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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바로알기

`태우라` 했으나 살아남은 정조 어찰 (2009.02.09)

실록.승정원일기도 “안심하지 못할 기록”

전문가들의 충분한 검토를 거쳐 9일 공개된 정조의 비밀편지 299통 중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에 수록된 것은 단 한 통도 없다. 홍재전서는 정조 23년(1799)에 편집하기 시작해 190편으로 정리됐으며, 정조 사후 2년만인 1801년에 말년의 저술을 덧붙여 재편집했다가 1814년에 출판됐다.

이번에 발굴된 어찰은 일부 대필(代筆)한 것을 제외하고는 정조가 심환지(沈煥之)에게 친필로 써서 보낸 것으로 드러났다.

심환지는 이 편지들을 받을 즈음에는 예조판서와 우의정, 그리고 좌의정이었다. 그의 사후 순조시대가 개막하면서 심환지는 영의정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런 그가 한창 활동할 때 편찬이 시작되고 일단락된 홍재전서에도 이번에 발굴된 정조 어찰은 단 한 편도 실리지 않은 것이다.

이는 정조나 심환지가 문제의 어찰이 공개될 때 일어날 정치적 파장을 고려했기 때문임에 틀림없다.

실제 정조는 이 편지들을 보내면서 누누이 ’보안’을 강조하고 보고 난 즉시 태워 버리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이 편지들에서는 “此紙卽丙之”(이 편지는 보는 즉시 불에 태워라), “此紙卽차<손수변에 止>之”(찢어버려라), “覽卽차<손수변에 止>去’(찢어버려라), ”此紙卽洗之或還送如何“(세초하든지 돌려보내든지 하라), ”此紙覽後卽차<손수변에 止>之, 切勿暫留“(찢어버리고 남기지 말라), ”此紙勿留, 卽차<손수변에 止>之“(찢어버려라) 등의 문구가 자주 발견된다.

나아가 정조는 이렇게 비밀스럽게 주고받은 편지 내용이 자꾸 외부로 공개되는 일을 극도로 질책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1797년 7월7일에 보낸 편지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이 편지는 보는 즉시 찢어버리든지 세초(洗草)하든지 하라! 한 가지 염려가 늘 떠나지 않는 것은 비록 집안에서라도 혹시 조심하지 않는 데 있다. 경이 만약 각별히 치밀하게 한다면 이런 염려가 어디서 나오겠는가? 듣자하니 경의 아들이 자못 비범하여 제 형보다 낫다고 하는데, 늘 경을 위해 다행이라 여긴다. 이러한 서찰은 경이 스스로 세초하는가, 아니면 경의 아들을 시켜 세초하는가? 처리할 방법을 듣고 싶으니, 나중의 편지에 반드시 한번 언급하여 이 의심을 풀어주기 바란다.“둘 사이에 오간 정보가 샐까 봐 노심초사하는 정조의 표정이 역력하다.

세초란 글씨를 쓴 종이를 물로 씻어 글자를 지우고 재활용하는 일을 말한다.

같은 정사년(1797) 4월10일에 부친 편지에서는 ”나는 이처럼 경을 격의없이 대하건만 경은 갈수록 입을 조심하지 않는다“고 질책하면서 ”매번 입을 조심하는 일 한 가지만은 탈이 생기는 것을 면하지 못하니, 경은 생각 없는 늙은이라 하겠다. 너무나 안타깝다“고 했다.

왜 그렇게 보안에 신경을 쓰라고 했건만 자꾸 우리 둘만 아는 비밀이 바깥으로 새 나가느냐는 질책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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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편지에서는 또 ”계속 나랏일로 바빠 아마도 쉴 틈이 없을 듯하다. 밤사이 잘 있었는가? 요사이 소식은 어째서 알려주지 않는가?“라고 심환지를 다그치는 것으로 보아 정조는 당시 노론 벽파의 거두인 심환지를 통해 끊임없이 정보를 수집했음을 보여준다.

급박한 사안이 있을 경우에는 하루에 무려 4차례나 심환지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은 정조가 신하들과 비밀스럽게 주고받은 편지가 비단 심환지 한 사람에게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는 점이다.

노론 벽파인 심환지에 대비되는 남인계 거두 채제공(蔡濟恭.1720-1799)에게 보낸 비밀 편지도 최근 발굴됐고, 외사촌인 홍취영(洪就榮)에게 보낸 편지 39점도 공개됐다.

단국대 사학과 김문식 교수는 이와 같은 정조의 ’편지를 통한 막후정치’는 효종에게서 배웠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즉, 효종은 이조판서 송시열(宋時烈.1607-1689)과 북벌을 모의하는 과정에서 자주 비밀편지를 주고받았는데 이런 전통을 정조가 잘 활용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나아가 이번에 발굴된 정조어찰은 기록의 정확성과 방대함으로 정평이 난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도 ”그렇게 안심하고 믿고 따를 만한 기록이 아니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시켜 준 것으로 평가된다.

아무리 자세한 기록이라도 그 이면까지 모두 들춰낼 수는 없다는 점이 새삼 증명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