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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의 24시 (월간중앙 2009.04.29)

21시간 근무 상감마마 코피 쏟으시다 [조인스]

새벽 2시 기상 쮝 ‘침실업무’까지 마치면 밤 11시 ‘슈퍼맨의 비애’ 육체노동 ‘제로’에 글 읽고 업무보고 받고… 눈병·당료병들 심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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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싶으면 먹고, 놀고 싶으면 놀고, 잠자고 싶으면 잠자고…. 거칠 것 없는 권력을 가진 제왕이라면 능히 이런 생활을 누리지 않았을까? 오해도 큰 오해다. 오히려 조선의 군왕들은 신하들이 미리 짜 놓은 스케줄대로 움직여야 하는 꼭두각시 같은 일상을 살았다. 조선 군왕의 하루를 따라가 본다.

글■신명호 부경대 교수 [smh@p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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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일제강점기 조선 이태왕(李太王) 고종의 하루 일과는 전화로 마무리됐다. 당시 덕수궁에 거처하던 고종은 새벽 3시는 되어야 잠자리에 들고는 했다.

잠자리에 들기 전 고종은 반드시 창덕궁에 전화를 걸었다. 자신이 이제 자려 한다는 사실을 아들 순종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때쯤 순종은 이미 꿈나라에 있었다.

그래서 고종은 순종의 비서실 격이던 찬시실(贊侍室)에서 숙직하는 직원에게 전화를 걸어 나중에 알리게 했다. 결과적으로 순종이 다음 날 아침 일어나 맨 처음 받는 보고는 지난 밤 새벽 3시에 고종이 잠자리에 들었다는 내용이었다.

조선 왕실의 관행으로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잠자리 문안인사를 해야 하는데, 고종은 거꾸로 자신이 아들에게 잠자리 문안인사를 하는 셈이었다. 밤낮이 바뀐 고종의 생활습관 때문이었다.

1874년 친정어머니가 폭탄테러로 죽은 후 명성황후 민씨는 불안감에 휩싸여 밤에는 잠을 자지 못하다 날이 밝아야 잠자리에 들고는 했는데, 고종 역시 명성황후를 따라 날이 밝아야 잠자리에 들고는 했다. 그렇게 생긴 생활습관을 고종은 한참 후까지 고치지 못했다. 새벽 3시쯤 잠자리에 든 고종은 보통 7시간을 자고 오전 10시 전후에 일어났다.

일어나 처음 하는 일 역시 창덕궁에 전화를 거는 일이었다. 자신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순종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전화를 건 뒤 고종은 복정(福正)에서 길어온 물로 세수를 했다. 이어 차를 마시고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했는데, 보통 차는 창향차(蒼香茶)나 귤강차(橘薑茶)였으며, 아침식사는 우유죽인 낙죽(酪粥)이었다.

아침식사 이후 점심때까지는 손님을 접견하거나 별일 없이 소일하는 것이 주요 일과였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12시가 되면 조연차(早蓮茶) 등의 차를 마시고 점심식사를 했다. 점심식사 이후 저녁때까지는 또 손님을 접견하거나 의사의 진찰을 받거나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어 오후 6시30분쯤 저녁을 먹고 산책을 하거나 궁녀들을 찾아보며 시간을 보내다 새벽 3시가 되면 다시 창덕궁에 전화를 걸고 잠자리에 드는 것이 고종의 하루 일상이었다. 이처럼 식민지 조선에서 고종은 밥 먹고 차 마시는 일 말고는 딱히 하는 일이 없었다. 그것은 물론 일제에 권력을 빼앗긴 망국의 왕이었기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고종은 이렇게 하는 일이 없는 처지여서 1912년 5월25일 고명딸 덕혜옹주가 태어난 뒤에는 매일 점심 후 한두 번, 저녁 후 한 번을 합하여 두세 번씩 옹주에게 들르고는 했다. 그것도 잠깐 들르는 것이 아니라 두세 시간씩 머물렀다.

그 결과 고종은 오전 10시에 침전에서 일어나 점심을 먹은 후 덕혜옹주를 보러 가서 두세 시간 보내다 다시 침전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은 후 다시 옹주를 보러 가서 두세 시간 머무르다 침전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드는 것이 하루 일과였다. 식민지 조선에서 고종은 이처럼 하는 일 없는 존재였지만, 조선시대 국왕은 절대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조선시대 국왕의 업무는 ‘만 가지나 되는 기무’라는 뜻의 ‘만기(萬機)’로 불렸던 사실에서 알 수 있듯,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존재였다. 조선시대 국왕의 하루 일과는 세종의 경우를 통해 그 전형을 들여다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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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

경연 참석 여부는 국왕의 성실성 척도 세종은 재위 32년 만에 막내아들 영응대군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건강이 좋지 않아 피접(避接)차 영응대군 집으로 나갔다 그곳에서 숨을 거둔 것이었다.

<세종실록>에는 세종의 승하를 전하는 기사에 이어 세종의 일생을 정리한 사론(史論)이 실려 있는데, 그 가운데 “즉위 후에는 매일 사야(四夜)에 일어나 옷을 입고, 평명(平明)에 조회(朝會)를 받고, 그 다음에 시사(視事)를 하고, 그 다음에 윤대(輪對)를 하고, 그 다음에 경연(經筵)을 하였는데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있다.

이 짧은 기록에 세종이 재위 32년간 하루하루를 어떤 일정으로 보냈는지 압축돼 있다. 먼저 “사야(四夜)에 일어나 옷을 입고”라는 기록은 세종의 아침 기상시간을 알려준다. ‘사야’는 지금 시간으로는 새벽 2시 전후다. 세종은 매일 새벽 2시 전후에 기상했던 것이다. 기상 후 해가 뜨는 평명까지는 책을 보거나 명상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물론 해가 뜨기 전에 미리 왕실의 웃어른들께 문안인사를 드리고 아침식사도 했다. “평명(平明)에 조회(朝會)를 받고”라는 내용은 세종이 공식적으로 치르는 첫 하루 일정이 아침 조회였음을 알려준다. 조선시대 국왕이 참여하는 아침 조회에는 정식 조회와 약식 조회가 있었다. 정식 조회는 ‘조참(朝參)’이라 하며 매달 5일, 11일, 21일, 25일 네 차례 백관이 궁궐 정전에서 왕을 알현하는 의식이었다.

반면 약식 조회는 ‘상참(常參)’이라고 했는데 대신과 중신, 중요 관청의 당상관·경연관·승지·사관 등이 매일 왕을 알현하는 의식이었다. 조선시대 국왕이 참여하는 아침 조회는 해 뜨는 시간에 맞춰 거행됐다. 국왕은 태양으로 상징됐기 때문에 최고의 효과를 내고자 해 뜨는 시간에 맞춘 것이었다.

조회 시간뿐 아니라 조회에 동원되는 수많은 상징물도 신성한 왕의 이미지를 극대화했다. 왕이 앉는 옥좌 앞 향로에는 향불을 피워 올리고, 그 앞에는 완전 무장한 호위병이 늘어섰다. 왕이 옥좌에 앉을 때는 장엄한 궁중음악을 연주하고, 자리에 참석한 모든 신료는 절을 네 번 올렸다. 옥좌 아래 뜰에는 문무 관료가 정렬하고 이들 주변에는 화려한 기치를 든 의장병이 둘러섬으로써 왕의 위엄과 신성성을 한껏 높였다.

아침 조회에 이어 “시사(視事)를 하고”라는 기록은 세종의 두 번째 하루 일정을 알려준다. ‘시사(視事)’는 ‘일을 본다’는 말 뜻 그대로 국왕이 처리해야 할 공무를 집행하는 절차였다. 조선시대 국왕의 공무는 기본적으로 지방의 팔도와 중앙의 육조, 의정부 등에서 올라온 수많은 공문서를 결재하거나 양반들이 올린 상소문 또는 각지에서 올라온 탄원서 등에 비답(批答)을 내리는 일이었다.

왕에게 보고되는 공문서는 승정원의 승지들을 통해 올라왔다. 승지들은 꼭 필요한 현안을 골라 왕에게 보고했는데, 내용이 긴 공문서는 왕이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도록 간단하게 정리했고, 일상적 사안에 대해서는 처리 방침까지 보고서 말미에 첨부했다. 따라서 왕은 보통의 사안은 승지가 건의하는 대로 따랐으며, 왕의 공문서 결재 문구는 ‘그대로 하라’는 뜻의 ‘윤(允)’, ‘의윤(依允)’, ‘지도(知道)’ 등 한 두 글자에 불과했다.

왕은 수많은 공문서에 일일이 붓으로 결재하기 힘들어 ‘계자인(啓字印)’이라는 도장을 찍기도 했다. 계자인이란 ‘계(啓)’ 자가 새겨진 도장이었다. ‘계’는 보고한 내용을 잘 알았다는 뜻으로, 이 계자인이 조선시대 공문서에 찍히는 국왕의 결재 도장이었다. 계자인이 찍힌 공문서는 왕의 결재가 난 것이므로 해당 부서로 내려보내 시행하도록 했다.

공문서 처리는 비교적 간단했지만 상소문이나 탄원서의 처리는 쉽지 않았다. 비중 있는 인사가 올린 상소문은 직접 읽어야 했는데, 상소문은 격식을 차리고 글 솜씨를 뽐내느라 매우 길 뿐만 아니라 난해하기까지 했다. 왕은 긴 상소문을 다 읽고 직접 비답을 써 주어야 했기에 상소문이 하루에 열 통만 올라와도 다 읽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므로 왕이 상소문에 대한 비답을 내려주는 일은 통상적으로 오래 걸렸다. 시사(視事)에 이어 “윤대(輪對)를 하고”라는 내용은 세종의 세 번째 하루 일정을 알려준다. ‘윤대(輪對)’는 ‘돌아가며 대면한다’는 의미로, 각각의 행정부서에서 순번에 따라 1명씩 궁중으로 파견한 관리를 왕이 만나보는 절차였다.

이들은 왕의 ‘시사(視事)’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왕을 알현하고 자신들의 부서와 관련한 업무를 보고했다. 왕은 또한 긴급한 현안을 협의하기 위해 정승·판서나 삼사(三司) 관료(官僚) 등을 인견(引見)하는 경우도 많았다. 왕을 면담하는 신료들은 모두 꿇어 엎드린 자세였다. 만약 왕의 얼굴을 보고 싶으면 허락을 받아야 했다.

허락도 받지 않고 멋대로 얼굴을 들고 왕을 보다가는 불경죄로 몰려 중벌을 받았다. 면담은 신료들이 왕에게 네 번의 절을 올리면서 시작됐다. 이때 신료들은 왕의 정면에 자리하는 것이 아니라 좌우로 나뉘어 엎드리기 때문에 마치 신료들끼리 맞절하는 것처럼 보였다. 절이 끝나면 신료들은 으레 왕에게 문안인사를 올린 뒤 현안을 보고했다.

윤대를 끝내면 보통 한낮이었다. 그래서 윤대 이후에는 점심식사를 하고 이어 곧바로 경연(經筵)을 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경연은 유학 경전이나 중국 또는 우리나라의 역사책을 교재로 이용한 공부였다. 경연에는 아침의 조강(朝講), 낮의 주강(晝講), 저녁의 석강(夕講), 그리고 밤의 야대(夜對) 등 네 가지가 있었다.

이념적으로 국왕은 하루 네 차례의 경연에 모두 참여할 것이 권장되었지만 바쁜 국왕이 그렇게 하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보통 하루에 한 번만 하거나 며칠에 한 번씩 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떤 왕은 몇 년마다 한 번씩 경연을 열기도 했다. 그래서 조선시대 국왕의 업무능력 또는 성실성은 얼마나 자주 경연에 참석하느냐로 평가되고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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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만의 시간에도 또 다른 업무가… 경연의 진행 방식은 조선시대의 서당 공부와 유사했다. 왕은 이전에 공부한 내용을 복습하여 읽은 후 새로운 진도를 나갔으며, 학습 분량은 경전 본문의 서너 줄 정도였다.

새로 배울 내용을 경연관이 먼저 읽으면 왕이 따라 읽었고, 이어 경연관이 글자의 음과 뜻을 설명하고, 경연에 참여한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각자의 의견을 개진했다. 예정된 진도가 끝나면 왕은 국정 현안을 제기하고는 했으며, 신료들은 각자 자신들의 의견을 개진했다.

이 과정에서 문제점이 부각되고 참석자들의 토론을 거쳐 해결 방안이 제시되고는 했다. 그러므로 경연은 겉으로는 학문 토론장이었지만 실제는 정치 토론장과 같았다. 이런 경연을 통해 왕은 유학에 대한 식견을 높이고 정치 안목을 키울 수 있었다.

윤대(輪對)에 이어 “경연(經筵)을 하였는데”라는 내용은 세종이 네 차례의 경연 중 최소한 주강(晝講)에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거의 매일 참석했음을 알려준다. 역사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세종은 재위 1년부터 재위 20년까지 20년 동안 약 2,000회의 경연에 참여했다고 한다. 연평균 100번 정도 경연에 참여한 셈인데, 이것은 대단한 참석률이었다.

국상(國喪)·제사·질병·사신접대 등 이런저런 이유로 경연을 하지 못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매일 참여해야 가능한 참석률이기 때문이었다. 경연 참석률이라는 면만 보더라도 세종은 조선시대 국왕 중 가장 탁월했다. 다만 세종은 재위 20년 이후 지병인 당뇨병이 악화해 경연에 거의 참석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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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국왕들이 반드시 챙겨야 할 업무가 있었다. 오후 3시쯤, 야간에 궁궐의 호위를 맡은 군사 및 장교들과 숙직 관료의 명단을 확인하고, 야간의 암호를 정해주는 업무였다.

주강(晝講) 이후에도 왕의 일정은 많았다. 지방관으로 발령받고 떠나는 신료나 중앙으로 승진해 오는 관료들을 접견해야 했다. 특히 팔도의 관찰사나 중요 지역 수령들은 직접 만나 업무를 당부하고 그 지역의 현안도 논의해야 했다.

이렇게 몇 명의 신료를 만나고 나면 저녁때가 가까웠다. 조선시대 국왕들이 오후 3시쯤에 반드시 챙겨야 할 업무가 하나 있었다. 바로 야간에 궁궐의 호위를 맡은 군사 및 장교들과 숙직 관료의 명단을 확인하고, 야간의 암호를 정해주는 업무였다.

이는 왕 자신의 안전 및 비상사태에 대처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였다. 이것으로 왕의 하루 일정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왕은 해가 지기 전에 다시 저녁 공부인 석강에 참석해야 했다. 석강 이후에는 저녁식사를 하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야간업무를 보았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대비나 왕대비 등 왕실 어른들에게 문안인사를 올려야 했다.

여기까지가 왕의 공식적인 하루 일정인데, 왕이 각각의 일정에서 무슨 일을 어떻게 했는지는 <승정원일기>에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예컨대 영조 37년(1761) 7월24일 당시 경희궁에 머무르던 영조의 하루 일과는 다음과 같았다.

“진시(辰時, 오전 7~9시)에 주상이 상참을 하기 위해 경현당에 납시었는데, 행도승지 조영진, 좌승지 김상중, 우승지 임위, 좌부승지 심발, 우부승지 이원익, 기사관(記事官) 유항주, 기주관(記注官) 최창국, 기사관 이관이 차례로 들어와 엎드렸다. 주상이 가주서(假注書) 김학수에게 명령하여 계단 위에 서서 ‘아뢸 말이 있는 관료는 건물 안으로 들어오고 아뢸 말이 없는 관료는 나가라’고 말하게 했다.

문반 관료는 의정부의 정승 이하가 모두 건물 안으로 들어오고, 서반 관료는 부마(駙馬) 이하가 나갔다. 우의정 홍봉한이 아뢰기를 ‘정성에 감응하여 내리는 비가 부족할 우려가 있었는데, 어젯밤부터 많이 쏟아지니 그 기쁨을 어찌 다 아뢰오리까? 다만 성상(聖上)께서 연일 노동하시느라 밤늦게 취침하셨다고 하는데 조섭하는 절차가 어떠하십니까?’ 하였다.

주상이 이르기를 ‘나의 몸 상태는 여전하다. 조상께서 돌보시어 이렇게 많은 비를 얻으니 몸이 수고로운 것은 알지 못하겠고 오히려 마음이 편안하다’ 하였다.(중략) 오시(午時, 오전 11시~오후 1시)에 주상이 주강을 하기 위해 경현당에 납시셨는데, 특진관 이장오, 동지사 김상철, 부제학 서명응, 참찬관 임위, 기사관 유항주, 기주관 최창국, 기사관 이관, 무신(武臣) 구환징이 차례로 들어와 엎드렸다.

주상이 <대학>의 ‘이른바 나라를 다스리려면 반드시 먼저 자기 집을 바르게 해야 한다’는 구절에서부터 ‘강고(康誥, <상서(尙書)>의 편명)에 이르기를 갓난아기를 보호하듯 한다’는 구절까지 읽었다. 부제학 서명응이 그 뒤의 ‘한 집이 어질면 온 나라의 어진 기풍이 부흥한다’는 구절에서부터 ‘그러므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그 집을 바르게 하는 데 있다’는 구절까지 읽었다.

서명응이 아뢰기를 ‘윗사람이 어질면 아랫사람이 의롭습니다. 어질고 의로운가 아니면 탐욕스럽고 어지러운가의 계기는 오로지 한 마음을 어떻게 잡아 보존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한 사람이 어질고 겸양하면 스스로의 교화로 자연히 감화시키게 되고, 한 사람이 탐욕스럽고 어지러우면 백성들이 각자 이익을 다투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는 백성을 마치 갓난아기처럼 가르친 이후에야 가히 다스릴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주상이 이르기를 ‘요순시대는 가히 태평성대라 할 만하지만 역시 사흉(四凶)이 있었으니, 걸주(桀紂) 시대라고 현인이 없겠는가’ 하였다. (중략)

미시(未時, 오후 1~3시)에 주상이 대신과 비변사 당상관들을 인견하기 위해 경현당에 납시었는데, 우의정 홍봉한 (중략)이 차례로 들어와 엎드렸다. 호조판서 윤동도가 아뢰기를 ‘올해 자연재해의 피해 상황을 조사하기 위해 경차관(敬差官)을 보내는 것이 어떠하십니까’ 하였다. 주상이 이르기를 ‘올 농사는 흉작인데 경차관을 보내면 접대하는 데 민폐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중략)

신시(申時, 오후 3~5시)에 주상이 석강을 하기 위해 경현당에 납시었는데 (중략)”

-<승정원일기> 영조 37년(1761) 7월24일의 기록-
하루 일정이 이렇게 빽빽하게 짜여 있기에 왕이 자기만의 호젓한 시간을 갖기란 쉽지 않았다. 조용히 명상에 잠기거나 보고 싶은 책이라도 뒤적이려면 한밤중에나 가능했다. 과거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왕이 한밤중에 조용히 독서하거나 상소문을 읽는 것을 ‘을람(乙覽)’이라고 했는데, 이는 밤 10시쯤인 을야(乙夜)에 책을 열람한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밤 10시쯤 되어야 왕은 자기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왕은 밤 시간도 자신만을 위해 쓸 수는 없었다. 왕을 기다리는 무수한 여인들 때문이었다. 그래서 왕은 밤 11~12시가 되어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왕이 이렇게 많은 하루 일정을 제대로 소화하려면 당연히 업무능력과 함께 육체적 건강이 요구되었다.

그런데 육체적 건강이라는 면에서 볼 때 조선시대 국왕은 매우 불리했다. 업무가 철저하게 정신노동이었던 반면 운동할 기회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왕은 앉은 자세에서 신료들을 접견했고, 공문서를 읽고 결재할 때도 앉은 자세였다. 자리를 이동할 때는 가마를 이용했다. 스스로 걷거나 움직일 기회는 거의 없었다. 게다가 업무 중 대부분은 공문서나 상소문·탄원서를 읽는 것이어서 문서를 한정없이 읽다 보면 눈에 무리가 가고는 했다.

각종 성인병은 국왕의 직업병 과다한 영양섭취에 비해 운동이 부족했던 조선시대 왕들은 때문에 대부분 비만·당뇨·고혈압 등의 질병으로 고생했다. 이런 질병은 혈액순환이 잘 되지 않아 생기는 병이었다. 비만·당뇨·고혈압 상태에서 무리하게 공문서를 읽어야 했던 왕들은 눈병과 부스럼에도 자주 걸렸다.

이런 병들은 국왕의 업무 특성상 피하기 어려웠다는 점에서 국왕의 직업병이라고 할만 했다. 조선시대에는 국왕이 병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국정을 살피도록 하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대책을 세웠다. 내의원과 시약청이 그것이다. 내의원은 평상시 국왕의 건강을 보살폈으며, 시약청은 비상시 국왕의 건강을 보살폈다.

내의원은 궁궐 안에 설치된 왕실 전용 병원으로, 책임자인 제조와 함께 어의와 의녀 등이 배속되었다. 어의들은 탕약·침·뜸과 같은 전공별로 있었다. 왕은 5일마다 정기적으로 내의원의 어의들로부터 진찰받았으며, 건강이 악화되면 수시로 진찰받았다. 진찰은 한의학의 전통에 따른 진맥이었다.

왕을 진맥할 때는 서너 명의 어의가 함께 들어갔다. 여러 명이 진맥해 정확한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서였다. 진맥 결과에 따라 탕약을 쓸지, 침을 놓을지, 뜸을 뜰지 결정했다. 특별한 증상이 없으면 원기를 보충하기 위한 탕약을 처방했지만 병증이 발견되면 탕약과 함께 침이나 뜸을 같이 처방했다.

처방한 탕약은 내의원에서 조제했다. 처방한 약재를 종류별로 정량을 달아 약탕기에 넣고 달였는데, 제조 1명과 어의 1명이 조제 과정을 감독했다. 탕약을 달인 후에는 제조가 먼저 맛을 보아 이상 유무를 확인했다. 이상이 없으면 약탕기의 뚜껑을 덮고 자물쇠로 잠근 후 쟁반에 약탕기와 열쇠를 얹어 왕에게 가져갔다.

이때 화로를 함께 가지고 갔는데, 식은 탕약을 곧바로 데우기 위해서였다. 약탕기의 자물쇠를 열고 탕약을 은으로 된 주발 뚜껑에 조금 따라 내의원 도제조가 먼저 맛을 보았다. 독이 들었는지 확인하는 절차였다. 이상이 없으면 은주발에 탕약을 따라 왕에게 올려 마시게 했다.
침을 놓을 경우에는 먼저 침의(鍼醫)들이 모여 혈(穴) 자리를 논의해 결정했다.

그 혈에 침을 놓아도 좋은지 왕에게 보고하고 좋다는 허락이 떨어져야 침을 놓았다. 침을 놓기 전에 수석어의가 아무 혈에 침을 놓겠다고 아뢴 후 침의가 침을 놓았다. 뜸을 뜨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평상시에는 내의원에서 이런 방식으로 왕의 건강을 관리하다 왕이 중병에 들면 시약청을 설치하고 24시간 비상대기하며 치료했다.

시약청에는 물론 내의원의 어의들이 배속됐다. 시약청은 왕이 중병에 들었다는 표시이므로 시약청의 설치는 곧 나라 전체의 비상사태였다. 당연히 시약청이 설치되면 양반 관료들은 물론 일반 백성들도 왕의 건강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숙종 승하 직전 예조정랑이었던 권상일은 시약청이 설치됐을 때의 상황을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묘시(卯時, 오전 5~7시)에 의관이 와서 말하기를 ‘밤 사이 주상의 몸 상태가 특히 심한 것이 여전하다’고 하였다. 사시(巳時, 오전 9~11시)에 주상이 의관에게 명령하기를 ‘수라를 물에 말아 먹으려 했지만 끝내 먹을 수 없다’고 하였다. 미시에 시약청에서 들어가 진맥했는데 여러 증상이 특히 심한 것이 여전했다. 주상의 복부가 어제보다 더 퉁퉁 부어올랐고, 물똥 2홉을 누셨다. 신시에 물똥 약간을 누셨다. 소문을 들으니 정오에 주상의 중완(中脘)에 뜸을 떴는데, 쑥뜸을 절반만 태우고 곧바로 치웠다고 한다. 주상의 원기가 뜸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약해 부득이 시험만 해보고 열기가 침투하지 못하게 하고자 그랬다고 한다. 유시(酉時, 오후 5~시)에 의관이 다시 들어가 진맥했다. 맥이 크기는 했지만 힘이 없었다. 여러 증상은 정오 때와 같지만 복부가 더 부었다고 명령하셨다. 그때 물똥 약간을 누셨다. 술시(戌時, 오후 7~시)에 의관에게 명령하기를 ‘어제부터 목구멍에서 가래 끓는 소리가 나는데, 오늘 자주 나니 왜 그런가’ 하였다. 의관이 아뢰기를 ‘복부가 더 붓고 수라를 들지 못하는 이유는 변도(便道)가 활삭(滑數)하기 때문입니다. 삼령차(蔘笭茶)를 드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그때 물똥을 반 홉 누시고 삼령차를 드셨다. 인정(人定, 밤 10시 전후) 때 소변을 4홉 누셨는데 색이 누랬다. 2경 4점(밤 11 전후)에 의관에게 명령하기를 ‘인삼탕 반 홉을 들었다’고 하였다.”

-권상일, <청대일기>, 경자(庚子) 숙종 46년(1720) 5월13일-
양반 관료들이 국왕의 건강에 이토록 신경을 쓴 이유는 왕이 국가의 최고 수뇌이기 때문이었다. 왕이 병들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국가 조직은 뇌성마비 환자처럼 작동 불능으로 빠져들었다. 그래서 조선시대 왕의 몸과 마음이 건강할 때 국가 역시 건강하였으며 반대로 왕의 몸과 마음이 병들었을 때 국가 역시 병들었다.

신명호

1965년 강원도에서 출생.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선임연구원과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를 거쳐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조선의 왕>(1998), <조선왕실의 의례와 생활, 궁중문화>(2002), <조선의 공신들>(2003), <궁궐의 꽃, 궁녀>(2004), <조선왕비실록>(2007)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