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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강 왕국` 베일 벗는다 (전남일보 2011. 07.19. 00:00)

'영산강 왕국' 베일 벗는다
"백제와 별개 세력"
제4 문화권 급부상
입력시간 : 2011. 07.19. 00:00


영산강 유역이 고고학적 발굴 성과와 각종 문화인프라 구축으로 백제, 신라, 가야와 대등한 제4의 고대문화권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가운데 18일 남도의 젖줄인 영산강에 여명이 밝아오고 있다. 함평군 학교면 사포나루 인근 야산에서 부분 촬영 후 합성했다.

나주, 영암 등 영산강 유역이 고고학적 성과와 각종 문화인프라 구축으로 백제, 신라, 가야와 대등한 '제4 고대문화권'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영산강 고대문화권은 그동안 '4세기 말(369년) 백제 근초고왕 복속설'이 역사학계의 통설로 굳어지면서 백제문화권에 가려졌지만 나주 복암리 3호분, 다시면 영동리 고분군 발굴로 백제와 다른 독특한 문화를 구축한 정치체제가 존속했음이 확인되고 있다.

문화재청과 국립중앙박물관은 영산강 고대문화의 가치에 주목, 경주, 부여, 창원에 이어 나주지역에 전국에서 4번째로 지난 2005년 '국립나주 문화재연구소'를 개소한데 이어 내년 '국립나주박물관'을 개관할 예정이다. 국립나주박물관은 반남면 신촌리 일대 9만여 ㎡ 부지에 지하 2층, 지상 1층, 연건평 1만1000여㎡ 규모로 영산강 유역의 역사와 문화를 체계적으로 조사, 연구, 보존, 관리하게 된다. 또 41기의 다양한 묘제가 발굴된 복암리 3호분에도 전시관 공사가 진행중이다.

전남대 임영진 교수는 "나주에 국립박물관과 문화재연구소, 고분 전시관이 잇따라 들어서는 것은 영산강 유역이 경주의 신라문화권, 공주ㆍ부여의 백제문화권, 김해의 가야문화권에 이은 제4의 고대문화권으로 평가받는 것"이라고 밝혔다.

영산강 유역 지자체의 발걸음도 빨라지고 있다. 나주시는 영산강 일대 대형고분과 국립나주박물관, 영산포 홍어거리 등을 묶어 전남의 대표적인 문화관광지로 개발할 계획이다. 영암, 무안 등 영산강 8개 자치단체도 기금을 출연해 '영산강 스토리텔링'사업을 본격화하고 있다. 국토해양부의 영산강 사업이 마무리되면 자전거 도로, 수변공원 등 다양한 친수공간이 들어서 외지인의 접근성도 더 높아질 전망이다.

임성훈 나주시장은 "영산강 고대문화를 문화관광자원으로 만들기 위해 전담조직을 구축할 방침이며, 고려 팔관회와 같은 국제적인 페스티벌을 나주에서 개최할 것"이라고 말했다.

길이 44m 높이 8.4m… 거대한 고분 주인공은

이제는 마한이다 (1) 나주 반남고분에 서서


근초고왕369년 침미다례 복속 '통설'
300년간 백제로 규정… 실체 가려져
옹관고분ㆍ전방후원분 등 묘제 독특

입력시간 : 2011. 07.19. 00:00



국가사적인 나주시 반남면 대안리, 신촌리, 덕산리 일대에 우뚝 솟은 거대한 고분들은 영산강 유역이 백제와 다른 독특한 문화를 구축한 정치체가 존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반남면 일대 고분군으로 길이가 40여m로 백제 무녕왕릉의 두배에 이른다.

영산포에서 국도 13호선을 타고 영암으로 향하다 오른편으로 꺾어 나주 반남면에 다다랐다. 국가 사적 76, 77, 78호 반남고분군이다.

영산강변 너른 논 한복판에 우뚝 솟은 대안리 9호분을 바라본다. 백제 무녕왕릉 보다 두배나 크다. 자그마치 길이가 44m에 높이가 8.4m다. 작은 산이다. 인근 덕산리 3ㆍ5호분은 45m에 높이가 8~9m에 달한다. 이런 초대형 고분들이 반남면 전체에 39기가 산재해 있다.

이 거대한 고분의 피장자, 주인공은 과연 누구일까. 역사교과서는 백제라 가르친다. 일부 학자들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27년' 기록에 기대어 아예 서기 9년에 영산강 유역이 백제 땅이 됐다고 하지만, 신빙성이 떨어진다. 역사학계는 '일본서기 신공기 49년' 기술에 근거해 백제 근초고왕 때(서기 369년) 전라도가 완전히 백제에 넘어갔다고 정리한다. 일본서기는 '왜가 군대를 일으켜 남만(南蠻)의 침미다례를 없애 백제에 주었고, 근초고왕 부자가 군사를 이끌고 와서 이를 맞이 했다'고 적혀 있다. 두계 이병도 선생은 왜가 군대를 일으켰다는 기록은 의문이지만, 근초고왕 부자가 전남을 원정해 침미다례(강진, 장흥 , 해남 등)를 소탕했다는 것은 사실로 해석했다. 일본서기의 자의적 풀이에 기초한 역사해석이 60년 넘도록 영산강 고대사의 통설로 자리잡고 있다. 이는 영산강 유역이 철기시대부터 아예 백제 땅이었거나, 아니면 4세기 후반(근초고왕)부터 백제부흥운동이 종말을 고한 663년까지 최소 300년간 백제의 지배(영토)를 받았다는 의미이다.

최근 들어 영산강 유역에서 고고학적 성과물이 나오면서 서기 369년 백제의 영산강 지배설은 흔들리고 있다.

전남대 임영진 교수(인류학과)는 "영산강 유역의 고대사는 한국고대사의 공지(空地)나 다름없다"면서 "다만, 최근 10여년 사이에 영산강유역권의 발굴 조사가 활발해지면서 고대 영산강 유역의 토착문화는 분명하게 백제와 구분되는 독자적인 문화로 파악됐다"고 확언했다.

고고학계에서는 역사학계와 달리 나주 반남고분군(36기)과 복암리 고분군(4기), 영암, 함평 등지의 전방후원분(14기ㆍ일명 장고분)의 축조시기와 출토 유물에 근거해 '영산강 고대문화의 탈(脫) 백제'를 선언하고 있다.

반남 신촌리 9호분에서 출토된 금동관, 금동신발과 환두대도는 백제 관료의 물건이 될 수 없는 독자적인 정치세력의 수장급 유물이라는것. 또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 50년 동안 오직 영산강 유역에서만 등장한 일본식(왜) 묘제인 전방후원분의 존재, 옹관묘-초기 횡혈식석실분-백제 석실분으로 400년간 이어지는 복암리 3호분을 봤을 때 영산강 유역은 백제문화와 다른 고대문화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임 교수는 "백제 석실분이 본격적으로 출조된 6세기 후반 이전까지 영산강 유역은 대형옹관묘, 전방후원분 같은 독특한 묘제를 사용한 정치세력이 존재했으며, 이는 백제와 다른 세력이다"고 말했다.

목포대 최성락 교수(고고학과)는 "전남지역은 4세기 후반에 일차적으로 백제의 영역으로 편입됐지만, 영산강 유역의 옹관고분세력은 거의 독자적인 문화를 유지했다"고 밝혔다.(고분을 통해 본 영산유역 고대사회 논문 중에서)

그렇다면 영산강 유역에서 산 만한 무덤을 축조하고, 금동관, 금동신발, 환두대두로 한껏 위세를 떨쳤던 주인공은 과연 누구인가. 물음표는 이어진다. 일본식 묘제인 전방후원분이 왜 영산강 유역에만 나타나는가. 피장자는 왜인인가, 아니면 토착세력일까. 피장자가 왜인이라면 영산강 유역이 고대 일본의 식민지(임나일본부 설)였다는 말인가. 백제는 영산강 유역을 언제 제대로 지배했을까, 영산강 토착세력은 백제 멸망 후 왜 부흥운동에 소극적이었을까 등등.

백제사 전공인 문안식 박사(전남예술문화재단 문화사업팀장)는 "광주 월계동 등 이 지역에서 14기가 확인된 전방후원분은 왜인의 무덤이라는 일본학자의 주장에서 부터 백제 용병이었던 왜군의 무덤, 영산강 토착세력 가운데 일본에 망명했다가 다시 귀국한 세력의 묘지라는 주장까지 다양하다"며 "영산강 고대사는 미스터리의 연속이지만 반드시 실체를 짚고 가야할 역사이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나주시 반남면 일대 무덤에서만 국보 295호 금동관을 비롯해 모두 1만2573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영산강 유역에는 특히 한 고분 내에 400년 동안 41기의 다른 매장시설이 발견돼 세계 최초의 벌집형, 아파트형 고분이라는 신조어를 낳은 복암리 3호분, 3세기 옹관묘부터 7세기 석실묘까지 30여기의 매장시설이 드러난 또하나의 벌집형 고분인 나주 다시면 영동리 고분 등 세계적인 유적이 즐비하다.

다시 거대한 반남고분을 바라본다. 저 고분에 묻힌 주인공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와 같은 고대국가의 왕이었을까.

신촌리 9호고분서 일제 금동관 발굴

자미산 주변 구릉지 옹관묘 35기 산재


■ 반남고분군은 어떤 곳

입력시간 : 2011. 07.19. 00:00



신촌리 9호분 출토 금동관(왼쪽)과 신촌리 9호분 원통형 토기.

국가사적지인 반남고분군은 나주시 반남면 자미산 주위 3개 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한 거대고분군이다.

사적 76호 대안리 고분군은 자미산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낮은 구릉지역으로 12기가 존재한다. 제9호분은 최대 규모로 9기의 옹관과 함께 금반지, 큰칼, 구리팔찌, 유리구슬 , 토기 등의 유물이 나왔다.

사적 77호 신촌리 고분군은 자미산에서 동북쪽으로 내려가는 낮은 구릉인데, 9기가 위치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 학자에 의해 9호분 등이 발굴됐는데, 여기서 금동관(국보 295호ㆍ국립광주박물관 소장), 금동신발, 금반지,봉황문 환두대도(큰칼), 청동 팔찌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됐다. 9호분을 1996년에 재발굴한 결과 고분 정상부에서 28개의 원통형 토기가 나왔다. 이 토기는 일본 고분에서 출토된 '하니와'라는 유물과 같은 성격으로 한ㆍ일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했다.

사적 78호 덕산리 고분군은 신촌리 고분군과 이어지는 낮은 곳에 14기가 존재한다.

거대한 돌무덤 축조세력… 영산강 문화에 영향

이제는 마한이다 (1) 영산강 유역의 고인돌


화순 효산ㆍ대신리 4700여기 집중 분포
220톤 거대한 돌 이동 정치적 권력 증명
국보 지정 동검 거푸집 영암서 발굴

입력시간 : 2011. 07.19. 00:00



청동기 시대의 대표유적인 고인돌이 화순 도곡면 효산리와 춘향면 대신리를 잇는 보검재 계곡에 거대한 벨트로 집중 분포하고 있다. 화순 일대의 고인돌은 우리나라 최대 밀집도를 보이면서 청동기시대 중심지가 영산강 유역임을 증명하고 있다.

거뭇거뭇한 것이 꽤 묵직해 보이는 바위다. 밑을 들여다보니 몇개의 큰 돌들이 바위를 받치고 있다. 고개를 조금 더 돌려 거대 바위의 아래를 살펴봤다. 반듯한 모양을 만들려고 했던 듯 쪼개어지고 다듬어진 흔적이 있는 것이, 누군가의 손길이 닿았음을 말해준다.

3000년 전 선사시대의 역사가 담겨있는 이 바위를 사람들은 '고인돌'이라고 부른다. 화순에는 산기슭 뿐 아니라 사람들이 살고 있는 동네 밭 한 가운데서도 고인돌을 쉽게 볼 수 있다.

전국에서 발견된 4만여기의 고인돌 중 2만2000여기가 영산강유역에 집중돼 있고 상당수가 화순에서 발견되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고인돌은 내륙보다는 해안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이는 해양문화와 천문학 등과 관련이 있다.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다. 국내 고인돌은 서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분포돼 있다.

목포대 이영문(58) 교수는 "유럽, 아시아에서는 대서양과 지중해 연안, 흑해, 인도양 인근에 거석문화 벨트가 형성돼 있다"며 "이는 태양숭배에서 비롯된 천문학 등 문명의 발달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설명했다.

화순에는 도곡면 효산리와 춘향면 대신리를 잇는 보검재 계곡을 따라 거대한 고인돌벨트가 형성돼 있다.

이 교수는 "효산리와 대신리에만 596기의 고인돌이 있다"며 "고인돌로 추정되는 석재들까지 고려하면 한정된 이 지역에만 4700여기가 분포한다"고 밝혔다.

효산리 보검재 산기슭에서 대신리 지동마을에 이르기까지 약 5㎞로 형성된 화순 고인돌 유적지는 지난 2000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곳이기도 하다.

버스 한대가 지날 수 있는 너비를 사이에 두고 보검재 계곡에는 효산리 7개군, 대신리 6개군 등 초13개군의 고인돌 집단이 있었다. 대개 무덤으로 사용된 10여기 가량의 작은 고인돌 사이에 제단 역할을 하는 한개의 거대한 고인돌이 하나의 군을 이루고 있다. 또 한개의 군에서 관찰할 수 있는 고인돌의 종류도 다양하다.

전남 문화재관광해설사 양해숙(49ㆍ여)씨는 "고인돌은 북쪽지역에 분포돼 있는 탁자식과 호남ㆍ영남지역에서 발견되는 기반식, 요동반도ㆍ일본의 특징인 개석식, 제주ㆍ절강성 지역에서 나타나는 위석식이 있다"며 "신기하게도 화순 고인돌 유적지에서는 탁자식과 기반식, 개석식ㆍ위석식의 고인돌을 모두 관찰 할 수 있다"고 밝혔다.

눈짐작으로 계산해 봐도 작은 고인돌도 무게는 수천㎏가량은 족히 나갈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제단으로 쓰였던 고인돌은 수십톤에서 280톤까지 나간단다.

인근에 마당바위ㆍ관청바위ㆍ각시바위 등 고인돌 원료를 제공했던 채석장이 5곳이 있지만 어마어마한 무게의 돌을 청동기 인들은 산 아래까지 어떻게 운반할 수 있었을까.

고인돌이 '권력'과 연결돼 있음을 예상할 수 있는 부분이다. 수천㎏의 돌을 운반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수의 인부들이 필요 했을 것이다. 따라서 고인돌의 주인은 많은 수의 인력을 동원할 수 있는 힘이 있었을 것이고, 그 인부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할 수 있을 정도의 재산을 가진 자 였을 것이다.

이 교수는 "고인돌을 축조하기 위해서는 무덤방을 구축한 사람, 덮개돌을 운반하기 위해 길을 내는 사람, 이동시 지휘하는 사람, 음식물을 제공하는 사람 등 많은 인원이 동원돼야 한다"며 "따라서 사회ㆍ경제적으로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고인돌을 축조할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한개의 고인돌에 투입되는 시간과 비용에도 불구하고 화순지역에 분포돼 있는 4700여기의 고인돌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전문가들은 고인돌의 밀집은 이 지역의 사회ㆍ경제ㆍ정신적으로 번성된 곳이었음을 증명해 주는 예라고 주장한다.

영산강이 실어다 주는 양분은 비옥한 토양을 만들어 풍년과 연결됐고 인근의 하천과 산에서는 어로와 채집이 가능했던 풍요의 땅이 바로 화순이었다는 것이다. 경제적인 풍요로움은 사유재산의 축적을 가져왔다. 그리고 수장이 등장했다.

영산강 유역 청동기 문화가 번성했음은 영암에서 발굴된 동검의 거푸집(용범ㆍ국보 231호ㆍ숭실대박물관 소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영암에서 선사주거지와 함께 청동 검을 제조한 현장이 확인됨으로써 이 지역 지배자의 세력규모가 상당했음을 유추케 한다.

화순 등 영산강 지역의 고인돌의 집적은 번성했던 청동기(고인돌) 문화가 이 지역의 철기시대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 교수는 "고인돌 축조과정에서 형성된 공동체 정신은 지배층의 출현과 함께 사회통합의 근간이 됐다"며 "협동정신, 공동체 정신을 바탕으로 형성된 국가가 바로 철기시대의 마한소국"이라고 설명했다.

1톤돌 1.6㎞ 옮기는데 성인 20여 명 필요
흙 경사지게 쌓아 덮개 돌 끌어올려
■ 고인돌 축조 동원 인력은
입력시간 : 2011. 07.19. 00:00


화순 대곡리 출토 청동팔령구.
고인돌은 집단의 수장이나 권력을 가진 혈연집단의 무덤, 제사를 지내는 제단 그리고 지역과 지역 사이를 구분하는 경계석으로 사용됐다. 고인돌 축조 인력은 덮개돌의 이동 거리나 무게에 따라 차이가 있다.

연구 결과, 1톤의 돌을 1.6㎞ 옮기는데 16~20명이 필요하며 32톤의 큰 돌을 둥근 통나무와 밧줄로 옮기는데 200명이 필요한 것으로 조사됐다. 우리나라에서의 실험은 진도에서 이뤄졌는데 덮개돌과 이동하는 길이 준비된 상태에서 6.8톤의 덮개돌을 60명이 끌 수 있고, 통나무를 옮겨 깔거나 운반을 지휘하는 사람을 포함하면 73명이 동원됐다.

고창에서의 실험은 9.8톤을 85명이 동원돼 4시간 동안 70m를 끌었다.

덮개돌을 올리는 방법은 지상이나 지하의 무덤방 또는 받침돌에 적당히 흙을 경사지게 돋운다. 그 위로 통나무를 이용해 덮개돌을 끌어올린 후 흙을 제거한 것으로 추정된다. 흙을 경사지게 돋우고 끌어올린 흔적은 덮개돌과 받침돌 사이 또는 뚜껑돌 위에 남아있는 압착된 흙으로 증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