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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이 2층 아닌 3층 구조였다고? (조선일보 2009.12.26)

거북선이 2층 아닌 3층 구조였다고?

2009.12.26 02:38 / 수정 : 2009.12.26 14:23

이순신(李舜臣) 장군 관련 시설을 만들어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이순신 프로젝트'를 추진 중인 경남도가 최초로 '3층 구조 거북선' 3척과 판옥선 1척을 2011년까지 복원하기로 했다.

본지 12월 11일자 보도

우리가 아는 거북선은 2층 구조였다. 전국에 모형으로 만들어졌거나 복원된 거북선들이 대개 그랬다. 그런데 거북선이 3층이었다고?

거북선 '2층 구조설'은 1933년 연희전문학교 교수 호러스 언더우드가 처음으로 제기했다.

재미 기업인 윤원영씨가 2004년에 공개한 고서화. 가운데 거북선이 선실(1층)과 노 젓는 곳(2층), 전투원 활동 공간(3층 창 열린 곳)으로 이뤄진 3층 구조였음을 보여준다. / 조선일보 DB
1층에서 서양식 노를 젓고 2층에서 전투원들이 활동했다는 것이다. 이는 1976년 조선공학자인 김재근(金在瑾) 서울대 교수에 의해 수정·발전됐다. 거북선에 사용된 노는 위에서 젓는 한국식이었다는 것이다.

또 거북선은 1층에 선실, 2층에는 노를 젓는 격군(格軍)과 전투원이 함께 배치된 구조였다는 분석이었다. 이게 정설이었지만 비슷한 시기 물리학자인 남천우 서울대 교수가 3층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2층에서 노젓기가 이뤄지고 3층에서 병사들이 전투를 하는 구조였다"는 것이다. '거북선 내부 구조 논쟁'의 시작이다. 3층설을 좀 더 구체화한 논문은 2004년에 나왔다. 장학근(張學根) 현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장이다.

그가 쓴 논문은 '전장 환경과 거북선 선형 변화'였다. 장 소장은 "이순신 장군이 2층 구조의 거북선으로 출전했다면 순간의 기동력이 승패를 결정짓는 해전에서 절대 승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존 학설대로 2층이었다면 노 젓고 활 쏘며 포를 쏘는 일이 2층에서만 이뤄진다. 한 번 포를 쏘려면 노를 뽑아낸 뒤 창을 닫고 총통을 방패 쪽으로 옮긴 뒤 거리를 조준하고 고정하고 나서야 심지에 불을 붙여 탄환을 발사한다.

이러면 사격의 공백기간이 10분 이상 생기는데, 그 시간이면 적선은 이미 거북선에 접근해 조총이나 활로 공격한 뒤 도끼로 선체를 부수고 배 안으로 돌입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은 적진을 종횡으로 다니며 전열을 무너뜨리는 '돌격선'이었다. 그렇다면 반드시 거북 등 바로 아래에 3층이 따로 있어야 하고 포를 가진 전투원이 그곳에 배치돼 있어야 한다고 장 소장은 주장했다.

2004년 8월
미국에서 공개된 고서화가 '3층설'을 거들었다. 그림 속 거북선 4척 중에서 가운데 거북선에선 노 젓는 공간 위에 열린 창문이 있고 그 안에 작업 중인 전투원들이 보인다. 그림의 제작 연대에 대해선 아직 논란이 있다.

'3층설'의 약점은 1795년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거북선 그림에서 2층에 보이는 대포 구멍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데 있었다. 장학근 소장은 Why?와의 통화에서 "(그것을 해명할 수 있는) 새 논문을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그 거북선 그림은 임진왜란 당시의 것이 아니라 200년이 흐른 정조 때의 거북선이라는 것이다. 그동안 거북선은 덩치가 커져 사람이 많이 탈 수 있었으나 속도가 느려져 돌격선으로서의 기능은 많이 사라졌다.

반면 무기 기술이 발달해 옛 총통이 고성능 신식 화포인 불랑기포(佛狼機砲)로 상당수 교체됐고 조총 사수가 직접 창문으로 배치됐다. 이로써 공간적·시간적 여유가 생겨 2층에서도 사격할 수 있게 구조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경남도의 거북선 복원을 위한 역사고증위원으로는 장학근 소장과 나종우
원광대 교수, 서인한 국방부 군사편찬위원회 박사, 이민웅 해군사관학교 교수, 정진술 전 해군사관학교 박물관 기획실장 등 전사(戰史) 분야의 학자 다수가 참여한 점이 주목된다.

이 학자들 대부분이 '3층설'에 어느 정도 동의했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역시 역사고증위원으로 참여했으며 최근 저서 '화염조선'을 낸 박재광 전쟁박물관 교육팀장은 "이번 고증을 통해 '3층설'은 상당히 힘을 얻었고 정설에 좀 더 가까워졌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직 '2층설'을 주장하는 목소리 역시 만만치 않다. 이원식 원인고대선박연구소장은 "임진왜란 당시 제작된 귀선(거북선)은 2층 구조였지만 18세기에 이르러 3층으로 변모했다"고 말했다.

이순신 장군의 장계에 '등판에 창을 꽂았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등판 아래의 좁은 공간에 독립된 3층이 있다면 창을 빽빽이 꽂아놓은 자리에서 어떻게 대포를 쏠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이 밖에 3층이 독립된 것이 아니라 딛고 설 발판이 있는 정도였다는 '2.5층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