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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독살설 (조선일보 2009.02.11)

필자가 정조 독살설을 추적하기 위해 오랫동안 사료를 섭렵하면서 가장 이해가 가지 않았던 대목은 심환지를 내의원(內醫院) 제조로 그냥 둔 부분이었다. '정조실록'에는 정조의 와병 사실이 재위 24년(1800) 6월 14일 처음 등장한다. 그날 정조는 예전에 심환지에게 보낸 서신에서 '호로자식'이라고 욕한 내의원 제조 서용보(徐龍輔)를 불러 진찰을 받는다. 그런데 다음날 서용보를 교체해 그에게 치료를 맡길 수 없다는 속내를 드러냈다. 그러나 심환지는 계속 내의원 제조로 근무시켰다.

이번에 공개된 서신은 그 의문을 상당 부분 풀어주었다. 정조가 사망 13일 전 심환지에게 와병 사실을 알린 것이 그가 정조의 의문사에 아무 관련이 없다는 근거라고 주장하는 것은 논리적 타당성이 떨어진다. 오히려 그간 알려졌던 것보다 정조의 의문사에 보다 깊은 관련이 있다는 근거로 해석되는 것이 마땅하다. 정조의 병세는 하루 전에 이미 약방의 진찰을 받음으로써 공개된 사안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조가 자신의 죽음을 전혀 예상하지 않고 있었다는 점이다.

정조 의문사의 연원은 사망 28일 전인 5월 30일 그믐날 경연에서 한 오회연교(五晦筵敎)에 있다. 이 하교에서 정조는 사도세자 문제를 거론하면서 대대적인 정계 개편을 암시한다. 이는 이가환(李家煥)·정약용(丁若鏞)처럼 천주교도라는 노론의 공세로 쫓겨났던 남인들을 중용하려는 의지로 해석되었다. 노론 벽파가 당황한 것은 당연했다. 이런 구상이 사실이었음은 다산 정약용의 글로도 증명된다.

정조는 사망 16일 전인 6월 12일 밤 규장각 각리(閣吏:규장각 아전)를 정약용에게 보내 '한서선(漢書選)'을 전하면서 "너를 부르려고 주자소(鑄字所)의 벽을 새로 발랐다"면서 "그믐께쯤이면 들어와 경연에 나올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정조는 자신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는커녕 남인들을 중용하는 정계 개편을 결심하고 있었다.

규장각 각리는 정약용에게 "전하의 안색과 말씀하시는 어조가 매우 온화하셨다"고 정조의 동태를 전했다. 그러나 정조 곁으로 돌아갈 결심을 했던 정약용은 그믐이 되기 전에 정조가 사망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는다. 정약용이 정조 의문사에 관한 글을 남긴 것은 이런 배경이 있었다.
이덕일·역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