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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를 세운 홍무제 주원장이 고려사람인가요 ?

명나라를 세운 홍무제 주원장이 고려사람인가요 ?

유명한 사람이 태어난 장소는 보통 길이길이 보존이 되는 것이 흔한 일입니다.
특히 일국의 宰相정도만 되어도 동네가 난리가 나고 몇 백년을 흘러 후손대대로 보존이 되건만, 어찌하여 일국의 왕이 그것도 태조에 해당하고 武帝라는 칭호를 얻은 사람의 고향이 불분명한 것일까요?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은 한고조처럼 미천한 신분으로 명나라를 건설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洪武帝인 주원장의 출생지 즉 고향이 어디인지를 중국역사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이니지. 그 이유가 뭘까요?

주원장은 원래 고향이 안휘성이라고 사전에 되어있다고 하는데 정확하지가 않다고 합니다. 장소가 정확하다면 그 동네 중국사람들이 호들갑을 떨어도 떨었을 것인데, 암말 없이 어딘지도 모르고 있다는게 말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원장은 원래 고려의 도적출신인데 죄를짓고 중국으로 쫒겨가서 홍건적을 일으켜 명나라를 세웠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고 되려 이 말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이런식으로 유난히도 주원장에 관해서는 우리나라와 연관된 설들이 많이 전해 내려오는데, 특히 그 전설에는 이성계와 관련된 것들이 많이 전해 내려온다고 합니다. 그중 유명한 것이 유현설화로써 전라남도 해남 근처에 천하제일의 명당자리가 있는데 그것을 두고 이성계의 아버지가 먼저 그 묘소를 발견하나 주원장이 먼저 자기 조상의 묘를 쓰는 바람에 중국의 왕이 되고 또 다른 자리가 있는데 그 자리는 천하에서 둘째가는 명당자리로써 이성계의 조상 묘를 쓰게되어 조선의 왕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고도 합니다.

명나라의 통지 [대명일통지]에는 주원장이 이르기를 "짐의 조상은 조선인이다. 짐의 조상의 묘소가 조선에 있다."라는 구절이 나온다고 하며, 그의 성씨가 신안주씨일 것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리고 주원장의 아내가 고려인 한영정의 딸이며 한확의 누이로 주원장과 교려비 사이에 태어난 주숙(朱肅)은 후에 永樂帝가 되는 것도 홍무제가 주원장이 고려인라는 근거가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과연 주원장은 고려인이었을 까요?  그렇다면 전설속에 주원장과 항상 같이 등장하는 이성계 역시도 짱꼴라가 아닌 토종 고려인간일 수도 있어 보입니다.
아시는 분들 답변 부탁드립니다.

 

명 태조 주원장은 고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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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百濟 (2009-11-07 15:25:43)

참고 바랍니다 ^^



~ 전라도 해남에는 명 태조 주원장 선대의 묘가 이 곳에 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믿기지 않겠지만 이 전설은 전해져오는 사실이다...
또한, 베일에 싸인 명 태조...

주원장! 그는 왜?

자신이 건국한 중국의 이름을 주신을 뜻하는 명(明=日=박)이라고 했는가?

또하나, 명나라 성조 영락제의 어머니가 조선인이라는데...왜 조선인인가?

그리고, 명나라 초기사에 등장하는 조선인들의 정체는 무엇이며,
이들이 왜 등장하며, 몽고제국인 원나라에 이어, 명나라 황실에서도 변함없이 존재하며 황제를 보좌한 고려인 환관들, 이들은 또 이조에 매년 황제사신으로 와 이조를 감독하였다.

이러한 일은 명과 이조밖에 없었던 일인데 이건 또 어떻게 된 일인가?
이제, 새로운 차원의 진실을 밝히려 하니 한민족참역사회원님들께서는 기존의 지식을 접어두고 읽어봐주시기 바랍니다.

주원장의 삶을 되짚어 봅시다...

明태조 주원장은 고려인

놀라운 사실은, 현재 중국에서는 명태조 주원장의 출생지가 없고, 밝혀진 사실도 전혀 없습니다.

明태조 주원장

제1편 주원장의 미스테리...

주원장의 출생지가 어디인지 중국에서는 아직까지 명확히 밝혀진 사실이 없습니다.
도리어, 주원장의 출생지로 회자되는 곳이 우리 나라의 전라남도 해남 마을로 전해져 내려옵니다.
본인이 조사한 유현설화에 의하면

고려당대 유명한 풍수지리가 유현으로부터 천하 명당이 전라남도 해남 바닷가 어딘가에 천하제일의 명당이 있음을 알아내고는 급히 찾아가보았는데, 주원장이라는 사람이 3년전에, 자기 부모를 모신 후 중원의 안휘라는곳으로 간다며 갔는데 그 부모가 꿈에 현몽하여 시켰다는 겁니다. 더욱놀라운것은 주원장의 유언에 의해 그는 극비밀리에 한반도 해남에 묻혔다는 겁니다. 실재로 중국 화교들이 최고로 치는 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묘지라고 불리는 곳인 명효능이란곳에는 터만 성대하게 궁궐같이 지어져 있을뿐, 묘지가 없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우리나라 전래의 설화뿐이 아닙니다. 장백전(張白傳)이란 군담소설에도 주원장이 장백(張白)의 죽은 누이의 자부(欺夫)라는 것을 현몽하는 대목이 있고,조선의 대표적 판소리 춘향전에도 주원장이 나타나죠.

사대주의와 모화사상이 뿌리내리는 이씨조선시대에서 감히 상국 明태조가 조선 전라도 해남에서 머슴이나하던 상놈출신이었다고 기록하지 못했을 뿐 남향 곳곳에서 상국의 황제가 된 주원장의 과거모습을 여기 저기서 나즈막하게 口傳을 통해 오랫도록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북한의 김일성도 한반도의 절반을 차지 했다고 작은 초가집을 성지로 꾸며 단장하고, 경북 구미 두메산골의 박정희 생가 역시 기념물로 지정돼 있어요. 노무현 대통령 생가도 보존되어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하물며, 중원 대륙의 황제 位에 오른 주원장은 오죽하겠습니까?
그의 생가가 지금의 중국 어느 외진 바다 작은 섬 하나였다 하더라도 세상에 알려졌을 겁니다.

그러나 明이 망할 때까지, 아니 현재까지도, 중국에서 주원장의 생가는 전혀 언급되지도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어요.

제 2 편 明나라는 高麗人들에 의해 건국 되었다.

주원장의 아내는 高麗人 한영정(韓永정)의 딸이며 한확(韓確)의 누이로 주원장과 高麗妃 사이에 태어난 주숙(朱肅)은 후에 永樂帝가 된다.

주원장이 명태조에 즉위하기 전 또 다른 高麗妃를 맞는데 석비(碩妃)이며 함산공주(含山公主)를 낳는다.또 高麗妃의 동생 한계란韓桂蘭은 후에 明 선종宣宗 선덕제宣德帝의 恭愼夫人 이다.

명 선종의 손자며 明 제9代 皇帝인 憲宗 成化帝(1464-1487) 朱見深이 恭愼夫人 韓씨가 졸할때 아래와 같은 제문을 지어 올리는 것으로 보아 성화제는 한계란(恭愼夫人)의 손자가 된다.

"成化帝는 司說監 太監 王据(사설감 태감 왕거)를 보내 공신부인 한씨에게 제문을 올림니다.

부인께서는 溫柔敬愼(온유경신)하여 아름답고 착함이 칭찬하기에 족하며 궁중에 일을 맡아 오랫동안 공로가 드러났고 壽福(수복)이 康寧(강녕)하여 마땅히 큰 복을 누릴 것인데 병으로 세상을 떠나신 訃音(부음)을 들으니 슬픔에 탄식하옵니다. 이에 특별히 공신부인을 추증하고 관원을 보내어 諭祭(유제)하며 또한 유사에게 명하여 장례를 치르게 하옵니다. 아아! 살아서는 어질고 착하셨으며 돌아가서는 영화로운 이름을 얻으셨습니다.
인생이 이와 같으면 유감이 없을 것이니 부인께서는 흠향하옵소서..."

또다른 고려인으로 明건국의 1등 공신은 병부시랑(兵部侍郞)을 거쳐 호부상서(재무장관)에 오르는 주원장의 오른팔 秋濡(추유 高麗人 :1343 - 1404)다.

秋氏는 송때 함흥으로 이전한 추엽을 시조로 하며 추엽의 자 추영수는 1213년 문과 급제 후 高麗의 예부상서, 예문관 대제학의 벼슬을 하며 손자 추적도 국학교수를 역임하는 등 고려 명문家다.

秋씨 일가가 明건국에 큰 기여를 하며 추익한(益漢)은 세종 때 한성부윤을 지내고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어 1457년 살해되자 그도 따라 죽으니 세상 사람들은 당시 단종의 시신을 거둔 엄흥도와 더불어 '살아 생전 추충신이요 죽어서는 엄충신'이라고 불렀으니 추氏는 明에도 조선에도 명문가다.

주원장 (朱元璋 ; 1328.10.21~1398.6.24)

제3편 주원장의 아명은 중팔이며

중국의 기록에 安徽省 鳳陽縣 출신으로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16세에 고아가 되었다고 기록되어있으며, 기근을 피하기 위해 평양에 있는 황각사(皇覺寺)에 입문하여 승려가 되어 하북지방 일대를 탁발 하였다고 되어있다.

즉 안휘성 봉양현의 막연히 어디쯤에서 태어나고 최소한 그 나이면 父의 성명과 4남2녀 형제들 신상을 모를 리 없다. 주원장은 한고조와 마찬가지로 미천한 신분에서 왕조를 건설한 입지전적 인물이다.그래서 요즘 중국 드라마나 영화로 여러 차례 소개되지만 더 이상의 진전은 없다. 거대한 중원을 통일한 영웅이 자신의 生地와 부모형제를 모른다니 말이 되나? 중국으로서도 참 딱한 일이 아닐수 없다하겠다.

주원장이 절에 투신한 해에 하북지역의 재난은 심각했다. 당시 이 일대는 제도적 권위가 존재하지 않는 무법천지였다. 당시 중원의 중부와 북부 지방에서는 기근과 가뭄으로 700만명 이상이 굶어 죽었다. 이런 상황은 민중봉기를 촉진시켜 1325년경부터는 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눈이 퀭하니 굶주린 거지들이 떼를 지어 다니고 골목 여기 저기엔 굶어 죽거나 칼에 찔린 시체들이 나뒹글고 밤이면 이집 저집에서 그 시체들을 소리 소문 없이 집안으로 끌어 가곤 했다. 이런 상황에서 탁발승에게 시주할 사람은 없었다. 절 역시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곳이 아니어서 주원장은 강호를 유랑하며, 발길 향하는 대로 정처없이 살아갈 길을 찾았다.

25세에 濠州 郭子興의 홍건紅巾 기의군 투신한 것으로 나온다. 말이 기의군이지 도적의 소굴이다.

그는 여기서 뛰어난 담력으로 그의 진가를 인정 받는다.
그의 배짱이 얼마나 두둑한 지는 7세의 나이로 거슬러야 한다.
重八은 7세때 집안을 돕기 위해 지주의 소를 방목했다.
소를 방목하던 날 重八은 친구인 서달, 덕흥, 탕화와 함께 놀았다.
이때 그의 개성이 잘 드러나는 일화가 있다.

어느날 重八이 친구들과 함께 방목했는데, 장난을 치느라 배고픈 것도 잊었다. 서산에 해가 아직 떨어지지 않은 것을 보고는, 누구도 집에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돌아가면 지주의 채찍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는 배가 고파졌다. 누군가가 '고기가 어떤 맛인지 모르겠다. 부잣집은 온종일 고기를 먹는다.'

이 말은 더욱 어린 악동들의 배를 고프게 했다.

重八은 갑자기 목청을 높였다. '차려 놓은 고기를 안먹어서야 되겠는가?'하며 송아지를 끌고 갔다. 소년들은 놀랐으나, 한 사람이 주도적으로 하는 것을 보고, 또 실제로 배가 고프자, 소를 묶고는 소를 잡아 구워 먹었다. 모두는 게걸스럽게 먹었다. 배가 채워지고 날이 어두워 집에 돌아가려니 그제야 근심이 밀려왔다, 어떻게 지주에게 대답해야 하는가? 重八은 한가지 생각을 냈다.

소의 껍질과 뼈를 묻고, 소꼬리를 땅에 꽂아 놓고, 지주에게 보고를 했다. '송아지가 땅속으로 들어가고, 꼬리만 남았다. 아무리 해도 꺼낼 수가 없다.' 이같은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믿을 지주는 없었다. 중팔은 실컷 얻어 맞고 집으로 쫓겨 갔다. 그리고 그는 이 일로 인해 친구들 중에서 당연히 두목이 되었다.

1352년 그가 몸담은 홍건적은 대규모로 호주를 공략 하는데 주원장은 이 반란군의 일개 병졸로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워 그 뒤 제2인자가 된다. 1353년 주원장은 安徽省을 함락시켰다. 뒤이어 계속 중요한 임무를 수행해냈고 와중에 元군과 대치하던 농민군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고

그 결과 많은 유능한 인재들을 거느렸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이후 명 초기에 벼슬아치로 관리로 일했다.

1355년 두목이 죽자 주원장은 반란군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 후 주원장은 중국 동부지역의 여러 읍과 성을 함락시킨 뒤 양쯔 강(揚子江) 유역에 도달하여 그곳에서 사대부 계급 출신의 지식인들과 알게 되었다. 이들 가운데 일부가 주원장의 봉기에 가세하자 그는 그들의 조언을 현명하게 받아들여 실천에 옮겼다.

그들로부터 그는 중국어의 기본을 배웠고, 중국사와 유교경전을 공부했다.

더욱 의미 깊은 일은 그가 통치의 원칙을 배우고, 군대조직과 함께 효과적인 지방행정제도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더욱이 조언자들은 그에게 민중봉기의 우두머리에 만족하기 보다는 원(元)나라에 대항하는 국민적인 지도자로 나설 것을 종용했다. 중국 측의 기록이다.

그러나 살펴보면 사대부 출신의 엘리트란 다름 아닌 맨 위에서 열거한 고향후배 高麗人 추 유(秋濡)의 합세를 표현함이며 굶주려 도적이 된 홍건적이나 농민군 중에선 그런 인재를 찾을 수 없자 다른 도적과 달리 배포가 남다른 주원장은 그가 두목이 되자 일개 지역의 도비에서 일국의 제왕을 꿈꾸며 그리하여 그가 알고 있던 고향 高麗의 후배 추유(秋濡)(전주秋씨)를 불러 와 그에게 처음으로 학식을 얻으며 체계적인 병법을 익힌다.

더욱 큰 이유는 후에 기술하지만 高麗軍과의 전투에서 전략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그 당시 용감 했지만 원시적이던 元의 지배 하에 100여년의 세월이 흐른 중국에서는 체계적 병법의 이치를 꿰뚫는 식자를 구할수 없었고 이때 주원장은 고향 고려의 수재 추유를 불러 들이며 秋濡는 주원장의 오른팔이자 뛰어난 전략가로 후에 주원장이 건국 明의 兵部侍郞을 거쳐 재무장관에 이른다.

추유의 사촌 수경(秋水鏡)은 明의 무강자사(武康刺史)에 재임 중 조선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원병으로 이여송의 副將이 되어 아들 노(蘆)·추(萩) 형제와 함께 우리 나라에 들어와 곽산·동래(東萊) 등지에서 많은 전공을 세우고 정유재란때 全州싸움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여 완산부원군에 추봉되었으며 1380년 좌승상 호유용의 모반으로 3만의 행정관리를 몰살 하는바 6部의 기능이 마비되어 주원장이 親政 하고 6部의 관리를 새로 뽑아 교육하는바 이때 秋濡의 인척인 고려의 侍郞겸 예문관대제학이며 국학교수인 秋適은 교육을 위해 明에 건너간다.

그러나 중국의 모든 기록엔 고려인 秋濡대신에 劉基를 내세운다.

劉基는 元말 浙東行省都事로 근무하다 1357년 청전산에 들어가 저술활동을 하다.
유원장의 전략가로 묘사되며 명 건국 후 御史中丞兼太史令, 太子贊善大夫, 弘文館學士, 開國翊運守正文臣, 資善大夫上護軍등을 역임했으며 1370년에 誠意伯에 봉해졌다고 하나 그의 저서나 직책 등을 살피면 그는 전략가가 아니고 단순한 서기나 행사를 기록하는 史官에 불과함을 알수 있다.

그럼 왜 고려인 추유 대신에 유기를 내세우는가 하면 주원장 근처에 어른거리는 고려인의 흔적을 지워 명 황제 주원장이 고려인임을 감추기 위함이라 판단한다.

유기가 저술했다는 郁離子를 살피면 그가 저술했다는 民本論의 요체로 仁과 德을 주장하나 이건 고려인 이라면 누구나 단제(일태칸=칸) 의 弘益人間 사상임을 알수 있다.

당시, 중국은 제갈공명 다음으로 유기의 수많은 논문을 쏟아 내고 있다.

중국의 기록에 의하면, 원제국의 황제나 주원장이 고려의 공녀와 결혼 한것으로 기록하고있으나 이것은 자기들의 조상이 고려라는 사실을 은폐 조작한 내용으로써 사실이 아니다.

공녀가 아니라, 귀족출신의 마누라(황후)였다.

주원장(1328.10.21~1398.6.24) 32세 되던 5월2일 영락제가 태어나니 1360년이다.

明 건국이 1368년이니 永樂帝는 이미 明건국 8년 전에 태어났으며 당시 元을 섬기던 고려에서 국가의 운명을 걸고 상국 元나라의 반란군 홍건적의 두목 주원장에 고려조정에서 공녀를 상납함은 있을수 없는 일이며 더구나 영락제가 태어나던 1360년 이전의 주원장은 당시 황건적의 거대 세력 장사성(張士誠),진우양(陳友諒)등에 가려 별로 드러 나지도 않던 조그만 비적 무리에 고려조정이 공녀를 조공 받았다는 것은 상식이 아님을 알수 있다.

청주 한씨 문정공파 족보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麗妃 明 太宗 永樂帝 西成府院君永恭愼夫人 明 宣宗宣德帝上 同昭惠王后 德宗大王 西原府院君確丁巳誕降 甲子昇遐...)

주원장이 전라도 한영정 대감 머슴이었을 때 주인집 딸인 麗妃와 눈이맞아 중국으로 도피 하였거나 주원장이 중국에서 어느정도 자리잡은 연후 고향의 머슴살던 한대감집 麗妃를 불러들인 것인지는 명확 하지 않아 더 세밀한 조사가 필요하나 永樂帝의 모친이며 주원장의 부인되는 麗妃가 생산된 문정공파 한씨의 족보에 고려 중엽 (容信王后<1036>,容懿王后)를 배출한 고려 최고의 명문 대가이다.

따라서 중국문헌의 공녀 운운함은 년대상 혹은 조건상에서 적용 대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영락제는 후에 티벳 베트남 남만주등 중국 최대의 영토를 넓히고 콜럼버스 60년 앞서 환관 정화를 시켜 6회에 걸쳐 멀리 아프리카 까지 정복하는 고구려의 광개토태왕에 버금가는 중국인에 자긍심을 심어준 황제다.이게 다 순수 父母가 고려인에서 난 순종 Korean 바로 중국인들이 자랑하는 永樂帝다 지면상 영락제는 여기서 줄인다.

주원장은 유능한 조언자들을 밑에 거느리고 효과적인 전술과 전략 행정조치를 취할 줄 아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마침내 원에 대항하는 가장 강성한 지도자가 되었다.
주원장은 장사성의 세력을 제거한 후 북벌군을 편성해 사방에서 원으로 진격했으며, 주원장은 북벌군을 편성해 북진에 성공하여 1368년 남경에서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명나라를 세웠다.

북으로 쫏겨간 北元과 조선군의 결합을 주원장은 죽기 전까지 근심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요동(遼東)에 나가 있는 요왕에게 주원장은 조선이 20만대군으로 쳐들어 온다면 우리군대가 어떻게 막겠는가! 우려하며 조선의 공격을 염두에 두고 철저히 대비하라 당부한다. 그러면서 만약 조선이 요동을 공격하여 차지한다면 이는 단기전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며 걱정하는 대목이 『명실록』에 전한다.

이 기록을 정리 하면서 당시 고려는 1354년 元의 요청으로 최영 장군을 필두로 수하에 유탁(柳濯)·염제신(廉悌臣) 등 40여명의 장수와 함께 군사 2,000명을 거느리고 홍건적을 토벌하는데, 이때 무명의 장수 이성계가 비로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바 기록에 의하면 고우(高郵), 회안로(淮安路), 팔리장(八里庄)에서 1년여 전투를 벌여 元의 승상(丞相)이던 TATAR(脫脫)와 연합하여 홍건적을 소탕한다.

문제는 사기에 기록된 지명이 놀랍게도 安徽省 바로 明건국의 진원이며 주원장의 본거지인 즉 現 上海에서 내륙 한가운데 지점이라는 것.

주원장은 홍건적 무명의 졸개로 이성계는 高麗장수로 조우했단 사실.

그당시 상해 내륙 안휘성, 강소성에는 농민군을 포함해 약 60만의 반란군이 엄청난 속도로 북상을 하며 기승을 부리던 때로써, 그 험악한 60만명의 홍건적에 단지 2,000여명의 고려군사들이 종횡무진 활약하며 반란군을 1년여간 제압 한다는 사실이죠.

고려 원정군에 제압당해 북상의 활로를 1년간 뚫지 못하고 확실하게 제압당하며 발이 묶이자 황건 기의군은 더이상 북진을 감행하지 못하고 고려원정군과 원의 연합군이 주둔한 지역을 멀리 피해 3방향으로 분산시켜 포위망올 벗어날 계획을 세우고 성공적으로 분산이동을 개시한다.

홍건적은 군대를 3군으로 나누어, 1군은 관선생(關先生), 파두반(破頭播)등을 장군으로 하여 기주(寶州:낙양과 산서성 하동지역)로 진출하고, 2군은 백불신(白不信)을 대장으로 하여 섬서성 동관(違關)을 지나 관중(關中)지방으로 이동하여 세력을 넓히고, 3군은 모귀(毛貴)의 지휘하에 익도(益都:산동성 교주)방향으로 진출하여 가는 곳마다 승리했다.라고 원사는 쓰고 있고 고려사에도 이러한 내용이 나온다.

즉 지도를 펴고 이들의 북상루트를 살피면 고려 원정군 주둔지 고우(高郵), 회안로(淮安路), 팔리장(八里庄)등지를 피해 가기위해 엄청난 거리를 돌아 북상 루트를 개척함을 살필수 있다.

그러나 고려 원정군은 중국 전지역을 커버하는 기능이 아닌 제한된 지역만을 방어하는 임무였기에 이들의 뒤를 추격하지는 않고 1355년 고려황제의 명에 의해 철수한다.


제4편 현대판 300

고작 5천의 고려군이 60만의 홍건적을 1년동안 유린 하다

중국 심장부 상해에서 승세를 타고있던 60만 반란군의 틈바귀에서 고작 2천의 高麗軍이, 1년간, 그것도 그들을 헤집고 다닌 용맹한 그들...만약 성계의 위화도 쿠데타가 아니었던들,,,고려군은 중국을 정복하고도 남았을것임은 군사전문가들은 부정하지 못합니다. 주인이 뒤바뀌었을 가능성은 충분했다는 아쉬움..

고려군을 아는 사람이라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고 할수밖에 없다는 역사적,군사적 사실입니다.

물론, TATAR군(북원=기황후 아들의 몽고)과 려진군과의 연합 이었지만 주력군은 고려군인만큼 아직 전열도 정비되지않은 상태의 명나라 초기군들에 더구나 무패의 고려군,10만 대군의 3면에서의 공격이 불시에 감행되었다면 당시 명군이 숫자로 호활 60만이라 해도 고려군에게 비교한다면 모두 오합지졸에 불과 했단건 부인하기 어려운것입니다. 그러길래 이성개로부터 회군과 고려점령의 보고서를 받은 주원장이 성계를 "생명의 은인" 이라하며 직접 "기자조선의 왕이되라" 고 윤허하게되죠(연사)

어떻든, 이러한 역사에서 우리가 배울 점은 노비에 불과한 신분이라도 한인간의 의지로서 거대한 제국의 주인 될 수도 있고 십수만의 세계최강의 정예군을 거느린 황제와 장수라 하더라도 사람하나 잘못쓰면 졸지에 500년황실의 전통뿐아니라 세계역사 최초로 왕손들이 처참하고도 철저하게 대살륙되어 멸문지화될수있다는 우리 역사의 과거이자 세계역사의 유일한 일부분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후일, 이성계는 明황제가 된 주원장에게 위화도회군의 사실을 알리고,
그 공으로 이씨조선의 개국을 명받아 한민족의 본산인 한반도에 이씨조선 500년의 역사가 열립니다.

( 참고: 야사인 법화경 (法華經)묘장엄왕본사품 제27에 나오는 글에 의하면, 조선의 국호를 허락 받기위해 사신을 明에 보내나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章)은 조선의 태조 이성계를 신하로서 임금을 쳐 나라를 세운 충신이 아닌 역적의 무리들이란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조선에서 보내는 사신마다 참수를 하여 보내며 조선의 국호를 승인하지 않았다. 가는 사신마다 목이 잘려 오니 이제는 어느 누구도 사신으로 가길 주저 할때 고려의 정승으로 불심이 아주 돈독했고 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지극한 정승 조반이 큰 사명을 띠고 위험한 사신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황해도 서흥군 오운산에 이르렀는데 꿈에 비 맞는 부처님을 잘 모시면 소원을 성취할 것이란 가르침을 받고 그대로 하였다. 조정승은 명나라 조정에 들어가 개국과 국호를 간절히 청하였지만, 주원장은 역시 처형을 명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조정승의 목을 친 칼이 세 번이나 부러졌을 뿐 조정승의 목은 멀쩡했다. 집행을 맡았던 대신은 이 사실을 주원장에게 보고했다.

주원장은 놀라운 사실에 크게 감명하였고, 이는 하늘의 뜻으로 볼 수밖에 없다하여 자신의 경솔함을 사과하고 큰 상을 내렸으며 개국의 승인과 조선이란 국호를 얻었다는 것이다. 조반정승의 목이 세 번이나 무사했던 것은 황해도 오운산 불상의 목에 칼자국이 3번이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라는 기록이 있으나, 이 내용을 입증할만한 기록들이 명활실사고나 청황실사고 청사 연사등에서 찾아볼수 없으니 이는 이조개국후에, 문제가 많은 이조개국을 합리화시키기위해 후대에 이방원이 가필하여 퍼트린 "고구려=>싸구려" 식으로 만들어진 내용으로 보여집니다.



이상,

明태조 주원장, 韓妃, 아들 永樂帝, 천재 전략가 高麗人 추유(秋濡)

一家.. 이들 자랑스런 高麗人들에 의해 明나라가 세워졌단 사실을

기록과 야사를 종합하여 알려드리는 바 입니다.


도움: 주신(연사)님, 백산님(직접 수정부분있슴)


자료출처 : 석천의 아나로그 쉼터 http://blog.daum.net/smj4210

한눌 (2009-11-09 13:23:19)  
正史와 픽션의 차이를 얼마나 알고 글을 썼을까?
한 문중의 기록을 오도하는 행태를 보며, 드라마 ‘선덕여왕’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1%의 史實에 허구를 첨삭하는 놀라운 재능에 국민들은 열광하고 있다. 때때로 역사를 난도질하여 이를 보고 쓰는 자로 하여금 正史로 각인하게 만드는 기술을 보며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윗 글과 댓글을 보자.
< 그리고 주원장의 아내가 고려인 한영정의 딸이며 한확의 누이로....>, <주원장의 아내는 高麗人 한영정(韓永정)의 딸이며 한확(韓確)의 누이로... >

해당 문중의 족보까지 거론했으니,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족보 기록을 얼마나 자세히 확인했을까?.

청주한씨족보(1748년 戊辰譜)의 내용이다.

明太宗後宮은 동래정씨 鄭允厚의 1남4녀 중, 차녀이다. 韓休의 외손녀이다. 거론한 “한영정(韓永石+丁)의 딸이며 한확(韓確)의 누이”는 成祖의 麗妃이다. 成祖가 죽자 순장했다. 후일 麗妃의 동생이 宣宗의 妃인 恭愼夫人으로 明祖 三代를 거치며 조선 여인의 위상을 드높였다.

주원장은 1370년 7월 이 땅의 정기를 말살하고 天子의 맥을 끊기 위해 조천궁(朝天宮) 도사(道士) 서사호(徐師昊)를 보내어 백두대간인 단천에 쇠말뚝을 박았다. 또한 북한산성(北漢山城) 아래에다 소금을 쌓고 그 위를 덮어서 태워 마침내 염산(鹽山)이 되어 내려온 맥을 진주(鎭住)시켰다.

이 문제는 조선 개국과 동시에 제후국으로 전락되고, 공자(孔子)의 논리와 홍무(洪武)의 예제(禮制)에 의해 하늘제사(天祭儀式)를 폐지한 군주(君主)의 안위가 500년 한(恨)으로 지속된 계기가 되었음이다.

< 참조; target=_blank>http://www.pluskorea.net/sub_read.html?uid=13185§ion=section78§ion2=상고사/고대사>



역사를 거론코자 할 때는 정확한 전거가 필수적이다. 좀 더 세심한 관찰을 당부하고자 한다.
昻明人 (2009-11-09 18:11:05)  
몰라서 여쭤본 것인데.... ㅉ ㅉ 참...
전설이나 설화의 형태로 전해지는 내용이 물론 근거가 희박하기도 하지만, 그 희미한 실마리가 단서가 될 수도 있겠지요.
주원장이 우리민족에게 한 짓은 한 짓이고, 그의 핏줄이 고려냐 짱꼴라냐 하는 얘기를 물어보는 것이었습니다.
정말로 일설에 의하는 것처럼, 그의 고향이 중국사에 제대로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인지 등...
허구를 보고 좋아 날뛰고자 하는 게 아니고, 어차피 다시 밝혀지는 우리의 역사와 무슨 연관이 있는지를 캐고 싶어서 였으니 노여워 마세요.
자기 민족에 배신감을 느끼고 나쁜짓을 한 인간들 많습니다. 민족의 반역자라고 우리 민족이 아니라는 법도 없잖습니까?
물론 주원장이 꼭 그렇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오해 없으시길 바라고요...
우리민족에게 나쁜짓을 했냐 안 했냐를 물어보는 게 아니고, 우리민족이라는 것에 대한 근거 등이 있는지
아니면 확실히 지나족이라는 근거가 있는지를 질문드린 것이지요.
그렇게까지 얘기 하기 보다는 좀 더 자세한 역사적 사료를 들어 주셔서 이왕이면 愚問賢答을 부탁드립니다.
昻明人 (2009-11-09 23:53:41)  
한눌님,
픽션인지 역사인지 구분도 못하면 글을 올리면 안 되나요? 모르는 사람은 질문도 못합니까?
황당합니다. 얼마나 많이 아시길레...
한단고기를 위서라고 하는 인간들이 있고, 단군을 설화라고 하는 인간들이 있는 반면 진정한 우리의 역사를 찾아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주원장이 우리의 역사라는 거 아닙니다.
저 역시, 자칫, 혹시나 맹신주의에 빠지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민족사학을 보는 사람중의 하나 입니다.
많이 아시는 분이시라면 일러주시는게 도리 입니다.
쪽빠리들이 설화라고 했지만, 우리에게는 역사가 분명합니다.
주원장이 중국사에 불문명한 부분에 의심을 가지고 캐면서 연구하려는 학도들을 완전히 바보로 만드시는 군요.
겨우 한가지만 가지고 남을 비판하지 마시고, 님의 고귀한 학식으로 고견 부탁드립니다.
한눌 (2009-11-10 11:09:00)  
昻明人님,
노여우셨나 봅니다. 단, 제가 말씀드리고자 한 부분은 한 문중의 기록인 문중사 즉 '족보'의 상세한 검증이 필요하다는 취지였습니다.
자칫 문중사가 오도되었을 때, 한 문중이 받는 타격은 상상을 초월하는 경우를 많이 겪어 보아서 입니다. 님이 제시하신 주원장의 전설같은 부분은 높이 사고 싶습니다. 그러나 <주원장의 아내가 고려인 한영정의 딸이며 한확의 누이로 .... 근거가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지요>란 부분은 확증적 기록으로 보여 바로 잡는다는 취지에서 논했으니, 오해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한눌 (2009-11-10 11:17:30)  
昻明人님, 혹 추후 문중사를 기록하실 때 모호한 부분이 있다면 성심껏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칸 (2009-11-17 15:45:25)  
묘호(廟號)는 태조(太祖)이고, 재위연호(在位年號)에 의해 홍무제(洪武帝)라고도 한다. 호주(濠州:安徽省 鳳陽縣)의 빈농 출신으로, 17세에 고아가 되어 황각사(皇覺寺)라는 절에 들어가 탁발승(托鉢僧)이 되어 여러곳을 전전하였다. 홍건적(紅巾賊)의 부장 곽자흥(郭子興)의 부하가 되면서 두각을 나타내었고 곽자흥의 양녀와 결혼하여 그의 사위가 되었다. 곽자흥의 군대가 분열되자 독자적으로 군대를 모아 세력을 키워나갔으며 원(元)나라 강남(江南)의 거점인 난징[南京]을 점령하였다. 이때 그의 병력은 2만명에 달했고 자신을 오국공(吳國公)이라고 호칭했다. 홍건적 군대가 원나라의 공격을 받고 패퇴하고 나머지 남경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진우량과 소주의 장사성의 군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여 마침내 각지의 군웅들을 모두 굴복시켰다. 1368년 남경에서 명나라를 세우고 연호를 홍무(洪武)라 하였다. 동시에 북벌군을 일으켜 원나라를 몽골로 몰아내고 중국의 통일을 완성하였다.

주원장은 한민족(漢民族)의 왕조를 회복시킴과 아울러 모든 몽고 풍속을 금지시키고 중앙집권적 독재체제의 확립을 꾀하였다. 중앙에는 1380년 중서성(中書省)을 폐지하여 육부(六部)를 독립시키고 도찰원(都察院)·오군도독부(五軍都督府)를 설치하여 이들 기관을 황제 직속하에 두었다. 지방에도 포정사사(布政使司:行政)·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軍事)·안찰사사(按察使司:檢察)를 병립(並立)시키고 이들을 중앙에 직결시켜 황제는 이 통치기구 위에 군림하여 절대권력을 장악하였다. 또, 24인의 황자(皇子)를 전국의 요지에 분봉(分封)하여 제실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한편, 농민통치에도 힘을 기울여 전국의 농촌에 이갑제(里甲制)를 설치하고 부역황책(賦役黃冊)과 어린도책(魚鱗圖冊)을 만들도록 하여 조세·부역의 징수를 공평히 하고 정책의 침투를 꾀하였다.

주원장이 실현하고자 했던 군주독재권의 강화는 공포정치에 의해 실현되었는데 특히 황제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해 그와 동고동락한 측근들 대부분을 숙청하였다. 이때 목숨을 잃은 측근이 2만명에 달했다고 전한다. 이런 비극을 감내했던 이유는 그의 아들에게 보다 확고한 황제의 지휘권을 물려주기 위함이었는데 큰 아들이 급사하는 바람에 손주(건문제)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되었고 왕위 계승자가 아직 어려 숙청작업은 더욱 가혹하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주원장이 걱정하였던 황제의 위협세력은 그를 도왔던 개국공신들이 아니라 26명이나 되는 그의 아들이었다. 주원장은 만년에 고독하게 살다 1398년 71세의 나이로 병사하였고 그가 죽은 이후 아들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이 일어났다.
대칸 (2009-11-17 15:56:17)  
위글은 아주 간략하게 소개하는 주원장입니다. 태어난 곳이 호주로 되어있네요// 설화 내용 재미있었습니다.//또한 대백제님의 글을 보니 많은 것이 새롭습니다//
그냥 설화로 볼 것이 아니라는 생각도 드네요// 그러나 명나라는 분명히 우리의 역사를 지우는 동북공정을 시작(?)한 나라이다는 글을 본적이있습니다/ 특히나 사대와 소중화라는 일부 부끄러운 조상들이 상국으로 받든 나라이며, 삼국지같은 허구로 고대사의 흔적을 지우는 뻥튀기를 한 나라이지요/ 애신각라 처럼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고 세계의 중심 국가로 살아간 분들이 있는 반면에 자신의 뿌리를 애매하게 설화로 치부하거나 명확히 밝히지 않는다는 것에는 뭔가 있지 않나 의문은 남습니다// 질문하신분이나 구리넷 선생님들의 건승을...
昻明人 (2009-11-22 11:59:45)  
그렇군요, 부끄럽습니다.
허나, 이렇게 알게되니 명쾌해지내요.

 

주원장이 고려인이라고?

역사-歷史/역사잡담 2010/03/25 15:42 Posted by 바로바로

 

중국에서 한국인들이 주원장을 고려인이라고 말한다는 대목을 발견하였다. 본인 처음에는 또 한국에 관련된 루머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실제로 서프라이즈라는 프로그램에서 주원장이 고려인이라는 방송을 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 주원장 고려인설이 뭔지 한 번 보자. 처음부터 결론을 내자면 "어이없음" 이다.

* 본 내용은 아쉽게도 "조선기문朝鮮紀聞"직접 보지 못하고 쓴 글이다[각주:1].



 



3월 7일 방송된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는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실체를 놓고 한국과 중국의 학자간의 대립을 다뤘다.

1368년 명나라를 세운 초대황제 주원장은 이민족을 몰아내고 한족 중심의 문화를 세운 인물이다. 그는 미천한 거름뱅이에서 시작해 중국 역사상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개인으로 평가된다.

그런데 일부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주원장이 고려인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역사학자 백린은 '조선기문'에 기록된 설화를 근거로 들었다. '조선기문'에는 명태조 주원장과 이름이 같은 남자가 등장한다. 주원장은 경상도 웅천의 주씨 노부부의 아들로 5살이 되던 해 고승을 따라 절에 들어갔다가 15세에 하산했으며 총명하고 민첩했다고 적혀있다. 또 한국 민간 전설집에는 주원장이 중국으로 건너가 나라를 세웠다는 얘기가 적혀있어 더욱 신빙성을 더했다.

반면 중국학자들은 역사학자 오함이 쓴 주원장의 전기 '주원장전'을 들어 이를 터무니 없다고 반박하고 있다. 전기는 주원장이 중국 안휘성에서 태어났고 아버지 또한 중국인으로 적고 있다.

이를 반박하는 학자들은 주원장전은 조선기문에 실린 탄생 설화를 보고 만들었다고 했다. 주원장전의 발행시기는 조선기문이 발행된 뒤다. 두 책을 비교해 볼 때 주원장의 어린시절 매우 가난했다는 점과 주원장이 절로 들어갔다는 것, 그리고 주원장이 걸식하며 돌아다닌 시기가 비슷하다.

또 주원장의 주변에는 유독 고려인이 많았고 주원장의 심복인 주유도 고려인이어서 각별히 신임했다는 주장까지 더해져 주원장이 고려인이라는 주장에 힘을 실었다. 또 다른 학자는 주원장의 아들 영락제의 친모가 고려인일 가능성까지 제기한 상황이다. 아직까지 한국과 중국의 학자들은 이에 대해 뚜렷한 결론을 내지 못한 채 논쟁을 벌이고 있다.

출처 : 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고려인 논란, 韓中 역사학자 대립 논쟁



1) 대체 어디를 봐서 학자들의 공방이지?
조선기문朝鮮紀聞은 잘해봐야 2차사료이다. 1885년 일본인 鈴木信仁에 의하여 쓰여진 조선의 일들을 모아놓은 책[각주:2]이다. 주원장전朱元璋传는 2차사료조차 어림없다. 중국의 역사학자 吴晗[각주:3]에 의하여 1948년에 쓰여진 책이다. 이건 연구서라로 해야된다.

대체 어떤 "미친" 학자들이 2차사료도 안되는 것을 기본으로 공방을 펼친다는 것인가?[각주:4] 솔직히 이 부분부터가 벌써 어이없음이다. 역사학 관련 사람들은 본인이 위에서 적은 조선기문과 주원장전의 간략내용만 보아도 어이없어 할 것이라고 감히 장담한다.

가장 간단히 말해서 명사明史를 보면 주원장의 아버지가  钟离로 이동했다고 나와있다. 그리고  钟离는 현재 중국 안후이펑양安徽凤阳이다[각주:5]. 그리고 명사는 1739년에 완성되었다. 정식사료인 명사를 믿을 것인가? 아니면 명사보다도 100년이상 늦게 기록되었던 전설을 믿을 것인가? [각주:6]


2) 설화는 가치있는 사료이지만 믿을 수 없는 사료이다.
설화의 가치는 상당히 뛰어나다. 오히려 정사에서 제대로 기록하지 못하는 일이 설화에 남아 있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나 설화만을 가지고 논문을 쓰는 학자는 없다. 왜냐하면 설화 그 자체는 많은 시간동안 온갖 변형을 거쳐왔기 때문에 그곳에서 뽑아내어서 "간접 증명"으로 사용할 수는 있지만, 그것만으로 직접 증거로 사용하면 웃음거리가 되기 딱이다.

조선기문은 무려 일본인이 1885년에 출판한 책이다. 이미 주원장과 상당한 시기적인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조선인 자신이 아닌 일본인에 의해서 적혀진 내용이기에 그 정확성부터 시작하여 다양한 부분에서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잘해봐야 2차사료일 뿐인 것이다. 그 외에 출처를 아직도 모르겠는 "민간설화집" 역시 동일하다.

논란이 된다는 말 자체가 어이가 없다. 논란이 되려면 1차사료정도는 있어야되는 것 아닌가?


3) 설사 주원장이 고려인이라고 하더라도!
그래 원하는대로 주원장이 고려인이라고 해보자. 그럼 주원장은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하는 개같은 한반도"을 떠나서 "꿈을 이룰 수 있는 중국"으로 간 것이 된다. 이 점은 생각해보았는지 모르겠다. 무조건 "한국인" "한국인" "한국인"만을 말하다보니 이런 조그마한 것을 간과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주원장이 고려인이라고 하자. 그래서? 조상이 당신 밥 먹여 주지 않는다. 본인 스스로가 역사학도의 입장에서 분명히 이야기를 하겠다. 정체성을 스스로 세우지 못하고 역사에 기대지마라. 설령 조상이 아무리 위대했어도 지금 현재 빌어먹는 거지꼴이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역사라는 과거에서 교훈을 얻고 현재를 냉철하게 살피고 미래로 향하여 가는 것이다.

다시 묻겠다. 주원장이 고려인이라고 하자. 그래서??? 우리 모두 중국정령하자?!
정신 차려라. 이 내용 덕분에 중국에서의 반한정서가 왕창 상승하였다.


추가 : 혹시 주변에 중국인에게 말하고 싶은데 중국어가 안되는 경우 아래를 참고하셔요.

我身为在中国学古代史的的韩国人,向中国朋友道歉。

朱元璋为韩国人是由于不可靠的史料(朝鲜纪文)来推测的垃圾理论,是韩国的一部分极端民族主义者和国家主义者引起的一场大误 会,我已经通过博客向韩国朋友解释了,并且韩国历史学界不会依靠这些不可靠的史料来推定历史事实。再说这些都是一部分人造成的祸,世界上任何地方都存在着一些疯子,希望不要通过疯子来判断一个民族或者一个国家。

只是借这个机会向大家提醒一件事。民族主义和国家主义总是内涵着这些问题,而且这个问题不仅仅在韩国,中国跟日本也确实是存 在着。比如说,意大利面是中国发明或者把历代边疆的各个民族政权统统被列为地方政权等等的事情。

我希望大家尽量理性的摆脱这些民族主义和国家主义的束缚,不要老是纠缠着过去,要重视现实和未来。历史经验可以值得学习,只 是不要忘记学习历史经验的的目的。

  1. 직접 구해서 볼 수 있었으면 더 어처구니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본문으로]
  2. 제목; 朝鮮紀聞 바로가기 (새창). 저자; 鈴木信仁 編. 발행일; 1885. 발행기관; 愛善社.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본문으로]
  3. 심히 정치적인 사람이었고, 이 책을 연구서 수준도 안되게 보는 사람도 많다. 吴晗은 나중에 심히 유명해진다. 문화대혁명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海瑞罢官》이라는 명작을 내놓는다. [본문으로]
  4. 조금 과장하긴 했고, 본인이 1차사료를 통한 공방을 구하지 못한 것일수도 있다....그래도 어이없어!!! [본문으로]
  5. 《明史》第一卷 本纪第一 太祖一 太祖开天行道肇纪立极大圣至神仁文义武俊德成功高皇帝,讳元璋,字国瑞,姓硃 氏。先世家沛,徙句容,再徙泗州。父世珍,始徙濠州之 钟离 。生四子,太祖其季也。 [본문으로]
  6. 위의 것만 적어놓으니 혼동하시는 분이 있어서... [본문으로]]

 

 

中환구시보 "주원장이 고려인이라고?"

 (연합뉴스  2010-03-26 16:24)

 

(베이징=연합뉴스) 인교준 특파원 = 중국의 유력 일간지가 26일 "명나라 태조인 주원장(朱元璋)이 고려인일 수 있다"는 논란이 담긴 한국의 한 방송 프로그램 내용을 자세히 소개해 눈길을 끌고 있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人民日報)가 발행하는 국제문제 전문지 환구시보(環球時報)는 이날 3면에 주원장의 실체를 놓고 논란을 벌인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지난 3월7일분) 내용을 자세히 전했다.

당시 해당 프로그램은 1368년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이 미천한 신분에서 태어나 한족(漢族)을 중국의 중심에 우뚝 세운 역사적 인물로 평가받지만 일부 역사학자들은 그가 고려인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 근거로 '조선기문(朝鮮紀文)'이 등장하는데, 여기에 명 태조 주원장과 같은 이름이 등장한다.

조선기문에는 경상도 웅천군에 사는 노부부의 아들로 태어난 주원장은 어려서부터 총명해 5살 때 고승을 따라 절에 들어가 문무를 익혔고 15살이 되던 해 하산해 장군으로 성장했다고 적고 있다.

이런 내용은 이와 유사한 책인 '한국민간전설집'에도 등장하는데 그 책에는 주원장이 중국으로 건너가 나라를 세웠다는 얘기도 적혀 있으며, 춘향전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는 주장이 해당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환구시보가 전했다.

이 신문은 나아가 중국 역사학자인 오함이 저술한 '주원장전'에 주원장이 중국 안후이(安徽)성에서 태어났고 아버지가 중국인으로 적고 있지만 일부 한국 학자들은 '조선기문'이 1894년에, '주원장전'이 1945년에 발간된 점을 들어 사료로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도 소개했다.

신문은 또 두 책에 주원장이 어린 시절 매우 가난했고 어려서 절에 들어갔으며 그리고 주원장이 걸식하며 돌아다닌 시기가 비슷하게 서술돼 있고 주원장 주변에 유독 고려인이 많고 주원장의 아들 영락제의 친모가 고려인일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고 덧붙였다.

환구시보는 그러나 결론적으로 그 같은 주장은 '터무니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신문은 그러면서 최근 한국에서 '공자가 한국인', '한자는 한국에서 발명한 것' 등의 주장이 나오고 그와 관련해 논란이 분분하다고 소개하면서, 그러나 그로 인해 한.중 양국민 간에 논란이 생길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