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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을 여는 책] 돈의 본성 (내일신문 2011-08-12 오후 1:26:48)

주말을 여는 책] 돈의 본성
2011-08-12 오후 1:26:48 게재

화폐에 관한 불편한 진실


삼천리
제프리 잉햄지음 홍기빈 옮김
2만3000원


돈이란 무엇인가. 돈 때문에 야단들이다. 돈을 빼놓고는 인류의 삶을 말할 수도 없는 시대가 되었다. 개인의 생명유지, 국가나 지역의 번영, 세계 경제의 원활한 흐름, 전쟁과 평화, 문명의 발전이 전부 다 돈에 좌우되는 듯이 보인다.

며칠 새 미국의 국가신용등급하락으로 인한 글로벌 금융시장의 충격으로 한국도 증시 폭락과 패닉장세로 인한 투매를 겪었다.

매일 밤 뉴욕 증시의 상황을 눈이 빠져라 살피고 다음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증시가 상하로 요동을 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이제 돈은 더 이상 삶을 위한 교환수단으로 단순히 여길수 없게 되었다. 대체 돈이란 무엇일까.

2010년 여름 '녹색평론' 113호는 캐나다의 화가이자 화폐제도 연구가 폴 그리뇽이 제작해서 전세계에 보급하기 시작한 애니메이션동영상 "돈이 곧 빚이다"(Money as Debts )의 내레이션을 "돈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란 제목으로 옮겨 실었다. (이 동영상은 세계 10여개 언어로 번역되어 인터넷에서 자유롭게 볼 수 있다고 한다.) 이후 녹색평론은 화폐에 관한 불편한 '진실'들을 경제학 교과서의 화폐경제론이 아닌 인문학적 접근을 통해 꾸준히 다뤄왔다.

이는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돈'이 가지는 의미와 위력이 이미 단순한 경제학적 요소가 아닌 단계에 이르렀음을 인식한 편집이었다고 보인다. 이를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돈에 대한 인문학적 관심을 갖게 되었다, 때맞춰 그 갈증을 풀어줄만한 책들이 출간되고 있는데 이 책도 그중의 대표적인 번역서이다.

이 책 역시 원제목 (The Nature of Money)그대로, 화폐의 본질적 성격을 규명하기 위해 생산이나 소유관계에 초점을 맞춘 전통적 경제학과 달리 사회적 관계와 그에 바탕을 둔 화폐를 통해 현대자본주의를 해석하고 있다.

오랫동안 군림해온 정통 경제학의 신화와 우상을 허무는데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고, 게오르크 지멜과 막스 베버 이후 맥이 끊긴 사회학의 전통을 회복시켜냈다. 저자 제프리 잉햄은 케임브리지대학 사회학과 교수로 사회학과 정치경제학을 아우르는 자본주의와 화폐문제 분석 방법들을 사용하고 있다.

역자 홍기빈씨는 경제학을 전공하고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연구자(글로벌 정치경제연구소 소장)이다.

폴 그리뇽이 지적한 것처럼 우리는 돈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면 자동으로 조폐창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리고 돈은 정부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돈은 일부분 정부기관에 의해 조폐창에서 생산되지만 대부분은 은행이라고 하는 사기업에 의해 매일 막대한 규모로 만들어지고 있다.

그 수단은 돈을 빌리러오는 사람들의 계좌에 (집과 재산을 담보로 잡고) 나중에 반드시 갚도록 하는 금액을 써넣는 것이다. 실제로 은행이 갖고 있는 금이나 재화보다 더 많은 금액을 써도 그것을 확인하는 사람은 없다. 은행이 써준 대출금 액수가 현금처럼 유통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술처럼 은행이 생산해낸 숫자인 부채를 돈으로 여기고, 이를 바탕으로 한 화폐경제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는 셈이다.

제프링 잉햄의 '돈의 본성'은 그처럼 단순하고 쉽게 화폐의 존재를 설명하지 않는다. 이 책은 돈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거기에 대한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깨는 것으로 시작한다. 화폐에 관한 '경제학적 상식'은 돈이란 교환가치를 담고 있는 '물질'이며, 가격변화에만 영향을 줄 뿐 경제성장이나 총생산엔 영향을 주지 않는 중립적 상징이란 '신화'에 기초하고 있다.

화폐란 주제가 인문학과 사회학에서 퇴출되어 오직 정통경제학 영역으로 넘어감에 따라 굳어진 신화이다. 오늘날에도 경제학 교과서는 화폐의 4대 기능이 1.교환의 매개 2.가치 저장 3. 경제 수단 4 .가치의 척도인 계산단위 라고 반복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주류경제학의 상품화폐론과 통화주의를 비판하고 게오르그 크나프, 카를 마르크스, 게오르크 지멜, 막스 베버, 마르크 블로크등 경제학자로 분류되지 않는 화폐연구들까지 동원한다.

그는 화폐를 물물교환 단계에서 자생적으로 나온 교환 상품이 아니라, 그 자체가 '사회적 관계'인 것으로 보고 있다. 화폐란 본질적으로 지불에 대한 잠정적인 '약속'이며 그 화폐로 갚도록 되어있는 채무와 동시에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민국가는 바로 이 화폐의 통화공간의 단위가 되며, 화폐를 만드는 주체는 국가 위임을 받은 중앙은행들이다. 국가는 민간에서 갖가지 재화와 서비스의 댓가로 화폐를 발행, 지불한다. 그러니 화폐를 쓰는 사회를 하나로 통합해주는 건 무수한 채권-채무관계의 네트워크이며, 이는 국가 주권으로 인정되고 지지된다. 화폐시장은 정치사회적 권력이 맞부딪치는 공간이고 막스 베버의 말대로 화폐는 하나의 무기가 된다.

채권-채무자의 투쟁은 자본주의의 핵심이기도 하다.

화폐는 여러 사회적 관계로 구성되는데 그 관계들은 본질적으로 불평등과 권력을 담고 있다. 이 책은 여러 가지 상이한 지불 약속들이 이런 불평등 관계들을 표출하고 재생산함으로써 서로 위계를 이루며 서열화하는 실상을 밝힌다.

책은 1부 개념과 이론, 2부 역사와 분석의 두 부분으로 크게 나뉜다.

1부에선 하나의 상품이면서 동시에 상품의 '중립적' 상징이었던 화폐, 추상적 가치와 크레딧으로서의 화폐, 화폐에 관한 사회학 이론 , 화폐이론의 기본 요소들을 다루고 있다. 2부에서는 화폐의 역사적 기원과 형태, 자본주의적 신용화폐의 발전, 자본주의 신용화폐의 생산으로부터 통화의 무질서 (20세기 후반의 인플레이션과 소멸, 부채 디플레이션과 일본, 아르헨티나의 통화해체), 정보통신기술과 새로운 화폐공간들, 유럽의 단일통화까지의 업데이트된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역자는 이 책이 경제학, 사회학, 인류학, 역사를 포괄하는 넓은 시야,

그동안 변죽만 울려오던 돈의 본질에 대한 정면 분석, 금리조절로 '화폐수요'를 조정해서 인플레이션을 잡는 공식적 정책수단에 대한 비판, 한차원 높은 화폐문제 연구등 탁월한 점이 많아 크나프, 이니스이후 '백년만에 나온 가장 중요한 저작'이라고 평가한다. 그래도 책속의 돈과 삶속의 돈은 다른 것처럼 느껴진다. 과연 돈이란 무엇인가.

차미례 언론인·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