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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 시대 질문이요 (barksan 2009.06.03 10:37)

춘추 시대 질문이요

 

Ⅰ. 춘추시대(春秋時代)의 태동

 

춘추전국시대는 주(周)나라가 수도를 동쪽 낙양(洛陽)으로 천도한 기원전 770년에서 진(秦)이 중국을 통일한 기원전 221년까지의 혼란기를 말한다. 춘추시대(春秋時代)는 기원전 770년 시작하여 한(韓), 위(魏), 조(趙)가 진(晉)을 3분하여 독립한 기원전 403년으로 끝난다. 춘추시대라는 명칭은 공자가 저술한 ‘춘추(春秋)’에서 유래하였다. 전국시대(戰國時代)는 춘추시대의 종말을 시점으로 하여 진(秦)의 중국통일을 끝으로 한다.1) 전국이라는 명칭 역시 ‘전국(戰國)’이라는 책에서 유래하였다.

 

Ⅱ. 춘추오패(春秋五覇)

 

춘추시대 형세도춘추오패라는 말은 춘추시대 열국(列國)의 패권을 잡은 다섯 제후를 가리킨다. 주 왕실의 권위가 실추되고 각 중원제후국이 서로 침략을 일삼고 있을 때 이들이 오랑캐라고 멸시하던 초(楚)가 남방에서 강성해지자 제후들은 제국을 다스려 봉건제를 유지하기 위한 강력한 권력을 필요로 하였다. 그러나 기존의 이러한 역할을 하던 주왕은 권위가 실추되어 존왕양이, 계절존망(尊王壤夷, 繼絶存亡)2)이라는 말 아래 주왕을 대신하여 만이(蠻夷)를 토벌하는 패자가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두 번째 패자 진 문공(晉文公) 이후 패자의 성격은 변질하여 중원제후가 아닌 남방의 만이(蠻夷)들도 패자를 칭하게 되어 존왕양이의 성격도 희미해져가고 점점 더 주왕을 핍박하고 주 왕권을 부정해 나갔다. 춘추시대의 다섯 패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3) 여기서는 조기(趙岐)의 설을 들어 제 환공(齊桓公), 진 문공(晉文公), 진 목공(秦穆公), 초 장왕(楚莊王), 송 양공(宋襄公)으로 한다.

 

1. 제환공(재위 BC 685 ~ BC 643)

 

환공은 최초로 패자 칭호를 얻은 제(齊)의 임금이다. 관중4)을 중용하여 재상으로 삼고 정치, 군사, 경제 개혁을 단행하였으며 '존왕양이'를 주창했다. 환공은 동해의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제나라를 강국으로 발전시켰으며, 산융(山戎)을 정벌하여 연(燕)을 구하고 적나라를 평정하여 형(邢), 위(衛)를 지켜 주었다. 그리고 기원전 656년 노(魯), 송(宋) 등 8개국 연합군을 이끌고 지금의 하남지역인 소릉에서 남방의 초(楚)를 격퇴하여 초의 북진을 저지함으로서 패자의 지위를 얻었다. 기원전 651년, 환공은 규구에서 노(魯), 송(宋), 정(鄭), 위(衛), 허(許), 조(曹) 등의 제후들과 회맹하면서 패자의 지위를 굳건히 하였다. 제환공은 43년의 재위기간 동안 26차례의 회맹을 주재하였다. 그러나 관중사후 관중의 유언을 무시하여 자신이 등용한 간신들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었고 후에 내란이 일어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2. 진문공(재위 BC 635 ~ BC 628)

 

부친인 헌공 사후 치열한 내전을 겪으면서 19년간의 망명생활을 겪으면서 진 목공(秦穆公)의 도움을 받아 62세에 군위에 올랐다. 군위에 오른 후 조쇠, 호외, 선진 등의 현신을 등용하여 국력을 증가시켰다. 이후 주양왕이 왕실의 내란으로 정나라로 피신하자 주양왕을 도와 난을 평정하였다. 이어서 기원전 632년 송(宋)의 원조요청을 받아들여 북진을 노리는 초(楚)를 성복전투5)에서 크게 이겨, 전후 천토에서 주양왕을 맞아 제후들과 회맹을 맺었다. 그리하여 문공은 춘추시대 두 번째 패자가 되었다. 문공은 비록 8년간 재위하였으나 재위기간 동안 현신을 많이 등용하여 국력을 증강시켜 사후에도 패업이 계속되었다.

 

3. 진목공(재위 BC 660 ~ BC 621)

 

목공은 이름이 임호이며 성은 영으로 진(秦) 역사상 가장 유명한 군주가 되었다. 재위기간 중 국정을 정비하고 지금의 감숙, 영하지방까지 세력을 확장하여 발전하기 시작했다. 재상 백리해와 건숙을 등용하여 국정을 정비하였고 동으로는 하서지방을 차지하고 서로는 서융(西戎)을 정벌하여 패자가 되었다. 목공은 신분고하 국적에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여 백리해와 건숙을 얻을 수 있었으며 망명생활 중이던 진 문공(晉文公)을 후하게 대접하였다. 진 문공의 동생인 진 혜공에게 두 번이나 속으면서도 흉년이 든 진(晉)나라 백성을 위해 곡식을 빌려주었다. 그러나 죽으면서 수백명을 같이 순장하여 사기의 저자인 사마천으로부터 혹평을 받았다.

 

 

4. 초장왕(재위 BC 614 ~ BC 591)

 

성은 웅이고 이름은 여이다. 재위 초 간언하는 자는 참수하겠다고 말하면서 삼년동안 국정을 제쳐두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으나 오거와 소종을 간언을 받으면서 부패한 신하를 숙청하고 간언한 신하를 중용하면서 국력을 신장시켰다. 기원전 606년 낙양부근까지 쳐들어 온 융(戎)을 토벌하고 낙수 변에 군대를 진주시켜 주왕실을 위협하였다. 그 후 기원전 597년 정(鄭)과 송(宋)을 굴복시키고 필의 전투6)에서 진(晉)에게 대승하면서 패자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그는 존왕양이와는 상관이 없는 인물이었으나 진(陳), 정(鄭) 등의 나라를 압박하면서도 멸망시키지 않아 춘추오패 중 하나로 일컫어진다.

 

5. 송양공(재위 BC 650 ~ BC 637)

 

성은 자(子)이며 이름은 자보(慈父)이다. 배다른 형 목이를 재상으로 삼고 바른 정치를 펴 나라를 안정시켰다. 기원전 642년 제 환공(齊桓公)이 죽기 전 셋째 아들인 소의 뒤를 돌봐달라는 부탁을 받아 환공 사후 제후들의 연합군을 이끌고 두 차례나 제나라에 들어가 후계자 쟁탈전을 진압하여 소를 옹립하여 제의 군위에 올렸다. 이 일은 양공의 야심을 일으켜 목이의 간언을 무시하고 제후들과 회맹하려 하였으나 초의 방해로 실패했고 오히려 초 성왕이 그를 체포하였다가 강화조약을 맺고 풀어주었다. 돌아온 양공은 초의 속국처지였던 정(鄭)을 치고자 군대를 일으켜, 초나라와 홍수에서 일전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나 양공은 헛된 인정7)을 베풀어 싸움에서 대패하였고 그 상처로 2년 후 사망하였다. 양공은 비록 초에게 대패하였지만 나름대로 회맹을 주재하였고 주왕실에 충성을 바쳤기 때문에 춘추오패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III. 춘추전국시대의 종말

 

춘추시대는 기원전 453년 삼진(三晉) 즉 한(韓), 위(魏), 조(趙)가 진을 삼분하며 독립국이 되면서 끝났다. 전국시대 역시 진(秦)이 열국을 멸망시키면서 기원전 221년 종말을 고했다. 진왕 정은 통일 후 스스로 시황제라 칭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정책을 추진하여 법령의 정비, 전국적인 군현제 실시, 문자 ·도량형 ·화폐의 통일, 전국적인 도로망의 건설, 구 6국의 성곽 요새의 파괴 등을 강행하였다. 또한 만리장성을 쌓아 흉노의 침입을 막고 아방궁을 지었다. 그러나 사상의 통일을 위해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단행하고 대규모 공사를 벌이는 등 백성들의 불만을 샀다. 기원전 210년 지방 순시 중 죽었으며 그가 죽고 내분이 일어나 진나라는 통일된 지 16년 만에 망하고 말았다. 이 후 항우와 유방의 초한전쟁을 거쳐 통일제국 한(漢)이 성립하였다.

 

 

IⅤ. 춘추전국시대의 사회

 

춘추전국시대는 열국이 서로 경쟁하면서 부국강병을 추구하던 시기였다. 그로 인해 관료제의 정비와 봉건제에서 군현제로의 변화를 볼 수 있고, 하극상의 풍조가 만연하였으며 철기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생산력 또한 증대하였다. 전국시대에는 거대도시가 등장하고 상공업이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1. 국군(國君)의 암살과 추방

 

주(周)대의 봉건제도는 주왕을 중심으로 하여 제후들이 주왕을 떠받들었다. 그러나 춘추시대에 이르러 봉건제가 동요하여 주왕과 제후의 관계가 역전되는 경우가 종종 나타났다. 춘추(春秋)의 경문에 의하면 신하에 의한 주군의 암살을 “그 군(君) 모(某)를 시(弑)하다”로 기재하고 있는데 이러한 예가 25번이나 보인다. 또 “시하다”로 기재되어 있지 않은 경우도 분명히 암살된 것으로 볼 수 있는 예가 있어 이것을 합치면 무려 34번에 이른다. 그리고 이런한 경우는 대국과 소국 가릴 것 없이 거의 모든 국가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처럼 춘추시대에는 군주의 암살이나 추방이 빈번히 일어나 군주의 지위는 극히 불안정한 것이었다. 이렇게 군주권위가 저하하고 있는 다른 편에서는 신하측이 착실히 권력을 쌓아가고 있었다.

 

 

2. 대부(大夫)와 사(士)의 대두

 

춘추시대의 제국에서는 거의 예외없이 신하인 대부나 사의 대두가 보이며 그 가운데서도 하위인 자가 국정의 실권을 장악하는 경향이 일어나고 있다. 특히 이러한 성향은 노(魯)와 제(齊), 진(晉)에서 전형적으로 보인다.

 

노에서는 먼저 노환공에게서 분가한 삼환씨14)에게 국정의 실권이 넘겨지고 나중에는 그 삼환의 가신인 사가 그 실권을 장악하게 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제에서는 공족에서 나뉜 국시와 고씨가 오랫동안 국정을 담당하였는데 이 실권은 나중에 다시 최서와 경봉에게 넘어갔다. 그 최서도 경봉에게 공격당하고 경봉도 제대부에게 공격받아 타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그 뒤에는 전씨가 대두하면서 점차 민심을 얻어 국군의 폐립을 마음대로 하고 대부들을 추방하면서 결국에는 제후의 열에 오르면서 제를 전씨의 것으로 만들었다. 진에서도 제와 마찬가지로 진문공 이후 대부 조순이 권력을 잡았고 후에 난씨 또 나중에는 한, 위, 조, 중행, 범, 지씨들이 국정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들 중에서도 중행과 범씨가 탈락하고 나중에는 한, 위, 조 3씨가 지씨를 멸망시키면서 나중에는 제후로 인정받아 진을 3분하고 만다. 춘추시대는 봉건제가 내부로부터 붕괴되고 새로운 세력이 대두되어 갔고 이 새로운 세력들이 봉건제를 대신하는 새로운 체제를 형성해갔다. 그것이 바로 군현제이다.

 

 

3. 멸국의 진행

 

주대에 봉건된 국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의하면 주가 은을 멸할 때 주와 같은 성의 55국이 있었다고 하고 또한 순자(荀子)에는 주공 단이 71국을 봉건하였는데 그 중 동성이 53국이라 하고 있다. 그런데 춘추대사표에는 춘추의 경과 전에 보이는 209국을 열거하고 있다. 이 가운데 하대(夏代)나 은대의 옛 국과 이민족의 국을 제외한 147국이 주가 봉건한 국을 여겨지는 까닭에 실수효는 훨씬 많았을 거라고 예상된다. 그런데 춘추대사표의 열국강역표에 의하면 춘추시대 가장 많은 나라를 멸한 나라는 초(楚)인데 그 수가 42국에 이른다. 이어 진(晉)이 18국이며 정, 위, 노 등 중원의 희(姬)성 제후국이나 제, 진(秦) 등 이성제후국의 의한 멸국도 많다. 이 멸국의 시기는 대체로 2/3이 춘추중엽에 멸국되고 있다. 춘추시대에 들어서면서 주왕의 권위가 저하됨과 아울러 멸국이 증가하고 이 멸국을 기초로 실력을 축적한 국이 패자로서 출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타국을 멸망하면 당연히 멸망한 나라를 지배하게 두게 된다. 춘추시대에는 이 처리방법으로 대체로 세가지방법이 있는데 첫째가 속국화로서 독립을 인정해 주고 필요에 따라 부역을 제공케 하는 지배형태이다. 두 번째로는 채읍화 인데 이는 국의 독립을 인정치 않고 멸국을 자국 대부에게 채읍으로 주어 지배케 하는 방법이다. 이 두 방법은 모두 기존의 봉건틀 아래 이루어진 것이지만 세 번째 방법인 현(縣)으로서 지배하는 방법은 봉건틀을 벗어난 방법이다.

 

 

4. 현(縣)의 설치

 

진한시대의 현은 군주가 관료를 임명하여 통치하는 직할지인데 춘추시대의 현은 아직 그러한 형태를 지닌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춘추시대의 현은 채읍과 비슷한 측면을 가지고 있는데 예를 들면 진(晉)의 현은 유력한 대부에게 은상으로서 주기도 하고 몇 대에 걸쳐 세습되기도 하는 경우조차 있다. 진의 원(原), 온(溫), 주(州)의 3현 중 원과 온은 한때 조씨에게 세습되고 있다. 그리고 3현 모두 조씨 이외 고, 낙, 극, 난씨 등 당시 유력한 대부에게 관리되고 있는 것이다. 초의 경우도 신현(申縣)의 관리자인 신공은 투씨 등에게 세습시키고 있으며, 또한 일반적으로 현의 관리자는 왕족 출신이 많다.

 

그런데 채읍과는 다른 측면도 발견된다. 먼저 세습된다고 하여도 채읍과 같이 한 대부의 가에 오래도록 보유되는 경우가 드물며 또한 채읍화는 구래의 국의 내부조직에 변화가 없이 행해지고 있지만 현화는 내부조직의 개혁이 수반되고 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진의 과연현이나 초의 권(權), 진(陳), 채의 현화에서 보이는 주민의 이주이다. 이 내부개혁으로 인한 현화에는 군사적 요청이 강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진(晉)에서는 기원전 6세기 후반 49개의 현에서 각각 100승의 전차를 낼 수 있는 능력이 있었음이 강조되고 있다. 또 초에서는 신과 식의 2현에서 징발된 군대는 방위상 중요한 군대로 특별히 ‘신, 식의 사’로 칭해지고 있다. 즉 춘추시대의 진(晉)이나 초의 현은 종래의 국이나 채읍이 군사적으로 재편되어 이러한 현이 진한시대의 현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진(晉)이나 초(楚) 이외의 춘추시대 현은 역사서에 보이는 것이 적어 명확한 것을 알 수 없다. 또한 춘추시대의 현이 곧바로 전국시대의 현으로 이어지는 것의 여부 또한 명확히 알 수 없다.

 

 

 

 

 

춘추제후국들의 기원 및 간개

I. 희성제후국(姬姓諸侯國)

문왕과의 관계

피봉자

국명

봉지

기원(起源) 및 간개(簡介)

장남

백읍고

伯邑考

 

 

주문왕(周文王)은 그의 열 아들 중 무왕(武王) 발(發)과 주공(周公) 단(丹)이 덕이 높고 재주가 뛰어남을 알고 좌우에 두고 자기를 보좌하게 하였다. 그래서 그의 후사를 장자인 백읍고로 세우지 않고 차자인 무왕 발을 세웠다. 문왕이 죽자 무왕이 즉위했을 때는 백읍고는 이미 죽고 없었다.

2남

무왕(武王)

발(發)

 

 

 

3남

관숙선

管叔鮮

관(管)

하남성

정주시

(鄭州市)

주무왕(周武王)이 은(殷)의 주왕(紂王)을 죽이고 은나라의 고토(故土)에 주왕의 아들인 무경(武庚) 녹보(綠父)를 봉하고 다스리게 하면서 그의 동생들인 관숙(管叔), 채숙(蔡叔), 곽숙(霍叔) 세 사람을 삼감(三監)에 임명하여 은나라를 감시하게 하였다. 무왕이 죽고 주나라의 정사를 주공단이 독단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관숙 등 삼감은 무경녹보를 부추겨 반란을 일으키게 한다. 소공(召公) 석(奭)의 협조로 은나라의 반란을 진압한 주공단은 관숙을 죽이고 채숙과 곽숙은 나라 밖으로 추방하였다.

1. 주문왕의 아들들 ( 주무왕의 동모 형제들, 母 太姒)

문왕과의 관계

이름

국명

봉지

기원(起源) 및 간개(簡介)

4남

주공단(周公旦)

노(魯)

산동성 곡부시

(曲阜市)

무왕에 의해 노(魯)에 봉해진 주공단은 무왕이 죽고 어린 성왕을 대신하여 섭정(攝政)을 한 관계로 봉지를 돌보지 못하고 자기의 장남인 백금(伯禽)을 대신 보내어 다스리게 했다. 경공24년 기원전 249년에 망하고 초나라에 편입되었다.

5남

채숙(蔡叔)진(振)

 

채(蔡)

하남성

탑하시

(漯河市)

주공단에 의해 나라 밖으로 추방당한 채숙(蔡叔)은 유랑 중에 죽고 그의 아들인 채호(蔡胡)가 그의 부친의 잘못을 뉘우치며 덕을 쌓고 선행을 행하였다. 주공단이 듣고 채호를 불러 노나라의 경사(卿士) 직을 맡겼다. 채호의 노력에 의해 노나라가 크게 다스려 지자 주공단이 그 공을 높이사서 성왕에게 품하여 호를 채읍에 봉하고 채숙의 제사를 받들도록 했다. 채호가 채중(蔡仲)이다.

후에 초소왕 42년 기원전 447년에 망하고 초나라의 군현이 되었다.

6남

조숙진탁(曹叔振鐸)

조(曹)

하남성 정도시

(定陶市)

주무왕의 동생 숙진탁이 봉해진 제후국으로 도읍은 지금의 산동성 정도시(定陶市)에 있었던 도구(陶丘)였다. 기원전 487년 에 송나라에 의해 병합되었다.

7남

성숙무(成叔武)

성(成)

산동성

영양현

(寧陽縣)

곡부시(曲阜市) 북 20키로 있던 곳으로 후에 노나라에 병합되어 삼환씨(三桓氏)가 세력을 잡았을 때 맹손씨(孟孫氏)의 봉읍이 되었다.

문왕과의 관계

피봉자

국명

봉지

기원(起源) 및 간개(簡介)

8남

곽숙(霍叔)처(處)

 

하남성 임여시

(臨汝市)

은나라를 감시하기 위해 삼감(三監) 중의 한 명으로 봉해 졌으나 관숙(管叔)의 회유로 반란에 참가하였다가 실패로 돌아가자 주공단에 의해 나라 밖으로 추방당하여 유랑생활 끝에 죽었다.

9남

강숙(康叔)봉(封)

위(衛)

河南省 淇縣

은나라 고토의 땅을 주왕(紂王)의 장자인 무경(武庚) 녹보(綠父)에 맡겼으나 삼감의 부추김으로 반란을 일으키자 은나라의 고토를 용(庸), 패(邶), 위(衛) 세 나라로 나누어 그 중 하나인 위(衛) 땅에 강숙을 봉했다. 후에 위(魏)나라의 속국으로 있다가 위원군(衛元君) 재위 때인 진시황 6년 기원전 241년에 진나라가 위(衛)나라의 도성인 조가(朝歌)를 함락시키고 그 땅에 동군(東郡)을 설치하자 위원군은 종족들을 데리고 서쪽으로 달아나 야왕성(野王城 : 지금의 산서성 심양현(沁陽縣) 소재)의 험지에 의지하여 명맥을 유지했다. 이후 위(衛)나라는 천하가 진시황에게 통일될 때까지 계속 독립국으로 존재하다가 진나라의 이세(二世) 황제 때인 기원전 209년에 이르러서야 진(秦)나라에 복속되었다.

10남

염계재

(冉季載)

 

 

 

2. 주무왕 형제 외의 희성제후국

국명

주왕실과의관계

피봉자

봉지

기원(起源) 및 간개(簡介)

(鄭)

주선왕(周宣王)의 동모제(同母弟)이며 주유왕의 숙부

정백

(鄭伯)

우(友)

1. 섬서성 화현

(華縣)

부근

 

2. 하남성 신정시

(新鄭市)

주선왕의 동모제로써 정에 봉해졌다. 처음의 봉지는 현 섬서성 화현(華縣) 부근으로써 당시 호경과 가까운 곳이었다. 그러나 정백우는 화현이 주도(周都)인 호경(鎬京)과 가까이 있어 이민족의 침략을 받을 것을 걱정하여 유왕에게 청하여 지금의 하남성 신정시 부근의 회(檜) 땅과 동괵(東虢)의 일부의 땅을 할양 받아 자기의 봉지를 옮겨 그곳의 이름을 신정(新鄭)이라 했다. 정백우는 유왕을 위해 침입한 견융군과 싸우다가 전사하고 그의 아들인 정무공 굴돌(掘突)이 정나라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견융을 물리치고 주나라가 낙양으로 동천하는데 공을 세워 주나라의 경사(卿士)가 되었다. 후에 황하의 남안(南岸)에 있었던 동괵(東虢)을 공격하여 병합하고 그 땅을 경성(京城)이라 칭했다. 무공의 아들인 장공의 시대에 이르러 중원의 강국이 되었다. 그러나 장공이 죽고 그의 아들들이 벌린 후계 싸움에 국력이 소모되어 중소제후국으로 전락하고 이어서 당진(唐晉)과 초(楚) 두 나라 사이에 벌어진 중원 쟁탈전에서 항상 정나라가 그 싸움의 중심이 되어 춘추전국 시대 대부분의 시기에 있어 전화가 끊일 때가 없었다. 전국시대에 이르러 기원전 375년 한(韓) 나라에 병합되었다.

국명

주왕실

과의관계

피봉자

봉지

기원(起源) 및 간개(簡介)

(燕)

 

소공

(召公)

북경시

계현

(薊縣)

주 나라를 창건하는데 공헌을 세운 삼공(三公-太公, 周公, 召公)의 한 명인 소공이 봉해진 나라. 후에 전국칠웅(戰國七雄)의 하나가 되었다. 소공은 주무왕이 죽고 그의 아들 성왕이 나이가 어리자 주공과 함께 주나라를 동주와 서주로 나누어 맡아 다스리다가 성왕이 장성하자 주공과 함께 주나라의 통치권을 성왕에게 돌려주고 자기는 봉지로 돌아가서 연나라를 다스렸다.

당진唐晉

주성왕

(周成王)의 동생

당숙우

(唐叔虞)

산서성

강주시

(絳州市)

성왕이 어린 나이에 그의 막내 동생 우(虞)와 함께 장난감 배를 만들어 물놀이를 할 때 장난 삼아 우(虞)를 당(唐)에 봉한다고 글로 써서 배에 띄어 보냈다. 이것을 본 성왕의 신하 필공(畢公)이 군왕에게는 희언(戱言)이 없다 하면서 그 즉시 우를 당에 봉했다. 당(唐)에서 후에 반란이 일어나 당(唐)이라는 국명 대신에 진(晉)이라 부르게 되었다. 후에 당진은 문공에 이어 계속 국력이 신장되어 초나라와 중원의 패권을 다투는 패자의 지위를 유지하다가 결국은 세력이 커진 세가(世家)들인 한(韓), 위(魏), 조(趙) 삼가에 의해 삼분되었다. 당진(唐晉)이 삼분되는 계기가 된 진양성(晉陽城) 싸움이 벌어진 해인 기원전 453년을 전국시기의 시작으로 본다.

국명

주왕실

과의관계

피봉자

봉지

기원(起源) 및 간개(簡介)

(虢)

주문왕(周文王)의 동생 들

동괵

괵숙

하남성 형양(滎陽) 동북

주문왕의 동생 숙(叔)이 봉해진 나라로 지금의 하남성 형양시(滎陽市) 동북에 있다가 주평왕(周平王) 4년 기원전 767년 정무공(鄭武公)에 의해 멸망당하고 정나라 영토에 편입되어 경성(京城)이라고 이름 지었다

서괵

괵중

섬서성 보계시(寶鷄市) 동

주문왕의 동생 중(仲)이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보계시(寶鷄市) 부근에 봉해진 나라로 서주가 망하자 나라를 지금의 하남성 섬현(陝縣) 이가요(李家窯)였던 상양성(上陽城)으로 옮겼다.

북괵

하남성 상양성(上陽城)

서괵(西虢)이 상양성으로 옮긴 나라를 북괵이라 칭하고 영토는 지금의 하남성 삼문협시(三門陜市)에서 산서성 평륙(平陸)까지 넓혔다. 주혜왕(周惠王) 22년 (기원전 655년) 헌공(獻公) 치세 때인 당진(唐晉)의 순식(荀息)이 펼친 가도멸괵(假道滅虢)작전에 의해 멸망당했다.

소괵

섬서성 보계(寶鷄)

주나라가 천도할 때 따라가고 남은 서괵(西虢)의 잔존 세력이 세운 나라를 소괵(小虢)이라 한다. 주장왕 10년 (기원전 687년) 섬진(陝秦)의 무공(武公) 11년에 의해 멸망 당했다.

국명

주왕실

과의관계

피봉자

봉지

기원(起源) 및 간개(簡介)

(吳)

 

주무왕

(周武王)

오태백

(吳太伯)

강소성

(江蘇省)

소주시

(蘇州市)

주 태왕 고공단보(古公亶父)에게는 아들이 셋이 있었는데 장자가 오태백(吳太伯), 차자가 중옹(仲雍)이고 막내가 계력(季歷)이었다. 그 중 계력이 가장 덕이 높고 재주가 뛰어나 고공단보가 계력을 후계로 삼으러 하자 태백과 중옹은 형만(荊蠻)으로 달아나 만이(蠻夷)의 습속으로 바꾸고 그들의 추장이 되었다. 태백이 죽자 후사가 없어 그의 동생 중옹이 뒤를 이었다. 후에 계력은 창을 낳고 창은 무왕을 낳아 무왕이 은을 멸하고 주 왕조를 세운 후에 태백과 중옹의 자손을 찾았다. 한편 강소성의 오나라에서는 태백의 19대인 수몽(壽夢)에 이르러 초나라의 망명객인 신공(申公) 무신(巫臣)이 당진으로 망명했다가 다시 오 나라에 와서 중원의 용병술과 전차전을 전수하여 주고 다시 무신의 아들인 굴호용(屈狐庸)이 행인(行人)이라는 관직으로 오나라에 살면서 중원의 문물을 전해주어 오나라는 중원으로 강국으로 등장하였다.

(虞)

주무왕

(周武王)

우중

(虞仲)

산서성

평륙현

(平陸縣)

중옹(仲雍)의 자손인 주장(周章)은 이미 스스로 오나라의 군주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주장의 동생인 우중(虞仲)을 불러 옛 하나라의 고도(古都)에 봉했다. 나라의 이름이 우(虞)라고 전해 내려오다가 당진(唐晉)의 헌공(獻公) 때 순식(荀息)의 작전으로 멸망하고 당진의 영토에 복속된다. 이 나라가 고서성어인 가도멸괵(假道滅虢)에서 당진에 길을 빌려주어 괵나라를 망하하게 하고 결국은 자기도 망하는 우(虞)나라다.

II. 비희성 제후국

국명

시봉자

피봉자

봉지

기원(起源) 및 간개(簡介)

섬진

(陝秦)

주무왕

(周武王)

진양공

(秦襄公)

영성

(嬴姓)

서견구

(西犬丘)

감숙성 예현(禮縣)

1. 서주 중엽에 진족 부락의 수령이 되어 견구(犬丘)에 살았다.

2. 주효왕(周孝王) 때 지금의 감숙성 청수현(淸水縣) 진정(秦亭) 부근인 진읍(秦邑)에 처음으로 봉해졌다.

3. 견융이 서주를 침입하자 당시 부용국(附庸國)의 군주로 있던 진양공(秦襄公)이 군사를 이끌고 출동하여 견융을 물리치고 평왕이 즉위하는데 공을 세워 진백(秦伯)에 봉해지고 후에 주나라가 하남성 낙양(雒陽)으로 동천하자 주나라의 고토는 모두 섬진의 차지기 되어 서쪽의 강국이 되었다

4. 춘추 때 영공(寧公)이 지금의 섬서성 보계시 동남의 평양(平陽)으로 천도

5. 다시 덕공(德公) 때 지금의 섬서성 봉상현(鳳翔縣) 남인 옹(雍)으로 천도

6. 전국시대에 이르러 영공(靈公) 때 지금의 섬서성 경양시(涇陽市)인 경양(涇陽)으로 천도

7. 효공(孝公) 원년 기원전 361년 지금의 섬서성 임동현(臨潼縣) 동북의 역양(櫟陽)으로 천도.

8. 효공 12년 기원전 350년 함양(咸陽)으로 천도(遷都)

국명

시봉자

피봉자

봉지

기원(起源) 및 간개(簡介)

제(齊)

주무왕

태공(太公)

여상(呂尙)

강성(姜姓)

산동성 임치시

(臨淄市)

태공 여상(呂尙)이 주무왕을 도와 주나라를 창건한 공로로 태공의 출신지인 제 땅에 봉해짐. 기원전 378년 전상(田常)이 제왕을 대신하여 강씨의 제나라는 수명을 다함. 기원전 221년 전국칠웅(戰國七雄) 중 제일 마지막으로 진나라에 복속되었다.

송(宋)

주공단

미자개

(微子開)

자성(子姓)

하남성

상구시 (商邱市)

주무왕이 은의 마지막 왕 주(紂) 왕을 죽이고 그 구토에 주왕의 형 무경 녹보를 봉하고 그를 감시하기 위해 삼감을 임명하여 은나라를 다스리게 했다. 그러나 무왕이 죽고 그의 아들은 성왕이 나이가 어린 관계로 무왕의 동생인 주공단이 국정을 전단하자 주공단의 또 다른 동생들인 삼감(관숙, 채숙, 곽숙)이 그에 불만을 품고 무경 녹보를 부추겨 반란을 일으키게 하였다. 주공단은 무경 녹보의 반란을 평정하고 은나라 유민은 양분하여 일부는 그 구토인 위(衛)에 머물게 하고 대부분의 유민은 현 하남성 상구시로 이주시켜 그 수장에 주왕(紂王)의 서형인 미자개(微子開)를 봉하고 그 작위는 주왕실과 동격인 공으로 올렸다.

초(楚)

주성왕 (周成王)

웅역

(熊繹)

1.호북성 단양시

(丹陽市)

2.호북성 강릉시

주성왕이 문왕, 무왕 때의 공신들의 자손들을 대거 기용하여 주나라의 정사를 일신시켰다. 그때 웅역도 기용되어 형만에 봉해지고 작위는 자작이었으나 그 봉해진 땅에 남작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성은 羋다.

국명

시봉자

피봉자

봉지

기원(起源) 및 간개(簡介)

초(楚)

주성왕

미성(羋姓)

3. 호북성

의성시(宜城市)인 약(鄀)

4.호북 강릉시

5.하남성

진현

(陳縣)

6. 안휘성

거양

(巨陽)

7. 안휘성

수현

(壽縣)

초자(楚子) 웅역(熊繹), 노공(魯公) 백금(伯禽), 위강숙(衛康叔) 자모(子牟), 진후(晉侯) 섭(燮), 제태공(齊太公)의 아들 여급(呂伋)등이 힘을 합하여 성왕을 보좌하였다. 웅역으로 부터 오대인 웅거(熊渠)에 이르러 왕호를 참칭하다가 주려왕(周厲王)의 토벌을 두려워하여 왕호를 버렸다. 다시 웅거의 손자인 무왕(武王) 웅통(熊通)에 이르러 왕호를 다시 부활 시켰다. 초나라의 도성(都城) 이동사(移動史)는 다음과 같다.

1. 초나라는 지금의 호북성 자귀시(秭歸市)인 단양(丹陽) 도읍을 정하고 개국했다.

2. 기원전 670년 경 초문왕(楚文王)에 의해 지금의 호북성 강릉시(江陵市)로 천도하고 그 이름을 영(郢)이라고 지었다.

3. 오자서(伍子胥)와 오왕 합려(闔閭)가 이끌던 오나라 군사들에게 의해 영(郢)이 폐허가 되자 주평왕의 뒤를 이은 초소왕(楚昭王)이 주경왕(周敬王) 16년 기원전 504년에 지금의 호북성 의성시(宜城市) 부근인 약(鄀)으로 천도하고 그 이름을 영(郢)이라고 불렀다. 이어서 구도인 영(郢)을 재건하여 초소왕 재위 시에 다시 그곳으로 도성을 옮겼다.

4. 주난왕(周赧王) 17년 기원전 278년 진나라의 장군 무안군(武安君) 백기(白起)의 침입으로 郢이 점령당하자 초경양왕은 초나라의 잔존세력을 이끌고 지금의 하남성 진현(陳縣)인 진성(陳城)으로 나라를 옮겼다.

 

국명

시봉자

피봉자

봉지

기원(起源) 및 간개(簡介)

초(楚)

 

 

 

5. 초고열왕 10년 기원전 253년 초나라는 다시 도성을 陳城에서 지금의 안휘성 태화현(太和縣) 부근인 거양(巨陽)으로 옮겼다.

6. 고열왕 22년 기원 241년 초나라는 거양에서 다시 지금의 안휘성 수현(壽縣)인 수춘(壽春)으로 옮겼다.

7. 초나라는 수춘에서 진나라 왕전(王翦)의 공격으로 기원전 223년에 멸망했다가 진시황이 죽고 진나라가 분열되자 이곳에서 항우가 기병하여 유방과 자웅을 겨루었다. 항우본기에 나오는 강동자제 6000명이라는 말은 이곳 수춘 출신의 군사들을 말한다.

진(陳)

주무왕

규만

(嬀滿)

하남성

진현

(陳縣)

호공(胡公) 만(滿)은 우순(虞舜)의 자손으로 순이 평민의 신분이었을 때 당요(唐堯)가 그의 두 딸을 그에게 주어 규예(嬀汭)라는 곳에서 살게 했던 관계로 순의 후손들 성씨는 규씨가 되었다. 순이 죽자 천하는 우(禹)에게 넘어가 순의 아들 상균(商均)은 일 개 제후의 신분으로 살게 되었다. 하왕조 때 순의 제사는 끊기게 되어 은왕조에 이르게 되었다. 주무왕이 은의 주왕을 토벌하고 주나라를 세울 때 순의 후손 중 규만(嬀滿)이라는 사람을 찾아 진(陳)에 봉하고 순의 제사를 받들도록 했다. 이 규만이라는 사람이 호공(胡公)이다. 기원전 672년 진(陳) 나라에서 권력다툼이 일어나 진나라의 공자 경중(敬仲) 완(完)이 제나라로 망명하여 그 후손들이 전씨(田氏)로 성을 바꾸고 번성하다가 전화(田和)의 대에 이르러 태공의 후손들인 강씨를 몰아내고 전씨의 정권을 세웠다. 전화(田和)의 아들인 전상(田常)이 강씨들을 대신하여 제왕(齊王)으로 올랐다. 본국인 진 나라는 후에 초나라에 병합된다

국명

시봉자

피봉자

봉지

기원(起源) 및 간개(簡介)

기(杞)

주무왕

동루공

(東樓公)

하남성

기현(杞縣)

사마천(司馬遷) 사기(史記) 진기세가(陳杞世家) 참조. 주무왕(周武王)이 은주(殷紂)를 멸하고 하우(夏禹)의 자손인 동루공(東樓公)을 찾아내 지금의 하남성 기현(杞縣)인 옹구(雍丘)에 봉했다. 춘추 때는 지금의 산동성 안구현(安丘縣)인 순우(淳于)로 옮겼다가 기원전 445년 초나라에 의해 멸망당했다.

거(莒)

주무왕

현효(玄囂)의 장남

산동성

거현(莒縣)

황제(黃帝)의 장남인 현호(소호(少昊))의 후손이 봉해진 나라.

  

출처
http://www.yangco.net/new0822/?doc=bbs/gnuboard.php&bo_table=jiphy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