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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의 네 왕비는 고종사촌, 친사촌, 외사촌 자매 (중앙일보 2013.06.16 06:52)

경종의 네 왕비는 고종사촌, 친사촌, 외사촌 자매

고려사의 재발견 경종 ① 왕실의 근친혼

 

지금 황제(*경종)의 만수무강을 빈다”는 명문(銘文)이 삼각형 바위 왼쪽에 새겨져 있다. ‘태평 2년(977·경종 2년)’은 좌상이 만들어진 시점이다. 태평은 송나라 태종의 연호다. 경종은 연호를 송나라 것을 쓰되, 스스로를 황제라 칭했다. 조용철 기자


고려 5대 국왕 경종(景宗: 955∼981년, 975∼981년 재위)은 6세 되던 960년부터 즉위 직전까지 15년간 지속된 광종이 일으킨 숙청의 광풍을 뚫고 어렵사리 즉위한다.

“경종은 깊은 궁중에서 태어나 부인(*광종의 부인 대목왕후)의 손에 자랐다. 따라서 궁궐 문 밖의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고 알지도 못했다. 다만 천성이 총명하여 아버지 광종의 말년에 겨우 죽음을 면해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고려사』 권93 최승로 열전)

숙청의 회오리바람은 경종의 사촌이자, 혜종과 정종 아들의 목숨까지 앗아갔다. 막강한 친정 서경세력을 등에 업은 어머니의 보호로 경종은 겨우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성장한 경종에게 영특한 군왕의 자질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옳고 그름을 분간하지 못하고, 상 주고 벌 주는 것이 고르지 않은 것이 통치에도 영향을 끼쳤다. 정치를 게을리하고, 여색과 향락, 바둑과 장기에 빠졌다. 그의 주위에는 내시들뿐이었다. 군자의 말은 외면하고 소인의 말만 들었다. 처음은 있으나 끝이 없다는 말이 그를 두고 한 말이니, 충신의사들이 통분할 일이 아닌가?”(『고려사』 권93 최승로 열전)

 

드러내 놓을 만한 치적이 없다는 얘기다. 자식을 따뜻하게 보듬지 못한, 강한 개성의 부모 아래 자란 자식에게 나타나는 유약성이 경종에겐 이런 모습으로 나타난다. 부모의 영향력은 그의 혼인관계에서도 드러난다.

경종의 1비 헌숙왕후 김씨는 광종의 친누이 낙랑공주와 신라 경순왕 김부 사이에 태어난 딸이다. 경종과 고종사촌이다. 2비 헌의왕후 유씨(劉氏)는 광종의 동생(경종의 삼촌)인 문원(文元)대왕의 딸로서 경종과 4촌이다. 3비 헌애왕후 황보씨와 4비 헌정왕후는 자매 사이로, 어머니 대목왕후의 동생인 대종(戴宗: 경종 외삼촌)의 딸이다. 경종과는 외4촌이다. 경종의 비는 이같이 모두 경종과 4촌 간이다. 근친혼(近親婚)으로 왕비를 맞아들인 것이다.

왕권 지키기 위해 왕족 끼리끼리 결혼
부전자전이랄까? 광종은 근친혼을 한 첫 국왕이다. 1비 대목왕후는 태조와 4비 신정왕후 황보씨 사이에 태어난 딸로서, 광종의 배다른 형제다. 2비 경화궁부인은 형 혜종의 딸로서, 광종의 조카다. 이같이 국왕이 근친혼을 한 첫 사례는 태조의 아들 광종에서 찾을 수 있는데, 태조가 낳은 9명의 공주 가운데 신라 경순왕과 혼인한 2명을 제외하면 모두 근친혼을 했다(1명 미상). 고려왕실의 근친혼은 태조 때부터 시작되었다. 경종을 잇는 성종과 목종의 비도 각각 4촌·6촌과 근친혼을 한다.

근친혼은 이후 고려왕실 혼인 형태의 하나로 굳어지는데, 다음과 같은 패턴이 반복된다. 먼저, 국왕은 왕실이 아닌 이성(異姓)과 혼인하더라도 왕비 1명은 반드시 근친혼을 한다. 그 다음, 태어난 공주는 어머니 쪽 성씨인 모성(母姓)을 사용한다. 경종의 어머니 대목왕후는 태조의 딸이나 그 어머니 신정왕후 황보씨(태조 4비)의 성을 따라 황보씨라 한 것이 그 예다. 근친혼의 전통은 고려에서가 아니라, 이미 신라왕실에서 나타난다.

고려의 근친혼 풍습을 비난한 『동국통감』. 조선 성종 때 편찬됐다.

 

“같은 성씨를 아내로 맞아들이지 않는 것은 분별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다. 신라의 경우 같은 성씨는 물론 형제의 자식과 고종?이종 자매까지 아내를 삼았다. 이는 도리에 크게 어긋나는 일이다.”(『삼국사기』권3 신라본기3 내물이사금조)

김부식은 『삼국사기』(1145년)에서 신라 내물왕이 삼촌인 미추왕의 딸을 왕비로 삼은 사실을 이같이 비난했다. 유교는 ‘동성불혼(同姓不婚)’의 원칙을 강조한다. 유교사가인 그에게 근친혼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고려사』를 편찬한 조선 초기 역사가 역시 고려의 근친혼을 심하게 비난했다.

“태조는 옛것을 본받아 풍속을 교화하려는 뜻을 가졌다. 그런데도 토착적인 풍습에 젖어 아들을 딸에게 장가보내고, 딸은 외가성을 따르게 했다. 자손들도 (근친혼을) 가법(家法)으로 삼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애석하다. 부부는 인륜의 근본이다. 나라가 잘 다스려지거나 어지러운 것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려사』 권88 후비전 서문)

근친혼은 인륜의 근본을 무너뜨려 국가의 운명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논리로 근친혼을 비난했다. 윤리적 차원에서 용납할 수 없다는 생각이 김부식과 같다. 한편 『동국통감(東國通鑑)』(1485년)을 편찬한 역사가들은 현실적인 이유에서 근친혼을 비난했다.

“『좌전(左傳)』에 ‘남녀가 성이 같으면 태어나는 자손이 번성하지 못하다’고 했다. 같은 성씨 사이에도 그러한데, 더구나 아주 가까운 친족 간엔 어떻겠는가? 이제 그 고모나 자매에게 장가든 사람을 보면, 대개 후손이 없는 사람이 많다. (고려가) 오백 년의 오랜 세월을 지났어도 종손과 지손(支孫)이 결국 수십 인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을 본다면 선왕(先王)이 (동성불혼의) 예를 제정한 뜻이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계할 일이다.”(『동국통감(東國通鑑)』高麗紀 혜종 2년조?작은사진)

고려 오백 년간 왕실의 자손이 번창하지 못한 원인을 근친혼에서 찾았다. 윤리 문제가 아니라 유전적인 결함의 위험성을 거론하며, 근친혼의 문제점을 비판했다.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왕실의 내밀한 사실을 역사의 붓자루를 쥔 그들이 기록으로 남길 리야 없겠지만, 간접적이나마 그런 실례는 찾을 수 있다.

건국 백 년 지나서야 다른 성씨와 혼사
고려 역대 34명 국왕의 비는 모두 135명이다. 국왕 1명당 평균 3.97명, 대략 4명의 왕비를 두었다. 혼인하지 않은 국왕 4명을 제외하면 평균 4.5명, 즉 4명 내지 5명의 비를 둔 셈이다. 출생한 전체 자녀는 164명이다. 비가 없는 국왕을 제외하면 평균 5.5명으로 약 5~6명의 자녀를 두었다. 1명의 비가 평균 1명 정도의 자녀를 출산한 셈이다. 가족관계가 기록된 묘지명 약 220점을 분석하면, 고려 관료의 평균 자녀 숫자는 4명 정도다. 당시 일부일처제인 점을 감안하면, 관료의 경우 1명의 부인이 4명의 자녀를 출산한 셈이다. 결국 국왕의 자녀 출산은 관료의 4분의 1에 불과할 정도로 출산율이 매우 낮은 셈이다.

한편 묘지명에 따르면 관료의 평균 사망 연령은 65.5세다. 『고려사』열전에 사망 연령이 기록된 관료 176명의 평균 사망 연령은 60.7세다. 그에 비해 국왕의 평균 사망 연령은 42.3세에 불과하여, 일반 관료의 사망 연령과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통계만으로도 유전적 결함의 흔적을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고려가 건국된 지 약 백 년이 지난 현종 때 김은부(金殷傅)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인다. 고려 왕실이 이성(異姓) 후비를 왕비로 맞아들이고, 여기에서 태어난 왕자가 다음 국왕으로 즉위한 예는 현종이 처음이다. 물론 이후에도 근친혼의 관례는 지켜지나, 근친혼 대신 이성 후비에게서 태어난 자식이 예외 없이 국왕으로 즉위한다. 현종 이후 인종 때까지 고려 전기 왕비 가운데 근친혼 출신 왕비는 6명, 이성 왕비는 24명으로, 이성 출신의 왕비 숫자도 늘어난다. 이성 후비와의 혼인은 유전적인 결함의 폐해를 막기 위한 고육책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된다.

유교 이념 취약했던 것도 근친혼 원인
왜 고려왕실은 근친혼을 했을까? 건국 당시 고려왕실은 송악 출신의 호족세력에 불과할 정도로 상대적으로 미약했다. 태조는 통합전쟁에서 호족세력의 협조를 얻기 위해 그들의 딸과 혼인하면서, 많은 부인을 두었다. 태어난 자녀들이 왕실 외부세력과 혼인관계를 맺을 경우, 태조가 죽은 뒤 왕규의 발호에서 보는 것처럼 왕실이 위태롭게 될 것을 염려했던 것이다. 29명의 부인에게서 태어난 많은 자녀는 근친혼을 할 여건이 되었다. 근친혼은 왕실과 왕권의 안정과 강화를 위해 고려왕실이 택한 불가피한 혼인 형태였다.

다음, 동성불혼의 원칙을 강조한 유교 정치이념이 보편화되지 못한 당시 사상풍토가 근친혼이 성행한 원인의 하나였다. 유교 정치이념은 국왕은 ‘천명지(天命之)’, 즉 하늘이 명한 것이라는 이른바 천명사상(天命思想)에 의해 초월적인 존재로 상징화시키고, 신하는 능력과 실력에 의해 충원된다는 엄격한 군신관계를 강조한다. 고려왕조 성립기엔 그런 이념기반이 취약하여 근친혼을 통해 국왕과 왕실의 세력기반을 강화하려 했다.

현종 이후 유교 정치이념이 뿌리를 내리고 왕권과 왕실이 안정되기 시작하는데, 이성 후비와의 혼인은 이런 사정과도 관련이 있다. 왕권과 왕실이 점차 안정되자 도리어 유력가문의 딸을 맞아들이고 외척가문을 왕실의 울타리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근친혼이든 이성과의 혼인이든 왕권 강화와 왕실 세력기반을 유지하려 한 점에서 혼인의 법칙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현대 사회의 유력한 정치·경제 실력자들 사이 혼인도 그 점에서 예외는 아니다. 역사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이렇게 넓고도 깊다.

박종기 국민대 교수 j9922@kookmin.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