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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의 숨은 영웅, 김취려 장군

울산의 숨은 영웅, 김취려 장군

거란족 떨게 만든 고려의 명장
최고 관직인 시중까지 올라


고조선부터 조선시대까지 우리나라는 수많은 외세의 침략을 견뎌냈다. 특히 고려시대는 거란, 여진, 몽고, 왜군 등 다른 시대보다 더 많은 외세의 침략을 받았다.
수많은 전쟁을 겪으며 때로는 시원하게 적을 물리치기도 하고, 때로는 굴욕적으로 무릎을 꿇기도 했지만 그 속에서 영웅이 탄생하기도 했다.

고려시대 유명한 영웅 중 우리가 아는 인물은 강감찬, 윤관, 서희 장군 정도. 하지만 울산의 인물이면서 거란, 몽고 북방의 이민족들을 떨게 한 김취려 장군은 잘 모를 것이다.

김취려(金就礪) 장군(?~1234)은 언양 김씨의 시조로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과 고려 태조 왕건의 장녀 낙랑공주 사이에 일곱 번째 아들로 태어난 김선(金繕)의 7세손이다.

어려운 국제정세서 뛰어난 활약
김취려 장군이 활약하던 13세기 초엽의 국제 정세는 금(요)나라를 압박하던 몽고족이 북쪽에서 새로이 흥기해 거대한 세력을 형성하는 과정이었다.

몽고족이 그 세력을 동서남북으로 뻗쳐 금나라의 황하이북 땅을 차지하자 금에 속했던 거란 유족들은 느슨해진 금의 간섭에서 벗어나 대요국(大遼國)을 세워 고려를 침입해 왔다.

이러한 시기 뛰어난 전술로 거란을 크게 물리친 영웅이 바로 김취려 장군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고종 3년(1216)에 거란왕자 금산(金山), 금시(金始)가 대요목국왕(大遼牧國王)이라 칭하고 몽고에게 쫓겨 국경을 넘어오자 김취려 장군은 후군병마사로 상장군 노원순, 오응부 등과 함께 1만3천의 군사로 15만 거란병을 물리치는 대승을 거뒀다.

또 고종 4년에는 거란병이 개성을 위협하고 철원, 원주 등을 짓밟았는데 그는 서울을 지켜 적의 침공을 물리쳤다.

박달재 전투, 역사의 한 페이지 장식
김취려 장군이 활약한 가장 유명한 전투는 제천(堤川) 박달재 전투로 거란족은 이 전투에서 막대한 타격을 입고 물러났다.

‘울고 넘는 박달재’라는 노래로 유명한 박달재 고개에 가면 김취려 장군의 승리를 기리는 기념비와 그의 동상을 볼 수 있다.

이후에도 그는 몽고군과 연합해 거란족 잔당을 소탕하고 국내의 반란까지 평정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워 병부판사가 됐고, 고종 15년에는 고려시대 최고 관직인 시중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평생을 전장에서 활약하다 고종 21년(1234)에 사망하니 고종은 3일간 정사를 중단하고 친히 빈소에 나와 조의를 표했고, 위열공(威烈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김취려의 풍모는 신장이 6척5촌(185cm)이고 수염이 배 아래까지 내려와 조복을 입을 때는 수염을 시종들에게 나누어 들게 하고 했다고 전하며, 거란족은 관우 장군을 닮은 김취려장군의 외모만 봐도 벌벌 떨었다고 한다. 또 그의 사람됨이 절검 정직해 충의로 자신을 돌보고 군기를 엄하게 하니 사졸들이 함부로 그를 대하지 못했다.
인간적인 면에서도 다른 사람의 모범이 돼 먹을 것이 생겨도 사졸들과 나눠먹고, 적을 공격할 때는 그의 전략전술이 뛰어나 큰 공을 세워도 그 공을 스스로 자랑하지 않아 사졸들은 그의 높은 덕망을 칭송했다.

도굴꾼에 의해 현재의 묘 발견
김취려의 후예 중 많은 인물이 나서 활약하였는데 아들 전(佺)은 문하시랑 평장사를 지냈고, 손자인 양감(良鑑)은 첨의중호(僉議中護)로 언양군(彦陽君)에 봉해지기도 하는 등 후대에까지 그의 가문은 명문으로 이름을 날렸다. 현재 그의 묘는 울주군 언양읍 송대리 화장산 자락에 있으며, 장군의 사적비는 1983년 5월에 세운 것으로, 비문에는 장군의 일대기가 상세히 적혀 있다. 이 묘는 1909년 도굴꾼이 도굴하다 우연히 흘린 지석(誌石)이 발견돼 세상에 알려졌으며, 지금은 언양 김씨 후손들이 묘를 관리하며 제사를 지내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김취려 [ 金就礪 ]

 김취려 [金就礪] (한국민족문화대백과, 2009, 한국학중앙연구원)

  

음서로 정위(正衛)가 되어 동궁위(東宮衛)에 배속되었다가, 이후 장군이 되어 동북계를 지켰고, 대장군에 발탁되었다. 당시 동아시아의 정세는 몽고가 금나라를 정벌했고, 금나라의 지배를 받았던 거란이 대요수국(大遼收國)을 세웠다.

그런데 거란 또한 몽고의 공격을 받아 1216년(고종 3) 압록강을 건너 고려의 북방지역으로 밀려오는 상황이었다. 이때 그는 대장군으로 후군병마사가 되어 조양진(朝陽鎭)에서 거란군을 물리쳤다. 또, 연주(延州)에서는 거란 군사가 강성해 모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때, 장군 기존정(奇存靖)과 함께 앞장서 적군의 포위를 돌파하였다. 이에 힘입은 군사들이 적군을 무찔러 목베고 사로잡은 군사들이 2천4백명이나 되었고, 거란은 드디어 청새진(淸塞鎭)을 넘어서 퇴거하였다. 이 전투에서 맏아들이 전사하였다.

1217년 거란군 5천여 명이 다시 남으로 내려오자, 금교역(金郊驛 : 지금의 황해도 서흥)에서 5군을 재편성해 상장군 오응부(吳應夫)를 중군병마사, 상장군 최원세(崔元世)를 전군병마사, 차상장군(借上將軍) 공천원(貢天源)을 좌군병마사 등으로 삼았다. 그러나 5군이 출발을 지체하는 동안 동주(東州 : 지금의 강원도 철원)가 함락되었다. 이에 당시의 집정자 최충헌(崔忠獻)에 의해 상장군으로 전군병마사에 임명되어, 거란군을 명주(溟州 : 지금의 강원도 강릉) 방면으로 패주시켰다.

그 해 다시 거란이 여진족과 연합해 침입하자, 예주(豫州 : 지금의 함경남도 정평)에서 교전했으나 병으로 돌아왔다. 1218년 병마사가 되어 서북면원수 조충(趙沖)과 함께 거란적을 강동성(江東城)으로 쫓아냈다. 이 때 동진국(東眞國)을 쳐서 신하로 따를 것을 맹세하게 하였다. 또한 거란을 토멸하겠다는 명분으로 동북면 지방으로 들어와 공동작전을 제의한 몽고군과 그리고 동진국과 힘을 합쳐 강동성을 함락시켰다.

 1219년 의주별장 한순(韓恂)과 낭장 다지(多智) 등의 반란을 이극서(李克偦)·이적유(李迪儒)와 함께 평정해 북방을 편안하게 하였다. 1221년 추밀원사 병부상서 판삼사사(樞密院使兵部尙書判三司事)를 거쳐, 참지정사 판호부사(參知政事判戶部事)가 되었다. 1228년 수태위 중서시랑평장사 판병부사(守太尉中書侍郎平章事判兵部事)가 되었으며, 그 뒤 시중에 제수되었다.

 평가 사람됨이 정직·검약했으며, 군사통제에 엄격하고 공정해 사졸들이 조금도 범함이 없었고, 존경하였다. 많은 공을 세웠으나 스스로 내세우지 않아 칭찬의 소리가 높았다. 또한, 정승이 되어서는 안색을 바르게 하여 아랫사람을 거느려 사람들이 감히 속이지 못했으니, 진실로 충성되고 의로운 사람이었다. 상훈과 추모 고종 묘정(高宗廟庭)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위열(威烈)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취려 [金就礪] (한국민족문화대백과, 2009, 한국학중앙연구원)

 

 

박달재에서본 김취려장군 이야기

 (http://blog.daum.net/chp5506/147  대미성주 2012.02.26 15:06)

 

박달재 정상에가면 휴게소옆에 안국사 라고하는 작은절이 있다.

            이절집이 바로 김취려장군의 대첩비와 역사관을 사비를 투자하여 조성했다는 스님 한분이계시곳이다.

            김취려장군은 신라의 마지막왕 경순왕과 고려태조 왕건의 장녀 낙라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예부시랑 김부의

            아들로 알려져 있으며언양인 이시다.(그러니 경순왕의 손자뻘이 되는것이다)

            김취려장군이 거란족과 크고작은 전투에서 가장큰 전과를 올린곳이 바로 이곳제천 박달재 전투였다.

            이전투에서 큰 타격을 입은 거란족은 강릉과함흥을 것쳐 퇴각을 하였다고한다.이후 김취려장군은 고종15년 고려시대

            최고의 관직인 시중의 자리까지 올랐다고 한다.

           김취려장군은 박달재 전투에서 큰 전공을세웠지만 지금까지 유적이나 유물이 발견되지 않아 역사관을 세워도 확실한

           물증이나 증거를 내 세울수 없다고한다.해서 김취려장군의 후손인 안국사 주지스님께서 사비를 투자해 장군의 박물관과

           전적비 그리고 기마상을 이곳에 세웠다고한다.

           이렇게 마땅치않은 유물이나 유적이 없다보니 고향인 울산이나 또 전투를 치루었던 이곳 제천에서도 푸대접을

           받고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 안국사옆에서본 김취려장군 기마상 모습 *

 

  

 

 

 

 

           *영정사진과함게 조촐하게 차려진 분향소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