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의 일대기 업적
유불선의 뿌리, 신교(神敎)를 밝힌 고운 최치원
이성욱(창원 상남도장)
신교(神敎)는 본래 뭇 종교의 뿌리로 동방 한민족의 유구한 역사 속에 그 도맥(道脈)이 면면히 이어져 왔나니 일찍이 최치원(崔致遠)이 말하기를 “나라에 현묘(玄妙)한 도(道)가 있으니 풍류(風流)라 한다. … 실로 삼교를 포함하여(包含三敎) 접하는 모든 생명을 감화시키는 것(接化群生)이라” (道典 1:8:1~2)
가야산으로 들어가 신선이 되어 사라졌다고 하는 최치원. 유불선의 뿌리가 신교(神敎)임을 밝혔고, 신라는 물론 당나라까지도 이름을 드날린 신라시대 최고의 문장가 최치원의 생애와 사상을 알아보고 신선의 도를 닦아온 선인들의 신교의 맥을 짚어보기로 하자.
때를 만나지 못함을 슬퍼하며
고운 최치원(崔致遠,857~?)은 신라시대의 학자로서 경주 최씨의 시조이다. 자는 고운(孤雲), 해운(海雲)이며, 경주 사량부 출생이다. 6두품 출신으로 어릴 적부터 자질을 인정받아 당나라에 유학하였으며, 귀국한 후에는 진성여왕에게 시무책을 올려 6두품이 오를 수 있는 최고 관등인 아찬에 올랐다. 고려 현종 때 문창후로 봉해졌고, 학문과 문학에서 깊은 업적을 남겨 문인들은 그를 ‘동국문종’이라고 추앙하고 있다. 또한 후일 가야산으로 들어가 신발만 남긴 채 신선이 되었다고 전해서 후인들에게 ‘유선(儒仙)’으로 불린다.
경상도와 전북 일대에는 지금도 최치원의 행적이 전해진다. 옥구군에 있는 바위에는 최치원이 먹을 갈던 곳과 무릎자국이 남아있다고 하며, 해운대에서는 도술로 바위에 자신의 호를 새겼다고 한다. 유적뿐 아니라 출생설화를 비롯하여 전설도 많이 전해진다.
조선시대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 『최고운전』에 의하면, 최치원의 글 읽는 소리가 당나라 장안에까지 들릴 정도로 낭랑하였다고 한다. 이에 당나라에서는 신라에 큰 인재가 태어났음을 시기하여 사신을 보내 수수께끼를 내었는데, 최치원의 문장과 총명함에 놀란 당천자는 그를 장안으로 불러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뛰어난 기지와 용왕, 노구, 미녀 등의 도움으로 무사히 간계를 물리쳤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최고운은 분명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음에 틀림없다.
13세에 최치원은 당나라 유학의 길에 올라, 18세의 나이로 빈공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881년에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를 지었는데, 황소의 난을 진압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때 군무에 종사하면서 지은 글들은 훗날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으로 엮어졌다.
당시 당나라는 조금씩 국운이 기울어가고 있었고, 이방인인 최치원이 겪는 고독과 한계는 극에 달했다. 아픔과 좌절된 꿈을 시(詩)로 달래던 최치원은 결국 29세에 주위 관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부친의 병을 계기로 신라로 귀국하였다. 큰 포부를 안고 귀국했지만 최치원은 다시 골품제의 한계와 국정 문란으로 뜻을 펼 수가 없었다. 당시 신라사회는 중앙귀족들의 권력쟁탈과 함께 지배체제가 흔들리면서 도적 떼와 반란이 횡행했다.
891년 양길과 궁예가 세력을 확장했고, 다음해에는 견훤이 자립하여 후백제를 세웠다. 망국의 그림자를 본 최치원은 마지막 힘을 짜내어 894년 진성여왕에게 <시무책 10조>를 올려 왕이 이를 가납하였으나 골품제의 모순과 왕권의 미약으로 그의 개혁의지는 실현되지 못했다.
결국 어디서도 자신의 포부를 펼치지 못한 최치원은 40대의 나이에 관직을 버리고 풍류객으로 삶을 시작한다. 그에 대한 문헌의 기록은 904년을 끝으로 보이지 않는데 세간에서는 그가 신선이 되어 등천하였다고 전한다.
붓을 휘둘러 난을 토벌하다
최치원의 문집을 모은 『계원필경』 서문을 보면, 최치원을 당나라에 유학 보내며 아버지는 “10년 안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다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최치원은 “다른 사람이 백번하면, 나는 천번하였다(人百之己千之)”라고 하며 유학시절의 역경을 적고 있다. 그러나 최치원의 남다른 학문열은 결코 출세를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수없이 생각해 보아도 학문하는 것만 못합니다. 평생에 노력한 것이 오히려 헛될까 두려워서 출세의 길에 경쟁하지 않고 다만 유교의 道를 따랐습니다.… 오직 도가 장차 없어지는 것을 근심할 뿐 어찌 사람들이 나를 쉽게 알아주지 않음을 말하겠습니까?” 『계원필경 卷17』
또한 최치원의 남다른 철학과 정신이 더욱 잘 드러나는 것은 남아있는 저작과 시문을 통해서이다. 그 중 당나라 유학의 고독을 담은 「추야우중」과 말년에 은거하며 속세의 길을 훌쩍 뛰어넘은 경지가 잘 드러난 「가야산 독서당」이 대중에 널리 회자되고 있다.
또한 황소의 난의 기세를 통렬하게 꺾고, 치민(治民)의 대의를 담은 『토황소격문』은 당대에 견줄만한 작품을 찾기 힘든 명문이다. 더욱이 역사상 붓으로 난을 토벌한 이는 고운 최치원 외에 유례를 찾기 힘들다. 이런 경력에 힘입어 고려시대에는 후(侯)로 봉해졌고 심지어 조선문인들은 문천자(文天子)로 까지 숭상하였다.
“햇빛이 활짝 퍼졌으니
어찌 요망한 기운을 그대로 두겠는가!
하늘그물이 높게 달렸으니 반드시 흉적을 베리라!”
(토황소격문 中)
저술로는 『계원필경』 20권과 『사륙집四六集』 1권, 문집 30권 등이 있었고, 사서(史書)로는 『제왕연대력』과 불교와 관련하여 법장화상전 1권과 사산비명四山碑銘 등이 전하며 <동문선>에 시문 약간이 기록되어 있다. 그 외에도 방대한 저술이 있지만 전하여 오지 못하여 아쉬움이 남는다.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최치원은 스스로 자신을 ‘유자(儒者)’로 자처하였다고는 하나 그의 사상은 유불선을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그는 중국의 선, 불, 유는 한민족의 본래 신교(神敎)가 다시 역수입된 것으로 보았다. 특히 그가 쓴 <난랑비 서문>은 한민족에 면면히 내려왔던 신교의 정신을 확연히 드러내주는데 여기에서 최치원은 신교가 유·불·선의 뿌리임을 밝히고 있다.
國有玄妙之道하니 曰風流라.
국유현묘지도 / 왈풍류
設敎之源이 備詳仙史하니 實內包含三敎하야 接化群生
설교지원 / 비상선사 / 실내포함삼교 / 접화군생
且如入則孝於家하고 出則忠於國은 魯司寇之旨也오
차여입즉효어가 / 출즉충어국 / 노사구지지야
處無爲之事하고 行不言之敎는 周柱史之宗也오
처무위지사 / 행불언지교 / 주주사지종야
諸惡莫作하고 諸善奉行은 竺乾太子之化也라.
제악막작 / 제선봉행 / 축건태자지화야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조 난랑비 서문」)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 한다. 가르침을 베푸는 근원은 선사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거니와, 실로 삼교를 포함하여 접하는 모든 생명을 감화시키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보면, 이는 곧 집으로 들어와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으로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가 가르쳤던 뜻이요, 매사에 무위로 대하고 말없는 가르침을 행함은 노자의 가르침이며, 악한 일을 하지 말고 모든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하라는 것은 석가모니의 교화니라.”
마지막 화랑, 최치원
최치원은 문인으로서의 면모뿐 아니라, 선인으로서의 구도행 역시 후대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말년에는 시해법의 일종인 ‘가야도인법’을 저술하여 전하였다고 한다.
신라 중기 화랑인 물계자나 사랑(四郞)의 전설에서 보여지듯, 화랑의 정신은 멋과 풍류였다.1)
『청학집靑鶴集』을 쓴 조여적은 조선 단학의 계보가 광성자(廣成子)-명유(明由)-환인(桓因)-환웅(桓雄)-단군-문박-영랑-보덕-도선-최치원-위한조-편운자(片運子)로 이어졌다고 주장했다.2)
반면 『해동전도록』에서는 태상노군에서 종리권 여동빈으로 이어지는 중국 도교가 종리권에서 당나라 유학생이었던 최승우를 거쳐 최치원을 통해 우리나라로 흘러 들어와 김시습 등으로 이어졌다고 보기도 한다.
최치원은 비록 신라를 다시 부흥시키는 데는 실패했지만, 자신이 진정한 풍류객의 길을 걸었고, 뛰어난 필치로 화랑의 정신을 후세에 전했다는 점에서 신라의 마지막 화랑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최치원이 말한 바대로 유불선의 뿌리이며, 우리 민족 문화의 뿌리인 ‘신교’는 수천년 역사의 굴절 속에서도 꿋꿋이 전해져 후대에 최수운의 ‘동학’으로 이어졌으며, 이제 가을의 원시반본(原始返本)의 자연섭리에 의해 상제님의 천지공사 속에서 완성되었다. 이제 후천개벽의 시운을 맞아 그 얼과 혼을 받은 증산도의 초립동이들이 다시 세계 무대의 주인공으로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밤이 깊어 가매 더욱 흥을 내어 북을 치시며
시 한 수를 읊어 주시니 이러하니라.
時節花明三月雨요 風流酒洗百年塵이라
시절화명삼월우 풍류주세백년진
철 꽃은 내 도덕의 삼월 비에 밝게 피고
온 세상의 백년 티끌 내 무극대도의 풍류주로
씻어 내니 우리의 득의지추(得意之秋) 아닐런가.
(道典 5:15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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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화랑세기>에는 “화랑이란 선의 무리(仙徒)이다. … 선도들은 다만 신(神)을 받드는 일을 주로 하여 국공(國公)들이 그들을 따라 나란히 다녔고, 후일에 선도들은 도의(道義)로써 서로 면려(勉勵)하였으므로, 이에 어진 재상과 충성스런 신하가 이로부터 선발되었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이 여기에서 나왔으니 화랑의 역사는 알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라고 전한다.
《계림유사(鷄林類事)》를 보면, “단(檀)은 배달(倍達)이고, 국(國)은 나라(那羅)이며, 군(君)은 임검(任儉)이다.(檀倍達 國那羅 君任儉)”라는 기록이 있다. 풍월도(風月道)의 ‘풍(風)’이 옛날에는 ‘발함 풍’이라 하였는데, ‘바람’, ‘배람’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월(月)’은 ‘달 월’이다. 이것을 이두식으로 읽게 되면 ‘발달길’또는 ‘배달(倍達)길’이 된다. 또한 풍류도라 할 때 ‘류(流)’ 자는 ‘흐를 류’ 또는 ‘달아날 류’라 한다. 그렇다면 풍류도 역시 ‘배달길’이 된다고 하겠다. 신라에서는 맨 처음 풍월주(風月主)라 하였다가 뒷날 화랑(花娘, 花郞)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2) 광성자와 명유는 중국정사에서 상고의 신선으로 모셔지는 신비의 인물이다. 그리고 환인은 『환단고기』에서 ‘승유지기(乘遊至氣) 묘계자연(妙契自然)’ 하였다고 전하며, 환웅 역시 주문을 읽고 단을 복용하여 신령한 경지에 다다랐다고 한다. 단군임검 또한 삼국사기에 선인(仙人)왕검이라 칭하고 있다.
=== 선(仙)의 맥을 이은 인물들===============
신채호 선생은 『규원사화』 등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민족의 선(仙)이 한민족 고유의 것이며 이것이 일제치하 독립운동으로까지 이어지는 ‘낭가사상’이라고 보았다.
이런 선인들은 한민족 건국과정에서 주체로 참여하였으며 국가의 위란 시마다 구국의 투혼을 보여왔다. 배달국의 제세핵랑군에서 시작된 선인의 맥은 고구려의 조의선인, 백제의 무사도, 신라의 화랑, 고려의 국자랑으로 이어지며,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을 끝으로 은둔의 길을 걷게 된다.
을지문덕, 연개소문, 김유신, 우륵, 의상대사, 원효대사, 강감찬, 김시습, 정북창, 이지함, 곽재우, 권극중 등 낯익은 이름들이 선인의 맥을 이은 인물들이다. 이외에도 무명으로 시해선(尸解仙)이나 천선(天仙)이 된 이들은 수없이 많다. 이들은 세상과 담을 쌓고 풍류로써 자연과 벗하다가도 국가의 위난 시나 대변국기에는 어김없이 세상을 위하여 봉사하고, 헌신함을 꺼리지 않았다.
최치원 역시도 「낭혜화상비문」에서 장생을 구하여 학을 타고 날아다니며 고고함을 구하는 중국 선도를 깎아 내리며, 오히려 중생을 구제하여 세상을 위해 몸을 적시는 진정한 선의 길을 제시하였다.
<참고자료>
『삼국사기』권46(열전 제6) 최치원
「최치원의 삼교융화사상에 관한 연구」, 하갑룡, 부산대학교
「고운 최치원 시집1」, 김진영 외역, 민속원, 1997
출처 : 월간 개벽
최치원은 신라시대의 학자이며 경주 최씨의 시조이다.
869년에 13세로 당나라에 유학을 떠나 874년 당의 빈공과에 급제하여 선주표수현위라는 벼슬을 받았다.
879년 황소의날때에는 반란자를 치기 위해 선동하는 글인 토황소격문을 지어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다.
894년에 국정을 바로 잡기위한 시무 10조를 진성 여왕에게 상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후 최치원은 태수를 거쳐 아찬 벼슬에 올랐다.
하지만 어지러운 세상에 환멸을 느껴 관직을 내놓고 각지를 유랑하는 등
풍류 생활을 하다가 가야산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쳤다.
현재 송정에서 부산 해운대를 돌아오는 언덕에는 최치원의 동상과 함께
해운정이라는 작은 정자에 그의 흔적이 남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 최치원의 가야산독서당
- 최치원의 우흥
신교와 최치원의 풍류도
우리나라의 현묘한 도, 풍류
고대 한민족의 종교문화인 신교神敎의 존재는 통일 신라의 대학자 최치원이 남긴, 유명한 <난랑비서>에서 입증된다.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는데 이를 풍류風流라고 한다. 교를 설한 근원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 려 있거니와, 내용은 곧 삼교를 포함하는 것으로서, 군생群生을 접촉하여 감화시킨다. 이를테면 들어 와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아가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노사구(공사)의 주지와 같고, 무위로서 세상일을 처리하고 말없는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주주사周柱史(노자)의 종지와 같으며, 모든 악한 일을 하지 않고 모든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축건 태자(석가)의 교화와 같다.
최치원은 풍류라고 불리는, 우리나라의 현묘한 도의 존재를 언급하고 있다. 이는 여기서 다루는 우리 민족의고유한 신교와 같은 것일 터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것의 내용까지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얘기들이<선사仙史>라는 문헌에 이미 자세히 실려 있다고 밝히고 있다.
신교는 유불선 삼교의 원형
그는 신교의 주요한 특성으로 삼교의 핵심 주장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들고 있다. 글의 문맥으로 보면 하나의 원형으로서 신교가 먼저 있는데, 삼교를 통해 들여다보면 그것들의 종지들이 그 안에 이미 담겨 있다는 식으로 이해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참고로 부모에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널리 알려진 유교의 주장이고, “무위無爲로써세상일을 처리하고 말없는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노자> 제2장에, “모든 악한 일을 하지 않고 모든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불교의 <열반경>과 <증일아함경>에 발견된다.
‘풍류’의 어원 분석
어원분석을 통해 풍류의 뜻을 밝히는 한 시도에 따르면, 풍류는 배달이나 배달의 도를 가리킨다.
풍류에서 풍은 ‘밝’(태양, 밝음)을 이두문식으로 표기한 글자다. <훈몽자회>에 풍은 발함풍 ~ 발암풍 ~ 바람풍으로 읽는다고 나온다. ‘밝’(태양, 밝음)을 글로 적기 위해 발함, 바람이라 읽는 풍을 취한 것이다. 그래서 풍산이나 백산, 박산, 불함산이 다같은 이름의 산이다. 모두 밝산, 밝은 산을 가리킨다.
또 류는 어떤가? 류는 흐를 류는 다르난(달아날) 류로 읽는다. 풍류의 ‘류’는 땅을 의미하는 달을 한자로 적기위해 빌린 것이다. 그렇다면 풍류 혹은 풍월은 밝달, 배달을 의미한다. 그리고 밝과 배는 같이 쓰인다. 예컨대 새벽, 새박, 세배가 모두 같은 말(새밝, 東明)이다. 풍월에서 ‘월’ 역시 달 월이다. 양주동의 경우는 ‘류’나 ‘월’이 붉의 끝음이 ‘ㄹ'임을 표시하는 것으로 풀이한다.
이런 어원 분석의 관점을 떠나서도 풍은 신으로 해석되거나 신의 상징으로 쓰인다. 따로 한 곳에 머물지 않지
만 가지 않는 곳이 없는 바람에서 신을 떠올리는 것이다. 예컨대 신이 일으키는 조화의 활력을 ‘신바람’이라고 부르는 것을 상기해 보라. 대지에 이는 바람에서 신의 조화를 느끼는 것은 동, 서양이 다르지 않는가 보다. 헬라어로 프뉴마pneuma, 히브리어로는 루아흐ruach는 영靈을 뜻하는데, 바람과 숨의 동의어라고 한다. 보이지 않는 가운데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두루 편재하면서 조화를 짓는 바람과 살아있는 것들의 생명인 숨을 신의 활동과 힘 또는 신으로 여긴 것이다.
어떻게 해석하든 풍월(도), 풍류(도)는 (밝은) 도 신교나 신도를 가리키는 이름이 된다. 최치원은 또 <계원필경>에서 상고의 풍風을 언급한다.
... 상고의 풍風을 잘 일으켜서 길이 대동大同을 이루어 무릇 털을 이고 이빨을 머금은 것이나 물 속 에 잠긴 것, 공중을 나는 것들까지도 모두 자비를 입어 해탈하게 한다.
신교는 고대 한민족의 종교 생활문화
신교는 신으로써 가르침을 베푼다, 신의 뜻과 가르침으로써 세상을 다스린다, 신을 인간 생활의 중심으로 삼는다는 폭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한 종교나 신앙 형태가 아니라 정치나 종교 등 모든 삶의 중심을 이루는 것이었다.
신교는 이른바 확산종교diffused relogion에 가까운 것으로서 “한국 고대의 가장 뚜렷하고 독특한 민족적 종교요, 사상이요, 문화형태”였다. 그리하여 신교는 하늘을 섬기고 모든 것이 신의 주재 아래 있다고 믿으며 신의 뜻에 따라 사는 생활문화 혹은 삶의 방식임을 파악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해 신교의 핵심을 차지하는 것은 선 혹은 선교며, 또 신교는 유불선을 포함하는 혹은 그것들의 모태로 권리 주장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한민족 문화의 원형, '신교'", 황경선 지음, 상생출판, 15~2쪽>
최치원 삶과 꿈
한국 고대사 최고의 천재(天才)는 누구일까요? 필자는 최치원(崔致遠)이라고 생각합니다. 흔히 신라 3대 문장가라고 하면, 최치원·강수(强首)·설총(薛聰)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세 사람 중 으뜸을 꼽으라면, 신라 최대의 문장가라고 불린 최치원을 들 수 있습니다. 또한 통일신라 말기에 활동한 지식인과 학자들 중 가장 뛰어난 학식과 천재적 재능을 지닌 세 사람의 '최씨(崔氏)'를 일컬어 '삼최(三崔)'라고 합니다. 최치원, 최승우(崔承祐) 그리고 최언위(崔彦撝)가 바로 '삼최(三崔)'입니다. 이렇듯 최치원은 학문이면 학문, 문장이면 문장 어느 쪽에서도 최고의 자리를 차지한 '천재 중의 천재'였습니다.
최치원은 아주 일찍부터 천재성을 발휘한 듯합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 '최치원(崔致遠)'에서는, 그가 어려서부터 침착한 성격을 가졌고 매우 똑똑하고 영리했으며 학문을 좋아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일찍부터 부모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모양입니다. 그것은 열두 살에 당(唐)나라 유학길에 올랐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당시 유학길에 오른 어린 자식에게 그의 아버지가 했던 말 역시, 그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컸는가를 실감하게 해줍니다.
十年不第 卽非吾子也 行矣勉之
10년 동안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자식이 아니다. 당(唐)나라에 가거든 힘써 공부해라.
당(唐)나라에 도착한 최치원은, 낯설고 물 설은 이역만리(異域萬里)에서도 자신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드러냈습니다. 18세 때 치른 단 한 번의 과거시험에서 급제(及第)를 하여, 현위(縣尉)라는 관직에 임명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관직에 나간 지 5년째 되는 해인 서기 879년, 황소(黃巢)의 반란 사건이 일어나자 종사관(從事官)으로 따라 나서 지은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으로, 당나라와 신라에서 크게 이름을 얻습니다.
그 후 신라로 돌아온 최치원은 당나라 유학과 벼슬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이 품은 큰 뜻을 펼쳐보고자 했습니다. 당시 그는 진성여왕(眞聖女王)에게 자신의 개혁구상과 정책 대안을 밝힌 '시무 10조(時務十條)'를 올렸고, 여왕 또한 최치원을 중용하여 나라를 맡겼습니다. 그러나 이미 썩을 대로 썩어버린 신라의 귀족계급은 최치원의 개혁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을 김부식(金富軾)은, "말세(末世)에 접어든 신라의 귀족계급은 의심하고 꺼리는 것이 많아 최치원을 용납하지 않았다"고 썼습니다. 결국 최치원은 대산군(大山郡) 태수(太守)라는 외직(外職 : 지방 관리)으로 내쫓기다시피 나가게 됩니다.
그 후 최치원은 관직을 내놓고, 기울어 가는 신라의 운명을 한탄하면서 전국 각지를 떠돌아 다녔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지닌 천부적 능력과 큰 뜻을 펼칠 수 없는 신라에 대한 모든 미련을 버리고 초야(草野)에 묻혀 살기로 결심합니다. 최치원이 산 시대는 당나라나 신라 모두 난세(亂世)였습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최치원을 두고 난세(亂世)를 만나 처신하기 어려워 몸과 마음은 지쳤고 자신의 뜻을 펴 보이고자 움직이면 허물과 상처만을 입게 되었다고 평했습니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이 때문에 최치원은 스스로 때를 잘못 만난 것을 탓하면서, 두 번 다시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최치원은 자유로운 몸이 되어 서적을 쌓아 베고 세상일을 멀리한 채, 역사를 기록하거나 자연을 읊는 삶에 자족(自足)했습니다.
신라 천년사 최고의 천재인 최치원을 받아들이기에, 신라는 이미 너무 늙고 기력이 쇠잔해버린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최치원은 몰락해 가는 신라의 운명을 지켜볼망정, 끝내 신라를 버리지는 못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최치원은 궁예와 견훤 그리고 뒤이어 왕건이 일어나자, 앞 다투어 신라를 버린 지식인들과는 다른 행보를 보여준 셈입니다. 그는 몰락해 가는 신라와 운명을 함께 한 최후의 지식인이었습니다.
최치원 (업적,일생,성격,일대기)
(임도령(inche12) 2012.05.15 13:58)
최치원(崔致遠, 857~?). 자는 고운(孤雲). 호는 해운으로 해운대구의 지명이 그에게서 유래한 것이다. 그를 신격화하여 주인공으로 한 《최고운전》이라는 고전소설이 있다.
속성
엄친아
- 카사노바
그가 남긴 시문은 현전하는 '계원필경'(20책), '사산비명'을 포함하여 '삼국사기'에만도 문집 30권이 전한다고 기록할 정도로 방대하다. 이 중 당나라 유학시절인 25세(881년) 때 지은 온 천하 사람들이 너를 드러내놓고 죽이려 할 뿐 아니라, 지하의 귀신들까지 너를 죽이려 이미 의논했을 것이다라는 내용의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은 적장 황소가 혼이 빠져 평상에 내려앉았다는 일화가 전해올 정도로 오늘날까지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황소의 난이 진압된 뒤 중국 황제는 최치원에게 자금어대를 하사했다. 자금어대는 황제가 정5품 이상에게 하사하는 붉은 주머니로, 이것을 받았다 함은 그 능력을 황제에게 인정받았다는 의미이다.
- 그의 말년
- 최치원의 안습일화
- 최치원은 빈공과에 급제한 후 2년간 관직이 나오지 않아서 허송세월을 하면서 서류대필과 저술활동으로 끼니를 때우다가 겨우 선주 율수현의 현위에 임명이 되었으나 이듬해 사퇴한다. 빈공과 자체가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과거다보니 여기 급제해봐야 제대로 된 대우를 받을 수 없었고, 당시 당의 사정이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현위를 그만두고 백수가 된 최치원은 박사굉사과라는 내국인 대상 시험을 준비하지만 관직에 있던 시절 나오던 녹봉도 끊겼기 때문에 다시 끼니걱정을 할 상황에 들어간다. 이후 양양의 이위라는 사람의 문객으로 들어가서 밥을 먹게 된다.
- 결국 2년만에 시험을 포기하고, 대신 구직활동에 나섰다. 당시 절도사중 1인으로 이름을 떨치던 고변의 문객으로 들어가려 한 것이다. 이 시기 최치원은 동년배인 고운을 통해서 고변에게 자신의 소개와 관직청원인 자천서를 2회에 걸쳐서 올려서 결국 고변의 문객이 되었고, 고변이 황소의 난 토벌을 맞게 되자 함께 참전하였다. 격황소서 역시 이 시기에 발표된 것으로, 발표자의 명칭도 당연히 최치원이 아니라 고변이었다. 이러한 고변의 덕으로 최치원은 도통순관 승무랑 전중시어사 내공봉의 직책과 함께 비은어대를 받지만, 토벌군이 편성되는 과정에서 군 내부의 사기를 높히기 위해서 내렸던 명예직으로 실권은 전혀 없었다. 실제로 이 시기의 최치원은 당나라의 기록에 고변의 문객으로만 기록에 남아있을 뿐이다
- 최치원이 문객으로 의탁한 고변은 도교에 심취해서 나중에 그 때문에 군무마저 내팽겨쳤다가 내부 반발로 살해당한 인물이었다. 최치원은 한국 도교사에서 비조로 꼽히는데, 이 고변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라는 추정도 존재한다
- 문제는 고변이 황소의 난을 토벌하는데 관할지인 양주에 머무르기만하고 정작 수도 장안을 점령한 황소군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이유로 반란의 의심을 받아서 882년 파직된 것이다. 최치원과 관련해서 고변이 황소의 난을 토벌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황소의 난을 제압한 것은 돌궐계통인 이극용 등의 활약이 지대했다. 이후에도 고변은 양주에 머무르면서 거의 반 독립군벌처럼 움직였으며, 최치원이 귀국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내부 반발로 살해 당했다. 고변이 파직된 882년과 최치원이 귀국하는 885년 간의 3년간의 행적은 전혀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이 882년에 자금어대를 받았으며 이후 당나라 황제의 서신을 가지고 귀국하였기 때문에 이 때 할거한 고변을 이탈한 것이 아닌가 추정되기도 하지만 분명하지 않다.
- 이렇게 신라로 귀국한 최치원이 귀국해서 홀대 받은 것도 아니었다. 당시 신라의 헌강왕은 당나라 유학생 출신들을 중용하였고, 최치원 역시 한림학사에 임명되어서 외교문서 작성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헌강왕이 사망한 이후 최치원은 자청하여 외직으로 나가게 되는데, 이 역시 해안지방의 곡창지역으로 중요도가 높은 지역이었다.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조를 바치고 6두품의 한계인 아찬까지 임명되는 등 최치원에 대한 신라왕실의 신임은 상당했다. 단적으로 진성여왕이 물러나고 효공왕이 즉위하는 과정에서도 진성여왕의 양위표와 효공왕의 즉위에 대한 사사위표를 당나라 황실에 보내는 등, 효공왕 초기까지 대당외교에서 활동했다. 이 시기에 작성된 대표적인 외교문서가 발해의 출자문제와 엮이는 사불허북국거상표로 효공왕 원년에 효공왕의 이름으로 최치원이 작성하여 당에 보낸 국서였다. 하지만 최치원은 결국 관직을 버리고 물러난다. 하지만 신라는 이미 후삼국의 혼란기로 나아가고 있었고, 최치원은 이 상황에서 혼자 힘으로 뭘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이 더 문제였다. 최치원이 좌절한 것은 골품제의 모순이라기 보다는 반란과 절도사의 난립이 벌어지던 당과 마찬가지로 혼란한 시대적 상황이었다.
- 일설에는 최치원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계림(신라)은 누런 잎이고, 곡령(고려)은 푸른 소나무”라는 글을 올려 고려에 대한 지지를 완곡하게 표현했으며, 심지어 이 때문에 신라왕의 미움을 받아 가족을 이끌고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가 은거했다는 말들이 전하지만, 최치원의 효공왕의 즉위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은거한 것은 897년,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거병한 것은 918년으로 20년의 격차가 있기 때문에 신라 효공왕의 미움을 사서 파직되었다는 것은 당연히 말도 안되는 이야기이고, 최치원의 마지막 행적이 남아있는 것이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를 지은 908년이기 때문에 왕건의 거병시에는 생사조차 불분명하다. 더구나 최치원은 신라 왕실의 덕을 많이 보았고, 스스로도 신라왕실에 대한 충성이 강했기 때문에 다른 6두품들과는 달리 쉽게 호족들과 결탁하지도 못하는 입장이어서 좌절한 경우였다. 때문에 고려시대 최치원을 높이는 과정에서 후대에 가작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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