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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계승에도 급(級)이 있다 (조선닷컴 2010.01.23 23:34)

파계승에도 급(級)이 있다

입력 : 2010.01.23 03:24 / 수정 : 2010.01.23 23:34

40대 초반의 승려가 서라벌을 떠돌며 이상한 노래를 불렀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허락하려나? 나는 하늘 받칠 기둥을 다듬고자 하네(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 사람들은 도무지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지 못했다.

이 일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재위 654~661)에게까지 보고가 들어갔다. 왕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도대체 그 노래는 무슨 뜻이었을까? '자루 없는 도끼'는 여성의 성기를, '자루'는 남성의 성기를 상징한다.

자신이 여인과 결합해 낳을 훌륭한 인물을 '하늘 받칠 기둥'으로 표현한 것이다. 분석심리학적인 시각으로는 무한한 자아 팽창의 표현이라고도 한다. 이 승려의 본명은 설서당(薛誓幢), 바로 원효(元曉·617~686) 대사였다.

그는 압량(押梁·경북 경산)의 6두품 가문에서 태어났다. 날로 더해가는 난세의 한복판에서 그는 출가를 결심했다. 33세이던 서기 650년(진덕여왕 4), 그는 여덟 살 아래 의상(義湘)과 당나라 유학을 떠나 요동에까지 이르렀다.

대단히 좋지 않은 때였다. 당태종의 대군이 고구려를 침략했다가 이곳 안시성에서 격퇴당했던 것이 불과 5년 전의 일이었다. 원효와 의상은 이 살얼음판 같은 전선을 끝내 통과하지 못하고 고구려 변방 수비대에게 체포됐다.

"너희는 중을 가장한 정탐자가 아니냐?" 백제의 개로왕을 바둑으로 농락했던 고구려 승려 도림(道琳)처럼, 승려들이 첩보전에서 활약한 일은 종종 있었다. 수십 일 만에 풀려난 이들은 10년 뒤 해로를 통해 다시 당에 들어가려 했다.

가는 길에 폭우가 쏟아졌다. 원효는 토굴 속에서 잠을 자다가 목이 말라 샘물을 맛있게 마셨는데 날이 밝자 그곳은 무덤이었고 샘물은 해골바가지 속의 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원효는 "마음 밖에 법이 없으니 어찌 따로 구하랴(心外無法胡用別求)"라며 탄식했다. '진리는 밖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깨달음이었다. 그는 혼자 서라벌로 돌아왔다.

끝내 당나라로 떠난 의상으로서는 상대적으로 좀 덜 돋보이는 듯한 에피소드다. 그러나 의상을 주인공으로 하는 설화에서는 두 사람의 위치가 바뀐다. 신라로 돌아온 의상은 동해 관음굴(강원도 양양 낙산사)에서 14일 동안의 예배 끝에 관음보살을 친견할 수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원효는 자기도 관음보살을 보기 위해 낙산사로 향했다.

가는 길에 흰 옷을 입은 여인이 벼를 베는 것을 보고 희롱 삼아 "그 벼 좀 주구려"라고 했으나 거절당했다. 또 길을 가다가 다리 밑에 이르니 또 다른 여인이 월수백(月水帛·생리대)을 빨고 있었다.

원효가 물 좀 달라고 했더니 여인은 그 물을 떠 줬다. 원효는 그걸 쏟아버리고 깨끗한 냇물을 떠 마셨다. 그때 소나무 위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그만두쇼!"라고 말하고는 날아가 버렸다.

소나무 아래 벗은 신발 한 짝이 있었는데 낙산사에 도착하니 관음상 아래 나머지 한 짝이 있었다. 두 번씩이나 나타난 관음보살을 끝내 몰라봤다는 것인데 오히려 여기서 '변신한 관음보살과도 농담을 주고받은 원효의 활달한 성격'을 엿볼 수 있다는 해석도 있다.

노래의 뜻을 알아차린 태종무열왕은 청상과부인 딸 요석공주(瑤石公主)를 그에게 주기로 마음먹었다. 왕명을 받은 관리가 원효를 찾아다닐 때 원효는 문천교(蚊川橋)를 지나다가 일부러 다리 밑으로 풍덩 떨어졌다.

"아이고, 원효 대사님 아니세요?" "그렇소만…." 관리는 원효를 건져낸 뒤 공주가 사는 요석궁으로 인도해 옷을 말리게 했다. 얼마 뒤 공주에게는 태기가 생겼고, 훗날 대학자가 되는 설총(薛聰)을 낳았다.

요석궁에서 있었던 며칠 동안의 봄꿈은 우발적인 파계가 아니라 '다시 속세로 돌아오려는 강렬한 몸짓'(김상현 동국대 교수)이었다. 요석궁을 나온 그는 승복을 벗고 거사(居士) 행세를 했다.

미친 듯 난폭하고 예의에 어긋난 행동을 하기도 하고, 주막이나 기생집에도 드나들었다. 사당에서 가야금 연주를 하는가 하면 여염집에서 유숙하거나 산수에서 좌선하기도 했다.

그는 모든 형식을 벗어던진 채 춤추고 노래하며 사람들을 교화하는 '거리의 스승'이 됐다. 먼지 끼고 바람 부는 세상 한복판에서 불성(佛性)을 실현하려 했던 것이다. 원효는 '금강삼매경론'을 비롯한 240권의 불교 서적을 저술하며
한국 불교를 성장시켰다. 공부나 깨달음 없이 기행(奇行)만 좇는 부류와는 크게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