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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사] 김정일과 저우언라이의 만남(중앙일보 2007.03.22 18:05)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사] 김정일과 저우언라이의 만남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사 ① 김일성과 저우언라이의 마지막 만남

 

1975년 4월 17일. 캄보디아가 공산화된다. 그날 김일성은 평양을 출발, 중국 방문길에 오른다. 국경 도시 단둥(丹東)엔 차오관화(喬冠華) 외교부장이 마중 나왔다. 베이징(北京)에 도착한 시간은 18일 오후 4시쯤. 덩샤오핑(鄧小平) 부총리가 마오쩌둥(毛澤東)의 부인 장칭(江靑)과 함께 나와 영접했다. 김일성은 들떠 있었다. 베트남 전쟁 또한 월맹군 승리로 대세가 기울고 있었던 것이다. 마오쩌둥과의 회담에 이어 열린 18일 환영 만찬에서 김일성은 호전적 발언을 쏟아냈다. “우리는 남조선에서 혁명이 발생하는 경우 즉각 개입할 것이다. 전쟁으로 우리가 잃는 것은 군사분계선이요, 얻는 것은 조국의 통일이다.”


▲1975년 4월 중국을 방문한 김일성(왼쪽)이 문병차 저우언라이(가운데)를 찾아 담소하고 있다. 오른쪽은 덩샤오핑 김명호 제공

이튿날인 19일 김일성은 베이징의 305병원을 찾았다.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 문병이었다. 저우는 72년 방광암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어떻게 사람의 오줌만 보고, 방광암에 걸렸는지 아느냐”는 마오쩌둥의 무관심 속에 제때 치료할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사진을 보면 건강한 모습의 김은 평소의 습관대로 연신 담배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반면 75년 3월 세 번째 수술을 받은 저우는 병색이 완연하다. 당시 저우의 증세는 대장으로까지 종양이 퍼져 몹시 쇠약한 상태였다. 그러나 손님이 찾아오면 언제나 옷을 단정하게 차려입었다. 왼쪽 가슴엔 문혁(文革) 당시 유행하던 마오쩌둥 배지를 다는 것조차 잊지 않았다. 암투병 중임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을 위해 담배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세심한 배려도 눈에 띈다. 그러나 저우는 구두를 신지 못했다. 두 발이 퉁퉁 부었기 때문이다. 대신 특별히 제작한 헝겊 신발을 신었다. 김과 저우 사이엔 침을 뱉는 타구가 놓여 있다. 빨간 카펫이 깔린 접견실은 저우의 병실 옆에 마련된 것이었다. 이날 김일성과 저우의 회담은 30년대 이래 의형제 관계였던 두 사람 간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저우는 이듬해 1월 8일 사망했다. 78세.
 
김명호(57세)교수는

건국대ㆍ경상대 중문과 교수를 거쳐 성공회대 중국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해외에서 중국 전문서점으로 유명한 싼롄(三聯)서점의 서울점인 ‘서울삼련’을 10여 년 경영하며, 중국 관련 전문서적과 희귀 사진을 수집했다.

 

 

중국 핵 개발 아버지 덩자셴

 (중앙일보  2007.03.25)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② 중국 핵 개발 아버지 덩자셴

 

 

신장 뤼부포 핵실험장에서의 덩자셴(왼쪽). 사진은 덩이 사망한 뒤 공개된 것이다.  1956년 4월 25일 마오쩌둥(毛澤東)은 “원자탄을 가져야 한다. 남들에게서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으려면 이 물건을 갖지 않을 수 없다”고 선포했다. 당시 중국의 대표적 물리학자 중 한 사람으로 첸싼창(錢三强) 원자력연구소 소장이 있었다.

그는 루쉰(魯迅)에게 처음 소설 쓸 것을 권한 첸쉬안퉁(錢玄同)의 아들이다. 그해 8월 첸싼창은 미국 유학 후 귀국해 물리연구소에서 일하던 덩자셴(鄧稼先, 1924~88)을 방문했다. 첸쉬안퉁이 루쉰을 찾아가 글 쓸 것을 권한 지 40년 후였다. “국가에서 대포를 한 방 갈기려 한다. 작업에 참여하라.” 덩자셴은 첸싼창의 은어를 알아들었다.

그날 밤 덩은 부인(許鹿希)에게 말했다. “집안 일을 책임져주기 바란다. 나는 앞으로 해야 할 일에 생명을 바치겠다.” 당시 덩의 나이 34세. 이후 제2기계부에 설립된 핵무기연구소 이론부 주임이 된 그는 전국에서 전공과 상관없이, 우수한 대학졸업생 23명을 선발했다.

그리고 베이징(北京) 교외 옥수수밭 자락에 연구소를 세웠다. 중ㆍ소 관계 악화로 소련 과학자들이 철수한 뒤엔 ‘596’ 프로젝트를 주도했다. 596은 중국이 독자적 핵개발에 나선 1959년 6월을 뜻한다. 당시 중국공산당 서기처 총서기 덩샤오핑(鄧小平)이 연구원들을 격려했다. “비장한 마음으로 일해라. 잘못됐을 경우 모든 책임은 우리 서기처가 진다.”

1964년 10월 16일 신장(新疆) 뤄부포(羅布泊) 사막에 세워진 높이 120m의 철탑 위에 중국 최초의 원자탄이 걸렸다. 오후 3시 섬광과 함께 버섯구름이 일었다. 오후 5시,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인민대회당에서 음악무용극 ‘동방홍(東方紅)’ 출연자 3000여 명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1차 핵실험 성공을 발표했다. 이후 87년까지 32차례 핵실험이 있었는데 이 중 덩자셴이 직접 참가ㆍ지휘한 게 15차례였다. 84년 1차 핵실험 성공 2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덩은 자작시로 감회를 표했다.

붉은 구름 치솟아 하늘 끝까지 물들이고
거대한 원자탄의 힘은 땅을 뒤흔들었네
20년간 기를 쓰고 험한 곳을 기어올랐으나
지나간 세월이 덧없음을 이제야 알겠네

덩자셴은 청대(淸代)의 대시인이며 서예가인 덩스루(鄧石如)의 6대손이다. 

 

 

소시민으로 살다 간 마오의 차남 안칭

 (중앙일보 200.704.01)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③ 소시민으로 살다 간 마오의 차남 안칭

 

1960년대 초 마오쩌둥 일가의 모습. 왼쪽부터 안칭, 장사오린, 마오쩌둥, 류쑹린, 사오화.

마오쩌둥은 세 번 결혼했는데 세 명의 부인 모두 불우했다. 첫째부인 양카이후이(楊開慧)는 총살당했고, 둘째부인 허쯔전(賀子珍)은 강제로 이혼당한 채 마오 생전엔 베이징 출입도 못했다. 장칭(江靑)의 시샘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오의 셋째부인 장칭도 감옥에서 자살했다.

양카이후이는 마오의 무장 폭동 실패 후 아들 셋을 데리고 친정으로 피했으나 체포돼 숨졌다. 당시 안잉(岸英)이 8세, 안칭(岸靑)이 6세, 안룽(岸龍)은 3세였다. 양의 사망 후 공산당 비밀조직은 삼형제를 상하이로 빼내, 비밀당원 둥젠우(董健吾)가 성공회 신부 신분을 이용해 운영하던 다퉁(大同)유치원으로 보냈다. 그러나 안룽은 병사했고, 둘째 안칭은 거리에서 경찰에게 얻어맞아 머리를 다쳤다. 1933년 상하이 공산당 조직이 와해돼 유치원도 해산됐다. 이때부터 둥젠우의 전 부인이 형제를 양육했다.

36년, 홍색(紅色) 신부로 알려진 둥젠우는 동북군벌 장쉐량(張學良)에게 접근해 자신의 아들과 친구의 아들 두 명을 프랑스에 보내고 싶다며 도움을 청했다. 장쉐량은 10만 프랑이라는 돈을 지원했고, 마오의 두 아들은 파리를 거쳐 소련으로 갈 수 있었다. 장쉐량은 영문도 모른 채 마오의 두 아들을 구해준 셈이다.

안잉에 비해 안칭의 소련 생활은 알려진 게 별로 없다. 다친 머리를 치료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47년, 안칭은 형보다 1년 늦게 귀국해 다롄(大連)의 요양원에 있다가 중국 건국 이후엔 군사과학원과 중앙선전부에서 연구와 러시아 서적 번역에 종사했다. 안잉은 한국전쟁에서 전사했다. 60년, 안칭은 장원추(張文秋)의 차녀 사오화(邵華)와 결혼했다. 장원추에겐 첫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안잉의 부인 류쑹린(劉松林)이다. 그리고 둘째남편과의 사이에서 사오화와 장사오린(張少林) 두 딸을 두었다. 장의 딸 둘이 마오쩌둥 며느리가 된 셈이다. 마오는 훗날 류쑹린을 재혼시키고 수양딸로 삼았다. 며칠 전 안칭이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평범한 삶이었다. 태자당(太子黨)이라는 괴상한 용어로 불리는 사람들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그러나 안칭에겐 아무리 생각해도 붙이기에 적당한 용어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