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면열전'…냉면에 대해 알아두면 좋을 5가지 상식
- ▲ 조선일보DB
조선의 26대 임금 고종은 냉면 마니아였다. 단 음식을 좋아했던 고종은 특히 배동치미 냉면을 즐겼다. 수라간 상궁들은 겨울이면 고종에게 올릴 냉면 육수를 위해 동치미를 따로 담갔는데 배를 많이 넣어 일반 동치미 국물보다 훨씬 달게 만들었다.
문인들의 냉면 사랑도 유별났다. 소설가 최인호는 하루 한 끼 냉면을 찾을 정도로 냉면광이었다. 청록파 시인 박목월은 수필 '냉면 맛, 숭늉 맛'에서 냉면의 맛을 "단맛의 용해적 황홀감은 노란빛과 통할 것 같고, 신맛의 서늘한 신선미는 청색과 통할 것 같다"고 묘사했다.
어디 임금과 작가뿐이겠는가. 슴슴하고 희스무레한 맛의 평양냉면부터 매콤하게 삭힌 홍어나 가자미 무침과 함께 면발을 쭉쭉 끌어올려가며 먹는 함흥냉면까지, 냉면은 가히 누구나 즐겨 먹는 음식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냉면의 이모저모를 한 권에 담아낸 책이 나왔다. 지난해 8월 방송된 다큐멘터리 '냉면'의 내용을 한데 엮은 ‘냉면열전’(인물과사상사)에는 냉면의 역사와 문화적 배경, 맛집 정보, 각종 에피소드가 나온다.
냉면은 흔히 '메밀로 만든 국수를 차가운 육수에 넣어 다양한 고명과 함께 먹는 음식'을 지칭한다. 면과 국물이 기본이고, 고명은 없어도 그만이다. 하지만 저자들은 얼핏 보면 단순해보이는 이 차가운 면 요리에 엄청난 수고와 역사가 배어있다고 말한다. 이 책을 토대로, 냉면에 대해 알아두면 좋을 5가지 이야기를 소개한다.
◆냉면의 계란, 먹는 데도 순서가 있다
냉면의 ‘화룡점정’은 면 위에 살짝 얹는 계란이다. 취향에 따라 먼저 먹기도 하고 한 입씩 아껴 먹기도 한다. 어떻게 먹는 게 좋을까? 이 책은 먼저 먹어 둘 것을 권한다. 거친 메밀과 차가운 육수로부터 위벽을 보호하려면 일단 계란을 먹어서 단백질 성분으로 위벽을 감싸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게다가 달걀 노른자가 풀어지면 육수가 탁해지기 때문에 깔끔한 육수를 원한다면 먼저 먹는 것이 좋다.
하지만 매운 함흥냉면을 먹을 때는 반대로 냉면을 먹고 난 다음에 계란을 먹는 것이 좋다. 매운 고추 양념에 캡사이신 성분이 들어 있는데, 이 성분은 물보다 지방에 잘 녹기 때문에 입 안의 얼얼한 성분을 깔끔하게 제거해준다.
◆평양냉면 O, 함흥냉면 X
냉면 앞에는 대개 북한의 지명이 따라붙는다. 평양냉면이 대표적이다. 함흥냉면 간판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저자들에 따르면 이것은 ‘정체불명’이다. 이북 출신 실향민들과 북한에서 넘어온 새터민들도 '함흥냉면'이라는 음식은 들어본 적 없다고 말한다. 문헌을 뒤져봐도 '함흥냉면'이라는 단어는 찾기 힘들다.
북한에서 간행된 '사회주의 생활문화백과'가 꼽은 이름난 조선 음식에도 '평양랭면'은 있지만 '함흥랭면'은 없다. 함경도의 특산 음식으로는 감자 농마국수와 함흥국수가 나올 뿐이다. 농마란 녹말의 북한식 표현이다. 함흥 사람들에게 비빔국수 내지 농마국수라고 불리던 음식이 남으로 내려오면서 '냉면'이라는 이름이 붙었을 것이라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여름냉면, 겨울냉면…철따라 다르게
냉면도 계절에 따라 변신한다. 1917년에 쓰인 방신영의 '조선요리제법'에는 냉면을 여름냉면과 겨울냉면으로 구분해 기록하고 있다. 문헌에 따르면 여름냉면은 두 가지가 있다. 가게에서 파는 냉면은 고깃국이나 닭국을 식힌 후 금방 내린 국수를 말고 한가운데에 얼음 한 덩이를 넣는다. 그 다음 국수 위에다가 제육과 수육, 전유어, 배추김치, 배, 대추, 복숭아, 능금, 실백, 계란을 삶아 둥글게 썬 것과 알고명(달걀 고명) 등을 넣고 잡고명 대신 김치와 배와 제육을 넣어 먹는다.
집에서 하는 냉면은 장국이나 깻국이나 콩국에다가 국수를 말고 오이를 채 쳐서 소금에 절였다가 기름에 볶아 얹는다. 이어 알고명과 석이버섯을 채 쳐 얹고 고기를 볶다가 잘게 썰어 얹고 실백(잣)을 뿌리고 얼음을 넣어 먹는다.
겨울냉면은 좋은 동치미 국물을 떠내어 놓고 국수를 더운물에 잠깐 담갔다가 건져 물을 빼 대접에 담는다. 그 다음 김치 무와 배를 어슷하게 썰고 제육을 굵직하게 썰어 국수 위에 얹고 김칫국물을 부어 먹는다. 식성에 따라서는 꿀도 치고 알고명과 표고버섯을 기름에 볶아 채 쳐 넣고 고춧가루 등을 뿌려 먹기도 한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김치 무와 배와 제육, 고춧가루 이 네 가지만 넣은 냉면만 한 게 없다고 저자들은 쓴다.
◆냉면 육수로는 꿩고기가 제격이지만
냉면 맛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육수다. 저자들에 따르면 그 중 최고는 꿩고기 육수다. 기름기가 적은 꿩고기는 담백한 냉면 육수에 안성맞춤이다. 끓이고 남은 꿩고기는 고소하게 양념해 고명으로 올려도 제격이다. 꿩고기는 소를 식용으로 여기지 않아 소고기가 귀했던 시절, 손쉽게 얻을 수 있어 자주 이용했다.
소고기 양지머리도 훌륭한 육수 재료다. 동치미나 꿩고기가 없는 여름에는 소고기 양지머리를 육수 재료로 많이 썼다는 것이 저자들의 설명이다. 소고기 육수는 깔끔하고 담백한 맛을 내는 반면, 돼지고기 육수는 진하고 들큰한 맛을 낸다.
냉면 육수는 지역에 따라서도 다르다. 겨울이 길고 무가 맛있는 평양에서는 동치미 국물로 냉면을 말아먹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서울의 냉면집에서는 거의 육수를 쓰는데 여름에 동치미 국물을 만들기가 까다롭고 보관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부산밀면, 이름 뒤의 아픈 사연
냉면의 기본은 메밀로 만든 면이다. 하지만 부산에서는 면을 밀가루로 만든 밀면이 인기다. 이것도 냉면으로 쳐야 할까. 그래야 할 사연이 있다고 저자들은 소개한다. 부산에 밀면이 들어온 것은 6·25전쟁 때다. 당시 북한에서 온 피란민들은 먹고살 길이 막막하자 냉면을 팔았다. 하지만 전쟁통에 메밀 가격이 엄청 올랐고, 비싼 메밀 대신 구호물자로 보급되던 밀가루를 쓰기 시작했다. 냉면의 모양새를 갖춘 데다 가격까지 저렴한 밀면은 날개 돋친 듯 팔렸고 부산의 명물이 됐다. 밀면은 '밀냉면' '부산 냉면' '경상도 냉면'으로 불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지금 이름을 갖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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