[Why] 하늘로 간 성호가 말했죠… 별은 딸 수 없지만 산은 올라갈수 있다고
에베레스트 오른뒤 숨진 서성호,한필석 월간山 기자 그날을 기록하다
산에선 뭔가 걸지 않곤 나아갈 수가 없다, 종종 그 뭔가는 목숨이다
한필석 월간山기자가 전하는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 秘話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긴 무산소 등정 기록 - 산소통 없이 인간의 힘만으로 정상 섰던 그…
하산후 산소마스크 쓰라했지만 거부
텐트서 자다 일어나 앉은채로, 산이 됐다… 난 종종 후배들에게 말한다 멈추라고
대단한 김창호 원정대 - 8000m 넘는 히말라야 14좌 'From 0 To 8848' 목표로
헬기 안타고 베이스캠프까지 카약ㆍ자전거ㆍ도보로 도착해 국내 첫 무산소 등정 성공
서성호 대원 숨진 '캠프4' - 해발 8000m의 막영지 칼바람에 산소는 희박
고산족 셰르파들조차 인공산소 마시며 지내는 곳
한줌의 재가 된 성호 - 캠프4서 6800m 지점까지 셰르파가 시신 끌고내려와
네팔 카트만두에서 火葬 가족ㆍ대원들 한없이 울어
계속 밀어붙이면 당한다 - 8500m 지점에 다다랐을때 난 체력에 한계를 느꼈다
눈물을 머금고 하산키로 했다 무모함의 대가를 알기에…
기자는 지난달 20일 산악인 김창호 대장이 에베레스트를 인공산소 도움 없이 등정했다는 기사를 에베레스트에서 전송했다. 기자는 당시 50대 세 명으로 이뤄진 원정대를 꾸려 에베레스트 정상 도전에 나섰고 베이스캠프에서 김창호 대장의 원정대와 만나 그들의 등반 과정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등반의 현장을 담은 기사는 본지 5월 21일자 A2면에 실렸다. 김창호 대장이 국내 산악인 최초로 인공산소를 사용하지 않고 이번 에베레스트를 포함한 히말라야 8000m급 14개 고봉을 모두 올랐다는 낭보였다.
이런 의미 있는 등반은 그러나 성공한 지 하루 만에 서성호 대원이 목숨을 잃음으로써 슬픔으로 바뀌었다. 2007년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 고(故) 박영석 원정대의 오희준, 이현조 대원은 7900m 캠프에서 눈사태를 맞고 1500m 아래로 추락해 사망했다.
이런 생각이 밀려왔다. 나약한 우리는 죽음을 곁에 둔 대자연의 위용 앞에서 왜 번번이 목숨을 거는 것일까?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서 서 대원이 목숨을 잃은 캠프4가 위치한 사우스콜까지, 약 한 달의 기록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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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레스트(8848m) 정상으로 향하는 길에 있는 넓은 눈밭인 발코니(8500m)에서 촬영한 히말라야의 모습. 한 산악인이 정상을 향해 힘겹게 올라가고 있다. 지난달 21일 새벽 기자는 이 지점에서 정상에 오르기를 포기하고 돌아내려 가기로 결심했다. / 한필석 기자
지난달 21일 새벽. 그곳에서 한 젊은 산악인이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부산 부경대 산악부 출신인 서성호(徐成晧·33·아트캠프 부사장) 대원은 2006년 봄 중국 티베트 쪽 등로(登路)로 에베레스트를 올랐고, 2008년 봄부터 다이내믹 부산희망원정대 대원으로서 선배인 김창호 대장과 함께 히말라야 8000m급 14좌(座) 고봉 완등 레이스를 펼쳐왔다. 2011년 가을까지 그는 12개 고봉을 올랐다. 14좌 가운데 파키스탄 히말라야의 K2(8611m)와 브로드피크(8047m) 2개 고봉만 남겨놓고 있었다.
김창호 대장의 팀이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에 도전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을 때 나는 별도의 팀(코리아 드림팀)을 꾸려 등정에 나섰다. 한 해 중 에베레스트에 오를 수 있는 시기는 봄, 가을 각각 한 달 정도다. 올해 봄 에베레스트 등정에 도전하는 한국 원정대는 김 대장과 우리 팀뿐이었다.
캠프4에 다다르자 2007년 5월 15일이 떠올랐다. 그때도 나는 정상 공격을 위해 캠프4에 머물고 있었다. 2011년 가을 안나푸르나 등반 중 실종된 박영석 대장과 함께였다. 김창호 대장(당시 한국도로공사 에베레스트-로체 원정대 대원)도 있었다. 인공산소의 도움 없이 혼미한 상태로 밤을 지새우던 5월 16일 새벽, 무전기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현조는 찾았어! 희준이는… 희준이도 찾으란 말이야!”
박영석 대장의 목소리는 짐승의 울부짖음이나 다름없었다. 당시 박 대장이 이끄는 원정대의 오희준, 이현조 대원은 캠프4에서 잠을 자다가 뭔가 불길한 느낌을 느끼고 텐트에서 탈출하려던 터에 눈사태를 맞고 그대로 1500m 아래 빙하로 추락해 사망하고 말았다. 그날 사고로 김창호와 나는 사고 수습을 위해 등정을 포기하고 하산했었다.
그리고 6년 후, 우리는 다시 에베레스트에 왔다. 지난달 21일 오전 8시쯤. 두 번째로 에베레스트 등정에 도전해 산을 오르던 나는 체력의 한계를 느끼고 해발 약 8500m 지점에서 돌아서서, 캠프4로 돌아와 있었다. 히말라야 고산족인 셰르파들조차 움직임이 없는 캠프4는 황량했다. 예전에는 이 지점에서 셰르파들이 산소마스크 없이 지냈었다. 그런데 이번엔 그들조차 산소마스크를 모두 끼고 있었다. 그동안 희박한 산소가 인체에 얼마나 나쁜 영향을 끼치는지가 의학적으로 많이 밝혀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때 어렴풋이 또 다른 산악인 오영훈 대원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반가웠다. “영훈아! 영훈아!” 오 대원이 내 목소리를 듣고 다가왔다. “…형님! 아침에 성호 텐트 안에 들어갔더니 성호가 앉아 있었어요. 흔들어도 꼼짝하지 않더라고요.” 산소가 희박한 상태에서 잠을 자다 힘이 들면 숨통을 틔게 하려는지 본능적으로 일어나 앉게 된다.
“그래, 그래. 지금은 괜찮니?” “아뇨….” “그럼!” “…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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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0일 밤 에베레스트 정상에 인공 산소 없이 올랐다 기진한 상태로 내려오던 서성호 대원(왼쪽)이 정상을 향해 올라가던 한필석 월간산 기자와 만나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 서 대원은 산소마스크가 없는 상태고 한 기자는 마스크를 쓰고 있다. / 산악인 오영훈 제공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는 어마어마한 넓이다. 지난 4월 도착한 그곳엔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에 오르겠다고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250명이 넘었다.
히말라야와 안데스, 알프스 등 여러 고산을 다녔지만 내가 원정대 대장을 맡은 것은 처음이었다. 우리 팀 대원은 세 명이었다. 나와 고교동창인 석상명씨, 지난해 가을 에베레스트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아마다블람(6812m)을 등정했던 윤태근씨였다. 김창호 대장 팀도 우리와 같은 시기에 등반에 나섰다. 김창호의 에베레스트―로체 무산소 원정대는 ‘From 0 To 8848(0에서 8848까지)’를 내세웠다. 남들이 헬기를 타고 베이스캠프로 올 때 이들은 해발 0m인 인도 벵골만에서 156㎞를 카약을 타고 893㎞는 자전거를 타고 162㎞는 도보 카라반을 해가며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김 대장, 괜찮아?” 나는 물었다. 김창호 대장은 얼굴이 많이 상해 있었다. 베이스캠프 도착에 앞서 40일 가까운 원정에 이미 많이 지친 듯했다. 그래도 히말라야 8000m급 고봉 13개를 이미 인공산소의 도움 없이 등정한 클라이머답게 눈빛은 형형했다.
김 대장과 함께 8000m급 고봉 11개를 오른 서성호 대원도 보였다. 서 대원은 특이하게도 14좌 완등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그보다 더욱 높은 가치를 둔 것이 2006년 봄 이미 등정에 성공한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를 순수한 인간의 힘만으로 오르는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이었다.
에베레스트 등반의 관문은 아이스폴(Ice Fall)이다. 해발 5400~6000m에 형성되는 아이스폴은 정말 아름다운 구간이다. 약 600m 높이에 거대한 빙탑과 크레바스(빙하의 갈라진 틈)가 뒤섞여 있다. 새벽녘에는 등반객들과 셰르파들의 헤드 랜턴 불빛이 꼬리를 물면서 불 뱀 같은 멋진 야경을 뽐낸다. 햇살이 내리쬐는 시간대에는 수많은 보석을 모아놓은 것처럼 빛난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도 자연이 허락해줘야 가능하다. 기온이 올라가면 어마어마한 빙탑이 무너지고 크레바스가 벌어지면서 위험천만한 지형으로 변한다. 크레바스에서 추락하는 날이면 좁은 얼음 벽 사이에 쐐기처럼 박혀 목숨을 잃을 수 있다.
캠프2엔 긴장감이 넘쳤다. 등반객이든 셰르파든 가벼운 등반복 대신 두툼한 우모(牛毛) 원피스를 입는다. 50대 산꾼 세 명으로 구성된 약체팀인 우리 원정대 얼굴에는 긴장감이 넘쳤다. 반면 김창호 원정대는 소풍 가는 분위기였다. 경험이 많은 만큼 여유가 있었다. 캠프3에서 끓여 먹겠다며 동태찌개 재료에 여러 종류의 젓갈까지 준비했단다. 김창호 대장의 지론은 “먹는 만큼 힘쓴다”이다. 밥도 엄청 먹어댔다. 막내 대원이자 홍일점인 전푸르나(24·서울시립대 졸업예정자) 대원은 입을 가만 놔두지 않았다. 식사 때가 아니더라도 과자든 육포든 무언가를 씹어댔다. 서성호 대원은 다른 대원에 비해 적어도 한 숟가락 이상 밥을 더 먹었다. 그만큼 컨디션이 좋아 보였다.
◇‘죽음의 지대’에 불빛은 반짝이고
김창호 원정대 대원들의 등반 속도는 대단했다. 신속하면서도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면서 캠프3 출발 약 6시간 만에 마지막 캠프4인 사우스콜에 올라섰다. 우리 팀도 조금 늦었지만 같은 날 캠프4에 도착했다.
캠프4에 도착할 즈음이면 피로감이 대단하기 때문에 등반객들은 캠프에 도착하자마자 텐트에 들어가 드러누워 휴식을 취했다. 정상 공격은 오후 6시부터 8시 사이 출발해 밤새 정상을 향해 올라가고 또 이튿날 해가 지기 전에 다시 사우스콜 캠프로 내려서야 하는 길고 힘든 과정이다. 이 모든 과정이 해발 8000m에서 8848m 사이에서 이뤄진다. 그 위험은 평지 생활에만 익숙한 사람들은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대단한 것이다. 오죽하면 이 지역의 이름이 ‘죽음의 지대’일까.
“파상! 난 아무래도 다음 날 서밋(정상 밟기)하는 게 낫겠어.”
나는 셰르파 파상을 불렀다. 오후 7시, 사우스콜에 도착한 지 다섯 시간이 지나가고 있지만 컨디션이 살아나지 않았다. 잠시 일어서 봤다. 몸은 술에 잔뜩 취한 듯 휘청거렸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언뜻 절벽처럼 보이는 등로를 오를 수 없는 노릇이었다. 셰르파에게 다음 날 서밋을 요청하며 텐트 안으로 들어섰다. 우리 원정대 대원이자 친구인 석상명씨는 먼저 올라가겠다고 했다(윤태근씨는 설사로 캠프1에서 등반을 포기했다). 나는 정상을 바라봤다. 사우스콜과 정상부는 이미 칠흑 같은 어둠에 묻힌 상태. 오늘 등정에 도전하는 등반객들과 셰르파들의 헤드 랜턴 불빛만이 죽음의 지대에서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느껴졌다.
‘지금 어디쯤 가고 있을까?’ 40년 지기가 걱정됐다. 그러나 걱정도 깜빡대는 백열전등 같았다. 산소마스크를 입에 댄 채로 누워 걱정하다 무거운 눈꺼풀에 눌려 눈을 잠깐 감으면 한 시간 혹은 두 시간이 지나갔다. 서성호 대원이 있는 김창호 원정대는 워낙 경험이 많고 체력이 좋다 보니 그다지 걱정되지 않았다.
“바라사브(‘대장’이라는 뜻의 네팔어)!” 11시, 12시가 지나고 오후 1시 30분, 파상은 텐트 밖으로 뛰어나가 정상에서 무사히 돌아온 석상명씨를 맞아주었다. 오전 7시 정상에 올라선 석씨는 30분쯤 뒤에 올라온 전푸르나 대원과 등정의 기쁨을 나누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러나 김창호, 서성호, 안치영 대원에 대한 정확한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다. 단지 석씨가 올라갈 때와 내려설 때 스쳐 지나갔다는 얘기뿐이었다.
3시가 넘어가자 김창호 원정대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한 명이라도 등반 중 이상이 오면 원정대 전체에 문제가 생길 텐데…. 피를 말리는 기다림의 시간이 시작됐다. 오후 3시쯤 안치영 대원이, 잠시 후엔 김창호 대장이 캠프4로 내려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서성호 대원은 아직이었다. 김 대장은 며칠 뒤 베이스캠프에서 털어놓았다. “정상에 올라선 기억이 희미할 정도로 혼미한 상태였어요.” 그만큼 무산소 등정은 힘들고 위험한 도전이었던 것이다.
“바라사브, 출발하죠!” 기운을 차린 나를 셰르파가 불렀다. 20일 오후 6시, 이제 내가 정상을 향해 오를 차례다. 장비를 착용하고 사우스콜을 출발할 즈음 어둠이 밀려왔다. 이미 댓 명은 헤드 랜턴 불빛으로 길을 밝히며 정상을 향해 오르고 있다. 완만한 빙설면을 지나는 사이 랜턴조차 켜지 않은 채 등반객들이 한 명 한 명 내려선다. 대부분 입 주변은 허옇게 얼어 있고 표정이 전혀 없다. 등반을 시작한 지 만 하루가 지나가고 있는 이들의 얼굴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덮치고 있었다. 산소마스크를 낀 이들이 이럴 정도면 마스크 없이 올라간 성호는…. 설벽(雪壁)에 다가설 즈음 정상에서 내려오는 두 개의 헤드 랜턴 불빛이 반짝였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소리쳤다.
“어, 성호야!” “와, 형님!” 서 대원은 기진한 상태였다. 오영훈 대원의 부축을 받으며 하산하고 있었다. 오 대원은 베이스캠프는 같지만 중간에서 등로가 갈라지는 로체 등반을 위해 이곳을 찾았다. 그런데 오늘 로체로 향하던 중 에베레스트 팀 사다(셰르파 우두머리)한테 대원들 상태가 좋지 않다는 소식을 무전기를 통해 듣고 자신의 등반을 포기하고 이들을 돕기 위해 사우스콜에 올라왔단다. 그리고 사우스콜에 도착해 상황을 파악한 다음 하산 길에 지쳐 걸음을 제대로 떼지 못하는 서 대원을 마중 나갔던 것이다.
나는 물었다. “괜찮으냐?” 서 대원이 간신히 답했다. “무산소로 했더니 너무 힘드네요. 이젠 갈 만합니다.” “대단하다, 대단해. 자, 그럼 난 올라간다.”
모두 안전하다. 이제 나만 잘 올라갔다 내려오면 된다. 설사면은 8500m 지점에 있는 너른 눈밭인 ‘발코니’까지 가파르게 이어진다. 자정을 넘어서자 체력적으로 버겁다. 발가락도 시리고 손가락도 감각이 무뎌진다. 화가 난다. ‘젠장! 내가 이렇게 힘이 없단 말인가!’
오전 3시 40분, 가까스로 발코니에 올라섰다. 파상은 툴툴댄다. ‘이젠 늦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 해도 지금 내 체력으로 정상에 섰다가 하산까지 마치려면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산에서는 이런 순간을 맞닥뜨린다. 무언가를 걸지 않고는 나아갈 수가 없다. 종종 그 ‘무언가’는 목숨이다. 물어볼 사람이 없다. 혼자 결정해야 한다.
산에서 얼마나 많은 이가 목숨을 잃었던가. 나는 후배들에게 종종 ‘그만하라’고 했다. 이제 됐으니 멈추라고 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더 높은 곳, 더 위험한 곳, 남이 한 번도 가지 않은 곳…. 끝이 없다. 계속 밀어붙이다 보면 결국 한 번은 당한다.
나는 내려가기로 한다. 발코니에서 한 시간만 기다렸다 내려가자고 셰르파에게 말했다. 가까이 로체에 이어 마칼루, 그리고 멀리 히말라야 산맥 동단의 고봉 캉첸중가(8586m)를 보는 것으로 만족하자고 마음을 먹는다. 이런 날씨에 발코니에 오래 있으면 동상으로 손가락 다 잘라내게 된다며 아우성치는 셰르파를 달래 한 시간여, 여명 속의 히말라야를 바라본다.
◇“계속 걷지 않으면 죽는다”
발코니에서 내려설수록 힘이 들었다. 캠프2에서 발병한 이후 고통을 주던 허리 통증이 다시 느껴졌다. 조심스럽게 사우스콜로 내려섰다. 오영훈 대원이 보인다.
“영훈아!” “어! 벌써 내려오셨어요?” 벌써 정상을 밟고 온 줄 아는 모양이다. 나는 머쓱하게 웃었다.
“응, 난 여기까진가 봐. 발코니에서 그냥 내려왔어.” “아, 예. 그런데 형님….”
서성호가 갔다. 그는 스스로 목을 조른 것과 다름없었다. 동료 대원들은 하산 직후 여러 차례에 걸쳐 서성호에게 괜찮으냐고 묻고는 산소마스크를 쓰라고 권했다. 그러나 그는 목숨보다 무산소 등정이란 기록을 더 소중히 여겼다. 아무리 그래도…. 목숨보다 중요한 것이 있단 말인가. 나는 서성호 대원의 텐트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고이 잠자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 몸은, 사우스콜의 땅바닥만큼이나 차가웠다.
“형, 여긴 죽음의 지대예요. 오래 있으면 서서히 죽어가요. 어서 내려가세요. 저도 곧 내려갈 겁니다.” 김창호 대장은 선배인 나에게 하산을 재촉했다. 장비를 챙기다 울다, 또 훌쩍이다 장비를 배낭에 집어넣고 하산 길에 들어섰다.
2007년 5월이 다시 생각났다. 그때도 대원들이 목숨을 잃었다. 하산 길은 너무도 힘이 들었었다. 세상을 뜬 오희준과 이현조가 눈앞에 떠오를 때면 눈 위에 털썩 주저앉아 엉엉 대며 울기도 했다. 산은 마라톤과도 달라서, 멈춰선 안 된다. 계속 걷지 않으면 죽는다는 마음으로 간신히 내려왔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묘하게도 내가 내려가는 속도가 숙련된 셰르파들과 비슷했다. 앞서 가던 파상이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이쯤 되면 내가 주저앉아야 하는데 계속 쫓아 내려가는 게 이상했는가 보다. 내 마음이 어서 죽음의 지대에서 벗어나라고 재촉하고 있었던 것 같다.
캠프3를 지나자 빙설벽은 나흘 전 올라설 때와 완전히 변해 버렸다. 빙설이 많이 녹은 곳은 흙이 드러났다. 하지만 여름 우기에 눈이 내리고 가을로 접어들면서 다시 설벽과 빙벽이 형성될 것이리라. 그리고 또다시 등반가들은 몰려들 것이다. 언젠가 내가 다시 올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들은 계속 묻는다. 왜 자꾸 산에 오르느냐고. 결국 또 한 사람이 스러지지 않았느냐고. 뭐라고 답을 해야 할까. 생전의 서성호 대원은 왜 산에 오르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별은 딸 수가 없지만 산은 올라갈 수가 있잖아. 시험해보고 싶어, 나 스스로를.” 나는 사우스콜을 바라보았다.
로체 정상에서 설연(雪煙)이 차갑게 날리고 있었다.
서성호 대원의 시신은 캠프4에서 해발 6800m 지점의 빙하까지 셰르파들이 끌어내렸다. 이후 헬기에 실려 네팔 수도 카트만두로 옮겨진 다음 한 사원의 화장터에서 두껍게 쌓인 장작 위에 놓인 채 하루종일 태워졌다. 12시간 뒤 생전에 키 172㎝, 몸무게 66㎏으로 단단한 체구를 자랑하던 서 대원의 몸은 한 줌의 재로 변해 버렸다. 이를 지켜보던 어머니와 동생, 그리고 김창호 대장을 비롯한 대원들은 한없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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