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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바로알기

조선은 명분보다 실리 추구한 왕조 (조선일보 2009.02.04)

청주대 민덕기 교수 동국대 학술대회서 주장

조선의 기본적인 외교노선은 사대(事大)였다. 말 그대로 대국인 중국을 섬겨야한다는 것이다.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에 ’사대’라는 말이 명문화 될 정도였다.

명(明)이 멸망하자 이미 중국 대륙을 정복한 청(淸)을 정벌해야 한다는 ’북벌론’이 조선 정가의 최대 화두로 떠오를만큼 사대에 대한 조선의 입장은 확고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조선은 ’사대’라는 대의와 명분에 매달린 이념 왕조였을까?

청주대 역사문화학과의 민덕기 교수는 이 같은 의문에 제동을 건다. 오히려 한 발 더 나아가 조선왕조가 이념 왕조가 아닌 무역 실리를 추구한 왕조라는 견해까지 피력한다.
민 교수는 6일 동국대 일본학연구소가 주최하는 ’동아시아의 소통과 교류’를 주제로 한 국제학술대회에 앞서 4일 배포한 논문 ’팔포무역으로 보는 사대.교린 사행외교의 특징’을 통해 이런 주장을 폈다.

민 교수는 조선왕조가 건국 초부터 무역적 요소를 배제한 채 신의(信義)에 입각한 사행외교를 전개하려 했으나 대명(對明)외교에서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중국에 조공하러 가는 “부경사행(赴京使行)을 통한 밀무역을 철저히 통제할 정부의 의지와 역량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경국대전’에는 부경사행으로 금지된 물품을 지참하는 자는 사형이라고 규정돼 있으나 조선 정부는 한 번도 이 법조항을 적용해 치죄(治罪)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특히 청나라가 들어서자 ’팔포(八包)무역’제도를 도입하면서 부경사행 때 사무역을 독려하기까지 한다. 팔포무역이란 사행원에 의하여 행하여지는 공인된 사무역을 말하며 통상 사무역에 참가한 이들은 은과 인삼을 거래했다.

심지어 정조는 “은이 귀하면 삼을 가져가고, 삼이 귀하면 다시 은을 가져가게 해 무역의 권한이 우리나라에 있게 하는 것은 실로 이웃 나라와의 관계를 획책하는 좋은 계책이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민 교수는 이러한 예를 통해 “조선 정부는 이념 왕조라기 보다는 무역실리를 추구한 왕조”로도 볼 수 있다고 결론짓는다.

민 교수는 이어 문화적 사대국이었던 명에서 정치적 사대국인 청으로 넘어가면서 사행외교 시 무역을 통해 실리를 취하려는 입장이 더 강화됐다는 설명도 곁들인다.

이밖에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츠노 도모아키 일본 고치대 인문사회과학부 교수가 ’임진왜란의 원인.목적에 관한 일본의 제학설’을 통해 임진왜란의 원인과 목적을 조명하고, 이훈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외교문서로 본 근세 한일관계’에서 교린(交隣:이웃 나라와 대등한 입장에서 사귄다) 이념에 어긋난 조선과 일본사이의 문서 사례를 살펴보는 등 5편의 논문발표가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