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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바로알기

조선의 연쇄살인 (조선일보 2009.02.04)

조선에서 살인죄는 어떻게 처리했을까? 조선의 형법전인 '대명률(大明律)' 인명(人命)조가 그 처벌규정인데, 모살인(謀殺人)조는 "살인을 계획한 자는 목을 베는 참형(斬刑), 계획을 도운 자는 목을 매는 교형(絞刑), 돕지 않은 자는 장(杖) 100대에 유배 3000리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사형을 참형과 교형으로 등급을 나누어 놓은 것이다. 돕지 않은 자는 계획을 알고도 신고하지 않은 자를 뜻한다.

현재의 폭행치사에 해당하는 투구(鬪毆) 살인에 대해서는 '손발로 때렸거나 금인(金刃:쇠붙이)으로 죽였거나를 막론하고 교형'이었고, 고의로 살인한 '고살자(故殺者)는 참형'이었다. '당률(唐律)'은 '무기(兵刃)를 사용한 자는 고살자와 같이 참형에 처한다'고 무기 사용을 더 강하게 처벌하고 있다.

연쇄살인의 경우는 어떻게 처벌했을까? '대명률'의 '일가 셋을 죽인 죄(殺一家三人)'가 여기에 해당하는데 "사지를 찢어 죽이는 능지(凌遲)에 처하고 재산은 살해된 자의 집안에 준다"고 규정하고 있다. 연산군 5년(1499) 이방(李芳)의 처자 등 4명이 살해당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주범 김이강(金伊江)뿐만 아니라 살인에는 가담하지 않았지만 시신 유기에 참여했던 이생(李生)도 사지가 찢겨 죽었다.

사형은 사약으로 죽이는 사사(賜死)·교형·참형·능지로 나뉘는데, 때로 사면되는 경우도 있었다. '대명률' 존류양친(存留養親)조는 "사형 판결을 받았지만 조부모와 부모가 늙고 병들었으나 그 이외에 모셔야 될 사람이 없을 경우 죄명을 상세히 갖춰 올려서 윤허를 받아 사면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살인은 사형이 원칙이지만 정상참작도 있었다는 말이다.

그 누구보다 죄인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던 임금이 정조였다. 그런 그도 대리청정 시절인 영조52년(1776) 서울 중부(中部)의 노(奴) 금이(金伊)의 임상휘(林尙輝) 살인사건에 대한 보고를 받고 "살인자는 죽음으로써 죽은 자의 생명을 보상하는 것이다(死以其償死者之命)"라고 말했다. 죽은 자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살인자를 사형시키는 것이란 뜻이다. 억울하게 죽은 생명에 대한 배려는 흔히 간과되는 현재의 사형제 존폐 논란에 대한 충고처럼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