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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渡 戰鬪의 승리자는 曹操가 아니었다 (boolingoo 2006.04.21 22:03)

官渡 戰鬪의 승리자는 曹操가 아니었다

 

서울대 朴漢濟 교수의 중국 中世로의 시간여행⑧

서울대 朴漢濟 교수

官渡紀行

청렴하기 그지없는 仁者 伯夷는 餓死했고, 孔子의 제자 가운데 가장 賢者였던 顔回는 빈궁 속에 요절했다. 반면 날마다 무고한 백성을 죽이던 盜稙은 天數를 다하였다. 善惡이라는 人間의 倫理的 基準으로 측량되지 않는 天道, 아니 人間歷史의 實在的 흐름에 당혹해하는 사람은 나뿐이 아닐 것이다. 누군가는 ‘三國志의 世界’에서는 두꺼운 얼굴과 검은 마음을 가진 소위 ‘(面)厚(心)黑’의 인간만이 英雄으로 행세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劉備가 그러하고, 曹操가 그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얻은 승리도 그것이 승리이기 때문에 칭송된다면, 인간세계를 규율하는 최소한의 룰도 이미 무의미해진다. 과연 이런 승리가 우리 인간세상에서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일까?
소설 “삼국지”에 나오는 몇 차례의 전쟁 가운데 당시 역사전개과정에서 가장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 官渡의 전투는 厚黑의 인간들이 승리를 위해 모든 지혜를 다 동원한 싸움이었다. 이 전투에서 曹操는 2만명의 적은 병력으로 袁紹의 10만대군을 격파한 것으로 유명하다. 술책과 농간으로 남을 속이고 괴롭히는 데는 중국 역사상 그 누구에게도 빠지지 않는 曹操가 어리석고 고집스러운 袁紹를 이긴 것은 당연한 귀결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그런 승리가 결코 값진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후 그의 가문에 밀어닥친 骨肉間의 싸움, 단명왕조로 끝난 魏王朝의 운명은 조조의 操行과 결코 무관한 것이 아닐 것이다. 전쟁이란 적나라한 인간의 모습을 숨김없이 보여주는 것이지만, 이 관도는 그 단조로운 地形과 달리 필자에게 많은 생각을 갖게 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관도는 전투 당시 황하 남안에 있던 작은 인공운하였다. 이제 그 물길은 말라버리고 단지 그 이름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황하는 그 전투를 연상시킬 만한 모든 유적들을 쓸고 가 없애버렸다. 관도에는 오직 끝없이 펼쳐진 평원 위에 옥수수만이 작열하는 7월의 태양 아래 수염을 길게 늘어뜨리고 익어가고 있었다.

소설 “삼국지”를 읽은 사람이라면 조조(曹操)가 2만명의 군대로 원소(袁紹)의 10만대군을 격파시킨 유명한 관도의 전투를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전투의 승리로 조조는 화북(華北)의 패자가 되어 후일 위(魏)나라를 세우는 데 결정적인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중국 역사상 중요한 전쟁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적은 병력으로 수적으로 비교되지 않는 대군을 이긴’(以少勝多) 전쟁의 전형으로 중국인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자가 조조라는 것도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 글에서 조조가 원소에게 이기기는 했지만 이 전투에서 얻은 알짜 전리품을 챙긴 사람은 따로 있었다는 점을 이야기하려 한다.
조조와 원소는 이 전투에서 처음 만나 싸운 것은 물론 아니었다. 두 사람은 젊은 시절부터 서로 친구처럼 어울리기도 했지만, 또 경쟁했던 사이였다.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진 일들을 돌아보면 ‘숙명의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질긴 인연을 맺고 있다.
원소(?~202)는 후한(後漢)시대 명사를 많이 배출한 지역인 여남군(汝南郡) 출신으로 증조부 원안(袁安)이 사도(司徒)가 된 후 4대에 걸쳐 3공(三公:太尉·司徒·司空)을 배출한 최고 명문에서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아버지(袁成)가 사망했으나 숙부(袁未)의 사랑을 받고 자랐다. 당당하고 위엄있는 풍모를 지녔다고 한다. 조조(155~220)도 원소의 가문만큼은 아니었지만 역시 권세가문 출신임에는 틀림이 없다. 패국沛縣) 초현(初縣) 출신으로, 전한 시대 개국공신으로 상국(相國)이었던 조참(曹參)의 자손이다. 환관이 후한 조정을 좌지우지하던 환제(桓帝)시대 환관의 최고 관직인 중상시(中常侍)에 있었던 조등(曹騰)이 명목상 그의 조부인데 그를 낳은 아버지 조숭(曹嵩)이 조등의 양자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두 사람 다 남부러울 것 없는 가문 출신이었지만, 젊은 시절 그들의 행동은 한마디로 개차반이었다. 세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있지만, 둘 다 그 버릇 개 못 주고 이 세상을 마친 사람들이다. 후한 말에서 삼국(三國)∼서진(西晉)∼동진(東晉)시대까지 인사들의 에피소드를 모은 “세설신어”(世說新語)의 ‘가휼편’(假譎編)은 휼책(譎策)과 농간으로 남을 속이고 괴롭힌 일들을 주로 적어 놓은 책인데, 이 편에 주연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조조이고, 조연은 원소라고나 할까? 총 13개의 에피소드 가운데 조조는 네 차례나 출연했고 원소도 두 차례나 등장한다. 여기서 일화 한토막을 소개한다.

위 무제(魏武帝:曹操)는 소년 시절 원소와 유협(游俠)의 행동을 즐겨 했다. 어느날 어느 집에서 혼인잔치가 벌어진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집 정원으로 몰래 숨어들었다가 이슥하기를 기다려 마침내 “도둑이야!”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혼인식에 참석했던 많은 사람들이 집밖으로 뛰쳐나갔다. 이때 위 무제는 신부방으로 쳐들어가 칼을 들이대고 신부를 겁탈했다. 그리고는 원소와 더불어 도망쳐 나왔는데 잘못하여 탱자 덤불 속에 빠져들고 말았다. 위 무제는 먼저 빠져 나왔으나 원소는 종내 움직이지 못했다. 위 무제는 이때 다시 “도둑이 여기 있다!”고 소리쳤다. 이에 놀란 원소는 스스로 황급히 뛰쳐나와 도망함으로써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 삽화를 통해 보면 조조는 시쳇말로 ‘성폭력’을 저지른 주범이었고, 원소는 공범이었다. 대개 이런 짓을 하는 사람들이 그러하듯 조조와 원소는 둘 다 그 밑에 몇 명의 조무래기 부하들을 거느리고 있는 조직 깡패였던 것이다. 가문이나 권세가 좋았으므로 시골에서 무작정 상경하여 밥 먹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깡패의 세계에 투신한 것은 아니니, 한때 명동 거리를 누비던 ‘칠공자’(七公子) 정도에 비유할 수 있을까? 둘 사이는 위에서 소개한 것처럼 항상 우호적이지만은 않았다. 다시 같은 “세설신어”의 ‘가휼편’에 나오는 또 다른 이야기를 소개해 보자.

원소가 젊었을 때에 밤에 사람을 보내 위 무제를 찔러 죽이려 했으나 칼이 조금 낮게 던져지는 바람에 빗나가 적중하지 못했다. 위 무제는 깊이 생각해 본 후 이번에는 칼이 조금 전보다 높이 날아오리라 확신하고 침대에 배를 대고 최대한 몸을 낮추고 누워 있었다. 과연 칼이 높이 날아왔다.
이 이야기는 깡패세계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양자간의 칼부림이었던 것 같다. 위에 인용한 두가지 삽화를 가만히 따져 보면 조조와 원소는 통의 크기와 기지(奇智) 등에서 분명히 차이가 났던 것 같다. 조조는 같이 일을 나갔다가 궁지에 빠진 동료 원소를 끝까지 구하려는 협객세계를 관통하는 기본적인 룰에 충실하려는 체하는 여유를 보였으나, 원소는 은밀하게 사람을 시켜 그를 죽이려는 초조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원소의 이런 행동은 기사도(?)를 생명으로 하는 협객들의 행동거지라 할 수 없다. 이로 볼 때 양자간의 승부는 관도의 전투를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일찍부터 판결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필자는 조조를 옹호하거나 그의 인격을 존중할 생각은 전혀 없으나 굳이 둘을 비교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절친한 친구이자 숙명의 라이벌이었던 조조와 원소

조조의 비인간적인 측면은 세간에 잘 알려져 익히 아는 바이다. 한때 동탁(董卓)을 목베려다 실패한 후 고향인 초군으로 도망가던 도중 그의 아버지와 형제의 의를 맺고 지내던 여백사(呂伯奢)의 집을 찾아갔을 때의 일이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아들을 접대하기 위하여 좋은 술을 구하러 나간 사이에 그 가족들은 조조를 위해 뒷뜰에서 돼지를 잡고 있었다. 가족들이 돼지를 잡는 방법을 두고 나누던 이야기를 자기를 살해하려는 모의로 오해한 조조는 여백사의 여덟 식구를 몰살시키고 달아나다 술을 사들고 돌아오는 여백사를 만나자 그마저 죽인다. 후환을 미리 차단한 것이다. 이런 짓을 하고도 그 죄를 조금도 의식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동행했던 진궁(陳宮)에게 오히려 “내가 차라리 남을 저버릴지언정 남이 나를 저버리게 하지는 않게”(寧我負人 毋人負我)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말로 자기의 살인행위를 합리화하던 위인이 바로 조조였다. 이 시대는 한마디로 ‘철판같이 두꺼운 얼굴과 뻔뻔스러움의 극치를 달리는 검은 마음’(面厚心黑)이 합작된 인간만이 천하를 종횡하며 소위 영웅으로 행세하던 시절이었다.

정치학자 최명(崔明) 교수는 “소설이 아닌 삼국지”라는 책에서 형용할 수 없는 흑심과 뻔뻔스러움이 엮어낸 역사가 바로 ‘삼국지의 세계’라 하였다. 지당한 지적이다. 사실 나관중이 그렇게 인자한 사람으로 묘사한 유비(劉備)도 그 점에서는 별로 나을 것이 없었다. 사회비평가 이종오(李宗吾:1879∼1944)는 그의 저서 “후흑학”(厚黑學)에서 유비를 의리도 지조도 없이 끊임없이 변신하는 기회주의자로 규정한 바 있다.
유비의 장기는 얼굴이 두꺼운 데 있으니 조조에게 의지하다 여포에게 붙고, 여포에게 의탁하다 숙적 손권과 결탁하고 다시 원소의 품에 안기는 등 동서 여기저기 찾아다니지 않은 집이 없고, 다른 사람의 울 밑에 기탁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평생 울기를 잘한다…. 해결하기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되면 그 사람 앞에서 한바탕 통곡하여 어려운 국면을 유리하게 반전시킨다. 그래서 당시인들은 “유비의 강산은 모두 그의 울음으로 얻어진 것”이라 하였으니 이 사람 역시 능력있는 영웅임에는 틀림이 없다. 유비는 두꺼운 얼굴(厚)로, 조조는 검은 마음(黑)으로 쌍벽을 이룬다. 두 사람은 서로를 칭찬하면서 원소 등 여러 군웅을 낮추어 본다. 그래서 조조가 “천하 영웅은 오직 그대와 나 조조뿐이다”라 한 것이다.

사실 나관중은 조조를 깎아내리기 위해 유비를 착한 사람으로 대비시킴으로써 극적 효과를 거둔 것뿐이다. 요즈음 TV 사극(史劇) 작가들이 그러한 것처럼…. 그러면 조조는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인간이었나, 아니면 시대가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인가? 손성(孫盛)의 “이동잡어”(異同雜語)라는 책에 실려 있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내용이다.
(조조는) 일찍이 허자장(許子將:許薑)을 찾아가서 “나는 어떤 사람이오?”라고 물었다. 자장이 대답하지 않으니 (조조는) 고집스럽게 되물었다. 자장이 “그대는 치세의 능신(治世之能臣)이 아니면 난세의 간웅이오”(亂世之姦雄)라 했다. 태조(太祖:조조)는 크게 웃었다.
이것에 의하면 조조라는 사람으로 대표되는 인간상은 그 시대의 산물인 것처럼 느껴진다. ‘정치는 그 나라 사람들의 수준을 극명하게 대변한다’는 말이 있다. 최근 총리직을 사임한 P씨는 ‘공직자는 진퇴를 분명히 해야 한다’며 결연히 사표를 던졌지만, 그를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한 것은 여론이었지 그 자신의 결단이 결코 아니었다. 이처럼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위장된 도덕군자들이 너무도 많다. 그것은 우리 역사에서 정당한 단죄(斷罪)나 과거에 대한 청산 등 마땅히 치러야 할 과정을 제대로 거쳐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어디 우리나라뿐이랴! 더욱 우리를 당혹케 하는 것은 하늘, 즉 천도(天道)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이다. 단죄나 청산의 주체인 사람의 수준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광명정대(光明正大)해야 할 하늘은 그동안 무얼 했던가?

노자는 “도덕경”(79장)에서 ‘하늘의 도란 특별히 친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지만 언제나 착한 사람의 편이 된다’(天道無親常與善人)고 하였다. 그러나 그 말이 실제와 다름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 비견한 예로 우리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할 수 있다는 저간의 판결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권을 잡으면 끝난다는 통념을 거부한 것이다. 그러나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갖은 방법으로 천문학적인 돈을 모은 J씨는 추징금으로 선고받은 2,205억원 가운데 아직도 1,892억여원을 미납하고 있고, N씨는 2,628억여원 가운데 884억여원을 미납하고 있는데도 잊을 만하면 국가의 원로로 청와대로 초대되어 극진히 대접받는 모습이 대중매체에 클로즈업된다.
우리나라 국민만큼 과거를 잘 잊는 사람들도 없다는 것은 누구나 다 인정하는 사실이지만, 그래도 하늘마저 이런 점에 대해 일절 언급이 없는 점에 대해서는 필자도 정말 헷갈린다. 어찌 필자만 그럴소냐! 역사의 아버지 사마천(司馬遷)도 ‘나도 몹시 헷갈린다. 이른바 하늘의 도(조처)라는 것이 옳은 것인지 아닌지?’(余甚惑焉 所謂天道 是耶非耶)라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그는 “공자가 ‘춘추’(春秋)를 짓자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이 두려워했다”는 말만 믿고 하늘이 상벌하지 않는 자들을 글로써라도 포폄(褒貶)하기 위해 궁형(宮刑)이라는 참기 어려운 치욕을 감내하면서 “사기”(史記)를 쓰려 하지 않았던가.
이제까지 이 글의 주제를 잊어버리고 딴소리만 했으니 필자가 너무 흥분했던가 보다. 독자 여러분께서는 결코 까닭없이 흥분한 것이 아님을 양해해 줄 것이라 생각한다. 이제 관도의 전투 이야기로 돌아가자.

유비는 의리도 지조도 없었던 기회주의자?

조조나 원소는 모두 철이 들자 사람이 달라졌다. 원소는 20세에 복양(樞陽)의 현장(縣長)으로 취임하고부터는 청렴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조조도 20세에 효렴(孝廉)에 추천되어 관계에 진출한 후 유능한 관리로 활약한다. 30세 때 제남국(濟南國)의 상(相)으로 승진한 조조는 뇌물이 횡행하고 독직사건이 빈번했던 영내의 관료 8할을 면직시켰고 백성을 괴롭히는 제사를 엄금하는 등 지방관으로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사람은 열번 변한다’고 하지만 그가 죽을 때까지 취한 행동을 따져보면 그것도 헛말이다. 사람이 달라진 것이 아니고 정치판 사람들이 흔히 연출하는 자작 변신극일 뿐이다.

후한 영제(靈帝)가 죽자 대장군 하진(何進)과 원소는 궁정 내의 환관을 일소할 계획을 세우고 동탁(董卓) 등 지방의 유력 무장들을 불렀다. 그러나 그 계획이 누설되는 바람에 하진은 동탁이 도착하기 전에 환관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궁중이 혼란에 빠지자 원소는 이 틈을 타 환관을 모두 살해해 버렸다.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동탁은 상경하자마자 소제(少帝)를 폐하여 홍농왕(弘農王)으로 강등시키고 진류왕(陳留王)을 황제로 세웠으니 이 사람이 바로 후한 마지막 황제인 헌제(獻帝)다. 원소는 겉으로는 동탁에게 복종하다 기회를 틈타 기주(冀州)로 도망한 후 동탁 토벌 동맹군을 결성한다. 동탁이 조조를 표기교위(驃騎校尉)에 임명하려 했으나 그는 이름을 바꾸고는 도망쳐 고향으로 돌아갔다. 고향으로 돌아온 조조는 가재(家財)를 흩어 병을 일으켰다. 이처럼 각처에서 일어난 군웅들이 모여 합의로 반동탁군인 관동군(關東軍)을 결성하고 그 맹주로 원소를, 분무장군(奮武將軍)으로 조조를 추대한 것이 190년의 일이다. 그러나 진말(秦末)의 반진(反秦) 제후 연합군이 그랬듯이 군웅들의 축록(逐鹿:황제위를 획득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원소는 동탁이 서쪽 장안으로 도망간 후 황하 중·하류 이북지방에서 대소군벌과 호족들을 복종시켜 당시 최강의 실력을 자랑하는 최대 군벌로 군림하기 시작했다.
이런 와중에 조조는 황건적의 잔여세력인 소위 청주병(靑州兵)을 바탕으로 서주(徐州)의 도겸(陶謙), 회남(淮南)의 원술(袁術), 완성(宛城)의 장수(張繡), 그리고 동탁(董卓)을 살해한 여포(呂布) 등 대소 군벌을 물리치고 황하의 중류와 하류 일대에 걸친 광대한 지역을 확보하면서 급속하게 세력을 확장해가고 있었다. 특히 196년 헌제를 낙양으로 맞이하게 됨으로써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황제로서의 실질은 사라진지 오래지만 그래도 이름값은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조는 낙양이 황폐해졌다는 이유로 헌제를 받들고 자기의 새로운 근거지인 허창(許昌)으로 천도하여 대장군(大將軍)이 된다. 이때 원소도 헌제로부터 태위에 임명되었지만 조조보다 아래 지위였기 때문에 거부하였다. 손책(孫策)이 죽고 손권(孫權)이 그 뒤를 잇자 조조는 강동(江東:江南)을 안정시켜 북방에 있는 제후세력을 소멸시키기 위해 헌제를 통해 손권을 파로장군(破虜將軍)으로 봉하고 회계태수(會稽太守)를 겸직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夾天子以令諸侯)하면서 급속하게 그 세력을 확장시켜 가는 조조를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있을 원소가 아니었다.

원소는 199년 그의 적수의 한 사람인 유주(幽州)의 공손찬(公孫瓚)을 멸망시키고 황하 이북의 광대한 땅을 수중에 넣었다. 당시 기주목(冀州牧)으로 업성(橙城)에 주둔한 원소는 장자 담(譚)을 청주(靑州)자사에, 중자 희(熙)를 유주(幽州)자사에 외조카(外甥)인 고간(高幹)을 병주목(幷州牧)에 임명하였다. 심배(審配)·봉기(逢紀)가 앞장서 군사를 이끌도록 하고, 전풍(田豊)·순심(荀諶)·허유(許攸)를 참모로 삼고, 안량(顔良)·문추(文醜) 두 맹장과 저수(沮受)를 군사(軍師)로 하는 10만 정예부대와 1만의 기병을 갖추게 되었다. 이제 화북의 통일을 위해서는 허창에 근거지를 둔 조조의 세력을 넘어뜨리는 일만이 남아 있었다.
이제 양자의 대결은 시간문제였다. 이들 사이에 화북의 패권을 두고 2년여 동안에 걸쳐 혈투를 벌인 싸움이 바로 유명한 ‘관도의 전투’였다. 당시 조조군이 처한 입장은 매우 어려웠다. 원소의 대군 외에 또 하나 해결해야 할 세력이 바로 동방에 있던 유비였다. 유비가 원소와 힘을 합쳐 쳐들어올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양면수적(兩面受敵)의 위험을 제거하기 위하여 조조는 200년 정월 원소가 아직 진군하지 않을 때를 틈타 신속하게 부대를 이끌고 서주(徐州)를 쳐서 유비(劉備)를 격파하려 했다. 조조가 유비를 치러 갔을 때 원소의 모사인 전풍(田豊)이 허창을 칠 좋은 기회라면서 조조의 후로를 습격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원소는 아들이 병이 났다는 등의 이유로 출병하지 않았다. 조조는 하비성(下匹城:현 徐州市 寧縣)을 공략하여 유비의 대장 관우(關羽)를 생포했다. 조조는 관우를 상빈(上賓)으로 대접하고 중용하였다. 유비는 패주하여 원소에게 투신하고 장비는 입산하니 도원에서 결의형제한 세 사람은 각각 헤어지게 된 것이지만, 조조로서는 후고지우(後顧之憂)를 없애는 성과를 거두었다. 조조가 관도로 돌아오고 난 후에 원소는 비로소 여러 장수를 모아 허창을 치는 것이 어떠하냐고 의논시키니 전풍은 이미 형세가 변했다며 원소에게 후에 기회를 잡을 것을 건의하였다. 원소는 전풍이 군심을 동요시켰다는 이유로 감옥에 넣고 만다.

화북의 패권을 두고 2년간 벌인 혈투

원소는 200년 2월 저수(沮受)를 감군(監軍)으로 하여 10만 대군을 이끌고 그의 근거지 업성을 출발하였다. 황하 북안인 여양(黎陽:현 하남성 浚縣)에 도착한 원소는 황하를 건너 백마(白馬:현재 하남성 滑縣)와 연진(延津)을 손에 넣고 관도를 탈취하여 허창을 함락할 계획을 세웠다. 위기에 처한 조조는 곽가(郭嘉)와 순욱(荀彧) 두 모사와 의논했다. 이들은 당시의 형세와 피아 쌍방의 정황 등을 참작한 끝에 방어책으로 일관하기로 결정하고 그해 8월 주력부대를 관도 일대에 포진시키고 원소를 기다렸다. 원소는 여양에서 먼저 곽도(郭圖)와 안량을 파견하여 백마를 침으로써 관도에 있는 조조를 유인하려 했다. 관도는 서로는 낙양, 동으로는 개봉으로 연결되는 노선상에 위치하여 전략적인 요충이었고 허창에서 80여㎞(200리) 거리에 불과하여 그 인후(咽喉)와 같은 곳이었다. 북대문(北大門)에 해당하는 관도를 잃으면 허창은 그 방어선을 잃는 것이 되는 셈이었다.

원소는 먼저 대장 안량을 파견하여 남으로 황하를 건너 백마를 포위했다. 백마의 포위를 풀기 위해 조조는 순유(荀攸)가 제시한 소위 ‘성동격서’(聲東擊西)의 전법을 구사하였다. 먼저 연진으로 북상하여 황하를 건너 원소의 후방을 치는 것처럼 함으로써 원소가 군 일부를 연진으로 향하도록 하고 조조는 기병을 이끌고 바로 백마를 기습하였다. 이때 관우가 단기(單騎)로 적중에 들어가 안량을 한 칼에 쳐서 죽이니 원소의 군은 주장을 잃고 갑자기 와해되었다. 이로써 백마의 포위를 풀 수 있게 되었다. 원소군은 조조군과 대적한 첫 전투에서 안량을 잃고 2차 전투에서 명장 문추를 잃었다. 이 두 전투에서 두 장수를 벤 조조군의 장수는 바로 관우였다.
원소의 군사력은 수적으로 많았으나 원소 자신이 교만한 나머지 부하의 계책을 잘 받아들이지 않았다. 저수가 원소에게 “우리 군은 비록 많으나 용맹함이 조조의 군대만 못합니다. 조조의 군대는 양식이 적은 반면 우리는 풍족합니다. 그러니 조조군은 나가 싸우는 것이 유리하고 우리는 병력을 움직이지 않고 견고하게 지키는 것이 유리합니다. 곧 조조군의 양식이 없어지면 싸우지 않고도 이길 수 있습니다”라고 건의했으나 원소는 듣지 않고 출병시키려 했다. 그러자 군사(軍師)인 허유가 다시 말했다. “조조는 그의 전 병력을 동원하여 관도에 포진하고 있으므로 그의 후방은 텅빈 상태로 있습니다. 지금 병력을 나누어 주야를 가리지 않고 달려가 200리 밖에 있는 허창을 습격한다면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원소는 여전히 병력과 군량의 우세함만 믿고 이 계책도 물리쳤다.
원소군과 조조군은 반년 동안이나 대치했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초조한 쪽은 군량이 부족한 조조측이었다. 이때 허유가 그의 계책들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조조의 진영으로 몸을 의탁해 왔다. 조조측으로서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허유는 조조에게 “원소의 군은 막강합니다. 조공께서는 어떤 계책으로 대처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조조는 허유를 믿지 못하고 1년은 버틸 수 있다고 대답했다. 허유가 조조에게 “원소를 물리치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고 말하자 그제서야 조조는 “사실은 한달 정도의 군량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했다. 이에 허유는 원소의 군량미가 쌓여 있는 오소(烏巢:하남성 延津縣)를 기습할 것을 권하면서 “만약 기습에 성공한다면 사흘이 못가서 원소를 패배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단언했다.
조조가 오소를 습격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원소는 구원할 병력을 극소수만 보내는 대신 주력부대에는 조조의 관도 진지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원소군이 조조의 진지를 공격했으나 조조군은 방비만 할 뿐 나와 싸우지 않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근대 이전에는 성 안에서 방어만 하는 적을 공격할 뾰족한 방법은 없는 법이다. 아무리 강력하게 공격해도 쉽게 승부가 나지 않는 것이다. 그 사이에 조조군은 오소를 습격하여 원소의 군량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오소가 불탔다는 소식을 접한 원소군은 크게 동요하여 제1선에서 군을 지휘하던 장합(張慶) 등이 조조에게 항복하였다. 이 틈을 타 조조군은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원소군은 크게 패하여 10만명의 군사 가운데 7만명 이상이 전사하고 원소는 800여 기병의 호위를 받으며 겨우 목숨을 보전하고는 북으로 도망쳤다.

관도의 전투에서 승리한 조조는 군량 부족 등으로 장기간에 걸친 전쟁을 계속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대신 남방 유표를 공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계속 원씨를 쳐야 한다는 순욱의 주장에 따라 201년 4월 황하를 건너 북상하여 창정(倉亭:南樂)의 전투에서 또 다시 원소의 군을 깨뜨렸다. 원소는 업성으로 돌아갔다. 조조는 허창으로 개선했다. 조조에게 대패한 쇼크로 원소는 202년 4월 병이 나 피를 토하고는 5월에 사망한다. 관도의 전투는 이렇게 싱겁게 끝났고, 조조와 원소의 긴 경쟁은 막을 내렸다. 조조에게는 뒷마무리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원소가 죽은 후 당연히 그 후계자는 관도의 전투 이래 행동을 같이했던 장자 원담(袁譚)이 되는 것으로 보였지만 막내아들인 원상(袁尙)이 그를 대신했다. 원소는 죽으면서까지 자기의 패배의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잘 알지 못한 것이다. 원소는 일찍부터 원상을 좋아했다. 이런 일에는 항상 그렇듯이 애첩이 개입되어 있게 마련이다. 원상이 후계자가 되고부터 원소의 부하들은 양분되었다. 심배·봉기(逢紀)등은 원상측에, 신평(辛評)· 곽도 등은 원담측에 가담했다. 혈육 사이에 내분이 생기면 타인보다 더 잔인하고 추잡해지는 법이다. 둘 사이의 내분이 심화되자 결국 원담은 조조편에 서게 되었다. 204년 5월 조조는 내분에 빠진 업성을 공격하여 8월에 함락시켰다. 그후 조조는 위약(違約)을 문제삼아 기주에 있던 원담을 죽였다. 승리자가 취하는 통상적인 수순을 밟은 것이다. 일종의 ‘팽’(烹)이다. 원소의 남은 두 아들인 원희와 원상은 노합하(老哈河)와 대릉하(大凌河) 유역에 거주하던 소수민족인 오환(烏桓)과 손을 잡고 재기를 도모하려 하였다.
그러나 때는 너무 늦었다. 그 넓은 땅도, 훌륭한 모사도, 용맹한 장군도, 인심도 다 원씨를 떠나버린 후였다. 조조는 원씨의 잔존세력을 일소하기 위해 207년 5월 북방 원정군을 출발시켜 오환의 근거지인 유성(柳城:현재 요령성 朝陽市 南郊)을 공격했다. 여기서 패한 원씨 형제는 요동태수 공손강(公孫康)의 근거지로 피신했으나 공손강은 두 형제의 목을 베어 조조에게 바쳤다. 이로써 조조는 화북통일 작업에 종지부를 찍었다.

병력과 군량의 우세함만 믿고 자만했던 원소

필자가 관도의 전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삼국지”와 전혀 상관이 없는 남북조 말기 사람인 안지추가 쓴 “안씨가훈”(顔氏家訓)에 나오는 한 구절을 읽으면서부터였다. 그는 남조 양(梁)나라에서 벼슬살이를 시작한 이후, 남북으로 다섯 왕조를 전전하면서 변화다극한 난세를 고뇌 속에 보내면서 앞으로 자기가 살아온 만큼이나 난세를 또 다시 살아가야만 하는 자손들에게 뼈저린 충고를 남긴 것이다. 그가 자손, 아니 바로 우리에게 들려주는 충고 가운데 지식인이라면 이렇게 행동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한 표본이 된 사람이 바로 이 관도의 전투에 참여했던 진림(陳琳:孔璋)이라는 문인이었다.

진공장은 원소 밑에 있을 때는 글을 지을 때 조조를 승냥이와 이리(豺狼)라고 부르더니 위(魏)에서 격문을 지을 때는 원소를 뱀과 살무사(蛇途)라 지칭했다. 이는 시군(時君)이 명한 바 있어서 스스로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문인의 거환(巨患)이다. 마땅히 조용히 그 입장을 삭이는 일에 힘쓸진저.

안지추는 여기서 거창하게 지식인의 지조 같은 덕목을 이야기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지식인은 그가 모시는 주군의 특정 목적에 의해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구사되는 경우가 많다. 국가도 정권도 언제 어떻게 바뀔지 그 어느 누구도 장담하지 못하는 난세를 살아가는 지식인은 가능하면 생명을 위협할 덫에서 한 발짝이라도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생명을 보전하고 가문을 이어갈 수 있는 처세의 요체라는 것이다. 진림은 원래 하진 밑에서 주부(主簿)라는 관직에 있던 자였는데 하진이 환관을 주살하려 할 때 태후의 편을 들다 하진의 미움을 사 기주에 있던 원소에게 몸을 기탁하였다. 그후 원소의 문장을 담당하던 그는 200년 2월 원소의 남정군에 종군하면서 원소를 위하여 조조를 토벌하는 격문을 썼던 것이다. 명문장가로 알려진 그는 격문에서 조조와 그의 아버지, 할아버지까지 3대를 사정없이 욕하였다. 그것을 읽은 조조는 너무도 분한 나머지 모골이 송연하여 식은 땀을 흘렸다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원소가 패하자 기주를 함락시킨 조조는 진림을 붙잡았다. 조조는 그에게 큰 책망은 하지 않고, “경이 옛날 원소를 위하여 글을 써 보낼 때, 나의 죄상을 까발리는 것은 상관하지 않겠지만 어째서 위로 아버지와 할아버지에게까지 그렇게 심한 욕을 하였다는 말인가?”라고 힐난하였다. 진림은 “화살촉이 시위에 있으면 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활에 장전된 화살촉처럼 시키면 할 수밖에 없는 문인의 애환을 말한 것이다. 좌우에서는 그를 살해할 것을 권했으나 조조는 그 재주를 아껴 더 이상 죄를 묻지 않았다. 진림은 후에 건안칠자(建安七子)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면서 글을 쓰거나 격문을 지을 때마다 초고가 완성되면 조조에게 보여주었다고 한다. 조조는 일찍이 두풍(頭風)이 있어 누워서 진림의 글을 읽다가 기뻐 일어나며 “이 글이 내 병을 낫게 했다”며 몇 차례나 후사하였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조조의 인재지상주의 임용 철학을 읽을 수 있다. 조행에 약간의 문제가 있어도 능력이 있으면 문죄하지 않는 그의 사상은 다음의 이야기에서도 드러난다. 즉, 관도의 전투가 끝났을 때 원소가 버리고 떠난 도서안건(圖書案件)중에서 한 묶음의 서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조조 진영에 있던 사람들의 편지로 조조가 곤궁에 처해 있었을 때 몰래 원소에게 보낸 비밀편지(密信)들이었다. 당시 어떤 사람은 이런 행위야말로 투항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엄중하게 조사하여 그 당사자를 가려내어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조조는 그 조사를 중지시키고 “원소의 강력함에는 나도 역시 앞날을 보장할 수 없었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들이랴!” 하며 이들 편지를 모두 태워 없애도록 하고 일절 추궁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분소밀신’(焚燒密信) 사건이다.

조조의 임용철학은 ‘인재지상주의’

조조의 이와 같은 행동과 달리 원소는 자신의 일가 친족 외에는 신용하지 않았다. 장자 원담을 청주자사로, 중자 원희를 유주자사로, 생질인 고간을 병주목으로 임명하는 등 그 일문의 사람들로 지방을 지키게 한 것을 보고 저수는 “반드시 화의 시작이 될 것”이라며 간언했지만 원소는 듣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재능있는 인물을 시기하고 무엇이든 혼자 결정한 것이 조조와의 경쟁에서 참패한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였다. 그러나 “머리를 빌릴 수 있지만, 건강은 빌릴 수 없다”며 용인(用人)의 중요성만 강조한 뒤 조깅에만 매달렸던 전 대통령 K씨가 결국 우리를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던 것은 무엇으로 설명할까? 용인에도 고도의 두뇌가 필요한 것이 아니던가?

화북통일 아니, 천하통일의 분수령이 되었던 전투의 현장이었던 관도는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여행 안내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관도라는 지명은 B.C. 361년 전국시대 위(魏)나라 혜왕(惠王)이 만든 인공의 운하(일명 古鴻溝)인 관도수에서 비롯된 것이다. 관도는 현재 정주시(鄭州市) 산하 중모현(中牟縣) 소속으로 정주와 개봉 사이를 잇는 정변공로(鄭薦公路)를 정주에서 출발하여 33㎞ 정도 달리면 도달하게 된다. 중모는 황하의 중류와 하류의 경계선이 되는 도화욕(桃花頒) 동남에 위치한 광활한 평야지대이다. 이곳은 원래 예주(豫州)에 속하였고, 삼국시대 때는 하남군(河南郡)에 속했다. 중모대미(中牟大米)와 마늘(白皮大蒜)·씨없는 수박(無尸西瓜) 등이 주산이다.

관도는 중모 현성 동북 2.5㎞ 지점에 있는 관도교촌(官渡橋村) 근방이라 한다. 관도수는 원래 이곳을 흘러 다리가 놓이고 마을의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청나라 초기에 편찬된 “중모현지”(中牟縣志)에는 ‘강을 따라 언덕이 연이어 있는 것은 바로 조조가 쌓은 보루의 흔적’(沿河崗阜綿亘 當是曹壘遺址)이라 하였지만, 관도수는 이미 명나라 시대에 말라버렸다고 한다. 관도교촌에서 서북 8㎞ 지점에 곽장(禱庄)이라는 마을의 서북편 밭 가운데 높이 3m의 구릉이 있는데 이곳 주민들은 이것을 원소강(袁紹崗)이라 부르고 있으니 원소의 본영 유지임을 알리고 있다.
1 991년 2월 필자는 개봉 지역을 답사하고 정주를 거쳐 낙양으로 가는 길에 관도를 한번 스쳐 지나간 적이 있다. 관심이 각기 다른 30여명이 함께 여행하는 길이라 관도를 둘러볼 계제가 아니었다. 아쉽지만 후일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는데 문득 8년여의 세월이 지났다. 관도 전투의 현장을 답사하겠다는 생각으로 필자는 1999년 여름 한국위진남북조사학회 회원들과 함께 정주를 출발하여 관도에 도착하였다.
‘왕사망망’(往事茫茫)이라던가, 지나간 일들은 멀고 아득하게 마련이다. 특히 관도의 흔적은 더욱 그러하다. 이 지역이 바로 황하의 상습적인 궤결(潰決)지역이라 그 전투로부터 1,800여년이 지난 지금은 옛날의 흔적 아니, 관도라는 지명이라도 남아 있다는 것마저 가상할 정도이다. 특히 전투 당시 황하는 백마의 북동으로 흐르고 있었지만 여러 차례의 황하의 범람으로 하도가 바뀌어 남쪽으로 몇 십리 이동하다 보니 원래 황하 남안에 있던 백마·연진 두 곳은 현재는 황하 북안이 되어 있다. 지금의 관도는 비옥한 평야가 펼쳐져 있어서 이곳이 왜 싸움터가 되어야만 했는지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돈독 오른 중국인들도 황토물이 수백번 휩쓸고 지나가 버린 이곳에서 농사짓는 것 외에는 할 만한 일이 별로 없는 것 같았다. 관도교촌이 끝나는 지점에 ‘관도지전유지’(官渡之戰遺址)라고 쓴 팻말이 있고, 그곳에서 쭉 뻗은 길로 약 1㎞ 지점의 옥수수밭 속에 콘크리트 건물 하나를 지어놓았을 뿐이다. 건물 벽면에 당시 전투도(戰鬪圖)를 그려 놓은 것이 고작이다. 건물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어 들어가 보기는 했으나 입장료가 너무 아깝다. 관도에는 옛 전장은 감추어진 채 7월의 강렬한 태양만이 옥수수밭 위로 작열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렇게 옛 싸움터의 많은 유적들은 그 모습을 감추었지만 이 부근 몇몇 마을 이름은 아직도 그 옛날 관도의 전투를 떠올리게 한다. 관도교촌에서 1㎞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원소의 전진기지였던 수궤촌(水潰村:당시의 臨櫃坡) 사이에 있는 작은 마을 축록영(逐鹿營)은 원소와 조조가 이곳에서 한 마리의 사슴(天下)을 얻으려고 다투었던 일이 그 이름에 그대로 표현되어 있다. 또 가로하(賈魯河) 북안(北岸), 사철 푸른 송림이 우거진 곳이 바로 조조군이 원소군을 대파한 진지의 하나였는데 조공대(曹公臺)라 부른다. 이곳에 말을 타고 전투를 지휘하는 조조의 동상을 세움으로써 사람들은 그의 승리를 확인해 주고 있다. 관도교촌 동쪽 끝에 있는 관도소학교 아이들이 학교 옆 수박밭에서 관도의 전투 때 썼던 것으로 보이는 녹슬고 낡은 화살촉을 주워 나무토막에 붙여 장난감으로 가지고 놀기도 한다는 여행기를 읽은 적이 있다. 관도의 전투라는 것이 까마득한 옛날의 일이지만 이곳 주민들은 여전히 그것과 연관짓고 살고 있는 것이다.
관도의 전투에서 원소는 패하였고, 승리를 거둔 자는 물론 조조였다. 그가 얻은 것은 과연 무엇이었던가? 이 문제와 관련하여 “세설신어” 한 대목을 또 다시 인용해 보자.

위나라 견후(甄后)는 총명하고 자색이 예뻤다. 원래 원희(袁熙)의 처가 되어 매우 사랑받고 있었다. 조공(曹公:曹操)이 업군(橙郡)을 도륙하자마자 견후를 불러오라고 급히 명령했다. 좌우 신하들이 “오관중랑(五官中郞:曹丕)께서 이미 데리고 가 버렸습니다”라 하자 조공은 “금년 적을 격파한 것은 바로 그 놈을 위한 것이었구만!”이라고 탄식했다.

위의 문장이 실려 있는 “세설신어”의 ‘혹닉편’(惑溺編)은 사랑에 홀려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 놓은 것이다. 사랑에는 국경도 체면도 없다고들 하지만 부자가 한 여자를 두고 벌인 이런 경쟁은 사실 추함의 극치다. 이 문제의 여인은 원소가 일찍이 그의 가운데 아들인 원희를 위하여 맞아들였던 견씨라는 여인이었다. 그는 여러 가지 면에서 비범하고 재색이 뛰어난 여인이었다. 그는 한의 태보(太保) 견감(甄甘)의 후예로 대대로 2,000석(즉 太守)을 배출하던 가문에서 태어났다. 세살 때에 아버지를 여의었지만 집안 사정은 그런대로 괜찮아 쌓아둔 곡식이 있었다. 천하가 전란에 휩싸이고 기근이 들자 그는 어머니를 설득하여 집에 쌓아둔 곡식을 친족 향리에 풀어 칭송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문제는 그의 이런 선행 때문이 아니라 재색이 비범했다는 데 있었다. 원희가 유주(幽州:현재의 北京) 자사로 임지에 가 있을 때 그는 업성에 남아 원소의 부인 유씨(劉氏)를 봉양하던 중 관도 전투 결과 기주가 조조의 손아귀에 들어가자 이렇게 조씨 부자의 집중적인 표적이 된 것이다.
수많은 시간과 생명을 희생시키고 승리를 거둔 관도 전투의 최대 전리품은 다름아닌 바로 견씨였다. 그를 차지한 자는 그 전쟁에 목숨을 걸고 앞장서서 지휘했던 조조가 아니라 그를 따라다니기만 했던 아들 조비(曹丕)였다. 견씨만이 아니었다. ‘사슴을 쫓는 자는 토끼를 돌아보지 않는다’(逐鹿者不顧兎)는 말처럼 황제위를 쟁취하기 위해 수많은 비난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조조에게 주어진 것은 위왕(魏王)이라는 칭호뿐이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황제위를 차지한 자는 바로 그에게서 미인 견씨를 낚아채간 아들 조비, 그 녀석이었다. 그러고 보면 20년간 고생만 한 조조가 얻은 것은 별로 없어 보인다. 지게 품팔이로 애비가 번 돈으로 아들이 벤츠를 타지 않는가? 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는 것이 고금의 법도가 아니던가?

싸움은 조조가 하고 전리품은 조비 품으로

이제 축록을 위해 조조가 흘린 피와 땀의 흔적을 추적해 보자. 고래로 나라가 바뀔 적에는 정주(征誅)와 선양(禪讓)의 두가지 방법이 있었다. 권력 있는 신하가 나라를 탈취하는 것을 ‘찬시’(簒弑)라고 칭하는데, 이 말을 듣는 것은 누구나 경계하는 사항이라 감히 이 방법을 쓰려 하지 않았다. 왕망(王莽)은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을 보좌한 것을 핑계로 섭정하다 황권을 쟁취하였다. 조조도 한의 천하를 자기 것으로 하고 싶었으나 찬시라는 이름을 뒤집어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에 선양의 형식을 빌려 천하를 탈취하려 했던 것이다.
조조는 208년 3공이 폐지된 후 신설된 승상에 취임하고부터 점차 자파의 관료나 군인으로 조정을 채워갔다. 그의 아들 조비는 211년 오관중랑장이 되어 자기의 관속을 임의로 채용하는 등 실제 부승상이 되었다. 212년 조조가 업성으로 돌아오니 그곳이 사실상 정청(政廳)의 소재지가 되었다. 같은 해 한 고조 시대 소하(蕭何)의 고사에 따라 찬배불명(贊拜不名:임금 앞에 朝見 行禮의 절을 唱할 때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 입조불추(入朝不趨:군주 앞에서 경의를 표하고 급히 가는 것이 통례이지만 그렇지 않아도 좋다는 것), 검리상전(劍履上殿:검과 군화를 신고 殿上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의 예우가 주어졌다.

213년 5월에는 이미 크게 확대되어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막대한 힘을 가진 기주 관내의 10군으로 위국(魏國)이 성립되자 조조는 위공(魏公)이 되었다. 이때 조조는 한나라로부터 특별한 공신에게 주어지는 물건인 구석(九錫:車馬 衣服 樂器 朱戶 納階 虎賁 斧鉞 弓矢 錮竣)을 받게 된다. 조조는 ‘세번 사양’(三讓)한 후 신하들의 권진에 의해 수령했다. 7월에 위국의 사직과 종묘를 세우고 헌제는 조조의 세 딸을 귀인으로 삼았다. 가운데 딸은 후에(215) 황후가 된다. 막내딸은 성년이 될 때까지 위국에 대기했다. 한과 위가 이렇게 친족관계를 맺은 것은 순이 요의 2녀를 취한 것과 같이 장래 행해질 정권이양이 폭력에 의한 것이 아니고 친연에 의한 것이라는 구실을 삼기 위한 것이었다. 216년 5월 헌제는 조조를 위공에서 위왕으로 승격시켰다. 조조는 세차례나 사양하는 상서를 올린 후 수락했다. 217년 4월에는 위왕이 천자의 정기(旌旗)를 세우도록 했으며 출입할 때 경필(警戡:먼저 앞에서 소리지르는 것)을 허락받았다. 10월에는 십류(十旒)의 면류관을 쓰고 금근차(金根車)를 타고 육마(六馬)를 몰고 오시부차(五時副車)를 마련하게 하고 오관중랑장인 조비를 위태자로 했다.
후세의 예로 볼 때 조조는 수개월이면 어려움 없이 황제위에 즉위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갔었다. 그러나 220년 정월 23일 병사할 때까지 그가 천자에 오를 수 없게 한 객관적인 정세의 흐름이 있었다. 관우가 형주로 진출하고 유비가 한중을 넘보고 있었고, 손권도 불온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헌제의 근신들이 허창에서 병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아직 인심이 한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정국의 흐름이었다. 이에 조조는 사마의의 계략에 따라 오와 연맹하여 관우를 협격하도록 하니, 219년 11월 형주를 탈환하고 220년 정월 관우의 목이 그 앞으로 보내져 왔다.
하늘은 결국 조조에게 천자의 자리를 허락하지는 않았다. 그나마 하늘이 망나니 조조에게 내린 벌칙이런가? 그가 죽자 그의 태자 조비가 승상에 취임하고 아버지가 진행하다 남겨 놓은 찬탈 과정의 마지막 부분을 처리하게 된 것이다. 조비가 선양이라는 형식을 통해 새수(璽綬)를 받고 황제에 즉위한 것은 그해 12월29일이었지만, 그에 앞서 헌제는 황제위를 넘기는 조서 및 책서(冊書)를 세번이나 내렸는데도 조비는 모두 표를 올려 사양하고 새수를 다시 돌려보냈다. 뿐만 아니라 신하들이 황제위에 오를 것을 권한 것이 열번이나 되었는데 조비는 모두 영을 내려 사양하였다. 공경들이 허창 남방 번양(繁陽:현재 繁城)에 단(壇:受禪臺)을 만들고 아뢰니 비로소 즉위하였다. 이런 과정은 모두 거짓에서 나온 것이지만 이처럼 조비가 감히 갑자기 황제위를 받으려 하지 아니한 것은 아직 ‘읍양(揖讓)의 유풍’이 있었던 때문이었으니 전 대통령 J씨보다 한결 양심적이었다 할 것이다.

갈족(鞨族) 출신으로 오호십육국시대 후조(後趙)를 창업한 석륵(石勒)은 조조와 사마의 부자는 남의 고아와 과부를 속이고 호려 천하를 취한 자라고 매도했지만, 두 사람의 공과(功過)가 같다고 할 수는 없다. 조씨는 한의 조명이 거의 끊어진 이후에 병을 일으켜 힘써 정벌하고 국가를 경영하여 한의 조명을 20여년이나 늘린 연후에야 한을 대신하였다. 그러나 서진(西晉)을 세운 사마씨는 위나라가 아직 쇠하지 않았는데도 기회를 틈타 대권을 훔쳐 한 황제를 폐하고 한 황제를 죽이면서 그 제위를 찬탈하였던 것이다.

가식적인 선양극을 통해 황제위를 빼앗은 조비

황제위의 쟁탈을 양위(讓位)로 포장하는 소위 선양의 형식은 왕망에서부터 시작되었지만 정형화된 형식으로 굳어진 것은 역시 조조부터였다. 위나라가 이런 국면을 개창한 후 700∼800년간 십 수 왕조가 창업할 때마다 이 선양의 형식을 채용하였다. 이렇게 후세 왕조가 정권교체시에 이런 방식을 취하기는 했지만, 그 과정을 보면 점차 걸리는 시간이 단축되고, 탈권자의 행위가 더욱 뻔뻔해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앞에서 보았듯이 이런 선양의 과정에서는 항상 실력자의 거듭된 고사(固辭)라는 절차가 따르게 마련이다.
사실 직위나 작위가 주어질 때마다 고사를 거듭하지만 전 대통령 J씨가 그랬듯이 실제로는 자기 스스로 계급장을 다는 것이니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순이 우(禹)임금에게 위를 넘기는 소위 ‘진선양’(眞禪讓)과 달리, 이런 사기극을 ‘선양극’(禪讓劇) 혹은 ‘가선양’(假禪讓)이라 한다. 조조는 헌제를 모셔와 실제로 정권을 장악한 200년부터 그가 죽은 220년까지 20년간이나 이런 조작극을 연출하는 지루한 세월을 보냈다. 1980년 J씨가 소장에서 중장을 거쳐 대장으로, 다시 대통령까지 되는 데 1년이 채 안 걸린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긴 세월이었다. 조비가 헌제에게서 황위를 선양받은 이후 사마씨의 서진이나 동진시대 안제(安帝)에게서 선양받은 환현(桓玄)까지 전 황제를 내쫓되 죽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유유(劉裕)가 송(宋)나라를 세우면서 동진의 공제(恭帝)를 죽인 이후, 남제(南齊)·양(梁)·진(陳)과 북제(北齊)·북주(北周)·수(隋)나라가 나라를 차지하면서 모두 전 황제를 죽인 것은 점차 그 과정이 살벌하게 변한 까닭이다.

조조는 분명 관도의 전투에서 원소를 패사시키고 승리를 거두었다. 그에게 상당한 전리품이 돌아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생애가 반드시 성공적이었다고 결론짓기는 힘들 것이다. 그가 죽은 후 추상같은 역사적 심판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제의 승리자가 반드시 오늘의 승리자가 되란 법은 없는 것이다. 원래 평가란 그 평가하는 시대 성격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는 오늘도 수많은 학자들의 검증의 대상이 되고 있고, 아직도 그에 대한 평가는 분분하다. 중국 역사상 조조만큼 그 평가가 엇갈리는 사람도 드물지만, 그가 훌륭한 인간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같다.
물론 인간이 인간을 평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모든 면이 노출되어 있는 사람들, 특히 정치인을 평가하는 것은 더욱 그렇다. 인간이 다 같이 공유하는 욕망과 가장(假裝)을 그들에게만 청교도처럼 절제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잘못이다.
따라서 탈선한 젊은 정치인들에게만 유독 근신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우리의 과도한 희망일지 모른다. 주위에서는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외침을 아직도 참말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지만, 필자는 당초 그들에게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들 일부의 행태를 살펴보면 지난 날들이 그랬고, 지금 하고 있는 짓들이 그러하고, 또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기 때문이다. 총학생회장이나 운동권 시절부터 권력만이 그들의 운동목표였다는 것도, 알맹이보다 껍데기의 목소리가 크다는 사실도 익히 알면서도 민초들이 늘상 그래왔던 것처럼 필자도 한때는 그들에게 속았다. 서로 때묻은 사람들끼리 얽히고 설켜 사는 것이 이 세상이라 치부해 버리기에는 아쉬움이 많다. 그들을 평가할 입장에 있지 않은 필자는 가급적 언급을 삼간 채 그저 그들의 행동들이 낱낱이 기록되기를 바랄 따름이다.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는 것은 우리 세대만의 소임은 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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