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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관계/국제분야

크림반도 ‘냉전 데자뷔’…19세기에 휘둘리는 21세기 (한겨레 2014.03.04 22:26)

크림반도 ‘냉전 데자뷔’…19세기에 휘둘리는 21세기

 

지정학적으로 본 분쟁 반복 역사

러시아 탄생과 성장의 무대
열강들의 패권전쟁 요충지로
소련 몰락뒤 ‘판도라 상자’ 돼

서방-러 경제이권 깊이 얽혀
전면전 번질 가능성 높지 않아
과거 지정학 바탕한 오판땐 재앙

 

러시아군이 장악해 우크라이나 사태의 화약고로 떠오른 크림반도의 상황은 수백년 동안 이곳에서 되풀이되던 역사의 반복이다. 이곳은 제국주의와 냉전 시대에 열강이 각축하며 충돌해온 ‘핫스팟’(열전 지대)이다.

■ 러시아의 고향 크림반도

근현대 이전 유라시아 대륙은 정주세력과 유목세력의 각축장이었다. 근현대로 접어들어 정주세력이 해양세력으로 진화하고, 밀려난 유목세력의 공백을 대륙세력이 채웠다. 유목세력의 공간을 차지한 대륙세력의 대표 주자가 러시아다. 러시아의 등장은 근현대 지정학의 변화와 일치한다. 프랑스, 영국, 미국이 차례로 주축이 된 해양세력이 유라시아 대륙에서 러시아의 확장·남하를 막으려다 벌어진 대결·전쟁은 제국주의와 냉전 시대를 관통하는 분쟁과 고스란히 겹친다.

크림반도는 러시아 탄생과 성장의 무대다. 크림반도 남서부 헤르소네스 해안의 작은 언덕에는 세인트블라디미르성당이 있다. 블라디미르 대제가 창시한 슬라브 문명은 키예프공국을 거쳐, 러시아로 발전했다. 블라디미르 대제가 988년 기독교 세례를 받고 국교로 받아들인 곳이 이 성당이다. 크림반도가 러시아의 고향이라 불리는 이유다.

슬라브 문명이 북상해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건설된 러시아가 17세기부터 세력을 확장해 흑해 연안으로 다시 진출하자, 서구 열강은 오스만튀르크를 부추겨 러시아와 6차례의 전쟁을 벌였다. 그 절정은 19세기 중반 영국과 프랑스가 터키와 연합해 러시아를 상대로 벌인 크림전쟁이다. 크림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는 흑해에서 군함의 항해권을 상실했고, 근대화에 절치부심한다.

■ 열강의 패권 요충지

크림전쟁은 해양세력 영국과 대륙세력 러시아가 유라시아 대륙의 패권을 놓고 아프가니스탄을 중심으로 격돌한 ‘그레이트 게임’의 연장선이다. 그레이트 게임은 서쪽으로는 크림전쟁, 동쪽으로는 러일전쟁까지 확산됐다.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일본에 패해 그레이트 게임이 막을 내렸다.

2차 세계대전 때 소련을 침공한 나치 독일은 모스크바가 아니라 흑해 연안에서 승부수를 던졌다. 크림반도를 핵으로 한 흑해 연안을 거쳐 캅카스 지역으로 나아가, 러시아의 곡창·유전 지대를 장악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벌어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대패는 나치 독일이 패망하는 원인이 된다.

2차대전 말기 미·영·소 3국 정상은 크림반도의 얄타에서 비밀회의를 열어, 전후 세계를 분할하는 냉전 질서의 틀을 짰다. 이 회의에서 소련은 독일을 분할해 동독과 동유럽 등 광활한 유라시아 대륙의 내륙 지역을 모두 세력권으로 인정받았다.

유라시아 대륙 중심부에서 소련이 다진 패권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와해됐다. 1979년 소련의 침공으로 시작된 아프간전쟁에서 미국은 이슬람주의 세력을 끌어모아 소련을 패퇴시켰다. 이는 소련 몰락의 중요한 원인이 됐다.

■ 중앙아시아, 패권 지정학의 중심축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는 중앙아시아에서 영향력을 회복하려 했고, 미국 등 서방은 이 지역의 석유를 비롯한 자원에 대한 전략적 통제권을 확보하려 했다. 그 결과가 러시아나 서방에 기댄 부패한 권위주의 정권의 난립 및 시민의 저항이다.

근현대 지정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영국 학자 해퍼드 매킨더의 ‘중심축 지역’ 이론으로 이런 상황을 설명할 수 있다. 매킨더는 유라시아 대륙의 인구와 부가 몰려 있는 심장부의 지배권을 장악하려면 그 출입구가 되는 ‘중심축 지역’을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중심축 지역이 중앙아시아 지역이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전 미국 백악관 안보보좌관도 <거대한 체스판>에서 비슷한 주장을 했다. 그는 미국이 패권을 유지하려면 흑해에서부터 중국 신장위구르 지역까지 펼쳐진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는 대륙국가의 등장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주도한 미국의 아프간전쟁 개입은 이런 철학에 기초했고, 실제로 소련의 패망을 유도했다.

지난해 11월 우크라이나의 반정부 시위로 시작해 러시아의 크림반도 군사점령으로 번진 우크라이나 사태는 소련 몰락 이후 이 지역에서 벌어진 분쟁의 재연이자 종합판이다.

■ 크림반도 장악은 나치의 수데텐란트 합병?

제국주의와 냉전 시대를 풍미한 전통적 지정학을 중시하는 전략가들은 과거와 같은 대결을 주문한다. 러시아의 크림반도 점령을 2차대전의 문을 연 나치 독일의 체코 수데텐란트 합병에 견준다. 아돌프 히틀러가 이 지역의 다수 민족인 독일계 민족 보호를 명분으로 이 지역을 영국 등의 묵인 속에 합병한 게 나치가 2차대전으로 나가는 교두보가 된 교훈을 잊지 말라는 지적이다.

대표적인 이가 브레진스키다. 그는 <워싱턴 포스트>에 보낸 글에서 “서방이 우크라이나의 와해를 좌시하면, 인접한 루마니아·폴란드·발트3국의 새로운 자유와 안보가 위협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우크라이나군에 대한 서방의 지원은 물론이고 미국 공수부대를 유럽으로 즉각 보내는 등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경계 태세를 강화해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서방의 결의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 흘러간 지정학에 휘둘리는 세계?

서방이 나토를 옛 소련 영역으로 확대하려는 시도, 이에 자극받은 러시아의 크림반도 군사점령, 여기에 서방이 군사력 과시를 하라는 주문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태가 이제는 유효성을 상실한 과거의 지정학에 바탕을 둔 오판이라는 회의적인 시각도 적지 않다. 지금의 세계에서는 초강대국 미국조차도 과거처럼 배타적인 세력권을 형성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울러 서방과 러시아의 경제 이권이 뿌리 깊게 얽혀 우크라이나 사태가 전면전으로 번질 가능성이 없다는 지적이 많다. 워런 버핏은 우크라이나 사태에 너무 휘둘리지 말라고 충고했다.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은 러시아의 행동을 두고 “21세기에 19세기 행동을 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러시아가 19세기적 행동을 했다면, 그 행동을 촉발한 것 또한 서방의 19세기적 행보다. 소련 몰락 이후 배제와 대결의 옛 지정학을 근거로 벌인 서방과 러시아의 각축이 이번 사태의 근본 배경이다. 우크라이나 사태의 확전 여부는 서방과 러시아 등 당사자들이 과거 지정학에 계속 매달릴지, 아니면 연관과 협력의 세계화 시대라는 새 프레임에 따라 행동할지에 달려 있다.

 

 

푸틴의 두번째 승부수 .. 실리·명분 챙길 퇴로 모색하나

(서울경제  2014.03.05 04:15)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인근 국경에서 실전훈련을 해온 군부대에 복귀명령을 내림으로써 전면적 충

서방 제재 압박은 무위 가능성
크림 주도권 용인될 공산 커져

 

돌로 비화하던 우크라이나 사태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미국 등 서방국들이 우크라이나 크림반도를 점령한 러시아에 대한 제재 수순에 돌입한 가운데 양측이 실리와 명분을 챙길 수 있는 '퇴로'를 모색할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 등 주요 외신은 푸틴 대통령의 군부대 철수발표 직후 "(철군 조치로) 크림반도의 상황은 교착상태에 빠졌지만 임박했던 양측 간 충돌 가능성은 봉합됐다"고 타전했다.

주요 외신들은 푸틴 대통령의 이번 조치를 러시아의 크림반도 점령에 이은 두번째 '승부수'라고 평가했다. 우크라이나 동부침공을 압박해온 러시아 군부대에 복귀명령이 내려짐에 따라 러시아에 대한 경제제재를 압박해온 국제사회의 대응은 무위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아졌고 크림반도의 주도권을 인정받으려는 러시아의 의도는 용인될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앞서 푸틴 대통령은 친러시아 성향의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친유럽연합(EU) 성향의 야권에 의해 전격 실각하자 '러시아계 보호'를 명분으로 즉각 크림반도로 진군, 친EU 쪽으로 이동하던 이번 사태의 무게중심을 180도 돌려놓았다. 이어 미국이 경제제재 방안을 발표하고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을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로 급파하는 등 공세를 강화하자 케리 장관의 우크라이나 도착 직전 국경지역 군병력에 철수 명령을 내림으로써 주도권 지키기 및 정치적 명분 쌓기에 나섰다는 해석이다.

실제 푸틴 대통령은 철군 발표 이후 진행된 기자회견에서 "크림반도에 진군한 부대는 자체 방위군"이라며 러시아는 중립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푸틴은 "(살얼음판 같은 시국에) 한번 깨진 신뢰는 다시 회복되기 힘들 것"이라고 경제제재에 나선 서구 측에 대한 경고를 잊지 않았다. 그는 이어 친EU 성향인 우크라이나 야권을 "탈헌법적인 불법 쿠데타 세력"이라고 규정한 뒤 "(대통령이 없는) 키예프와 대화하지 않겠다"고 일침을 놓았다.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해 정치적 명분 쌓기에 나선 푸틴은 동유럽권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한 '경제적 압박'에도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천연가스 국영기업인 가스프롬은 푸틴 대통령의 철군 발표 직후 "우크라이나가 20억달러 상당의 2월 가스 대금을 지금까지 지급하지 않았다"며 "대금을 완납하지 않으면 가격인상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FT에 따르면 러시아는 지난해 12월 우크라이나와 천연가스 공급 가격을 1,000㎥당 400달러에서 약 270달러로 인하하는 계약을 체결하면서도 3개월마다 가스 가격을 조정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18개국) 진입을 꿈꾸던 동유럽 일각의 분위기도 우크라이나 사태를 계기로 일부 반전되기 시작했다는 평가다.

FT는 이날 폴란드 현지 외신을 인용해 "이번 사태는 국제 투자자들에게 EU에 더 투자할 가치가 있는지를 알려주는 동시에 폴란드가 유로존에 합류할 필요가 있느냐를 숙고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마레크 벨카 폴란드 중앙은행 총재의 발언을 전했다.

특히 전문가들은 이번 철군 조치로 푸틴 대통령이 크림반도에 대한 주도권을 서구로부터 확실히 넘겨받을 수 있을지 여부를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신냉전을 초래할 동서 충돌을 양측 모두 꺼리는 가운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사태를 통해 국제사회로부터 크림반도의 주도권을 사실상 인정받게 된다면 명분과 실익을 동시에 챙기는 '일석이조' 이상의 효과를 본다는 것이다. 러시아 해군 및 육군기지가 위치한 크림반도는 우크라이나 군병력보다 러시아 주둔병력이 더 많은 러시아의 '안마당'에 해당한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푸틴 대통령이 미국 측의 경제제재가 시작되는 시점에 이 같은 조치를 단행했다는 점을 들어 이번 철군은 우크라이나 사태가 길어질수록 경제적 압박에 처할 수밖에 없는 러시아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 우크라이나의 외환위기 가능성을 막기 위해서는 서방 측의 달러 지원이 필수적이라고 파악되는 등 우크라이나 경제가 정상화되려면 미국 및 EU 등 국제사회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는 평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