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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

최치원_시무 10조

 

 

최치원(崔致遠, 857~?)은 유교∙불교∙도교에 이르기까지 깊은 이해를 지녔던

학자이자 뛰어난 문장가였다. 하지만 높은 신분제의 벽에 가로막혀,

자신의 뜻을 현실정치에 펼쳐보이지 못하고 깊은 좌절을 안은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그가 이룩한 학문과 문장의 경지는 높았으나,

 난세를 산 그의 삶은 그가 이룩한 높은 경지만큼 불행했다.

 

 

 

열두 살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 6두품의 천재

신라 6두품 출신으로 당으로 건너가 18세에 빈공과에장원으로 합격한, 신라 최고의 천재 최치원.

신라 6두품 출신으로 당으로 건너가 18세에 빈공과에
장원으로 합격한, 신라 최고의 천재 최치원.

868년 어느 날, 당나라로 떠나는 열두 살의

최치원에게 아버지는 말했다.

 

“10년 공부하여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라고 하지 말아라. 나 역시

아들이 있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가서 열심히 하거라.”

 

먼 곳으로 어린 아들을 보내는 아버지의

당부로는 지나치리만큼 매서운 이 말 속에는

 대대로 문장과 학문으로 이름을 얻었던

최씨 집안 자손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6두품으로서 느끼는 한과 비애가 숨어

있었다. “네 살 때 글을 배우기 시작해

열 살 때 사서삼경을 읽었다.”라는 기록이

 전할 만큼 총명한 아들이었지만 신라에서는

 그 재능을 다 펼치기 어렵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아버지였다.

 

최치원은 신라 6두품 집안 출신이었다. 엄격한 골품제 사회였던 신라에서 6두품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신라 17관등 가운데 6등위에 해당하는 아찬 이상의 벼슬에는 오를 수 없었다. 골품제라는 한계 속에서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하지 못했던 6두품들은 당나라 유학의 길을 많이 선택했다. 837년 한 해 동안 당나라에 건너간 신라 유학생이 216명에 이를 정도로 당시 신라에서는 유학 열풍이 불고 있었다.


 

 

 

 

유학을 떠나는 최치원의 각오도 아버지 못지않았다.

 당나라에 간 최치원은 “졸음을 쫓기 위해 상투를 매달고

가시로 살을 찌르며, 남이 백을 하는 동안 나는 천의 노력을 했다.”

라는 기록을 남길 만큼 열심히 공부했다. 그 결과 6년 만인 874년,

18세의 나이로 빈공과에 합격했다. 그냥 합격도 아니고 장원이었다.

 빈공과는 당나라에서 외국인을 위해 실시한 과거로 이 시험에

합격하면 당나라에서 벼슬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귀국 후

출세길이 보장된 엘리트코스였다.

 

 

 

[토황소격문]으로 당나라 전역에 이름을 떨치다

 

과거에 합격한 2년 뒤인 876년 율수현의 현위로 첫 관직에 올랐으나 이듬해

사직했고, 이후 회남 절도사 고변의 추천으로 관역순관이라는 비교적 높은

지위에 올랐다. 이 무렵 ‘황소의 난’이 일어났다. 소금장수였던 황소가 장안을

점령하고 스스로 황제를 칭하자, 고변은 이를 토벌하러 나가면서 최치원을

종사관으로 발탁했다. “황소가 읽다가 너무 놀라서 침상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라는 일화가 전하는 유명한 글 [토황소격문]이 쓰인 것은 이때의 일이다.

 

“무릇 바른 것을 지키고 떳떳함을 행하는 것을 도라 하고, 위험한 때를 당해서

변통하는 것을 권이라 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때에 순응해 성공하지만 어리석은

 자는 이치를 거슬러 패하는 법이다.”

 

이렇게 시작한 글은 “온 천하 사람들이 너를 드러내놓고 죽이려 할 뿐 아니라,

지하의 귀신들까지 너를 죽이려 이미 의논했을 것이다.”라며 겁을 주기도 하고

“나는 한 장의 글을 남겨서 너의 거꾸로 매달린 위급함을 풀어주려는 것이니,

너는 미련한 짓을 하지 말고 일찍 기회를 보아 좋은 방책을 세워 잘못을

고치도록 해라.”라고 회유하기도 한다.

 

 

중국땅에 문을 연 최치원 기념관. 최치원은 고국인 신라보다는 당에서 더욱 실력을 인정받았다.

중국땅에 문을 연 최치원 기념관. 최치원은 고국인 신라보다는 당에서 더욱 실력을 인정받았다.

 

 

 

고변은 황소가 장악한 모든 지역에 이 글을 뿌렸다. 당시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황소를 격퇴한 것은 칼이 아니라 최치원의 글이다.”라는 이야기가 떠돌았을

정도로 최치원의 글솜씨는 당나라 전체를 뒤흔들었다. 황소의 난이 진압된 뒤 

중국 황제는 최치원에게 자금어대를 하사했다. 자금어대는 황제가 정5품

이상에게 하사하는 붉은 주머니로, 이것을 받았다 함은 그 능력을 황제에게

 인정받았다는 의미이다.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6두품의 한계는 여전히 그의 발을 붙들고…

[토황소격문]으로 문명(文名)을 떨쳤고 황제에게 인정도 받았으나,

고국과 부모에 대한 그리움을 떨쳐버리지 못했기 때문인지 최치원은

17년간의 당나라 생활을 접고 귀국을 결정한다. 884년 당 희종이 신라 왕에게

 내리는 조서를 가지고 귀국할 당시 그의 나이는 28세였다. 신라의 헌강왕

최치원을 ‘시독 겸 한림학사’로 임명했다. 신라 조정에서 당에 올리는 표문을

비롯한 문서를 작성하는 직책이었다. 헌강왕은 왕권을 강화하려는 노력의 하나로

당나라 유학생 출신들을 귀국시켜 학문적인 전문가로 측근에 두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세계적인 지식인으로 성장한 젊은 최치원에 대한 기대가

컸을 것이다. 최치원 또한 당나라에서 배운 학문과 기량을 고국에서 제대로

 펼쳐보이고 싶은 열망에 가득 차 있었다.

 

 

삼국사기 옥산서원본 전 50권 가운데 권 46의 제 3장 최치원 부분. <출처 : 국사출판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NIKH.DB-fl_001_002_001_0035)

삼국사기 옥산서원본 전 50권 가운데 권 46의 제 3장 최치원 부분.
<출처 : 국사출판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NIKH.DB-fl_001_002_001_0035)


 

그러나 이듬해 7월 헌강왕이 승하하자

최치원은 곧 외직으로 나가 태산군 태수가

 되었다. 외직으로 나간 이유에 대해

[삼국사기]는 ‘최치원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당나라에 유학해 얻은 바가 많아서 앞으로

자신의 뜻을 행하려 하였으나, 신라가

쇠퇴하는 때여서 의심과 시기가 많아

용납될 수 없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헌강왕이 세상을 떠난 직후임을 살펴볼

 때 왕권을 강화하려는 노력을 펼치던

헌강왕의 측근으로서, 헌강왕의 정책에

반발하던 진골 귀족들의 눈 밖에 난 것일

 수도 있다.

 

그 무렵 신라는 급속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지방에서 호족들이 등장하여 중앙 정부를

위협하고, 세금을 제대로 거두어들이지 못한

 국가의 재정은 어려웠다. 889년에는

농민들이 사방에서 봉기하여 전국적인

내란 상태에 빠졌다. 의욕적으로 시작한

고국생활이었지만 골품제의 한계와 국정의

혼란을 넘어서지 못한 채 최치원은 외직으로

떠돌며 대산군∙천령군∙부성군 등의 태수를

역임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신라를 개혁하려는 의지가

 완전히 꺾인 것은 아니었다. 894년에는

시무책 10여 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려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진성여왕은 그의 시무책을 받아들여,

최치원을 6두품 신분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 관직인 아찬에 제수하고 그의 제안대로

개혁을 펼치려 했다. 그러나 당시 중앙

귀족들은 그의 개혁안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당나라에서는 이방인이라는 한계가,

 고국에 돌아와서는 6두품이라는 한계가

그의 발목을 붙잡은 셈이다.

 

 

유∙불∙선의 통합을 주장한 사상가

 

이후 최치원은 은둔을 결심하고 경주의 남산∙강주∙합천의 청량사∙지리산 쌍계사∙

동래의 해운대 등에 발자취를 남기다 말년에는 해인사에 머물며 열정적으로

저술활동에 몰두했다. 해인사에서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알 수 없으나, 그가

 남긴 마지막 글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에 따르면 908년까지 생존했던

듯하다. 그 뒤 방랑하다가 죽었다고도 하고 신선이 되었다고도 한다.

 

 

경북 문경의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 국보 315호로최치원이 지은 비문을 새긴 비석이다.

경북 문경의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 국보 315호로
최치원이 지은 비문을 새긴 비석이다.

부산 해운대(海雲臺)의 지명의 유래가 된 최치원이 남긴 글씨

 

 

 

최치원 자신은 신라인으로 남아 은둔 생활로 일생을 마쳤지만, 유교에서 그의

 선구적 업적은 최승로로 이어져 신흥 고려의 정치 이념을 확립하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후 최치원은 한국유학사상 최초의 도통으로 모셔지고 있으나,

사실 그의 사상은 유교와 불교, 도교를 통합한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지증∙낭혜∙진감 등 선승들의 탑 비문을 썼고, 노장사상에도 관심이 있었으며,

유∙불∙선의 통합을 주장했다.

 

한편, 최치원이 왕건에게 “계림(신라)은 누런 잎이고, 곡령(고려)은

푸른 소나무”라는 글을 올려 고려에 대한 지지를 완곡하게 표현했으며,

심지어 이 때문에 신라왕의 미움을 받아 가족을 이끌고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가 은거했다는 말들이 전한다. 그러나 최치원이 은퇴할 당시 왕건은

이십 대 초반의 청년으로 궁예 휘하의 장수에 불과했다.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것은 그로부터 20년이나 더 지난 뒤의 일이다.

은퇴한 이후에도 꾸준히 신라에 대한 강한 애착과 호국에 대한 굳은

의지를 글로 표현했던 최치원이 은밀히 왕건을 지지했을 것 같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