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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황소격문 (wh155 2005.09.24 10:04 )

토황소격문

 

이 글은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반란을 일으킨 황소에게 보내는 글이다. 이 글을 읽고 황소는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 앉았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후 황소의 난은 진압되었다.

檄黃巢書

廣明二年七月八日 諸道都統檢校太尉某官 告黃巢 夫守正修常曰道臨危制變曰權

智者成之於順時 愚者敗之於逆理 然則雖百年繫命

生死難期 而萬事主心 是非可辨 今我以王師則有征無戰 軍政則先惠後誅

將期剋復上京 固且敷陳大信 敬承嘉諭 用?奸謀 且汝素是遐?

驟爲勍敵 偶因乘勢 輒敢亂常 遂乃包藏禍心 竊弄神器 侵凌城闕

穢?宮? 旣當罪極滔天 必見敗深遁地 噫 唐虞已降 苗扈弗賓

無良無賴之徒 不義不忠之輩 爾曹所作 何代而無 遠則有劉曜王敦??晉室

近則有祿山朱 吠?皇家 彼皆或手握强兵 或身居重任叱叱則雷奔電走

喧呼則霧塞烟橫 然猶暫逞奸圖 終殲醜類 日輪闊輾

豈縱妖? 天綱高懸 必除凶族 況汝出自閭閻之末 起於?畝之間以焚劫爲良謀

以殺傷爲急務 有大 可以擢髮 無小善可以贖身 不唯天下之人皆思顯戮

仰亦地中之鬼已議陰誅 縱饒假氣遊魂 早合亡神奪魄

凡爲人事 莫若自知 吾不妄言 汝須審聽 比者我國家德深含垢

恩重棄瑕 授爾節? 寄爾方鎭 爾猶自懷?毒 不斂梟聲 動則齧人

行唯吠主 乃至身負玄化 兵纏紫微 公侯?竄危途 警?則巡遊遠地

不能早歸德義 但養頑凶 斯則聖上於汝有赦罪之恩 汝則於國有辜恩之罪

必當死亡無日 何不畏懼于天 況周鼎非發問之端 漢宮豈偸安之所

不知爾意終欲奚爲 汝不聽乎 道德經云 飄風不終朝 驟雨不終日

天地尙不能久 而況於人乎 又不聽乎 春秋傳曰 天之假助不善

非祚之也 厚其凶惡而降之罰 公汝藏奸匿暴 惡積禍盈 危以自安迷以不復

所謂燕巢幕上 漫恣騫飛 魚?鼎中 卽看?爛 我緝熙雄略?合諸軍

猛將雲飛 勇士雨集 高旌大? 圍將楚塞之風 戰艦樓船

塞斷吳江之浪 陶太尉銳於破敵 楊司空嚴可稱神 旁眺八維 橫行萬里

旣謂廣張烈火 ?彼鴻毛 何殊高擧泰山 壓其鳥卵 卽日金神御節水伯迎師

商風助肅殺之威 晨露滌昏煩之氣 波濤旣息 道路卽通 當解纜於石頭

孫權後殿 佇落帆於峴首 杜預前驅 收復京都 剋期旬朔但以好生惡殺

上帝深仁 屈法申恩 大朝令典 討官賊者不懷私忿 諭迷途者固在直言

飛吾折簡之詞 解爾倒懸之急 汝其無成膠柱 早學見機

善自爲謀 過而能改 若願分茅列土 開國承家 免身首之橫分

得功名之卓立 無取信於面友 可傳榮於耳孫 此非兒女子所知 實乃大丈夫之事

早須相報 無用見疑 我命戴皇天 信資白水 必須言發響應

不可恩多怨深 或若狂走所牽 ?眠未寤 猶將拒轍 固欲守株 則乃批熊拉豹之師

一麾撲滅 烏合?張之衆 四散分飛 身爲齊斧之膏

骨作戎車之粉 妻兒被戮 宗族見誅 想當燃腹之時 必恐?臍不及 爾須酌量進退

分別否臧 與其叛而滅亡 曷若順而榮貴 但所望者 必能致之

勉尋壯士之規 立期豹變 無執愚夫之慮 坐守狐疑 某告


격황소서(檄黃巢書-역적 황소에게 보내는 격문)





광명 2년 7월 8일에 제도도통검교태위 모(某)는 황소에게 고하노니,

무릇 바른 것을 지키고 떳떳함을 행하는 것을 도(道)라 하고, 위험한 때를 당하여 변통하는 것을 권(權)이라 한다. 지혜 있는 이는 시기에 순응하는 데서 성공하고, 어리석은 자는 이치를 거스르는 데서 패하는 법이다. 비록 백년의 수명에 죽고 사는 것은 기약하기 어려우나, 모든 일은 마음으로써 그 옳고 그른 것을 이루 분별할 수 있는 것이다.

- 서두(제도도통검교태위는 황소에게 고함)

이제 내가 왕사로서 말하면 정벌함은 있으나 싸우지는 않고, 군정(軍政)은 머너 은혜를 베풀고 베어 죽이는 것은 뒤로 한다. 장차 상경(上京)을 수복하고 진실로 큰 믿음을 펴려고 함에 공경스럽게 가유를 받들어 간사한 꾀를 쳐부수려고 한다. 또 너는 본래 먼 시골 구석의 백성으로 갑자기 억센 도적이 되어, 우연히 시세를 타고 문득 감히 떳떳한 기강을 어지럽게 하며 드디어 불측한 마음을 가지고 신기(神器)를 노리며 성궐을 침범하고 궁궐을 더럽혔으니 이미 죄는 하늘에 닿을 만큼 지극하였으니 반드시 여지 없이 패하여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은 분명하다.

애달프다. 당우 시대로부터 내려오면서 묘와 호 따위가 복종하지 아니하였은즉, 양심 없는 무리와 충의(忠義) 없는 것들이란 바로 너희들의 하는 짓이다. 어느 시대인들 없겠느냐. 멀리는 유요와 왕돈이 진 나라를 엿보았고, 가까이는 녹산과 주자가 황가를 시끄럽게 하였다. 그들은 모두 손에 막강한 병권(兵權)을 쥐었고 또한 몸이 중요한 지위에 있어서, 호령만 떨어지면 우레와 번개가 치닫듯 요란하였고, 시끄럽게 떠들면 안개와 연기가 자욱하듯 하였지만, 잠깐 동안 못된 짓을 하다가 필경(畢竟)에는 그 씨조차 섬멸(殲滅)을 당하였다.

햇빛이 널리 비침에 어찌 요망한 기운을 마음대로 펴리요, 하늘 그물이 높게 달려 반드시 흉적을 베일진대 하물며, 너는 여염집에서 내치고, 농묘 사이에서 일어나 분겁으로 좋은 꾀 삼고, 살상으로 급무 삼으니 큰 죄는 탁발할 수 있을 것이요, 소선(小善)으로 은신(隱身)할 수 없느니라. 천하 모든 사람이 다 너를 죽이려고 생각할 뿐 아니라, 문득 또한 땅 속의 귀신도 벌써 남몰래 베기로 의논하였다. 비록 기세를 빌어 혼을 놀게 하나, 일찍이 선을 망치고 넋을 빼앗으리라. 무릇 인사를 이름에 스스로 하는 것만 같지 못하니 내 망언(妄言)하지 않는다.

너는 자세히 듣거라. 요즈음 우리 나라에서는 더러운 것을 용납하는, 덕이 깊고 결점을 따지지 않는 은혜가 지중하여 너에게 병권을 주고 또 지방을 맡겼거늘, 오히려 짐새와 같은 독심을 품고 올빼미와 같은 흉악한 소리를 거두지 아니하여 움직이면 사람을 물어뜯고 하는 짓이 개가 주인을 짖는 격으로, 필경에는 천자의 덕화를 배반하고 궁궐을 침략하여 공후들은 험한 길로 달아나게 되고 어가는 먼 지방으로 행차하시게 되었다. 그런데도 너는 일찌감치 덕의에 돌아올 줄 모르고 다만 흉악한 짓만 늘어가니, 이야말로 천자께서는 너에게 죄를 용서해 준 은혜가 있고, 너는 국가에 은혜를 저버리니 죄가 있을 뿐이니, 반드시 머지않아 죽고 말 것인데, 어찌 하늘을 무서워하지 않느냐.

하물며 누자라 솥은 물어 볼 것이 아니요, 한나라 궁궐은 어찌 네가 머무를 곳이랴. 너의 생각은 끝내 어찌하려는 것이냐. 너는 듣지 못하였느냐. <도덕경>에 "회오리바람은 하루 아침을 가지 못하고 소낙비는 온종일을 갈 수 없다." 고 하였으니, 하늘의 조화도 오히려 오래 가지 못하거든 하물며 사람의 하는 일이랴. 또 듣지 못하였느냐. <춘추전>에 "하늘이 아직 나쁜 자를 놓아 두는 것은 복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그 죄악이 짙기를 기다려 벌을 내리려는 것이다."고 하였는데, 지금 너는 간사함을 감추고 흉악함을 숨겨서 죄악이 쌓이고 앙화가 가득하였음에도, 위험한 것을 편안히 여기고 미혹되어 돌이킬 줄 모르니, 이른바 제비가 막 위에다 집을 짓고 막이 불타오르는데도 제멋대로 날아드는 것과 같고, 물고기가 솥 속에서 너울거리지만 바로 삶아지는 꼴을 당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뛰어난 군략을 모으고 여러 군사를 규합하여, 용맹스런 장수는 구름처럼 날아들고 날랜 군사들은 비 쏟아지듯 모여들어, 높이 휘날리는 깃발은 초새의 바람을 에워싸고 총총히 들어찬 함선은 오강의 물결을 막아 끊었다.

진나라 도태위처럼 적을 쳐부수는 데 날래고, 수 나라 양소처럼 엄숙함이 신이라 불릴 만하여, 널리 팔방을 돌아보고 거침없이 만 리를 횡행할 수 있으니 마치 치열한 불꽃을 놓아 기러기 털을 태우고, 태산을 높이 들어 새알을 짓누르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금신이 계절을 맡았고 수백(水伯)이 우리 군사를 환영하는 이 때, 가을 바람은 숙살하는 위엄을 도와주고 새벽 이슬은 혼잡한 기운을 씻어 주니, 파도는 이미 쉬고 도로는 바로 통하였다. 석두성에 뱃줄을 놓으니 손권이 후군이 되었고, 현산에 돛을 내리니 두예가 앞잡이가 되었다. 앞으로 서울을 수복하기는 늦어도 한 달이면 되겠지만, 살리기를 좋아하고 죽이기를 싫어하는 것은 하늘의 깊으신 덕화요, 법을 늦추고 은혜를 펴려는 것은 국가의 좋은 제도이다.

국가의 도적을 토벌하는 데는 사적인 원한을 생각지 아니 해야 하고 어두운 길에 헤매는 이를 깨우쳐 주는 데서 바른 말이라야 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나의 한 장 글을 날려서 너의 급한 사정을 풀어 주려는 바이니, 미련한 고집을 부리지 말고 일찍이 기회를 보아 자신의 선후책을 세우고 과거의 잘못을 고치도록 하라. 만일 땅을 떼어 받아 나라를 맡고 가업을 계승하여서 몸과 머리가 두 동강이 되는 화를 면하고 뛰어난 공명을 얻기 원한다면 몹쓸 도당들의 말을 믿지 말고 오직 후손에게 영화를 유전해 줄 것만을 유의하라. 이는 아녀자의 알은 체할 바가 아니요 실로 대장부의 할 일이니만큼, 그 가부를 속히 회보할 것이요, 쓸데없는 의심을 두지 말라.

나는 명령은 하늘을 우러러 받았고 믿음은 맑은 물을 두어 맹세하였기에, 한 번 말이 떨어지면 반드시 메아리처럼 응할 것이매 은혜가 더 많을 것이요 원망이 짙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미쳐서 날뛰는 도당들에 견제되어 취한 잠을 깨지 못하고 마치 당랑이 수레바퀴를 항거하듯이 어리석은 고집만 부리다가는, 곰을 치고 표범을 잡는 우리 군사가 한 번 휘둘러 쳐부숨으로써 까마귀 떼처럼 질서 없고 솔개같이 날뛰던 무리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칠 것이며, 너의 몸뚱이는 도끼 날에 기름이 되고 뼈다귀는 수레 밑에 가루가 될 것이며 처자는 잡혀 죽고 권속들은 베임을 당할 것이다.

-본문 (왕사로서 정벌하고자 함)

옛날 동탁처럼 배를 불태울 그 때가 되어서는, 사슴처럼 배꼽을 물어뜯는 후회가 있을지라도 시기는 이미 늦을 것이니, 너는 모름지기 진퇴(進退)를 참작하고 옳고 그른 것을 분별(分別)하라. 배반하다가 멸망하기보다 어찌 귀순(歸順)하여 영화롭게 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다만, 너의 소망(所望)은 반드시 이루게 될 것이니, 장부(丈夫)의 할 일을 택하여 표범처럼 변하기를 기할 것이요, 못난이의 소견(所見)을 고집하여 여우처럼 의심만 품지 말라.

- 결말(귀순을 권유)



요점 정리

연대 : 당나라 881년
작자 : 최치원
형식 : 격문, 변려문체
성격 : 경고와 힐책과 회유
주제 : 적장의 죄과를 꾸짖고 투항할 것을 권고하는 글
의의 : 신라인으로서 당나라 사람들까지 놀라게 한 명문으로 최치원의 명성을 천하에 떨치게 한 글

내용 연구

격서 : 격문 또는 격. 특별한 경우에 군병을 모집하거나, 세상 사람들의 흥분을 일으키거나 또는 적
군을 타이르거나 힐책하기 위하여 발표하는 글
광명 : 당나라 희종의 연호(880-881) 재위는 873-888
대저 : 대체로 보아서
변통 : 일의 경우를 따라서 이리 저리 막힘없이 잘 처리함.
권 : 위태로움에 임해서 슬기롭게 이겨 나갈 수 있는 것
군정 : 전쟁이나 사변 때 군사령관이 임시로 행하는 행정
순응 : 환경을 좇아서 그것에 잘 적응함
분별 : 세상 물정을 알아서 가림
왕사 : 정부의 군대
상경 : 당나라 서울 장안
수복 : 잃었던 땅을 도로 찾음
가유 : 황제의 유시
신기 : 황제의 자리
성궐 : 대궐의 문

이해와 감상

당나라 희종 광명 2년에 유적인 황소가 모반하여 복주를 점령하고 소란을 일으키자, 조정에서는 고변을 제도행영도통을 삼아 적을 치게 하였다. 이 때 최치원은 그의 막하에서 고변을 대신하여 7월 8일에 '격황소서'를 지었다. 이 격문은 적장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명문으로서 문필의 대공을 세웠다. 이 격문의 뜻이 호장 장엄하여 추상열일과 같은 위압의 힘이 있었고, 용천설악의 쾌도로써 요마의 머리를 한 칼에 베는 것같은 위엄이 있었다. 격문에서 적장의 죄를 꾸짖고 힐책하는 가운데, '다만 천하의 모든 사람이 너를 죽이려고 생각할 뿐 아니라, 또한 땅속의 귀신까지도 이미 남몰래 너를 베려고 의결하였다'라고 한 구절에서는 아무리 완강무지한 도둑일지언정 한 번 읽고는 모골이 쭈뼛하고 혼비백산하여 저도 모르게 상(床)에서 굴러 떨어졌다고 한다. 이로써 최치원의 문명(文名)이 천하에 떨쳐져 천 년 후인 오늘날에도 그 이름이 높게 된 것이다. 그리고 조종(祖宗)이라는 의의를 제쳐놓고라도 갖가지 설화와 일화, 기담으로 말미암아 초인적 존재로서 추앙을 받는 소지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심화 자료

변려문

변려체·변문 ·사륙문(四六文) ·사륙변려문이라고도 한다. 문장이 4자와 6자를 기본으로 한 대구(對句)로 이루어져 수사적(修辭的)으로 미감(美感)을 주는 문체로, 변은 한 쌍의 말이 마차를 끈다는 뜻이고, 여(儷)는 부부라는 뜻으로 후한(後漢) 중말기(中末期)에 시작되어 위(魏) ·진(晋) ·남북조(南北朝)를 거쳐 당(唐)나라 중기까지 유행한 문체로, 변려문이라는 명칭은 당송(唐宋) 8대가의 한 사람인 유종원(柳宗元)의 '걸교문(乞巧文)' 중 “변사려륙금심수구”라는 구절에서 유래한다.

변려문의 필수적인 조건은 다음과 같다.

① 개념 및 문법적인 기능이 서로 대응하는 2개의 구(句)로써 대구(對句)를 이루어 문장의 대부분을 구성한다.
② 문장의 전편(全篇)이 4자구(四字句)를 주로 하고, 6자구(六字句)를 이에 따르도록 구성한다. ‘사륙문’이라는 호칭은 여기서 나왔다.
③ 구말(句末) 및 구중(句中)에서 일정한 규칙에 따라 평측(平仄)을 안배(按排)하고 문장의 운율을 알맞게 다듬는다.
④ 고전(古典) 문장을 잘라서 쓰는, 이른바 단어를 교묘하게 활용하여 문장에 세련미를 갖게 한다.

변려문의 귀족적인 문체는 과도한 수사주의(修辭主義) 경향으로 말미암아 중당(中唐) 때 한유(韓愈) 등이 일으킨 산문개혁운동에 의하여 서서히 쇠퇴의 길을 걸었고, 한국에서는 신라 때에 이미 '문선(文選)'이 애독되면서 이 문체가 성행하였으며, 고려 때까지 계속되었다.

 

출처
[타인글이나 자료 인용] http://www.seelotus.com/gojeon/gojeon/su-pil-bi-pyeong/kyeok-hwang-so-seo.htm

 

 

토황소격문에 대한 질문 

( 2009.02.15 22:53)

 

광명(廣明) 2년(881년, 신라 헌강왕 7년) 7월 8일, 제도도통검교태위(諸道都統檢校太尉) 아무〔某 : 고변(高騈)〕는 황소(黃巢)에게 알리는 바이다.

대개 옳고 바른 길을 정도(正道)라 하고, 위험한 때를 당하여 임기응변으로 모면하는 것을 권도(權道)라 한다. 슬기로운 자는 정도에 입각하여 이치에 순응하므로 성공하고, 어리석은 자는 권도를 함부로 행하다가 이치를 거슬러서 패망하는 것이다. 인간이 한평생을 사는 동안 살고 죽는 것은 예측할 수 없지만, 모든 일에 있어서 양심이 주관하여야 옳고 그름을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다.

지금 나는 황제가 내려 준 군대를 거느리고 역적을 토벌하려는 것이지 너와 같은 역적을 상대로 싸우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토벌을 하기에 앞서 한 번 더 은혜로써 회유하여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려는 것인데, 그래도 듣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이 무력으로써 너희가 침탈한 경도(京都)를 수복할 수밖에 없다.

지금 가 너를 회유하려는 것이 바로 정도인 것으로서 네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 진지한 태도로 들어 주기 바란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너는 본래 먼 시골에서 살던 하찮은 백성이었다. 무모하게도 갑자기 작당하여 강도가 되고 또 그 기세를 몰아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를 어지럽히고 말았다. 언감생심에 깊숙이 갈무리해 두었던 흉포한 마음을 함부로 드러내어 하늘이 정해 준 황제의 지위를 넘보는 데까지 이르렀다. 황제가 계신 도성과 궁궐을 무참히 짓밟았으니 그 죄를 하늘은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고대의 당·우(唐·虞: 요순으로 대표되는 상고 시대)로부터 헤아려 보건대 성인인 순(舜) 임금을 배반한 묘(苗)·호(扈)와 같이 양심과 체면, 의리와 충성을 팽개쳐 버린 무리가 어느 때이고 없지는 않았었다. 멀리는 진(晉)의 왕실을 엿보아 반란을 일으킨 유요〔劉曜 : 전조(前趙)의 임금〕와 왕돈(王敦) 등이 있고, 가까이는 당(唐)의 황실을 배반한 안록산〔安祿山 : 양귀비와 내통하여 연(燕)을 세움〕과 주자〔朱  : 대진국(大秦國)을 세움〕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수하(手下)에 많은 군대를 거느리거나, 또는 높은 벼슬을 차지하고 있어서 한번 큰소리로 호령하면 수많은 사람이 벼락을 피하여 도망가듯 사라지고, 은근한 소리로 속삭이면 권력에 아부하는 무리가 마치 연기가 바람을 따라 몰려오듯 온통 그의 주위를 감싸며 몰려들었다. 그리하여 잠시나마 그들의 역모는 성공을 거두는 듯했지만 마침내는 모두 무참히 섬멸당하고 말지 않았느냐? 밝은 해가 온 세상을 비추고 있는데 어찌 도깨비 같은 요기가 횡행할 수 있으며, 황제의 군대가 칼을 뽑아 들었는데 역적이 어찌 목을 온전히 부지할 수 있겠느냐?

다시 말하거니와 너 같은 역적은 시골 구석에서 태어난 하찮은 농민 출신으로서 관청을 불지르고 양민을 학살하는 것으로 능사를 삼으니, 그야말로 천인공노할 악질적인 죄인이 아니고 무엇이냐? 이 세상 사람 중에 너의 고기를 맛보려고 하지 않는 자가 없을 정도로 원한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너는 알아야 한다. 너 때문에 불행히 죽어 땅 속에 묻힌 원귀는 하루 속히 네가 목 없는 귀신이 되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대개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 것이 보통이다. 지난번 우리 조정에서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너를 달래기 위하여 지방의 요직에 임명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도 너는 만족할 줄 모르고 오히려 못된 독기를 발산하여 가는 곳마다 사람을 죽이고 군주를 욕되게 하여, 결국 황제의 덕화(德化)를 배신하고 말았다. 곧 너는 과분하게도 중서성(中書省)의 병권(兵權)을 장악하자 공후(公侯)들을 멀리 귀양 보냈고, 마침내는 황제까지 먼 지방으로 파천하도록 하였다. 결국 너는 은혜를 원수로 갚아 백 번 죽어 마땅한 대역죄를 저지른 것이다. 그러고도 네 어찌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는단 말이냐? 네가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려는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하겠다.

「도덕경(道德經)」에 이르기를, "갑자기 부는 회오리 바람은 한나절을 지탱하지 못하고, 쏟아지는 폭우는 하루를 계속하지 못한다." 하였다.

천지에 있어서도 갑작스럽게 일어난 변화는 이와 같이 오래가지 못하는 법인데 하물며 사람의 일이겠는가?

「춘추전(春秋傳)」에는 이르기를, "하늘이 착하지 못한 자를 돕는 것은 좋은 조짐이 아니라 그 흉악함을 기르게 하여 더 큰 벌을 내리려고 하는 것이다." 하였다.

지금 너의 흉포함이 쌓이고 쌓여 온 천지에 가득 찼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 속에서 스스로 안주하고 반성할 줄 모르니, 이는 마치 제비가 초막 위에 집을 지어 놓고도 만족해 하는 것과 같고, 물고기가 솥 안에서도 즐거워하며 헤엄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눈앞에 닥친 삶겨 죽을 운명을 생각지 못하고 말이다.

나는 지금 현명하고 신기스러운 계획으로 온 나라의 군대를 규합하니 용맹스런 장수가 구름처럼 모여들고, 죽음을 가벼이 여기는 용사들이 소나기처럼 몰려온다. 진격하는 깃대를 높이 세워 남쪽 초(楚)나라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잠재우고, 전함(戰艦)과 누선(樓船)을 띄워 오(吳)나라 강(江)의 풍랑을 막으려고 한다.

도 태위〔陶太尉 : 진(晉)의 장군 도간(陶侃)〕같은 장군은 적군을 무찌르는 데 용맹하고, 양 사공〔楊司空 : 수나라 장군 양웅(楊雄)〕같은 이는 귀신도 두려워할 만한 위엄을 가졌다. 온 세상을 널리 살펴보고 만릿길을 거침없이 횡행함에 너와 같은 좀도둑은 마치 활활 타는 용광로 속에 기러기 털을 넣는 것과 같고, 높이 솟은 태산 밑에 참새알이 깔린 것과 같아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때는 마침 가을이다. 물의 귀신이 우리의 수군(水軍)을 맞이하며 가을 바람은 생물을 죽음의 시련으로 몰아넣으려고 한다. 새벽 이슬은 어둡고 미련스러운 기운을 씻어 버린다. 파도가 진정되고 도로가 뚫리면, 석두성(石頭城)에서 닻을 올려 최후로 남은 손권(孫權)의 군대에게서 항복을 받던 두예(杜預)와 같이, 는 경도(京都)를 순식간에 수복할 것이다. 그 기간은 한 달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다만 사람 죽이기를 싫어하는 우리 황제의 인자한 뜻을 받들어 엄한 법을 적용하지 않고 덕으로써 포용하려고 하는 것뿐이다. 황제께서는 조정에 영을 내려, "역적을 토벌하는 자는 개인적인 감정을 버리고, 무지하여 방향을 잃은 자를 깨우치는 데 힘써야 한다." 하셨다.

나는 이 격문을 보내 너의 눈앞에 닥친 위급한 상황을 한 번 더 알려 주는 것이니, 너는 고집을 버리고 이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말기 바란다. 그리하여 허물을 알고 그것을 고치면, 나는 황제에게 주달하여 너에게 나라의 땅을 나누어 주어 대대로 부(富)를 누리도록 하겠다. 그러면 머리와 몸뚱이가 따로 떨어져 나가는 횡액을 면할 뿐 아니라 나라로부터 공명(功名)을 얻어 영원히 우뚝하게 빛날 수 있지 않겠느냐?

덧붙여 말하건대 얼굴로만 알게 된 벗들에게 신의를 생각지 말 것이며, 영화(榮華)를 후세 자손에게 내릴 수 있도록 하라. 이는 하찮은 아녀자들의 말이 아니라 진실로 대장부끼리의 약속이다. 너는 너의 생각을 일찍이 결정하여 나에게 알려 주고 쓸데없이 의심하거나 주저하지 말기를 바란다.

나는 황제의 명령을 받았다. 나의 신의는 저 맑고 깨끗한 물과 같은 마음에 바탕을 두었다. 나의 말은 틀림없이 하늘이 살펴볼 것이다. 은혜를 베푼다고 해 놓고 개인적인 원망을 내세우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네가 헛된 욕망에 이끌려 함부로 날뛰고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다면, 이는 마치 지네가 수레바퀴에 저항하는 형상이고, 세상의 변화를 모른 채 옛 것만 고집하는 수주대토(守株待兎)의 우(愚)를 범하는 것이다. 마침내 곰을 잡고 표범을 쫓는 우리 군대가 몰아친다면 큰소리만 치던 너의 오합지졸(嗚合之卒)들은 사방으로 흩어져서 도망칠 것이요, 너의 몸은 도끼에 묻은 기름이 될 것이며, 너의 뼈는 전차에 치여 부서진 가루가 될 것이다. 게다가 처자식도 무참히 처형을 당할 것이며, 종족들 또한 죽음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때를 당한 뒤에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터이니, 너는 지금 너의 진퇴를 깊이 헤아려 결정하라. 내가 너를 위하여 너의 앞날을 점쳐 보건대 네가 나라를 배반하여 멸망하게 되는 것보다야 나라의 명령에 순종하여 영화로운 장래를 보장받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내가 다만 바라는 바는 장사다운 기개로 과단성 있게 태도를 바꾸는 것이니, 어리석은 자의 집념에 얽매여 우물쭈물 의심만 하지 말기를 간곡히 바란다.

아무〔某〕는 알린다.    - 「계원필경(桂苑筆耕)」

 

 

최치원의 토황소격문입니다.

토황소격문의 작가는 최치원으로 알고있었는데 EBS강의를 듣다보니

빨간색으로 표시한 게 모두 최치원이 아닌 당시 토벌총대장인 고변을 지칭하는 말이라더군요.

분명 토황소격문은 최치원이 당시 신라인의 정서,체험,경험을 바탕으로 썼기 때문에 한국 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설명까지 했는데... 저게 모두 고변을 지칭하는 말이라면 이 글은 고변이 황소에게 쓴 글이 되는건 아닌가요?

정확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토황소격문에 대한 질문

 (언어천왕(kmin1100) 2009.02.16 14:46)

 

1. 작가는 고변인가?

  이 작품은 당나라에 유학하여 활약하던 최치원이 당나라에 발생한 황소의 난을 제압하는 임무를 맡은 장수(고변)의 명령으로 작성한 ‘격문`입니다.

 

  물론 이 작품은 신라에서 창작된 것이 아니라 당나라에서 창작되었습니다. 당나라 유학생인 최치원이 중국 정부를 위해 작성한 글이므로 비교문학적인 관점에서 살핀다면 작품의 의의를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우리나라의 문인이 중국에서 훌륭한 작품을 남겼다는 점을 통해 우리 문학에 대한 자부심을 일깨울 수 있는 작품이고, ‘격문`이라는 형식의 글이 오늘날에는 훌륭한 문학 작품이 될 수 있다는 점도 아울러 알 수 있게 하는 작품이죠.

 

 

2. 이 글을 한국 문학으로 볼 수 있는지?

  최치원은 통일신라시대의 문인입니다. 그 당시는 아직 훈민정음이 창제되지 않은 시기였으므로, 그가 한자를 사용하여 문학 활동을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죠. 당시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한자는 현재 우리가 한글을 쓰는 것과 유사할 정도로 편리하고, 쉽게 사용하던 문자였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최치원은 우리나라 문인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작품이 비록 중국이라는 공간에서 쓰였지만, 최치원이라는 인물의 교양과 문학적 재능을 바탕으로 창작된 것이므로 한국 문학 작품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최치원은 신라 3최 중 한 사람입니다.

최치원은 신라 최고의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으나 자신의 개혁이 받아들이지 않아 벼슬을 그만두고 숨어살았습니다.최승우는 후백제 견훤의밑에서 활약을 했으며,최언위는 왕건에게 가 태자의 사부가 되는 등 고려 초까지 관직에 있었습니다.

 

최치원은 12세 나이에 당나라의 빈공과에서 6년 만인 18세 나이로 합격을 합니다.그것도 장원으로 말입니다.10년을 공부해도 합격하기가 힘든 시험이었습니다.중국에서도 인정받는 대한민국의 인물로 말입니다.

황소의 난때 "황소가 읽다가 너무 놀라서 침상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라는 일화가 전해지는 유명한 글인 토황소격문이 있습니다.

“무릇 바른 것을 지키고 떳떳함을 행하는 것을 도라 하고, 위험한 때를 당해서 변통하는 것을 권이라 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때에 순응해 성공하지만 어리석은 자는 이치를 거슬러 패하는 법이다.”

이렇게 시작한 글은 “온 천하 사람들이 너를 드러내놓고 죽이려 할 뿐 아니라, 지하의 귀신들까지 너를 죽이려 이미 의논했을 것이다.”라며 겁을 주기도 하고 “나는 한 장의 글을 남겨서 너의 거꾸로 매달린 위급함을 풀어주려는 것이니, 너는 미련한 짓을 하지 말고 일찍 기회를 보아 좋은 방책을 세워 잘못을 고치도록 해라.”라고 회유하기도 한다. 이 사건으로 당 황제는 최치원에게 자금어대(정5품 이상에게 하사하는 붉은 주머니)를 하사받습니다.당 나라에서도 인정받는 인물이 되지요.

신라로 귀국하여 개혁을 위해 애쓰며 시무10조를 왕에게 바쳤으나 끝네 이루지 못하고 은둔생활을 합니다.

최치원이 끼친 사상이라면 유.불.선 의 통합사상입니다.

유교 정치이념을 기반으로 골품제도라는 신분제의 사회를 극복하려고 했던것이 후대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고려시대에 유교 정치이념을 확립하는데 기여하고,조선시대에 와서도 유학자들의 숭배를 받는 대상이 됩니다.

 

최치원(857 ~  ?  )의 약력은 이렇습니다.

 

자는 고운, 해운 또는 해부이다.
고려 현종 때인 1023년에 내사령으로 추증됨.
문묘에 배향되며 ‘문창후’라는 시호를 받았다.
오늘날 경주 최씨의 시조로 여겨지고 있다.
857년에 태어남. 부친은 38대 원성왕 때에 숭복사 창건에 참여했다고 전해지는 견일이다.
868년에 12세의 어린 나이로 중국 당 나라로 유학을 떠남.
874년 예부시랑 배찬이 주관한 빈공과에 합격하였다.
2년 동안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뤄양 등지를 떠돌면서 시작에 몰두하여 5수 1권으로 된 <사시금체부, 100수 1권으로 된 <오언칠언금체시>, 30수 1권으로 된 <잡시부> 등의 시문집을 지었으나, 오늘날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876년 선주 율수현 현위로 관직에 올랐으며, 이 무렵 1부 5권으로 된 <중산복궤집>을 저술하였다.
875년부터는 왕선지, 황소 등이 유민을 모아 산둥성, 허난성, 안후이성 등지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877년 겨울 관직에서 물러난 최치원은 양양에서 이위의 문객이 되었다가, 회남절도사 고변의 추천으로 관역순관이 되었다. 그리고 고변이 황소의 반군을 토벌하기 위한 제도행영병마도통이 되자, 그의 종사관으로 참전하여 4년 동안 표ㆍ서계ㆍ격문 등의 문서를 작성하는 일을 맡았다. 이 무렵 최치원이 쓴 글은 1만여 편에 이르렀는데, 그 가운데 특히 ‘토황소격문’은 명문으로 이름이 높았다.
879년 승무랑 전중시어사 내공봉으로 도통순관의 직위에 올랐으며, 포상으로 비은어대를 받았다.
882년 자금어대를 받았다. 
885년 당 희종의 조서를 가지고 신라로 귀국했다.
885년 당에 보내는 외교 문서 등을 작성하는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으로 등용하였다.
886년 왕의 명령으로 ‘대숭복사비문’ 등을 썼고, 당 나라에서 썼던 글들을 28권의 문집으로 정리하여 왕에게 바쳤다. 이 가운데 <중산복궤집> 등 8권은 전해지지 않으며, <계원필경> 20권만 전해지고 있다.
886년 헌강왕이 죽은 뒤에는 외직으로 물러나 태산군(지금의 전라북도 태인), 천령군(지금의 경상남도 함양), 부성군(지금의 충청남도 서산)의 태수를 지냈다.
893년에는 견당사로 임명되었으나,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나 떠나지 못했다.
894년 진성여왕에게 10여 조의 시무책을 제시하였고, 진성여왕은 그를 6두품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 관직인 아찬으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최치원의 개혁은 중앙 귀족의 반발로 실현되지 못했다.
897년 최치원은 관직에서 물러나 각지를 유랑하였다. 그리고 만년에는 가야산의 해인사에 머물렀다.
908년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를 쓸 때까지는 생존해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지만, 그 뒤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때문에 정확한 사망 날짜는 확인되지 않으며, 방랑하다가 죽었다거나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