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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서 백제 가는 길목 나주 복암리 고분군 (전남일보

마한서 백제 가는 길목 나주 복암리 고분군

 

나주 복암리 고분군 전경.


흔히 마한과 백제의 관계를 죽순과 대나무 관계로 비교한다. 어느 곳까지 죽순인지, 어디서부터 대나무인지 잘 구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한과 백제 역시 선후계승 관계를 명확히 구분하기 어렵다. 그런 마한과 백제의 관계를 잘 반영하는 고고 유적은 나주 다시면 복암리고분군이다.

다시평야는 복암리와 영동리를 중심으로 마한ㆍ백제시대에 조성된 수 십기의 고분군이 자리한다. 복암리에는 현재 방형고분 3기와 원형고분 1기가 남아 있지만, 경지정리 이전에는 7기가 존재하였다. 복암리고분군은 해발 7~8m 정도의 구릉 끝부분에 위치한다. 현재는 영산강의 강변에 위치하지만, 당시에는 바닷물이 육지 깊숙이 유입된 해변지역이었다.

1ㆍ2ㆍ3호분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열을 지어 있으며, 4호분은 3호분의 서쪽에 위치한다. 특히 3호분은 방대형고분으로 옹관묘ㆍ석실묘ㆍ석곽묘ㆍ목관묘 등 다양한 매장시설 41기가 확인되었다. 하나의 봉분(封墳)을 수 백년 동안 이용하면서 여러 사람을 매장하여 '벌집형' 혹은 '아파트형고분'으로 부르기도 한다.

복암리고분군은 400년 이상에 걸친 오랜 기간을 두고 기존의 분묘에 추가하는 방식으로 조성되었다. 1ㆍ2호분 사이 옹관묘를 매장시설로 하는 사다리꼴고분, 2호분 초축 사다리꼴고분, 3호분 하부에서 확인된 선행 사다리꼴고분이 가장 이른 단계에 해당한다. 이들 묘제의 축조 시기는 3~4세기 무렵으로 편년된다.

그 다음은 방대형이나 원형고분이 조영되는 단계이다. 원형 형태의 1호분, 수직 확장에 따라 방대형으로 개축된 2호분, 옹관석실묘의 축조와 관련된 3호분의 방대형분구가 조성되었다. 1호분과 2호분처럼 무덤 주변의 도랑에 개배 등 다량의 제사유물이 폐기된 양상도 확인된다. 3호분에는 대형석실묘에 금동신발 및 은장삼엽환두도(銀裝三葉環頭刀)가 부장되었으며, 5세기 말~6세기 중반 무렵 조성되었다.

마지막 단계는 이미 만들어진 원형이나 방대형고분의 분구를 다시 파고 매장시설을 추가하였다. 매장시설은 석실묘와 옹관묘가 중심을 이룬다. 1호분의 서남쪽 석실에서는 녹유 탁잔과 유개소호 등이 출토되었다. 3호분의 석실묘에서는 관모ㆍ규두대도ㆍ은제관식 등이 조사되었는데, 6세기 후반~7세기 무렵으로 추정된다. 이렇듯 복암리고분군은 다양한 분구 형태와 매장시설이 확인되어 묘제의 변화 양상, 토착세력의 모습, 대외관계와 사회문화, 경제활동 등 여러 분야를 연구할 수 있는 기초 자료를 제공한다.

복암리 3호분이 조성되기 시작한 1단계는 마한시대, 2단계는 마한에서 백제로 넘어가는 과도기, 3단계는 백제시대에 해당된다. 전남지역에서 마한 전통문화가 사라지고 백제의 문화양식이 본격적으로 확산된 시기는 6세기 중엽 전후로 이해한다. 백제의 마한지역 진출과 관련하여 여러 지역에 남아 있는 거대한 고분들은 강인한 토착문화 전통과 지방 수장층의 영향력을 반영한다.

복암리 3호분의 경우 금동신발과 은장삼엽환두도(銀裝三葉環頭刀) 등 백제 중앙정부가 내려 준 하사품이 출토되었다. 96호 석실과 같이 석실분 내에 옹관이 들어 있는 사실 역시 주목된다. 석실분의 축조방식도 백제양식과 달리 석실이 지상 부분에 위치한 소위 '영산강식 석실분'이다.

그러나 6세기 중엽에 이르러 중앙정부가 지방관을 파견하여 통치하는 방군성제(方郡城制)가 실시되면서 변화가 일어난다. 지방관은 중앙에서 파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지방 출신을 활용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지방 출신이 관리에 임명된 사례는 지방관을 상징하는 은제화형관식(銀製花形冠飾)이 나주 흥덕리와 복암리 석실분 등에서 출토된 사실을 통해 입증된다. 이들은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을 보좌하여 세금 징수와 군역 및 요역 징발 등을 담당하였다.

방군성제의 실시에 따른 지방통치 양상은 최근 복암리고분군 일대에서 조사된 목간(木簡)을 통해 확인된다. 목간은 나주 일대에 분포한 촌락의 호구, 경작 상황 등을 보고한 내용이 중심이다. 백제의 고유한 토지 단위였던 '형(形)'과 무게 단위 '석'(石)이 쓰인 사실도 밝혀졌다. 논밭으로 나눠 토지 단위, 소출량 등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생활 자료를 통해 지방통치가 철저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토착사회의 전통이 해체되지 않고 생명력을 유지한 모습도 확인된다. 복암리 3호분에서 출토된 규두대도는 토착집단이 6세기 중엽 이후에도 왜국과 독자적인 교섭활동을 지속했음을 보여준다. 규두대도는 칼자루의 끝부분이 'へ'자형으로 각진 것을 말한다. 일본에서 주로 출토되었는데, 복암리3호분의 백제식 석실분 계통의 제5ㆍ7호 석실에서 각 1점씩 2점이 확인되었다.

복암리 토착세력은 석실이 소형화ㆍ규격화되고 은제관식이 출토되는 등 백제의 직접지배를 받으면서도, 규두대도의 출토가 상징하듯이 대왜교섭 등의 활동을 통한 독자적인 해상 네트워크를 유지하였다. 복암리를 비롯한 다시면 일대에 거주한 토착세력의 해상활동은 신라의 통일 이후 회진현(會津縣) 일대가 국제교섭 창구 역할을 담당한 토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