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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 판결 꺼렸던 정조의 관대함 (연합뉴스 2010.01.12)

사형 판결 꺼렸던 정조의 관대함

’조선후기 국가권력과 범죄 통제’ 출간

조선시대에 사형 판결은 오직 국왕만이 내릴 수 있었다. 사형에 해당하는 죄인의 재판은 최종적으로 국왕에게 보고해야 했으며 국왕이 재가해야 형이 확정됐다.

사형 범죄로는 어떤 것이 있었을까? 역모와 반란, 살인은 물론이고 지금의 법률로는 사형에까지는 이르지 않는 폭행, 절도 등도 범죄의 대상, 범죄인과 피해자와의 관계에 따라 극형에 처할 수 있었다.

강도범은 매우 무겁게 처벌했는데 강도를 한 자는 주범, 종범 관계없이 참형으로 다스렸다. 자신의 조부모와 부모와 같은 직계 존속을 구타한 경우나 노비가 가장(家長)을 구타해 상처를 입힌 경우에도 참형에 처했다.

’조선후기 국가권력과 범죄 통제’(태학사 펴냄)는 사형에 해당할 만한 중한 범죄에 대한 국왕 정조의 심리 과정을 정리한 ’심리록’에 수록된 범죄를 분석한 책이다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보완한 이 책에서 조선후기 사회적 갈등의 양상과 국가의 사회적 통제 방식을 살폈다.

심리를 거쳐 정조가 내린 최종 형량을 분석한 결과 사형은 3.2%에 불과한 것으로 집계됐다. 감형(44%)과 석방(30.8%)을 합친 비율은 전체 74.8%에 달했으며 사형과 옥중에서 사망하는 물고(物故)를 합해도 전체의 12.1%에 그쳤다.

저자는 이 같은 관용적 조처는 사형 범죄인의 90% 이상을 사형에 처한 조선 전기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정조는 석방과 정배(유배) 등 관대한 형을 통해 사형 죄수들을 체제 내로 흡수하는 관용의 정치를 실천했다”면서 “이는 종래의 위협적인 처벌 방식에서 벗어나 극형을 면해주는 관용을 통해 권위체계에 대한 경외심과 복종을 효과적으로 도출해 냄과 동시에 변동기의 사회적 갈등을 완화하기 위해 새롭게 시도한 처벌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저자는 정조가 즉위 직후 ’흠휼전칙’을 반포해 곤장 등 형구(刑具)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에 착수했다고 설명한다. 정조는 고문에 사용하는 형구의 규격을 명시해 규정된 크기 이상으로 만들어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고문을 완화했다.

저자는 또 당시 서울 인구는 전체의 2.6%에 불과했지만, 범죄 건수는 전체 범죄의 14.5%나 됐다면서 그만큼 서울의 사회적 갈등이 다른 지역에 비해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됐다고 말한다.

범죄인의 신분별 형량 차이는 거의 없었으며 관권 침해 범죄와 사회풍속 범죄는 인명 범죄나 경제 범죄에 비해 엄하게 처리됐다고 저자는 덧붙였다.

정조가 1975년 대리청정 이후 1800년 사망할 때까지 24년 6개월 동안 심리한 사건은 모두 1천112건으로 정조는 매달 3.8건의 사건에 대해 8.9회의 판결을 했다.

저자는 “정조의 심리는 관리들의 보고를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조사한 내용을 원점에서 철저하게 점검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기 때문에 정신적 수고를 감내해야 하는 힘든 과정이었다”면서 “한번의 재판으로 범죄인을 확정하지 않았으며 의심스러운 사건은 재수사를 지시하는 등 필요한 경우 심리를 반복해서 진행했다”고 말했다.

348쪽. 1만8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