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바로알기

오늘의 세상] '작은 광개토왕릉비' 中서 발견… "고고학 대사건" (조선일보 2013.01.17 03:01)

오늘의 세상] '작은 광개토왕릉비' 中서 발견… "고고학 대사건"

지안 주민이 강가에서 발견해 신고… 세번째 고구려碑
학계 "자료 희귀한 5세기 고구려사 연구 획기적 단서"
'주몽이 나라를 세웠다' 등 도입부 광개토왕릉비와 같아

 

"광개토왕릉비는 고구려의 지방제도를 밝히는 계기가 됐다. 지안 고구려비는 5세기 고구려사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가 될 것이다."(한국고대사학회 총무 여호규 한국외대 교수)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 마셴(麻線)현에서 광개토왕릉비의 축약판처럼 닮은꼴의 고구려 석비(石碑)가 발견됐다. 고구려비로는 414년(장수왕 3년)에 세운 광개토왕릉비와 역시 장수왕 때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충주 고구려비(국보 제205호)에 이어 세 번째다.

지안은 고구려의 초기 수도로 고분 등 고구려 유적이 밀집된 곳이다.

국내 역사학계는 "지안 고구려비 발견은 고고학 대사건"이라고 흥분하고 있다. 고구려의 정치·경제·문화· 사회제도를 밝혀줄 귀중한 단서이기 때문이다.

학계에선 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5세기 고구려사의 베일을 벗기는 데 지안 고구려비가 획기적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지안 고구려비 어떻게 발견됐나

중국 국가문물국이 발행하는 소식지 '중국문물보(中國文物報)'는 지난 4일 발행한 잡지에서 작년 7월 29일 마셴현 주민이 마셴하(河) 강가에서 비석을 발견, 지안시 문물국에 신고했다고 소개했다.

마셴현은 1000기가 넘는 고구려 묘가 집중된 곳으로 이중 왕릉으로 알려진 천추묘(千秋墓), 서대묘(西大墓)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됐다. '중국문물보'에 따르면 고구려비는 천추묘에서 동남쪽으로 약 456m, 서대묘는 서남쪽으로 1149m 떨어진 곳에서 출토됐다.

지안 고구려비는 고구려 역대 왕릉을 관리하는 내용을 담은 '수묘(守墓)비'로 보인다.

◇지안 碑의 내용은?

414년 장수왕 때 건립된 광개토왕릉비는 1880년대 일본이 비문을 공개하면서 알려졌다. 비문은 주몽의 건국 신화부터 광개토대왕에 이르는 왕의 세계(世系)에 이어 광개토대왕의 정복 활동과 업적을 연대순으로 기록했고, 마지막으로 능을 지키는 사람인 '연호(烟戶)' 명단과 관리 규정이 기술돼 있다.

지안 고구려비는 광개토왕릉비의 내용을 축약한 것처럼 흡사하다. 비의 윗부분과 아랫부분이 일부 사라진 이 비엔 예서체로 글자 218자가 새겨져 있는데 판독 가능한 글자는 140자다.

'시조 추모왕(주몽)이 나라를 세웠다'(始祖鄒牟王之創基也)는 첫 행은 광개토왕릉비의 시작 부분과 글자까지 똑같다. 이어 '○○○子河伯之孫'으로 '주몽이 하백(河伯·물의 신)의 손자'라고 출신을 밝히고 있다. 광개토왕릉비가 주몽을 '천제(天帝)의 아들이자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라고 소개한 것과 비슷하다. 글자가 없어진 비 앞부분이 '천제의 아들'(天帝之子) 등 고구려의 천손(天孫)신화를 밝히는 내용일 가능성이 크다.

이어 "'연호'를 두어 사시(四時) 제사를 지내게 했고" "부유한 자들이 수묘자를 사고팔았다" "비(碑)를 세워 연호 20명의 이름을 새겨 후세에 전하고, 수묘자는 함부로 사고팔 수 없다"고 쓰여 있다.

화강암으로 세운 지안 고구려비는 높이 173㎝, 너비 60.5~66.6㎝, 두께 12.5㎝로 무게는 464.5㎏이다. 비문은 모두 10행으로 마지막 10행만 20자이고, 행마다 22자를 적었다. 1775자로 알려진 광개토왕릉비에 비해 8분의 1정도 분량이다.

 

 

 중국 지안서 제2 광개토대왕비 발견

 (중앙일보  2013.01.17 01:06)

비문 내용, 글자 모양 비슷 … 218자 중 140자 판독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 마셴(麻線)향 마셴촌에서 또 하나의 고구려 비석이 발견됐다. 기존의 광개토대왕비와 비교하면 크기는 작지만 새겨진 내용이 유사해 ‘제2의 광개토대왕비’로 추정된다. 기존 광개토대왕비는 같은 지린성 내 지안시 퉁거우(通溝)에 있다.

 이번 비석은 광개토대왕비, 충주 고구려비에 이어 세 번째 고구려비다. 한국고대사학회 총무이사인 여호규 한국외대 교수를 비롯해 고구려 전공 회원들이 연구 과정에서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하게 됐다. 여 교수는 “중국 국가문물국(문화재청에 해당)이 내는 ‘중국문물보’ 1월 4일자에 고구려 비석 발견 기사가 실렸다”고 말했다.


  비석의 높이는 1m73㎝, 너비 60.6∼66.5㎝, 두께 12.5~21㎝, 무게 464.5㎏이다. 윗부분과 아랫부분이 결실된 상태다. 비석 정면에 예서체로 218개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판독 가능한 글자는 140자다. 기존 광개토대왕비의 높이는 6m39㎝에 글자 수는 1775자다.

 이번 비석은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창건하다(始祖鄒牟王之創基也)’는 구절로 시작한다. 추모왕은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을 가리킨다. ‘하백의 손자(河伯之孫)’ ‘나라를 일으켜 후대로 전해졌다’는 구절도 보인다. ‘중국문물보’는 “추모왕의 고구려 창업을 서술한 대목은 기본적으로 기존 광개토대왕(중국은 호태왕·好太王이라고 부름) 비문과 내용이 같다”고 설명했다. ‘연호(烟戶)’ ‘사시제사(四時祭祀)’ 등에 대해서는 “글자 모양이 광개토대왕비와 유사하다”고 추정했다. ‘연호’는 집을 뜻하는 가호(家戶)로 해석된다

또 ‘수묘인(守墓人·묘 관리인)’이 언급돼 있어 주목된다. ‘부유한 자라도 수묘인을 함부로 팔 수 없다’는 뜻으로 추정해 볼 수 있는 구절이 나온다. ‘지금 이후로는 수묘인을 다시 팔 수 없다’고 한 광개토대왕비 내용과 유사하다. 이번 비석은 마셴촌에 사는 한 촌민이 지난해 7월 29일 마셴강 우측 강변에서 발견해 국가문물국에 신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 교수는 “광개토대왕비와 연관성이 분명하고 수묘인이 언급된 점도 흥미롭지만 해석이 안 되는 부분이 적지 않기 때문에 정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中 지안서 '제2 광개토대왕비' 고구려 비석 발견

 (머니투데이 2013.01.17 09:18)

 

▲ 중국 지안시 신발견 고구려석비 탁본 (사진=한국고대사학회 제공)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 압록강 지류 강변에서 역사상 세 번째 고구려 비석이 발견됐다. 이번에 발견된 고구려비석은 광개토대왕이 선조들을 위해 세운 수묘비(守墓碑)와 관련 있는 것으로 분석돼 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16일 한국고대사학회에 따르면 중국 국가문물국(문화재청에 해당)은 지난 4일 '중국문물보'에 "지린성 지안시의 마셴향 마셴촌에서 고구려 비석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지난해 7월 29일 한 촌민이 발견한 것을 검토한 결과 고구려 비석임이 최종 확인됐다는 내용이다.

발견된 비석은 높이 173cm, 너비 60.5∼66.5cm, 두께 12.5~21㎝, 무게 464.5㎏이다. 위아래 부분은 부서진 상태다. 비석 정면에 한자 예서체로 10행 218자가 새겨졌는데, 현재 판독이 가능한 글자는 140자다.

비문 내용은 광개토대왕비의 내용을 상당 부분 압축한 것으로 보인다.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창건해(始祖鄒牟王之創基也)", "하백의 손자(河伯之孫)", "(추모가) 나를 일으켜 후대로 전해졌다" 등의 구절은 기존 광개토대왕비에 새겨진 내용과 비슷하다. 추모왕은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주몽)을 가리킨다.

중국문물보는 "이 같은 근거로 볼 때 새 비석과 광개토대왕비는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 "연호(烟戶)를 배치해서 사시(四時)로 제사에 대비케하고(四時祭祀) 부유한 자들이 (묘를 관리하는 사람들인) 수묘인(守墓人)들을 함부로 사고팔 수 없다"는 구절 등이 발견된다.

기존 광개토대왕비에도 "광개토대왕이 조선왕(선왕)을 위해 묘에 비를 세우고 그 연호를 새겨 섞이지 않도록 했다"는 비슷한 구절이 있다. 이와 관련해 국내 학계에서는 이번에 새로 발견된 비석을 '선왕들의 무덤 앞에 비석을 세우라'는 광개토왕의 유언에 따라 만들어진 수묘비(守墓碑)로 추정하고 있다.

 

 

일본軍 조작설 시달린 광개토대왕비, 어떤 내용?

 (머니투데이 2013.01.17 10:42)

[5세기 시대상 담긴 '타임캡슐']

 

중원 고구려비 ⓒ문화재청

 

중국 지린성에 위치한 광개토대왕비와 충북 충주에 있는 중원 고구려비에 이어 중국에서 또 다시 고구려 비석이 발견되며 역사학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에 따라 광개토대왕비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17일 역사학계에 따르면 광개토대왕비는 높이 6.4m, 무게 37톤으로 4면에 글씨를 새겨 1775자가 기록돼 있다. 이중 150여자는 현재 판독이 불가능한 상태다. 고구려 건국 이야기와 왕의 재위 시 영토 확장 그리고 사후 묘 관리에 관한 것으로 예서체로 기록돼 있다.

광개토대왕비문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제1부는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왕계가 적힌 부분으로 고구려의 국가기원 전설과 추모왕(주몽), 유류왕(유리왕), 대주류왕 3대의 왕위계승과 광개토왕의 행장에 대해 간략하게 기술돼 있다.

제2부에는 광개토대왕의 즉위와 업적에 대해 연대순으로 나열했다. 비문에 따르면 "19대 왕으로 광개토대왕이 즉위했다. 나이 18세로 22년간 국위를 떨쳤다. 영락태왕이라고도 부른다"고 광개토대왕을 설명했다.

제3부에는 광개토대왕을 비롯한 고구려 역대왕들의 능을 안전하게 수호하기 위해 수묘제를 개혁했다는 내용과 그에 관계된 령, 수묘인의 전체 인원과 그들의 출신지 등에 대해 비교적 세밀하게 새겨 놓았다.

역사학계에서는 이번에 발견된 세번째 고구려 비석이 광개토대왕비에 쓰여 있는 수묘비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해석을 하고 있다. 국내 학계에서는 이번에 새로 발견된 비석을 '선왕들의 무덤 앞에 비석을 세우라'는 광개토왕의 유언에 따라 만들어진 수묘비(守墓碑)로 추정하고 있다.

광개토대왕비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앞둔 시점에서 일본 역사학자에게 먼저 발견되며 위변조 논란을 겪는 등 평지풍파를 겪었다. 1883년 일본 역사학자가 발견해 5년간에 걸친 비문 판독 후 참모본부가 일왕에 헌상했다.

당시 일본은 일본서기에 나와있는 임나일본부설의 증거를 찾으려고 혈안이 돼 있었고 이 배경으로 몇몇 역사가들은 일본이 비문을 날조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재일사학자 이진희는 1972년 발표한 '광개토왕릉 비문의 수수께끼'라는 논문을 통해 비문 날조 사실을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논문에서 일본이 비문의 훼손된 부분에 석회를 발라 새로운 글자를 넣어 내용을 조작했다는 설을 제기했다. 또 일본 사학자들이 비문의 훼손 사실을 알고도 야마토 정권이 백제와 신라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기 위해 이를 통설로 몰고 갔음을 비판했다.

일본 언론은 이 설이 발표되자 일본 육군 참모본부에 의한 비문 변조에 대해 집중해서 다뤘다. 이는 식민사관의 청산과 민족사학의 계승발전을 이루려는 한국 사학계에도 큰 파문을 일으키며, 일반인들의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비석이 발견되자 여러 서예가나 금석학자들이 탁본을 만드는 과정에서 석회를 바르면서 비면의 일부가 훼손됐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후에 이후 중국학자 왕젠췬(王健群)은 비에 석회를 바른 것은 탁본의 편리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비문변조설은 전에 비해 다소 퇴조했다.

석회를 바르기 전의 원석탁본(原石拓本)도 발견되고, 중국의 개방으로 비를(碑)를 직접 볼 수 있게 됐지만 여전히 비문변조설과 부정설은 결론이 나지 않은 채 팽팽히 맞서고 있다.

 

 

戊□ … □ 속 글자는 지안 제2광개토대왕비 연대 풀 열쇠

 (중앙일보 2013.01.31 00:52)

子자라면 가장 오래된 고구려비
午자일 수도 … 전문가 의견 갈려

 

중국 지린성 지안시 마셴촌에서 새로 발견된 고구려비. 기존 광개토대왕비보다 제작 시기가 이를 수 있다는 학계의 주장이 나왔다. [중앙포토]

대사는 수수께끼투성이다.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 마셴(麻線)향 마셴촌에서 지난해 7월 발견돼, 올 초 그 존재가 국내에 알려진 ‘지안 고구려비’의 경우도 그렇다.

 무자년(戊子年·388)인가, 무오년(戊午年·418)인가. 이 비속에 ‘戊□’(□는 훼손된 글자)이란 문구가 나온다. 연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는데, ‘무’ 다음에 어떤 한자가 오느냐가 이 비석의 정체를 푸는 키워드로 떠올랐다. 중국 국가문물국(문화재청에 해당)이 내는 ‘중국문물보’는 비석의 출토를 알리며 이 글자를 확인 불가능하다고 보도했었다. (중앙일보 1월 17일자 2면 )

 우리 고대사의 보고인 광개토대왕비석이 세워진 것은 414년 장수왕 때다. 이 비석의 문구가 무자년이라면 광개토대왕비보다 앞선다. 가장 오래된 고구려비석이 되는 것이다.

 30일 한국외국어대 오바마홀 국제회의실에서 열린 한국고대사학회(회장 이영호) 주최 언론설명회에서 여호규 한국외대 교수는 ‘무자년’설을 제기했다.

 그는 “광개토대왕이 그의 부왕 고국양왕이 무자년에 제정한 율령에 입각해 건립한 수묘비(守墓碑)의 하나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건립 시기를 광개토대왕이 재위했을 때로 본 것이다. 여 교수는 “광개토대왕비문 마지막에 수묘제 구절이 나오는데 새로 출토된 지안 고구려비의 수묘제 내용이 더 상세해 광개토대왕비보다 전 단계 표현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단독] "제2 광개토대왕비 가짜일 가능성은…"

 (중앙일보 2013.02.06 11:34)

고대 중국어 전문가 문성재씨 주장

 

문성재 박사

“새로 출토된 고구려 비석은 위각(僞刻)일 가능성이 크다.”

 ‘제2의 광개토대왕비’로 추정됐던 고구려비에 대해 고대 중국어 학자 문성재(우리역사연구재단 책임연구원) 박사가 의문을 제기했다. 고구려를 한나라의 지방정권으로 조작하는 증거로 만들어냈을 개연성이 크다고 했다. 비문 표현과 내용이 기존의 광개토대왕비와 비교해 가짜일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주장이다.

 ◆‘중국 문물보’ 분석=중국 국가문물국(문화재청에 해당)이 내는 ‘중국 문물보’ 1월 4일자에 고구려 비석 발견 기사가 실렸다. 문 박사는 ‘문물보’ 내용만 분석해도 비석의 실체와 그들의 의도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고 했다.

 ‘문물보’에서 이번 고구려비의 양식을 ‘규형비(圭形碑)’라고 규정했다. ‘규형비’는 동한(東漢=후한)시대 시작됐으며 ‘규(圭)’는 다섯 가지 상서로움의 하나라는 설명을 단 후 『설문해자』(說文解字·고대 한자어 사전)를 인용해 “규(圭)는 서옥(瑞玉·상서로운 옥)이다. 위는 둥글고 아래는 각을 이룬다. 이 규를 가지고 제후에 봉한다”고 적어 놓았다. 고구려가 한나라의 제후국(지방정권)이었다는 논리를 이 비석을 통해 우회적으로 주입하는 셈이다. [중앙일보 1월 17일자 2면, 31일자 23면]

 이런 경향은 ‘문물보’의 결론에서 재확인된다. “새로 발견된 고구려비는 한자 예서체다. 이는 고구려가 한자 예서체를 정부 공식 서체로 사용해 정책과 외교관계 등을 발포했음을 알려준다”고 했다. 또 “비석의 형식은 동한 이래 상용했던 규형(圭形)으로, 고구려가 중원 문화와 연계됐음을 반영한다”고 확대 해석했다. 고구려에 대한 한나라의 문화적 지배를 은연중 부각시키는 것이다


 ◆빈약한 내용, 세련된 문체=반듯한 예서체를 구사하고 있고 또 고구려 문장으로 보기엔 너무 매끄러운 한문으로 일관한 점도 의문이다. 광개토대왕비에는 ‘忽本(홀본)’ ‘殘國(잔국)’ ‘奴客(노객)’ ‘寐錦(매금)’ 등 알타이어나 고구려어의 특색과 세계관을 반영하는 어휘가 군데군데 나온다. 광개토대왕비는 어투도 다소 생경해 중간중간 막히거나 부자연스러운 면이 있다. 광개토대왕비에 나온 수묘(守墓) 부분만 이 비석에 중복해 써놓은 것도 의심스러운 대목이다. 고구려 내정이나 당시 상황에 대한 언급은 둘째 치고 비석을 세운 주체에 대한 헌사조차 없다.

 광개토대왕비는 명백한 왕릉 비석임에도 자연에서 채취한 거대한 원석을 거의 그대로 썼다. 또 전서·해서·예서 등 여러 서체가 섞여 있다. 이번 비석은 연호(烟戶), 즉 능지기의 거주지 인근에 세웠음에도 오히려 석질과 글꼴에 더 많은 신경을 쓴 점도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다.

 ◆5세기 때 비석에 6세기 때 쓰인 표현=이 비석엔 ‘천도자승(天道自承)’이란 표현이 나온다. 권선징악과 인과응보를 강조하는 중국 초기 도교(道敎)의 관용적 표현이다. 중국 도교가 고구려 말기에 수용된 점을 감안하면 6∼7세기 표현이 5세기에 튀어나온 격이다. 고구려의 도교 수용은 광개토대왕-장수왕 시기보다 한참 후인 보장왕 때로 알려져 있다.

 문 박사는 “이 비석이 진품일 경우 도교의 고구려 전래는 고구려 말기가 아니라 중기라는 말이 되고, 이 비석이 위조일 경우엔 고구려가 한나라 문화의 영향하에 있었음을 인정하는 비석을 고구려 스스로 세웠다는 이야기가 되므로 신중하면서도 비판적인 조사와 연구가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비석의 상태가 비교적 양호함에도 뒷면만 완전히 훼손된 점도 이상하다고 했다. 한국고대사학회 연구이사 윤용구 박사는 “고대 유물의 진위는 한 번은 반드시 검토돼야 하는 문제” 라고 말했다.

 ‘문물보’에 따르면 이 비석은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 마셴(麻線)향 마셴촌에서 지난해 7월 이 지역 주민 마사오빈(馬紹彬)에 의해 발견됐다. 중국 측은 이 비석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문 박사는 "이 비석은 획기적인 발견이 아니라 ‘제2의 동북공정’일 가능성이 있다”며 “위조가 아니라면 당당하게 공개하고 외국 학자들과 공동 연구를 진행해야 옳다”고 말했다. 그는 1997년 중국 난징(南京)대와 2002년 서울대에서 고대 중국 희곡과 초기 백화 연구로 각각 박사학위를 받았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