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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황에서 만난 혜초 (문화일보 2013년 09월 11일(水)

둔황에서 만난 혜초

[오피니언] 글로벌 에세이 전재원/駐시안 총영사

 

 

 

실크로드의 기점 시안(西安)을 출발해 란저우(蘭州)를 지나 하서회랑(河西回廊)을 따라 가면 중국과 서역을 잇는 둔황(敦煌)이 나온다. 둔황은 실크로드의 관문으로 서역과 중국과의 교역 및 문화 교류가 활발하게 이뤄진 오아시스 도시로 유명하다. 둔황 하면 떠오르는 세계 최대 규모의 천불동-막고굴(莫高窟·사진)에서 바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필사본이 발견됐다. 이 필사본은 이후 프랑스 박물관에 전시됐고 혜초와 둔황이 전 세계에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혜초는 719년 열다섯 어린 나이에 중국으로 가 5년간 수학하고, 723년 광저우(廣州)에서 뱃길을 따라 인도로 건너갔다. 인도 불교 8대 성지를 순례한 혜초는 서쪽 간다라를 거쳐 페르시아와 아랍을 지나 다시 중앙아시아를 걸어 파미르 고원을 넘었다. 그리고 카슈가르, 둔황을 지나 당나라 수도 장안(長安·오늘날 시안)으로 귀환했다. 장장 4년간 약 2만㎞에 걸친 대장정이었다. 그간의 보고 들은 것들을 하나하나 정리한 견문록이 바로 ‘왕오천축국전’이다.

혜초는 구법여행을 떠났지만, 여행에서 불교를 넘어 중앙아시아의 정치, 경제, 사회는 물론, 의식주와 같은 일상생활, 언어와 지리, 기후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자신이 보고 느낀 바를 기록했다. 이 때문에 왕오천축국전은 8세기 인도불교 및 서역 각지의 종교문화, 풍속지리, 역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혜초가 활약했던 8세기의 당나라 수도 장안은 인구 100만 명이 넘는 대도시였다. 당시 신라 유학생 중 최치원과 같이 당나라 과거 시험에 합격해 당나라 관리가 된 자가 50여 명이나 됐을 정도이니, 당시 당나라의 포용성과 개방성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만하다.

혜초는 국제적인 개방의식을 지닌 승려이자, 시대를 앞선 문명탐험가로서 수많은 외국인 중에서도 매우 특별한 존재였다. 당나라 황실과 불교계의 신임을 받아 황제의 명으로 장안 인근에 있는 ‘선유사’에서 기우제를 주관할 정도로, 당대 최고 지식인으로 존경받았다.

현대의 많은 학자가 혜초를 ‘한국 최초의 세계인’이라 할 만큼 혜초는 세계 역사 속에 우뚝 선 자랑스러운 글로벌 인재였다.

길은 인간에게 희망을 꿈꾸게 했으며 교류와 소통을 낳았다. 우리는 세계와 교류하고 소통한 노력 덕분에 한류라는 세계 속의 우리 브랜드를 만들어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우리의 것과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그 속에서 또다시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융합과 통섭의 시대정신에 맞춰 새로운 길을 가야 한다.

얼마 전 박근혜 대통령은 중국 국빈방문 여정 중 시안을 방문했다. 특히 대통령이 중국 문화의 자랑인 진시황병마용박물관과 중국 서부지역의 대표적 우리 진출 기업인 삼성전자 시안 반도체공장 건설 현장을 방문함에 따라 한·중 양국 간 경제, 역사문화 교류가 더욱 깊이 있게 발전해 나갈 것임이 예고돼 그곳에서 새로운 형태의 한류 붐이 기대된다.

혜초는 15세의 어린 나이에 실크로드를 걸어 미지의 세계로 떠났고, 그가 남긴 ‘왕오천축국전’은 오늘날 매우 귀중한 사료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혜초가 가진 도전 정신과 창조 정신은 당시 우리에게는 새로운 길을 알려 주었으며, 그 뒤를 이어 많은 후손들이 세계 속으로 뛰어들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다.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경제 침체와 청년 실업은 우리에게 큰 기회이자 도전일 수 있다. 그리고 그 기회는 우리가 글로벌 시대에서 진정한 세계인이 돼 혜초와 같이 창조정신과 도전정신을 발휘할 때 찾아온다고 생각한다. 내물왕의 7대손인 대세는 그의 친구인 승려 담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신라 산골짜기에서 인생을 마친다면, 저 넓은 바다를 모르는 연못의 물고기나 저 울창한 숲을 모르는 새장의 새와 다를 것이 무엇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