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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바로알기

“50년 전엔 한국이 이렇게 될 줄 몰랐다” (중앙일보 2010.02.01)

“50년 전엔 한국이 이렇게 될 줄 몰랐다”

지난달 29일 파리의 한 모임에서 김제옥(78·여)씨를 만났다.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 산 한국인이다. 고려대 법대 52학번인 그는 1957년 프랑스 정부 장학생으로 파리에 유학 왔다가 아예 정착했다. 반 세기 넘는 세월을 프랑스에서 보낸 것이다.

김씨는 모임에서 교환학생으로 와 있는 한국의 대학 3학년 여학생의 활기찬 모습을 지켜본 후 자신의 유학 시절을 얘기했다. “외교관은 대사(김용식 전 외무장관), 1등 서기관, 3등 서기관 등 모두 세 명이었는데, 나라가 가난해서 두 서기관은 가족을 데리고 올 수 없었습니다. 대사가 대여섯뿐인 유학생을 불러 식사 대접을 하면 부인이 내놓을 수 있는 한국음식은 밀가루 부침개 정도였습니다. 학교에서는 내가 일본인인 줄 알고 접근해 오던 학생들이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고서는 풍토병이라도 옮을까 싶어 슬금슬금 피했습니다.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20달러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31일에는 파리 시내에서 사공일 G20 정상회의 준비위원장을 만났다.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에 참석한 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본부의 고위 관계자를 접촉하러 온 참이었다. 11월 서울에서 열리는 G20 정상회의 준비를 위한 것이었다. 그에게 “한국이 G20 의장국이 됐다는 게 그렇게 큰 의미가 있는 것이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는 “1907년 이준 열사가 네덜란드 헤이그의 만국박람회에 참석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해 자결한 역사를 떠올려보라”고 답했다.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나라가 세계의 리더들을 불러모으게 됐다는 것만으로도 자랑스러운 일 아니냐”고 강조했다.

김씨와 사공 위원장을 대면한 이틀 사이 지난 100년의 한국 역사를 떠올려봤다. 불과 세 세대 사이에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달라진 한국과 한국인의 위상은 거의 매일 실감하는 대목이다. 샹젤리제의 대형 극장을 포함해 프랑스의 40여 개 개봉관에서는 지난달 28일부터 봉준호 감독의 영화 ‘마더’가 상영되고 있다. 르몽드 등 일간지의 호평 덕인지 대부분의 극장에 관객이 꽉 들어찬다. 파리 한국문화원의 한국어 강좌에는 늘 빈자리가 없고, 20여 개 프랑스 중·고교에서는 한국어를 수업 시간에 가르치고 있다. 프랑스 언론은 최근 아랍에미리트의 원자력발전소 건설 사업을 한국에 빼앗긴 것을 두고 “한국을 얕잡아봤다가 큰코다쳤다”고 전했다.

김씨는 “50년 전에는 한국이 이렇게 될 거라고 상상도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준 열사의 영혼도 비슷한 심경일 것 같다. 하지만 올해 초 미국 잡지 ‘인터내셔널 리빙’이 연례적으로 발표하는 ‘살기 좋은 나라’ 평가에서 한국은 42위, 프랑스는 1위를 했다. 이 잡지는 30년째 경제·문화·환경 등 삶의 질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요소를 반영해 각국에 등수를 매긴다. 한국은 생활 물가, 사회적 인프라, 보건 등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점수를 받았다. 한국은 그동안 숨차게 뛰어왔지만 아직도 넘어야 할 고비가 많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