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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와 목간 (조선일보 2008.07.09)

목간은 왜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와 인연을 맺었을까?


목간이란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 혹은 그것이 아직 널리 보급되기 이전 시기에 나무를 깎아서 그 위에 먹으로 문자를 쓴 것을 말하는데, 종이 이전의 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그 당시의 내용을 담고 있는 실증자료로서 수정되지 않은 채 온전하게 남아있어 중요한 것이다.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에서는 가야문화권 중요유적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아라가야의 고도였던 경남 함안군의 함안 성산산성(사적 제67호)에 대하여 1991년부터 연차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성산산성의 성격과 조성연대, 축조기법 등을 밝히고자 하였다.


발굴조사를 실시하면서 육안으로 보이는 성벽 내부에서 돌로 쌓은 정연한 성벽이 내외에서 확인되고, 그 외벽의 기저부에 삼각형의 모습으로 석축한 구조물을 덧대어 성벽의 기초부가 쉽게 무너짐을 방지하는 것이 확인되었는데, 이러한 보강구조물(기단보축)은 신라의 산성 축조방식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었다. 물론 첫해 조사(1991년)에서 신라의 기와(연화문수막새, 귀면와 등)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그럼 함안 성산산성은 가야의 산성이 아니고 신라에 복속된 이후 주변 세력의 침입에 대비하여 신라가 축성한 성곽이란 말인가? 다음해(1992년) 동문지 주변의 성벽 및 문지를 확인하기 위한 발굴조사에서 역시 동일한 모습의 석축 성벽을 확인하였고, 문지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문지 외벽에 덧대어 기단보축이 시작되는 점을 확인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6세기 경의 신라산성으로 추정되고 있어, 더 큰 꿈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축성비(산성의 축조와 관련하여 만들어진 비문)를 발견하는 일이었다.


1978년 단양적성비, 1988년 경주명활산성 작성비, 경주 남산신성비 등의 발견으로 인해 신라의 6세기대 역사를 복원할 수 있는 커다란 성과들이 나타나고 있는 시점이어서 함안 성산산성에서도 축성과 관련한 금석문의 충분한 발견 개연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단보축이 신라의 영역내 여러 산성에서 확인되고는 있지만, 이처럼 그 시작점이 확인되기는 이곳이 처음이어서 더욱 애착을 가지고 조사에 임하였다. 성 내부는 당시 벼농사를 짓고 있는 논이었으므로 주변은 항상 물기를 많이 머금고 있었으며, 동문지 일대가 산성내부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자연히 이곳으로 배수의 물길이 만들어져 있었다.


6월의 한여름에 표토를 벗겨내고 아래로 자꾸 내려갈수록 바닥은 확인되지 않고 보라색 뻘층이 나타나고, 그 아래에서는 유기질 층이 검게 형성되어 있었다. 저습지의 역한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지만, 바닥을 확인하기 위해 아래로 파내려가야만 하였다. 유기질 층에서는 많은 나무찌꺼기(자연나무와 깎아 낸 나무 부스러기 등)가 압착되어 있었는데 그 내부에서 복숭아, 도토리, 호두 등의 견과류가 있었고, 토기편, 나무방망이 등 목제품의 모습이 나타났다. 나무방망이 등 목제품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조심스레 유기물질을 제거하여 나갔다. 목제품은 오랜 세월 동안 산소와 차단된 채 물속에 있는 상황이므로 쉽게 흠집이 나고 부스러지기 쉬운 상태였다. 또한 햇볕에 노출되자 노출당시의 원색을 유지하고 있다가 검게 변하기 시작했다. 수습된 목제품들은 보존상태를 유지하기 위하여 밀폐용기를 구입하여 물속에 담가 두었다.


이런 과정에서 좁은 나무판에 글자 같은 것이 얼핏 눈에 띄었다. 목제품들은 물기를 머금고 있어 먹으로 쓴 글씨가 마주친 일순간 보였던 것이다.


“아! 이것이 말로만 듣던 목간(木簡)이라는 것이구나.”
곧 바로 연구소에 전화를 걸어 목간이 출토되었다고 보고를 하였으나, 흥분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홍성빈 소장은 전화를 받으시자 바로 현장으로 달려왔다. 1975년 경주 안압지에서 목간이 발견된 이래 간혹 여러 유적에서 목간이 확인되고는 있었지만, 실제 목간을 대한 그 순간의 흥분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목간의 먹글씨는 금방 사라져 버렸다. 공기 중에 노출되자 검게 변하여 육안으로 확인하고자 하였으나, 그 글씨의 형태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다. 계속 이어진 조사에서 약 20 여 점의 목간을 수습하였다. 그러나 육안으로 글씨가 보이는 목간은 한두 점에 불과하였고, 대부분의 목간은 오랜 기간동안 뻘층에 묻혀있었던 탓에 검게 변하여 글씨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리하여 목간은 그 보존상태를 유지하기 위하여 사무실에서 그 실상이 밝혀질 때까지 물속에 담겨져 관리되었다.


발굴조사가 끝나고 유물의 처리를 위하여 현상을 실측하고, 사진촬영 후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연구실에 그 처리를 의뢰하였다. 그러나 보존처리는 빨리 이루어지지 않았고, 뒤이은 조사(1994년)에서도 목간이 여러 점 확인되어 다시 보존과학연구실에 목간의 보존처리를 의뢰하였다. 이러한 동안에 우리연구소 청사건물이 준공되어 보존처리할 수 있는 각종 기자재를 구입하게 되었는데, 당연히 먹글씨를 확인할 수 있는 적외선카메라 촬영장치를 구입하도록 연구소에서 배려하여 주었다. 아직 적외선촬영장치가 거의 보급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목간의 먹글씨 확인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기자재였던 것이다.


1997년 적외선카메라 장치가 사무실에 구비되자, 몇 번의 테스터를 거쳐 운용방법을 익히고 난 뒤 곧 바로 확인작업에 들어갔는데, 대부분의 목간에서 먹글씨가 뚜렷이 나타났다. 먹 흔적이 있는 것은 그 형체를 뚜렷이 나타내고 있었는데, 아쉽게도 모르는 글자들이 많았다. 흘려 쓴 글씨거나 현재의 상용글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판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타난 글자를 프린터하여 전문가에게 의뢰하여 본 결과 전형적인 신라의 인명표기 양식으로 기재된 신라의 목간으로 확인하였고, 신라의 지명도 기재되어 있었다.


목간에 쓰여진 글자는 대개 단문이었으며, 한 면에만 있는 것, 양면까지 있는 것 등이 있었으나 뚜렷한 문장을 가지지 않았고, 글자의 수도 대부분 10자 남짓하였다. 전문가에 의하면 글자는 지역명과 인명, 그리고 관등명이 있는 것으로 확인되는데, 파손 등으로 인해 정확히 알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 관등명에서 신라(新羅)의 외위(外位) 벼슬인 일벌(一伐) 등이 확인되었는데, 一伐은 외위 8등급이다. 많은 지역명(□□伐, □□村, □□城)이 있었고, 인명으로 확인되는 단어들이 있었으며, 관등인지 물품명인지 알 수 없는 글자가 있었다. 신라의 인명표기 양식인「직명, 부명(출신지명), 인명, 관등명」의 순으로 대개 글자가 씌어 있었는데, 고구려의 기재양식(직명, 부명, 관등명, 인명의 순서)과는 확실히 다른 모습이었다.


이러한 내용을 함안 성산산성 보고서에 보고한 이후 많은 연구자들의 방문과 조언으로 1999년에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목간이란 유물을 주제로 국제학술심포지움(한국, 중국, 일본)을 개최하여 목간학을 정립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후 함안 성산산성 출토 목간을 가지고 여러 연구자들이 다방면의 연구성과를 발표하고 있으며, 2002년에는 또다시 100여 점 정도의 목간이 출토되는 쾌거를 이루었다.


현재 함안 성산산성 발굴조사는 동문지 부근 특히 목간이 출토되는 부분의 성격규명을 위해 2003년부터 연차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대규모의 저수시설이 있음을 확인하고, 정밀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함안 성산산성 발굴조사에서 6세기 중엽 경의 신라목간이 출토됨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산성 조사에서는 저수지 등 저습지 부분에 대한 조사를 신중히 실시하고 있으며, 매년 목간이 출토되고 있어 향후 목간에 대한 연구자의 저변 확대와 발전을 위한 한국목간학회의 발족을 기대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1975년 경주 안압지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목간이 최초로 출토된 이후 현재까지 약 300여 점의 목간이 출토되었다. 신라권(경주, 함안, 창녕, 김해)에서 목간들이 출토되었고, 백제권의 부여, 익산지역 등에서도 출토되어 우리나라의 고대문자생활을 엿볼 수 있는 실증적인 자료를 확보하게 되었다. 물론 중국이나 일본에 비하여 그 출토수량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적은 양이지만, 차후 점진적인 수량의 증대와 목간을 성격을 구체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자료들이 속속 출토되기를 바랄 뿐이다.


아직 함안 성산산성 출토 목간의 성격에 대한 연구결과가 분분하지만, 아직 출토될 개연성이 많은 함안 성산산성을 연차적으로 발굴조사를 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자료가 축적된다면 언젠가는 정확한 성격규명이 이루어지리라 기대하고 있다. 그리고 함안 성산산성에서는 한국 고대사회 문서행정의 실체를 엿볼 수 있는 나무로 만든 제첨축이 출토되었는데, 이것은 두루마리 문서를 말아 보관할 때,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한 일종의 책갈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많은 문서 가운데에서 특정지역의 문서를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목간의 머리부분에 특정지역명 등을 기재한 것이다.


2004년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에서는 목간연구의 자료 확보와 연구자들의 저변확대를 위해 국내에서 출토된 목간을 모두 정리하여 『한국의 고대목간』이라는 도록을 발간하였다. 책이 발간되자 국내외 학자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받았으나, 한정된 수량의 발간과 책자의 크기 등에서 활용하기에 다소 불편한 점이 지적되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책자요구가 있어 책의 판형과 편집을 변경한 개정판을 보급판 형식으로 다시 발간하기로 하고 작업에 착수하여, 곧 그 결실을 다시 세상에 내놓게 될 것이다.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박종익 연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