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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

 

최영


안팎으로 혼란스럽던 고려 말, 최영(崔瑩, 1316~1388)은 밖으로는 외적의 침입을 물리치고 안으로는 고려왕실을 지키려 한 명장군이자 재상이었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시대의 흐름보다는 기존의 질서를 고집했고 원∙명 교체기 급변하는 중국의 정세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 그리고 그 자신이 키워낸 새로운 무장세력 이성계와 불화한 탓에 결국 그토록 지키고자 하였던 고려 왕실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만 했다.


고려 말 환란을 해결하며, 동분서주한 해결사

최영은 고려 말 사헌부 간관을 지낸 최원직의 아들로 태어났다. 최영의 가문은 왕건의 고려 개창을 도운 철원 최씨(동주 최씨라고도 함) 가문으로 그의 5대조 최유청이 고려 예종 때 집현전 대학사를 지냄으로써 고려의 유수한 문벌 가문 중 하나로 발돋움하였다. 최영은 어렸을 때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풍채가 늠름했으며 용력이 출중하여 문신 가문에 태어났으면서도 병서를 읽고 무술을 익히어 무장의 길을 걸었다.

그가 무인으로서 첫발을 디딘 것은 양광도 도순문사 휘하에서 수차례 왜구를 토벌하면서부터였다. 이후 그는 공민왕 당시 왕을 압박하고 권세를 누리던 조일신을 제거하는 데 힘을 보태면서 호군(護軍)으로 출세하였다. 조일신은 공민왕이 원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던 시절 공민왕의 시종했던 공을 들어, 공민왕이 고려로 돌아와 왕이 된 이후 그 방자함이 도를 넘어 왕권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른 자였다. 안팎으로 국가의 위기를 해결하는 고려왕실의 해결사로서의 최영의 일생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최영은 원나라의 원군 요청에 따라 중국으로 출정하여 당시 중국의 상황을 파악하고 돌아오기도 하였다. 이는 원∙명 교체기 국제 정세를 이용하여 고려의 주권을 완전히 되찾아오기 위한 공민왕의 뜻이기도 하였다. 이후 공민왕의 뜻을 받든 최영은 밀직부사 유인우의 휘하에서 원나라에 맞서 싸워 100여 년간 빼앗겼던 함경도 일대 쌍성총관부의 땅을 되찾는데 일조하였다. 이 쌍성총관부의 땅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최영은 이자춘과 그의 아들 이성계를 만나게 된다.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은 고려인이었지만 쌍성총관부 지역의 원나라 관리로 있다가 공민왕 시기 고려조정과 그 뜻을 같이하여 쌍성총관부 회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최영은 이성계와 함께 북으로는 홍건적을, 남으로는 왜구를 막아내며 고려를 외침으로부터 치켜내는 대표적 장군으로 활약하였다. 일본의 이키∙쓰시마∙기타큐슈∙세토나이카이 등을 근거지로 삼았던 왜구는 14세기에 이르러 근 40년 동안 한반도의 해안을 끈질기게 괴롭혔다. 최영은 삼남지역 해안에 창궐하는 왜구를 격파하여 백수 최만호(白首 崔萬戶)라는 별명을 얻으며 왜구들의 공포 대상이 되었다. 또한 오랫동안 왜구에 시달렸던 삼남 지역 백성의 신망도 얻었다. 또 북쪽에서 침입한 홍건적을 물리치기도 하였다. 당시 중국에서 일어난 홍건적은 중국 본토에서 이민족 왕조인 원나라의 지배를 타도하자고 일어난 농민 반란세력으로 이즈음 원나라 군대에 밀려 고려에까지 침략해 들어왔다. 홍건적은 머리에 붉은 수건을 두른다 하여 붙은 이름으로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도 한때는 홍건적이었다. 최영은 홍건적이 국경을 넘어와 서경까지 함락시키자 이방실 등과 함께 홍건적을 물리쳤고, 1361년에는 개경까지 점령한 홍건적을 격파하여 나라를 위기에서 구출하였다.

국외 세력의 외침에만 활약한 것은 아니었다. 최영은 국내에서 일어난 반란에도 고려왕실의 보호자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공민왕을 시역하려 한 김용의 흥왕사 변을 진압하고, 공민왕의 반항에 위기를 느낀 원나라가 덕흥군을 왕으로 추대하여 보낸 군사 1만 명을 의주에서 섬멸하였다. 한때 최영은 신돈의 모략으로 6년간 유배 길에 오르기도 하였지만, 신돈 실각 후 공민왕의 부름을 받고 다시 중앙 무대로 진출하였으며 전국 각지에서 왜구들을 격파하여 왕실과 백성들로 신망을 얻었다. 이렇듯 나라 안팎에서 일어난 환란에 최영은 동분서주하며 고려왕실과 국가의 보호자로서 그 명성이 드높아졌다.


원∙명교체기의 혼란을 노린 야심 찬 요동정벌

고려의 명실상부한 명장으로 우뚝 선 최영은 내정에서도 그 위치를 확고히 해나갔다. 특히 공민왕이 죽고 이인임 등이 축출되고 나서, 풍전등화와도 같았던 위태로운 운명의 우왕을 보호한 것이 바로 최영이었다. 최영은 그의 서녀를 우왕의 비로 들여보내고 1388년에는 문하시중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당시 중국은 원나라와 명나라가 교체되는 혼란을 겪고 있었는데 그 여파가 고려에까지 미쳤다. 1368년 주원장이 화남을 통일하고 난징에서 황제로 즉위하면서 건국한 한족의 나라 명은 이미 그 세가 다한 원나라를 압박하면서 북벌을 개시하였다. 이에 원나라의 몽골인들은 중국 본토 지배를 포기하고 북쪽 몽골 지역으로 물러났다. 중국 본토를 차지한 후, 명나라는 원∙명 교체기의 혼란한 상황 동안 돌아보지 못한 이웃 나라들과의 관계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그 중 하나로 명나라는 공민왕이 회복한 철령 이북의 땅을 다시 반납하라는 억지를 부리고 나섰다. 철령 이북의 땅은 원나라가 고려의 땅을 강제 점거하였던 쌍성총관부로, 명나라는 이 지역에 철령위를 세우면서 이전의 원나라의 땅이었던 지역은 모두 명나라의 소유라고 주장하며 나선 것이다.

철령 이북의 땅을 수복할 때 전투를 치른 경험도 있었던 최영은 명나라의 말도 안 되는 요구에 반발했다. 최영은 건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명나라가 내정의 불안정으로 아직은 전쟁에 전력을 다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이 기회에 요동까지 쳐들어가자는 주장을 폈다. 그러나 최영과 마찬가지로 고려 말 잇단 외침을 잘 막아내 민심을 얻고 있던 이성계는 최영의 주장에 반대하고 나섰다. 그는 시기가 군사를 움직이기 어려운 여름인 점과 북방으로 병력을 이동하여 남쪽에 왜구가 들끓을 것에 대한 우려, 소국이 대국을 칠 수 없다는 주장을 내세우며 최영의 요동 정벌론에 맞섰다.


고려왕실의 운명을 바꾼 위화도 회군 그리고 최영의 실각

최영의 보호를 받고 있던 우왕은 최영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그가 자신의 곁을 떠나는 것은 원치 않았다. 결국 최영은 우왕과 함께 평양에 남고 이성계와 조민수에게 군대를 내주어 요동정벌 길에 나서도록 하였다. 그러나 최영이 이성계에게 군대를 내어준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전을 내준 것과 진배없었다. 명나라를 치기 위해 북쪽으로 가던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장마를 만나 섬에 갇히게 되고 군대를 이상 전진시킬 수 없게 되자 여러 차례 회군의사를 고려조정에 아뢰었다. 그러나 우왕과 최영은 이성계의 회군을 허락하지 않았다. 애초에 원치 않는 전쟁 길에 올랐던 이성계는 왕명을 거역하고 결국 군대를 회군시켰다. 이것이 바로 고려와 최영의 운명을 완전히 침몰시킨 위화도 회군 사건이다.

왕명을 거역하고 군대를 돌린 이성계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쿠데타 외에 다른 길이 없었다. 신진 사대부와 신흥 무장 세력들로부터 신망을 얻고 있던 이성계는 그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결국 개경으로 들어와 무력시위 후 정권을 탈취하였다. 돌연한 사태 변화에 최영은 급히 평양에서 개경으로 돌아와 회군해오는 이성계의 군대와 싸우려 하였으나, 이미 대부분의 군을 이성계의 요동정벌군에 내어준 상황에서 최영은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최영이 보호하던 우왕은 강화도로 쫓겨났고 최영은 고봉현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최영은 합포로 옮겨졌다가 결국 개경으로 다시 압송되어 참형 되었다. 최영이 죽은 뒤 4년 후 1392년 이성계는 조선을 개창하였고 그로부터 4년 후에는 최영에게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풀이 나지 않는 무덤의 주인공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 이는 최영이 남긴 말로 유명하다. 원래 이 말은 최영의 아버지 최원직이 최영이 16세 경에 죽으면서 남긴 유언이었다고 한다. 원래 성품이 강직하고 올곧았던 최영은 아버지의 말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아 이 글귀를 써서 곁에 두고 항상 되새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는 고위관직에 있을 때도 별다른 청탁이나 뇌물 사건에 휩쓸리지 않았다. 외적을 막고 고려왕실을 보호하며 청렴하기까지 했던 최영은 그래서 온 나라의 백성으로부터 매우 존경을 받았다. 이성계가 권력을 잡고 나서 존경하는 선배 무장이었고 싸움터에서는 전우이며 그를 장군의 자리로 이끌어준 것과 다름없는 최영을 결국 참형에 처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의 이러한 국민적 인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유배지에서 개경으로 불러온 최영에게 ‘무리하게 요동을 정벌하려고 계획하고 왕의 말을 우습게 여기고 권세를 탐한 죄’를 들어 참형에 처하려 하자, 최영은 평생에 있어서 탐욕이 있었다면 자신의 무덤에 풀이 자랄 것이고 결백하다면 무덤에 풀이 자라지 않을 것이라고 유언을 하고 최후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그의 무덤에는 오랜 세월 동안 풀이 자라나지 않았다. 현재 경기도 고양에 있는 최영장군의 무덤에는 내내 풀이 자라지 않다가 1976년부터 풀이 돋기 시작해 현재는 무성하다.


경기도 기념물 제23호. 경기도 고양시 소재. 1975년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돼 문화재로 관리되고 있는 최영 장군 묘역은 고려시대 보편적인 사각무덤 양식으로 원형이 잘 보존돼 있으며 독특하게 뒤편에 부친 최원직의 묘가 함께 있는 등 문화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안팎으로 혼란스럽던 고려 말, 최영(崔瑩, 1316~1388)은 밖으로는 외적의 침입을

물리치고 안으로는 고려왕실을 지키려 한 명장군이자 재상이었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시대의 흐름보다는 기존의 질서를 고집했고 원∙명 교체기

급변하는 중국의 정세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 그리고 그 자신이 키워낸

새로운 무장세력 이성계와 불화한 탓에 결국 그토록 지키고자 하였던

고려 왕실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만 했다.

고려 말 환란을 해결하며, 동분서주한 해결사

최영은 고려 말 사헌부 간관을 지낸 최원직의 아들로 태어났다.

최영의 가문은 왕건의 고려 개창을 도운 철원 최씨(동주 최씨라고도 함)

가문으로 그의 5대조 최유청이 고려 예종 때 집현전 대학사를 지냄으로써

고려의 유수한 문벌 가문 중 하나로 발돋움하였다. 최영은 어렸을 때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풍채가 늠름했으며 용력이 출중하여 문신 가문에

태어났으면서도 병서를 읽고 무술을 익히어 무장의 길을 걸었다.

그가 무인으로서 첫발을 디딘 것은 양광도 도순문사 휘하에서 수차례

왜구를 토벌하면서부터였다. 이후 그는 공민왕 당시 왕을 압박하고

 권세를 누리던 조일신을 제거하는 데 힘을 보태면서 호군(護軍)으로

출세하였다. 조일신은 공민왕이 원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던 시절 공민왕의

 시종했던 공을 들어, 공민왕이 고려로 돌아와 왕이 된 이후 그 방자함이

도를 넘어 왕권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른 자였다. 안팎으로 국가의 위기를

해결하는 고려왕실의 해결사로서의 최영의 일생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최영은 원나라의 원군 요청에 따라 중국으로 출정하여 당시 중국의

상황을 파악하고 돌아오기도 하였다. 이는 원∙명 교체기 국제 정세를

이용하여 고려의 주권을 완전히 되찾아오기 위한 공민왕의 뜻이기도

하였다. 이후 공민왕의 뜻을 받든 최영은 밀직부사 유인우의 휘하에서

 원나라에 맞서 싸워 100여 년간 빼앗겼던 함경도 일대 쌍성총관부의 땅을

 되찾는데 일조하였다. 이 쌍성총관부의 땅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최영은

 이자춘과 그의 아들 이성계를 만나게 된다.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은

 고려인이었지만 쌍성총관부 지역의 원나라 관리로 있다가 공민왕 시기

 고려조정과 그 뜻을 같이하여 쌍성총관부 회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최영은 이성계와 함께 북으로는 홍건적을, 남으로는 왜구를 막아내며

고려를 외침으로부터 지켜낸 대표적 장군으로 활약하였다. 일본의

이키∙쓰시마∙기타큐슈∙세토나이카이 등을 근거지로 삼았던 왜구는

14세기에 이르러 근 40년 동안 한반도의 해안을 끈질기게 괴롭혔다.

 최영은 삼남지역 해안에 창궐하는 왜구를 격파하여

백수 최만호(白首 崔萬戶)라는 별명을 얻으며 왜구들의 공포 대상이

 되었다. 또한 오랫동안 왜구에 시달렸던 삼남 지역 백성의 신망도 얻었다.

 또 북쪽에서 침입한 홍건적을 물리치기도 하였다. 당시 중국에서 일어난

홍건적은 중국 본토에서 이민족 왕조인 원나라의 지배를 타도하자고 일어난

 농민 반란세력으로 이즈음 원나라 군대에 밀려 고려에까지 침략해 들어왔다

. 홍건적은 머리에 붉은 수건을 두른다 하여 붙은 이름으로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도 한때는 홍건적이었다. 최영은 홍건적이 국경을 넘어와 서경까지

함락시키자 이방실 등과 함께 홍건적을 물리쳤고, 1361년에는 개경까지

점령한 홍건적을 격파하여 나라를 위기에서 구출하였다.

국외 세력의 외침에만 활약한 것은 아니었다. 최영은 국내에서 일어난

반란에도 고려왕실의 보호자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공민왕을

시역하려 한 김용의 흥왕사 변을 진압하고, 공민왕의 반항에 위기를

느낀 원나라가 덕흥군을 왕으로 추대하여 보낸 군사 1만 명을 의주에서

 섬멸하였다. 한때 최영은 신돈의 모략으로 6년간 유배 길에 오르기도

하였지만, 신돈 실각 후 공민왕의 부름을 받고 다시 중앙 무대로

진출하였으며 전국 각지에서 왜구들을 격파하여 왕실과 백성들로

 신망을 얻었다. 이렇듯 나라 안팎에서 일어난 환란에 최영은

동분서주하며 고려왕실과 국가의 보호자로서 그 명성이 드높아졌다.

원∙명교체기의 혼란을 노린 야심 찬 요동정벌

고려의 명실상부한 명장으로 우뚝 선 최영은 내정에서도 그 위치를

 확고히 해나갔다. 특히 공민왕이 죽고 이인임 등이 축출되고 나서,

 풍전등화와도 같았던 위태로운 운명의 우왕을 보호한 것이 바로

최영이었다. 최영은 그의 서녀를 우왕의 비로 들여보내고 1388년에는

 문하시중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당시 중국은 원나라와 명나라가 교체되는 혼란을 겪고 있었는데

그 여파가 고려에까지 미쳤다. 1368년 주원장이 화남을 통일하고

난징에서 황제로 즉위하면서 건국한 한족의 나라 명은 이미

그 세가 다한 원나라를 압박하면서 북벌을 개시하였다. 이에 원나라의

 몽골인들은 중국 본토 지배를 포기하고 북쪽 몽골 지역으로 물러났다.

 중국 본토를 차지한 후, 명나라는 원∙명 교체기의 혼란한 상황 동안

돌아보지 못한 이웃 나라들과의 관계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그 중 하나로 명나라는 공민왕이 회복한 철령 이북의 땅을 다시

반납하라는 억지를 부리고 나섰다. 철령 이북의 땅은 원나라가

고려의 땅을 강제 점거하였던 쌍성총관부로, 명나라는 이 지역에

 철령위를 세우면서 이전의 원나라의 땅이었던 지역은 모두 명나라의

 소유라고 주장하며 나선 것이다.

철령 이북의 땅을 수복할 때 전투를 치른 경험도 있었던 최영은

명나라의 말도 안 되는 요구에 반발했다. 최영은 건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명나라가 내정의 불안정으로 아직은 전쟁에 전력을 다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이 기회에 요동까지 쳐들어가자는 주장을 폈다.

그러나 최영과 마찬가지로 고려 말 잇단 외침을 잘 막아내 민심을

얻고 있던 이성계는 최영의 주장에 반대하고 나섰다. 그는 시기가

 군사를 움직이기 어려운 여름인 점과 북방으로 병력을 이동하여

남쪽에 왜구가 들끓을 것에 대한 우려, 소국이 대국을 칠 수 없다는

 주장을 내세우며 최영의 요동 정벌론에 맞섰다.

고려왕실의 운명을 바꾼 위화도 회군 그리고 최영의 실각

최영의 보호를 받고 있던 우왕은 최영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그가 자신의 곁을 떠나는 것은 원치 않았다. 결국 최영은 우왕과

 함께 평양에 남고 이성계와 조민수에게 군대를 내주어 요동정벌 길에

 나서도록 하였다. 그러나 최영이 이성계에게 군대를 내어준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전을 내준 것과 진배없었다. 명나라를 치기 위해

북쪽으로 가던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장마를 만나 섬에 갇히게 되고

군대를 이상 전진시킬 수 없게 되자 여러 차례 회군의사를 고려조정에

아뢰었다. 그러나 우왕과 최영은 이성계의 회군을 허락하지 않았다.

애초에 원치 않는 전쟁 길에 올랐던 이성계는 왕명을 거역하고

결국 군대를 회군시켰다. 이것이 바로 고려와 최영의 운명을 완전히

침몰시킨 위화도 회군 사건이다.

왕명을 거역하고 군대를 돌린 이성계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쿠데타 외에 다른 길이 없었다. 신진 사대부와 신흥 무장 세력들로부터

 신망을 얻고 있던 이성계는 그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결국 개경으로

들어와 무력시위 후 정권을 탈취하였다. 돌연한 사태 변화에 최영은

급히 평양에서 개경으로 돌아와 회군해오는 이성계의 군대와 싸우려

하였으나, 이미 대부분의 군을 이성계의 요동정벌군에 내어준 상황에서

최영은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최영이 보호하던 우왕은 강화도로 쫓겨났고

최영은 고봉현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최영은 합포로 옮겨졌다가

결국 개경으로 다시 압송되어 참형 되었다. 최영이 죽은 뒤 4년 후

 1392년 이성계는 조선을 개창하였고 그로부터 4년 후에는

최영에게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풀이 나지 않는 무덤의 주인공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 이는 최영이 남긴 말로 유명하다. 원래 이 말은 최영의 아버지 최원직이 최영이 16세 경에 죽으면서 남긴 유언이었다고 한다. 원래 성품이 강직하고 올곧았던 최영은 아버지의 말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아 이 글귀를 써서 곁에 두고 항상 되새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는 고위관직에 있을 때도 별다른 청탁이나 뇌물 사건에 휩쓸리지 않았다. 외적을 막고 고려왕실을 보호하며 청렴하기까지 했던 최영은 그래서 온 나라의 백성으로부터 매우 존경을 받았다. 이성계가 권력을 잡고 나서 존경하는 선배 무장이었고 싸움터에서는 전우이며 그를 장군의 자리로 이끌어준 것과 다름없는 최영을 결국 참형에 처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의 이러한 국민적 인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유배지에서 개경으로 불러온 최영에게 ‘무리하게 요동을 정벌하려고 계획하고 왕의 말을 우습게 여기고 권세를 탐한 죄’를 들어 참형에 처하려 하자, 최영은 평생에 있어서 탐욕이 있었다면 자신의 무덤에 풀이 자랄 것이고 결백하다면 무덤에 풀이 자라지 않을 것이라고 유언을 하고 최후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그의 무덤에는 오랜 세월 동안 풀이 자라나지 않았다. 현재 경기도 고양에 있는 최영장군의 무덤에는 내내 풀이 자라지 않다가 1976년부터 풀이 돋기 시작해 현재는 무성하다.


경기도 기념물 제23호. 경기도 고양시 소재. 1975년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돼 문화재로 관리되고 있는 최영 장군 묘역은 고려시대 보편적인 사각무덤 양식으로 원형이 잘 보존돼 있으며 독특하게 뒤편에 부친 최원직의 묘가 함께 있는 등 문화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출처 : Jjw at ko.wikipedia.com>

민간의 무속 신앙으로 자리 잡은 최영장군의 인기

고려 말기 명장인 최영의 전 국가적 인기는 고려가 멸망한 후 민간의 무속 신앙으로

 변모하였다. 무속에서 ‘최영장군’은 수명장수, 안과태평의 신으로, 무에서 가장 많이

 모셔지는 신령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외적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한 최영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민초는 최영을 장군신으로 다시 부활시키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최영장군’ 신은 조선시대부터 한반도 중부지방을 중심으로 널리 숭배받는

 신이 되었고, 지금도 한반도 최고의 장군신으로 군림하고 있다.

 매년 음력 5월 단오날에 부산 자성대에 있는 사당에서 '최영장군제'가

열리고 있고 전국 곳곳에 최영장군을 모시는 굿당과 사당이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