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톡톡튀는 문제해결 방안/아이디어

어릴적 17억 떼돈男, 쫄딱 망해 택시 몰더니… (매일경제 2012.10.16 13:40:46)

어릴적 17억 떼돈男, 쫄딱 망해 택시 몰더니…

박기봉 올드리버 대표, "사람을 사랑하는 행복한 기업가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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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트주의에 사로잡혀 있던 제가 변화하게 된 건 사업에 처절하게 실패를 맛 본 뒤였어요. 비빌 언덕 없이 혼자 힘으로 사업을 시작해 1990년대에 17억원까지 벌었다 한순간 빈털터리가 되고 절망의 시간을 보냈더니 세상을 보는 눈과 가치관이 변화하더라고요. 저는 우물 안의 개구리였습니다. 소위말해 제 잘난 맛에 살다 된통 당한거죠.”

대학시절 4년 내내 장학금을 받고 학생회장까지 지냈던 박기봉(52) 올드리버 대표는 최근 매경닷컴과의 인터뷰에서 연이은 사업 실패담과 택시운전 기사로 밥벌이를 했던 시간, 그로 인해 깨달은 지혜를 털어 놓았다. 그는 직장생활이든, 사업이든 자신이 좋아하고 잘 아는 분야를 일관성 있게 밀고 나가라고 조언했다.

박 대표는 “세상에서 내가 제일 똑똑한 인간인 줄 알고 살았다. 내가 하는 일은 다 잘 될 줄 알았다”며 “자존심 때문에 남들에게 ‘모른다’는 소리를 하기 싫어 뭐든 아는 척하고 살았고 그게 나의 발목을 잡을 줄 꿈에도 몰랐다”고 한탄했다.

세상 무슨 일이든 혼자서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몸소 깨달은 건 그의 나이 지천명이 되어서였다.

그는 지난해 여름 10평 남짓한 창고같은 사무실에서 다시금 사업에 도전했다.

박 대표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시작한 이번 사업은 혼자가 아니다”며 “항상 곁에 있었지만 잘난 체하고 살 때는 보이지 않았던 좋은 친구들과 지인들이 마음을 합해 조언하고 응원해준다”고 말했다.

◆ 청년기의 승승장구, 위험한 줄타기에서 끝없는 추락

“무역업을 하고 싶었어요. 1987년 대일화학 무역부서에 입사했지요. 또래에 비해 외국어에 능통해 일본을 오가며 화학제품을 수입하는 업무를 맡았습니다.”

박 대표는 대학졸업 전 교수 추천서와 여러 대기업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하지만 월급쟁이로 사는 것보다 사업으로 성공하고 싶은 열망이 더 컸다고.

그는 직장생활을 시작한지 4년 만에 관두고 나와 사업에 뛰어들었다.

“일본에서 게임용 칩을 수입해 청계천에서 판매했어요. 3년 뒤 중국에 갈 기회가 생겼는데 섬유를 접하며 더 큰 시장이 보였어요. 석달만에 독하게 공부해 중국어를 마스터하고 중국행 비행기를 탔죠. 옷감을 떼다 동대문에서 판매하는 도매업을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수익이 커져 신사복까지 하게 됐어요. 탄탄대로를 걷는 줄 알았습니다.”

박 대표는 2008년 중국에서 만난 사업가와 각별한 인연을 맺으며 중국 모 대학에서 개발한 의료용 기기를 독점 계약해 한국에 들여오는 사업에 손을 댔다. 추락의 시작이었다. 젊은 나이에 큰돈을 만지게 된 그는 자만에 빠졌고, 방탕한 생활을 하며 수입을 탕진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소송에 걸렸어요. 억울함 때문에 맞소송을 하다 가계가 몰락했습니다. 어떤 사업이든 내가 전문가여야 한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어요.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일에 자본이 있다고 무조건 뛰어들어서는 안 됩니다.”

재판에 사활을 걸자 직원들은 다 떠나고 사무실에 혼자 남았다. 그는 “당시의 나는 아무런 비전이나 대책 없이 소송에서 이기는 게 다라고 생각하고 책상에 앉아 게임으로 허송세월 보내던 철없는 사람이었다”고 자신을 자책했다.

그러던 중 문득 든 생각. ‘재판에서 이겨서 돈을 받아 내면 뭐하나. 주변에 내 사람들도 다 떠나고, 누구 한명 반겨주는 이 없는 인생… 난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다.’ 산에 올라 목 놓아 울기를 몇 차례, 그는 아침이 오는 것이 두려울 정도였다고 당시 심경을 털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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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 2막, 사람을 사랑하는 행복한 사업가로!

한동안 우울증세를 겪던 그는 2010년 택시운전을 시작했다. 담배값이라도 벌어보자는 심정이었다.

“새벽 4시 교대근무를 했어요. 동네 사람들이 볼까 부끄러워 기사복 위에 다른 옷을 덮어 입고 숨어 다녔죠. 택시 운전을 하며 하루에 1만원 버는 것도 힘든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는 택시기사 일을 하며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만났다. 대접만 받고 살던 삶에서 벗어나 무시도 당하고, 수치심도 겪었다. 돈이 없는 사람들도 마음은 풍요로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곁에서 묵묵히 자신을 지켜봐주고 있던 친구들의 마음도 보였다.

“거울을 보니 초라한 제 모습이 보였어요. 사업하던 시절이 떠올랐어요. 직원들에게 무슨 일이든 시키기만 하고 폼만 잡고 다녔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스스로 갇혀있던 벽을 철저히 깨고 부수었습니다. 낮은 자세로 살기로 결심했죠.”

박 대표는 계절이 바뀌고, 택시기사 일에 익숙해질 무렵 손님으로부터 온라인 쇼핑몰 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됐다. 스스로 힘으로 도전해보기로 했다.

그는 “젊은 시절 동대문에서 의류사업을 하며 기획했던 기능성 팬티가 떠올랐다”며 “제대로 만들어서 다시 도전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길로 택시를 몰고 원단공장을 찾아다니며 사정했다. 공장장들은 그를 신뢰하지 않고 쫒아냈다. 아이디어라며 찾아와 샘플 좀 만들어 달라는 요청이 하루에도 수 십 건이라는 것. 그는 공장 인부들과 함께 원단을 나르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친구가 됐다. 결국 공장장도 그의 삼고초려를 받아주었다. 그는 “사람에 정성을 기울이는 것이 사업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박 대표는 “원가가 비싸더라도 봉제를 꼼꼼히 하자는 원칙을 지켰다”며 “다른 제품들을 가져다 연구개발해 더 좋은 아이디어를 접목해 제품을 만들었다”고 자신했다.

그는 “남성용 속옷은 여성용 속옷처럼 디자인과 색감만 예뻐서는 안 된다”며 “반도체만 과학이 아니다. 가장 근본이 되는 건강에도 과학을 대입해야 한다. 남성의 신체구조를 고려한 속옷을 만들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쇼핑몰 사업을 시작하기 전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팬티 관련 4개의 디자인 특허를 받아낸 일이었다. 그는 “특허청에서 심사를 받던 날 심사관 중 여성도 있었다. 설명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 그들 앞에서 직접 바지를 벗어 착용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며 “내가 만든 개발품에 대해 자신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털어놓았다.

“론칭하자 3일만에 매출이 터지기 시작했어요. 산악회 등 동호회에서 입어본 사람들이 입소문을 내며 팔려나가기 시작했죠. 쇼핑몰 게시판에 고객들이 직접 착용후기를 사진으로 찍어 올리며 더욱 인기를 끌었습니다.”

오픈한지 1년쯤 된 기능성 속옷 쇼핑몰 ‘올드리버’에는 1000개 이상의 사진 후기가 올라와 있다. “속옷을 입은 것 같지 않게 편안하다” “다른 것은 이제 못 입겠다” 등 칭찬이 주를 이룬다.

박 대표는 이러한 고객들의 평가와 댓글에 하나하나 직접 댓글을 달아 답한다. 온라인으로 답하지 못할 문제에 대해서는 상품을 배송할 때 자필 편지에 해결책을 써서 동봉한다.

“갑자기 인기를 얻었다 금새 지는 것보다 끊임없이 꾸준하게 성장해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음식을 차렸을 때 젓가락이 가는 음식이 맛있는 음식입니다. 고객들이 즐겨찾는 브랜드가 되는 것이 목표입니다. 젊은 시절, 많은 기회를 돈 버는 기회로만 생각했던 어리석음이 실패를 낳았어요. 하다가 안 되면 포기하고 다른 곳에 눈을 돌렸던 스스로를 반성했습니다.”

박 대표는 “온라인몰이라는 작은 공간에서 고객들과 소통하며 살고 있는 지금이 행복하다”며 “내가 개발한 제품을 입어 본 고객들의 의견과 조언 하나하나가 소중하다. 고객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해 제품에 반영하고 싶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매출에 욕심내기보다 오래 가는 브랜드로 키우고 싶다”며 “허황된 꿈을 쫒기보다 현실적으로 이룰 수 있는 것들부터 차근차근 이루며 회사를 키우려고 한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는 “일본에서 최초 개발된 여성용 삼각팬티가 세계 여성들의 필수품이 되었듯 올드리버에서 선보인 구멍난 팬티가 전 세계 인구의 절반인 남성들의 필수품으로 자리잡을 날이 올 것이다”고 자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