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未完)의 혁명가 허균(上) |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 전 |
입력시간 : 2010. 12.03. 16:26 |
초등학교 5학년 2학기 때 쯤으로 생각이 든다. 찬바람 부는 겨울, 담임선생(이삼동)님은 난로 가에서 화보차를 드시며 밤새 읽은 홍길동전의 내용을 어린 우리들에게 감칠 맛나게 들려주곤 했었다. 반 동무들은 그 시간을 애타게 기다리며 소설속의 주인공을 그려보는 재미에 푹 빠졌었던 기억이 난다.
조선의 천재작가 허균
국문학사에 길이 빛날 금자탑이며 기념비적인 불후의 명작 <홍길동전>을 남긴 작가 허균이 비참한 최후를 마친지도 39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인 <홍길동전>의 주인공 홍길동은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제도에 용감히 맞선 민중의 영웅이었다.
허균은 선조 2년(1569) 음력 11월 3일 강릉시 사천면 판교리 외가 애일당에서 초당 허엽과 강릉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양천, 자는 단보, 호는 교산인데 허균의 아호 교산은 자신이 태어난 애일당이 있던 산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허균의 부친 초당 허엽은 화담 서경덕의 제자로 명종, 선조 때에 대사헌, 승지, 부제학 등을 지낸 문인, 학자, 정치가, 외교가였다. 1575년(선조 8)동서로 당파가 갈라지자 서애 류성룡과 더불어 동인의 노릇을 했고 선조 10년 경상감사로 내려갔다가 병을 얻어 사직하고 3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허엽에게는 아들 셋, 딸 둘이 있었다. 우성전에게 출가한 맏딸과 맏아들 허성은 전실 소생이요, 둘째아들 허봉과 막내딸 허초희(허난설헌), 막내아들 허균은 후실의 소생이었다.
허균은 나이 5세 때부터 형들의 어깨 너머로 글을 익히고 9세 때에는 시를 지을 만큼 총명했다. 13세에 부친을 잃고 어머니와 작은 누나와 함께 서울에서 살면서 학문은 류성룡 시는 이달에게서 배웠다. 이달(李達)은 작은형의 친구로서 자는 익지 호는 손곡이라 했는데 당대의 천재 시인이었으나 모친이 천한 종 이었으므로 벼슬길에 나아갈 수 없는 불운한 처지였다.
명문가에서 태어난 천재로 그 자신이 현실에 적응, 순응하면서 시운만 잘 타면 순풍에 돛단 듯 출세가도를 달리기 어렵지 않았으련만 허균은 어찌하여 이단의 사상에 기울고 마침내 왕조의 반역자로 몰려 역사의 무덤에 깊숙이 묻히고 말았단 말인가.
1592년(선조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허균은 홀어머니를 모시고 부인과 어린 딸을 데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함경도 단천으로 갔는데 그 해 7월 부인이 아들을 낳다가 둘 다 죽고 말았다. 전황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허균은 강릉으로 돌아와 애일당을 수리하고 이듬해 봄까지 어머니를 모시고 지내면서 첫 저서인 <학산초담>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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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의 파란만장했던 벼슬살이
허균이 과거급제하여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아간 것은 1594년(선조27) 26세 때다. 그러나 재주가 뛰어나고 개성이 강하니 소인배들의 시기와 모략이 끊이지 않았다. 그 옛날 매월당 김시습과 송강 정철, 백호 임제가 그랬듯 허균은 현실과 타협하기 보다는 불화를 택했다. 3년 뒤 예문관 검열직에서 처음 파직을 당해 강릉으로 낙향했다가 그 다음 달 문과에 장원급제 해 몇 자리를 거쳐 곧 병조좌랑으로 승진했다.
1598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그는 2년 뒤 31세 때 황해도 도사로 나갔다가 반년 만에 쫓겨나고 만다. 다시 복직하여 1602년에는 벼슬살이 8년 만에 당상관인 사복시정에 올랐으나 이듬해 또 다시 파직당해 강릉으로 낙향했다. 허균은 포부는 컸으나 뜻대로 펼칠 수 없었고, 재주는 인정하나 사람됨을 알아주지 않는 관료사회의 편협함에 염증을 느꼈다. 자신이 세상의 비위를 맞추지 못한다고 여긴 그는 산과 계곡과 바닷가를 돌아다니며 재주는 있지만 처지가 불우한 벗들과 어울렸다.
그 시대에는 아비가 양반이라도 첩의 소생이면 벼슬길을 막는 서얼금고(庶孼禁錮)라는 제도가 있었다. 나라는 비좁고 인구는 적은데 아무리 경천위지의 재주가 있어도 첩의 자식은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고 형도 형이라 부르지 못했다. 뒷날 허균은 ‘유재론’을 통해 이렇게 주장했다.
“사람의 재주와 능력은 하늘이 준 것이므로, 귀한 자식이라고 많이 주는 것도, 천한자식이라고 적게 주는 것도 아니다.”
허균은 적자, 서자 차별대우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인도적, 실리적 차원에서 그 당시 사회의 병폐를 없애고자 한 개혁자였다. 조정 출사 이후 파직과 복직을 반복하던 허균은 1607년 공주목사로 다시 등용되었을 무렵부터 재주는 있으나 불우하게 지내던 이재영, 심우영, 윤재영 같은 서얼들을 추종자로 거느리고 서양갑을 비롯한 후원자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1608년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새 정권에 기반이 없었던 허균은 다시 벼슬자리에서 떨어졌다. 뿐만 아니라 1610년 11월에는 과거시험관으로 복직되었지만 조카와 제자를 부정 합격시켰다는 혐의로 이듬해 1월부터 11월까지 전라도 함열에서 귀향살이를 했다.
다른 감독관들도 아들이나 사위, 사돈까지 급제시켰지만 유독 정치적 기반이 약한 허균 혼자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고 42일간이나 의금부에 잡혀가 고초를 당하다가 결국 유배길에 올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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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판에서 차갑고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는 한겨울에 유배지에 다다랐지만 허균은 북풍한설 몰아치는 엄동설한보다도 벼슬자리에서 또 다시 떨어져 유형수 신세가 된 처량함보다도 좋아하는 책들을 가지고 올 수 있었음에 기뻐했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처세에 졸렬하고 재물을 유리하게 쓸 줄 몰라 반평생 동안 파란이 많았다. 그러나 몇 번 옥살이를 하고 몇 번씩 쫓겨 다녀도 책만 있으면 극락같이 여겼다. 하지만 속된 무리와 있을 때에는 좋은 집 맛 잇는 음식, 비단 이불이 있어도 목에 칼을 쓰고 몸이 하염지옥 속에 놓여 있는 것 같았다.”
기생 매창과의 인연
유배가 풀리자 그는 친구들을 부르고 변산의 절경이 마음을 끄는 부안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허균은 기생 매창(梅窓), 이계생, 동갑내기 해안스님, 서출의 천재시인 촌은 유희경 등과 어울려 내소사, 개암사, 채석강, 적벽강 같은 변산의 절경을 찾아다니며 술 마시고 시 지으며 세상 잡사를 잊고 풍류를 즐겼다.
불후의 걸작 홍길동전을 집필한 것도 바로 이 무렵으로 알려져 있다. 허균은 소설은 괴담이라고 천시했고 공맹(孔孟)의 유교사상의 가르침만 참된 도리라고 생각하던 시대에 소설을 즐겨 쓴 선구자였을 뿐 아니라, 언문이라고 천대 받던 한글로 소설을 쓴 민중작가였다.
허균이 부안의 명기 매창을 처음 만난 것은 1601년(선조34) 7월 호남지방의 세미운반을 책임진 전운판관이 되어 전라도에 내려갔을 때였다. 당시 허균은 33세, 매창은 당대의 풍류시인 유희경의 애인으로 29세였다. 육체적 관계 대신 정신적 친구로 교류를 주고받았던 매창이 37세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허균은 두 수의 추도시를 짓기도 했다. 부안에 가면 상소산 기슭 시립공원에 매창의 시비석이 서있다.
“이화우(梨花雨) 흩 날릴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秋風落葉)에도 저도 나를 생각는 가
천리(千里)의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하더라.”
허균이 아끼고 사랑하던 부안의 명기 매창 이계생의 묘는 부안읍 봉덕리에 있는데 이곳 사람들은 ‘매창뜸’이라고 아직까지 부르고 있다.
미완(未完)의 혁명가 허균(下) |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가 백성이다” |
입력시간 : 2010. 12.10. 11:44 |
민중의 영웅 홍길동
‘홍길동전’은 몇 가지 기록과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최초의 한글소설이다. 둘째, 조선조의 병폐의 하나였던 서얼문제를 소재로 삼은 최초의 사회소설이다. 셋째, 주인공이 의적이란 점에서 반골소설이다. 넷째, 홍길동이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오는 실존인물이라는 점에서 실명소설이다. 다섯째, 주인공을 전설적 서민의 영웅으로 만든 영웅소설이다. 여섯째, 홍길동이 도술을 부리는 도가소설이기도 하다.
소설 첫머리는 길동이 서자로 태어나게 된 사정을 그려 보인다. 홍 판서가 하루는 낮잠을 자다가 용꿈을 꾸고 귀한 자식을 낳을 태몽이라 여겨 내실에 들어가 부인과 ‘일’을 치르려 하지만 부인은 체통 없는 짓이라며 거절한다. 이에 화가 난 홍 판서가 방년 18세인 몸종 춘섬과 관계를 가져 마침내 길동을 낳으니 아이의 기골이 비범해서 영웅호걸의 기상이었다.
길동이 어느덧 여덟 살이 되었는데 그 총명함이 빼어나 하나를 들으면 백을 통달할 정도였다. 하지만 천한 첩의 자식이라 열 살이 넘도록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고 종들도 천대하는 것이 뼛속깊이 사무치는 한이 되었다.
결국 부모를 하직하고 집을 떠난 길동은 정처 없이 떠돌다가 도둑의 소굴로 찾아들어 두목이 된다. 수천 명 도둑의 우두머리가 된 그는 무리를 활빈당이라 하고, 온갖 지모와 도술과 둔갑술을 써서 합천 해인사와 함경도 감영을 터는 것을 시작으로 조선 팔도를 휩쓸며 탐관오리를 징치하고 의롭지 못한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등 의적활동을 벌인다.
그 후 홍길동은 조선을 떠나 남해 율도국(聿島國)으로 들어가 5만 군사로 그곳을 점령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렇게 이상국 율도국의 임금이 된 홍길동은 30년간 나라를 다스리다가 홀연히 병을 얻어 70세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 ‘홍길동전’의 줄거리이다. 최근 일부 학자의 연구 결과를 보면 율도국이 바로 오키나와라고 한다. 오키나와는 고려 때 몽골에 항쟁하던 삼별초(三別抄)의 망명지로도 알려졌고, 아직도 우리나라와 비슷한 언어와 풍습이 남아 있다.
전복을 꿈꿨던 혁명가 허균
세상과 타협하지 못한 이런저런 이유로 울분만 쌓여가던 허균은 마침내 썩은 세상을 자신의 힘으로 둘러엎고 새로운 이상국을 세우기로 작정하기에 이른다. 이 보다 앞서 허균은 명나라 사신을 접대할 때에 후궁소생으로 왕위에 오른 광해군이 오로지 자신의 왕권을 다지기 위해 중국사신에게 뇌물을 주는 것을 보고 위로는 임금으로부터 아래로는 조무래기 벼슬아치들 까지 죄다 썩을 대로 썩어빠진 세상에 극도로 환멸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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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재주는 빼어나지만 재물이 없거나 출신성분이 서자라는 이유로 높은 뜻을 펴지 못하는 인재들이 천대받고 배척당하는 되어먹지 못한 현실에 비분강개 하여 마지않았다. 울분과 불만에 찬 허균은 중국사신으로 가라는 왕명을 두 차례나 받았지만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 그러다 나주 목사로 발령을 받았지만 부임하기도 전에 가로채 가는 작자가 있었다. 가슴속에서는 끓어오르는 분노와 함께 썩어빠진 세상을 둘러엎어야 겠다는 혁명의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나기 시작했다.
허균은 <호민론>에서 이렇게 외친다.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가 백성이다. 정치가들은 백성을 물이나, 불 호랑이처럼 무서워해야 하는데도 제멋대로 확대하고 긁어가고 부려먹기만 했다.”
백성을 두려운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는 구심점이 있어야 했다. 홍길동전이야말로 민중의 힘으로 부조리한 사회제도를 개혁하고 이상국을 세우려는 허균의 의지가 집약된 걸작이 아닌가. 현세의 홍길동이자 활빈당(活貧黨) 행수 허균은 원민들의 구심점이 되기 위해 활빈도를 모으려다 귀양살이를 했고 귀양살이가 끝나자마자 보다 적극적으로 현실과 맞부딪쳐 타협이 아닌 대결을 하기로 작정했다.
허균의 호는 교산 외에 백월거사(白月居士)라 하기도 했고, ‘온 세상이 어지러워도 혼자 깨어 있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성옹(惺翁)이라고도 했으며 또 제갈공명 같은 비상한 천재라는 자부심에 와룡이라고 하기도 했다. 강릉 교산에서 교룡산의 정기를 타고 났다고 하여 자신을 용이라 자부한 것은 용은 곧 제왕의 상징이나 제왕의 경륜과 포부를 지녔다는 자부심 자존심이 아니고 무엇이랴.
끝내 현실과의 불화가 극복되지 않자 허균은 혁명의 의지를 실천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가 당시의 실권자인 대북(大北)의 영수 이이첨(李爾瞻)과 손잡고 광해군의 조정에 들어가 좌승지, 형조판서를 거쳐 정2품인 좌참찬에까지 오른 것은 오로지 광해군의 그늘에 들어가 이이첨을 방패삼아 자신의 세력을 키우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1617년(광해군 9) 허균의 역모를 고발하는 비밀 상소가 기준격(奇俊格)에 의해 세차례나 연거푸 올라갔다. 인목대비 폐비사건 대에 폐비론을 주장한 이이첨, 정인홍, 허균 등은 대북파였다. 이에 맞선 기준격은 이덕형, 이항복, 윤선도 등과 더불어 대북파의 반대파로서 함경도 길주로 유배당했던 옛 친구 기자헌(奇自憲)의 아들이었다.
평소에 제자나 조카처럼 따르던 기준격이 아비의 원수를 갚는다는 구실로 허균의 실각에 선봉장 노릇을 했던 것이다. 그 무렵 허균의 소실 선산 김씨에게서 난 딸이 세자의 후궁으로 내정되자 이이첨은 허균을 더 이상 동지가 아니라 정적으로 보게 되었다. 세력이 더 커지기 전에 아예 뿌리부터 싹을 뽑아 버려야한다고 작정한 이이첨은 인목대비 폐출의 죄를 허균에게로 돌려버려 유생들의 비난을 허균이 한 몸에 받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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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아도 서양갑 등 칠서지옥(七庶之獄)사건의 배후 인물로 언제 정체가 드러날지 몰라 전전긍긍하던 허균은 이제 정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자 마지막 몸부림을 쳤다. 온갖 풍파를 다 겪으며 쉰 고개길을 넘어서자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되어버렸지만 기개는 아직도 살아 있어서 썩은 세상 둘러엎고 새 세상을 만들고자 처절한 몸부림을 쳤던 것이다.
미완의 혁명, 그러나…
<광해군 일기>의 기록을 보면 허균이 그동안 몰래 길러온 장사들과 승병들을 동원하여 도성을 포위 점령한 뒤 대궐로 쳐들어가려고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런 엄청난 거사 계획은 그러나 그의 추종자들인 현응민, 하인준, 김우성과 첩 추섬 등이 줄줄이 잡혀 들어가 자백함으로 해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허균은 자신이 당할 운명을 저어했음인지, 잡혀 들어가기 전날 밤, 7년 전 유배지에서 스스로 엮은 자신의 문집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초본을 외손자의 집으로 보냈다. 그러나 그가 역신으로 죽어 그의 글까지도 죽어야 했다. 남은 글들도 감추어졌다.
허균이 의금부에 하옥된 것은 1618년 8월17일이었으나 허균을 잡아넣은 이이첨의 압력을 받은 광해군이 허균일당을 빨리 처형토록 명령함에 따라 그 달 26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능지처참을 당한 채 한 많고 파란 많은 50년 이승살이의 막을 내리고 말았다.
하지만 허균은 영원히 죽은 것이 아니었다. 왕조시대가 끝나고 백성이 주인이 되는 세상이 되자 역사의 무덤에서 깊이 잠들어 있던 혁명아 허균은 민중의 영웅 홍길동과 더불어 민중문학의 선구자로 부활을 한 것이다.
<호민론>에서 “천하에 두려워해야 할 바는 오직 백성일 뿐이다”라며 “견훤, 궁예같은 사람이 나와서 몽둥이를 휘두른다면, 시름하고 원망하던 백성들이 가서 따르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보장하겠는가?”라고 썼던 허균. 그는 진정 만인이 꿈꿨던 이상향 ‘율도국’을 건설하려 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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