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승자총통으로 싸운 명량대첩
-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1597년 명량대첩(鳴梁大捷)에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소소승자총통(小小勝字銃筒) 3점이 최상급 고려청자와 함께 진도 오류리 해저에서 발굴됐다. 사진은 28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된 소소승자총통 3점. /연합뉴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진도 오류리 해저에서 발굴한 소소승자총통 3점 등은 조선의 무기사를 비롯해 임진왜란 당시 전투의 내용을 명확히 규명하는 계기를 마련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함께 찾은 석제 포환과 발굴 위치 등을 살펴보면 이들 총통이 명량대첩에 쓰였다고 추정할 수 있어 관심이 더욱 높다.
그렇다면 당시 명량 바다의 격전장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1597년(선조 30년) 임진왜란의 2차 침략전쟁으로도 불리는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1차 전쟁 이후 조선과 왜가 시도한 화의 조정이 깨지면서 일본이 다시 해상으로 공격해 들어온 것이다.
당시 경상·전라·충청도 등 3도의 수군을 지휘하는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는 원균이었다.
그의 수군이 다대포와 칠천곡에서 대패하며 사실상 해상권을 잃게 됐고, 전쟁의 패색은 짙어졌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선조는 유성룡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적장을 놓아주었다는 모함으로 파직당했던 이순신을 다시 불러들였다. 삼도의 수군을 통솔하는 통제사직을 다시 맡긴 것이다.
그러나 당시 조선 수군에게는 전함 12척과 일반 백성이 가져온 배 1척만이 남아있어 전력이 매우 취약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선조에게 “신(臣)에게는 아직 12척의 전함이 남아있습니다”고 말하며 전의를 다졌다.
이순신은 왜 수군이 한산섬을 지나 남해안뿐만 아니라 서해로 진출해 육상으로 침략하려는 움직임을 감지하고, 길목인 명량 바다에 진을 쳤다.
처음 이진(利津)·어란포(於蘭浦) 등지에 주둔한 이순신의 수군은 전남 진도군의 벽파진(碧波津)으로 옮긴 후 효율적인 싸움을 위해 1957년 9월 15일 해남군의 우수영(右水營)으로 진을 이동했다.
치열한 전투는 다음 날 벌어졌다.
이른 아침 왜 수군은 133척의 전함을 몰고 명량 바다를 침략했고 조선 수군은 단 13척의 전선으로 이들을 막아냈다.
이 때 조선 수군은 현자총통(玄字銃筒)과 각종 화전(火箭)을 쏘며 일본 장군 구루시마 미치후사와 도도 다카토라가 지휘하는 왜선 31척을 격파했다고 알려졌다.
이 싸움으로 조선은 해상권을 회복하고 조선 수군은 전열을 다시 가다듬었다.
연구소 측은 이번에 발굴된 총통이 명량대첩에 긴히 쓰였을 것으로 분석했다.
총통의 제작 시기와 장소가 임란 직전 전라좌수영이며, 발견된 장소가 명량대첩의 격전장과 인접한 곳이라는 것이다.
연구소 측은 “이 같은 내용을 볼 때 이순신, 그리고 명량대첩과 관련한 유물임이 거의 분명하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명량대첩 때 사용 추정 총통 3점 진도서 발굴
(중앙일보 2012.11.29 01:15)
명량대첩 9년 전 전라좌수영 제작
고려청자 기린형 향로 뚜껑도 인양
간송미술관의 국보 65호에 견줄 만
1597년(선조 30년),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수군이 단 13척의 배로 왜선 133척을 물리친 명량대첩. 이 전투에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개인 화기(火器) ‘소소승자총통(小小勝字銃筒)’ 석 점이 전남 진도 오류리 해저에서 발굴됐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소장 성낙준)는 지난달 4일부터 이달 25일까지 오류리 해저를 1차 발굴한 결과 소소승자총통, 돌로 만든 포환, 고려 순청자와 상감청자 등 유물 92점을 인양했다고 28일 밝혔다. 진도 오류리 해역은 명량대첩이 벌어진 울돌목(명량해협)에서 직선 거리로 5㎞가량 떨어진 곳이다. 그간 전남 여수 등지에서 임진왜란 때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총통이 발견됐지만, 명량대첩과 관련된 유물이 나온 것은 처음이다.
◆수군들의 개인 화기
이번에 발굴된 총통 3점은 길이 약 58㎝, 최대 지름 3㎝ 안팎으로 모양과 크기가 거의 같다. 자루 부분에 “만력무자/사월일좌영/조소소승자/중삼근구/량/장윤덕영(萬曆戊子/四月日左營/造小小勝字/重三斤九/兩/匠尹德永)” 등의 명문(銘文·새겨 넣은 글)이 있다. 해석하면 만력(명나라 만력제의 연호)으로 무자년인 1588년 4월에 전라좌수영에서 만든 소소승자총통으로, 무게는 세 근 아홉 냥(2㎏ 안팎)이고, 만든 사람은 장인 윤덕영이라는 뜻이다. 석 점 모두 명문 중 소(小)와 승(勝)자 사이에 한자에서 같은 글자를 표시하는 부호인 ‘エ’ ‘〃’ ‘マ’ 등이 새겨져 있어 유물의 명칭이 ‘소소승자총통’임을 알 수 있다.
조선 중기 개인용 화기였던 승자총통류 중에는 승자(勝字)·차승자(次勝字)·별승자(別勝字)·소승자총통(小勝字銃筒) 등이 문헌에 나타나 있다. 이번 소소승자총통은 기록에는 없지만, 소승자총통에 비해 총구 지름이 약간 작아 먼 거리를 조준할 때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임경희 해양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난중일기』 등에는 당시 전라좌수영 군사들이 전라우수영 해역으로 옮겨와 싸웠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증명하는 유물”이라고 말했다.
◆보물선도 나올까
이번 발굴 현장은 지난해 11월 문화재 전문도굴단을 검거하는 과정에서 알려졌다. 도굴단이 노린 장소답게 12~13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고려청자 수십 점도 함께 나왔다. 특히 ‘기린형 향로 뚜껑’은 맑은 비색(翡色)과 기린 꼬리를 말아 올린 형태 등으로 볼 때 간송미술관 소장 ‘청자 기린형 뚜껑 향로’(국보 제65호)와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 최상품으로 평가된다. 오리형 향로 뚜껑과 청자투각연봉형붓꽂이도 빼어난 조형미를 갖췄다. 연구소 측은 “왕이나 귀족만 사용할 수 있었던 최상품이다. 전남 강진에서 제작한 진상품 청자를 싣고 가던 배가 물길이 거센 이곳에서 좌초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번 발굴에서는 닻돌(닻을 물속에 가라앉히기 위하여 매다는 돌) 9점이 나와 향후 침몰된 보물선이 발견될 가능성도 있다. 수중발굴과 문환석 과장은 “1차 탐사지역은 전체 대상 지역의 1%도 되지 않는다. 충남 태안 마도 앞바다처럼 엄청난 유물이 쏟아질 수 있다”고 기대했다.
임진왜란 때 사용 ‘글자 새겨진 총통’ 발굴
(경향신문 2012-11-28 21:39:56)
ㆍ제조 일자·장소 등 음각 ‘소소승자총통’ 3점
ㆍ진도 오류리 전라우수영 해역서 처음 나와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지난 9월부터 11월까지 진행한 수중발굴조사 결과, 명문(銘文)이 있는 소소승자총통 3점과 석제 포환, 양질의 청자향로를 포함한 고려청자 등 92점의 유물을 인양했다고 28일 밝혔다. 임진왜란(1592년) 발발 420주년인 올해 발굴된 총통 3점은 길이 58㎝, 최대 지름 3㎝, 무게 2㎏ 안팎으로 크기와 무게가 거의 같다. 각각 “만력무자(萬曆戊子·1588년) 3·4·5월에 전라좌수영에서 장인 윤덕영(尹德永)이 제작했다”는 명문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총통을 발굴한 지점 주변에선 지름 8.6㎝, 무게 715g의 석환(石丸)도 함께 나왔다. 이 역시 임진왜란 때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때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승자총통 3점에 쓰인 명문들. ‘四月日左營 造小小勝字’(왼쪽 사진) 등 승자총통의 제조된 일시와 장소를 나타내는 명문이 선명하다. |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소소승자총통은 조선 중기의 개인용 화기인 승자총통류에 속하는 것으로 문헌에 나오지 않는 종류가 실물로 확인됐다. 임경희 해양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화기도감의궤>에 ‘승자총통이 있다. 거기에는 소(小)가 있다’고 간단하게 전할 뿐 소소승자라는 명칭은 보이지 않는다”며 “소승자총통처럼 마디가 없지만 안지름이 좀 더 좁아서 사정거리가 600보(120m 안팎) 정도인 소승자총통보다 더 멀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임 연구사는 또 “전라좌수영에서 만든 총포가 전라우수영 앞바다에서 발견된 것은 <난중일기> 등의 기록처럼 정유재란 당시 칠천량해전 패전 후에 전라좌수영 군사들이 전라우수영 해역으로 옮겨와 싸운 정황을 뒷받침한다”며 “총포가 명량해전에서 사용됐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진도 오류리 해역은 고려시대 강진에서 제작된 청자의 주요 운반 항로였다. 이번 1차 발굴조사에선 국보 제65호 ‘청자 기린형 뚜껑 향로’에 못지않은 최고급품인 ‘청자 기린형 향로 뚜껑’ ‘청자 오리형 향로 뚜껑’ ‘청자 투각 붓꽂이’ 등 다양한 기종의 청자가 발굴됐다.
김영원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은 “기린형 향로 뚜껑의 경우 말아올려진 꼬리가 독창적이고 혀도 세심하게 표현되었다. 오리 모양 향로의 뚜껑 안쪽에는 향이 빠져나가게 꽃모양 투창을 냈는데 내부까지 유약을 정성들여 발랐다”며 “고려시대 청자의 절정기였던 12세기 후반에서 13세기 후반까지 제작된 것으로 왕실과 귀족층에서 사용했을 수준의 최고급품”이라고 말했다
진도 오류리 수중문화재는 지난해 11월 이 해역에서 고려청자를 도굴한 일당을 붙잡으면서 존재가 알려졌다. 발굴단장인 성낙준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장은 “이 해역은 고려청자의 주요 운반 항로였고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연관되어 중요한 지역”이라며 “조사 해역(9만㎡)을 사적으로 가지정하고 실시한 1차 발굴조사의 진척률이 0.8%에 불과해 수온이 상승하는 내년 5월에 2차 수중발굴조사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임진왜란 때 사용 ‘글자 새겨진 총통’ 발굴
(경향신문 2012-11-28 21:39:56)
ㆍ제조 일자·장소 등 음각 ‘소소승자총통’ 3점
ㆍ진도 오류리 전라우수영 해역서 처음 나와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지난 9월부터 11월까지 진행한 수중발굴조사 결과, 명문(銘文)이 있는 소소승자총통 3점과 석제 포환, 양질의 청자향로를 포함한 고려청자 등 92점의 유물을 인양했다고 28일 밝혔다. 임진왜란(1592년) 발발 420주년인 올해 발굴된 총통 3점은 길이 58㎝, 최대 지름 3㎝, 무게 2㎏ 안팎으로 크기와 무게가 거의 같다. 각각 “만력무자(萬曆戊子·1588년) 3·4·5월에 전라좌수영에서 장인 윤덕영(尹德永)이 제작했다”는 명문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총통을 발굴한 지점 주변에선 지름 8.6㎝, 무게 715g의 석환(石丸)도 함께 나왔다. 이 역시 임진왜란 때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때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승자총통 3점에 쓰인 명문들. ‘四月日左營 造小小勝字’(왼쪽 사진) 등 승자총통의 제조된 일시와 장소를 나타내는 명문이 선명하다. |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소소승자총통은 조선 중기의 개인용 화기인 승자총통류에 속하는 것으로 문헌에 나오지 않는 종류가 실물로 확인됐다. 임경희 해양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화기도감의궤>에 ‘승자총통이 있다. 거기에는 소(小)가 있다’고 간단하게 전할 뿐 소소승자라는 명칭은 보이지 않는다”며 “소승자총통처럼 마디가 없지만 안지름이 좀 더 좁아서 사정거리가 600보(120m 안팎) 정도인 소승자총통보다 더 멀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임 연구사는 또 “전라좌수영에서 만든 총포가 전라우수영 앞바다에서 발견된 것은 <난중일기> 등의 기록처럼 정유재란 당시 칠천량해전 패전 후에 전라좌수영 군사들이 전라우수영 해역으로 옮겨와 싸운 정황을 뒷받침한다”며 “총포가 명량해전에서 사용됐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진도 오류리 해역은 고려시대 강진에서 제작된 청자의 주요 운반 항로였다. 이번 1차 발굴조사에선 국보 제65호 ‘청자 기린형 뚜껑 향로’에 못지않은 최고급품인 ‘청자 기린형 향로 뚜껑’ ‘청자 오리형 향로 뚜껑’ ‘청자 투각 붓꽂이’ 등 다양한 기종의 청자가 발굴됐다.
김영원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은 “기린형 향로 뚜껑의 경우 말아올려진 꼬리가 독창적이고 혀도 세심하게 표현되었다. 오리 모양 향로의 뚜껑 안쪽에는 향이 빠져나가게 꽃모양 투창을 냈는데 내부까지 유약을 정성들여 발랐다”며 “고려시대 청자의 절정기였던 12세기 후반에서 13세기 후반까지 제작된 것으로 왕실과 귀족층에서 사용했을 수준의 최고급품”이라고 말했다
진도 오류리 수중문화재는 지난해 11월 이 해역에서 고려청자를 도굴한 일당을 붙잡으면서 존재가 알려졌다. 발굴단장인 성낙준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장은 “이 해역은 고려청자의 주요 운반 항로였고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연관되어 중요한 지역”이라며 “조사 해역(9만㎡)을 사적으로 가지정하고 실시한 1차 발굴조사의 진척률이 0.8%에 불과해 수온이 상승하는 내년 5월에 2차 수중발굴조사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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