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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유학에 오늘을 묻다 (주간조선 2013.06.10)

 조선 유학에 오늘을 묻다

 담일청허’(湛一淸虛)의 기(氣)로 조선에 학자가 있음을 알려라!

유학의 영원한 노스탤지어, 기철학을 수립한 서경덕

 

유학뿐 아니라 동양철학 전체를 통틀어 기(氣) 개념만큼 많은 주목을 받은 용어도 드물다. 구름을 뜻하는 운기(雲氣) 개념은 중국 고대 은나라·주나라의 갑골문, 금문에서부터 등장한다. ‘좌전’과 ‘국어’는 음양풍우회명(陰陽風雨晦明)의 육기(六氣), 인간의 감정(六志), 질병(六疾)을 모두 기 개념으로 설명했는데, 이건 춘추전국시대에 이미 기가 자연과 인간 사회를 아우르는 보편적 철학 개념으로 정립됐다는 걸 말한다. 이로부터 기 개념은 도가, 유가, 음양가를 막론하고 동양인의 우주론,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피력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되었다.
   
   중국에서 기 개념에 근거한 ‘기철학’이 가장 분명한 형이상학적 위상을 갖게 된 것은 북송(北宋)시대 장재(張載·1020~1077)라는 인물을 통해서다. 그는 당대 중국인의 심성을 사로잡은 불교의 정밀한 사유체계와 종교적·초월적 세계관을 대체하기 위해, 기원전에 시작된 공자와 맹자의 유학을 새로운 형태로 변모시켰다.
   
   이른바 북송시대의 ‘신유학(新儒學)’은 내성적이고 주관적인 불교의 심성론을 넘어 기(氣)로 이루어진 새로운 우주관을 형성하면서 등장했다. 불교는 인간 삶을 고통으로 간주, 이 세상에서 벗어나 부처가 되길 열망했지만, 공맹(공자와 맹자)의 계보를 잇는 북송시대 유학자들은 삶 속에서 완전한 인격체인 성인(聖人)이 되고자 했다. 시대의 어리석음을 바로잡는다는 뜻의 ‘정몽(正蒙)’이란 작품은 성인이 되고자 한 장재의 우주론을 담고 있다. 그는 형체 없는 태허(太虛)의 기가 온 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다고 말한다.(‘正蒙’의 ‘太和’편)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변화 과정에서의 일시적 형태를 뜻하는 객형(客形), 즉 다양한 사물이 만들어지지만 이것은 모두 태허로 되돌아간다. 장재는 객형과 태허의 관계를 얼음과 물의 관계에 비유했다. 현상적으로 볼 때 얼음은 얼었다가 녹으면서 사라지지만 태허의 본래적 기로 돌아갈 뿐 소멸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무(無)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장재가 이 같은 기의 형이상학을 설파한 것은 거대한 우주 가족의 탄생을 예고하기 위해서다. 그는 광대한 세계에서 너무도 미미한 존재인 우리는 우주의 하늘과 땅을 자기 부모로, 자기 몸과 마음으로 삼을 때 비로소 모든 사람이 한 뱃속에서 태어난 한 가족이 되며 만물이 나와 더불어 사는 동료가 된다고 말한다.(‘正蒙’의 ‘乾稱’편) 현상계에서 우리는 갈등과 대립을 겪지만, 태허의 세계에서 하나의 기(氣)로 엮인 우주가족의 일원이 된다. 장재의 기철학은 신유학의 혁명적 우주론으로 급부상했고, 정호(程顥·1032~1085)의 만물일체설(萬物一體說)을 낳는 원동력이 된다. 정호는 만물과 자신을 한 몸처럼 간주하는 것이야말로 공자가 설파한 인(仁)의 참된 의미라고 보았다.(河南程氏遺書) 기(氣)가 불통해서 몸이 마비된 상태를 불인(不仁)으로 본 의학 용어를 빌려, 정호는 기가 통하여 모든 사물과 소통하게 된 상태를 인(仁)이라고 이해했다. 기의 우주론에 근거한 이들의 신유학은 중국의 유학 전통을 일변시켰고 조선 유학의 향배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 서경덕을 유혹하고 있는 황진이의 모습을 그린 그림. 북한 인민화가 차형삼의 작품이다.
      여기서 조선의 기철학을 수립한 화담 서경덕(徐敬德·1489~1546)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평생을 은둔자로 산 처사형(處士形)이다. 서경덕은 성종에서 명종 때 인물로 네 번의 사화(士禍)를 모두 겪었다. 기미를 알고 선견지명이 있는 선비라면 출사(出仕)하지 않고 평생 산림에 묻혀 학문과 후배 양성에 전념한다는 말이 사림파 지식인 간에 한창 유행하던 때다. 조광조의 기묘사림을 필두로 이황·이이 등 대다수 사림이 출사했지만 대표적 처사였던 서경덕과 조식(曹植·1501~1572)은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다. 중종 14년(1519년) 기묘사림이 현량과(賢良科·인재추천제)를 추진하면서 전국 인재 120명을 천거했을 때 개성 출신의 서경덕이 수석을 차지했다. 그러나 화담은 관직에 나가지 않았고, 1540년 대제학 김안국이 추천하여 참봉직(參奉職)을 제수받았을 때도 출사하지 않았다. 정통과 이단, 군자 소인의 엄격한 구별을 강조하던 사림파의 정치성향에 동조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런 내력 때문인지 기철학자 서경덕의 문헌 전승에는 기이한 행적의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환상소설인 ‘전우치전’에 나타난 화담은 도술의 고수가 되어 오만한 전우치를 징벌했다. 구비(口碑) 전승에선 서경덕이 승려로 둔갑한 호랑이와 여우를 벌준 야사까지 등장한다. 박연폭포와 서경덕 그리고 자신을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부른 황진이와의 로맨스는 의도적으로 각색되었다. 30년간 면벽참선한 지족선사(知足禪師)마저 무너뜨린 황진이가 갖은 방법을 동원해 서경덕을 유혹하지만 고결한 선비 화담이 끝내 지조를 잃지 않았다는 것이 이야기의 골자다. 유학자 서경덕의 내공이 불교의 선승(禪僧)이나 도사(道士)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강조한 이야기지만, 이면에는 다른 맥락의 인물평이 숨어 있다.
   
   뒷날 화담의 기철학은 이황(퇴계)과 이이(율곡)에 의해 이단의 징후를 가진 것으로 비판받는다. 이이는 화담이 경전 문구에 얽매이지 않고 성찰해서 자득(自得)한 맛이 깊지만 독학했던 그의 공부법은 학자들이 본받을 수 없다고 평했다.(율곡의 ‘經筵日記’) 퇴율(退栗·퇴계와 율곡)은 서경덕의 철학을 순정유학이 아니라 불교와 노장사상이 뒤섞인 잡학이라고 봤다. 이들의 부정적 평가는 서화담 전승에서 기괴한 도술을 일삼는 기인(奇人) 서경덕의 이미지를 더욱 증폭시켰다.
   
   서경덕 본인은 자기 철학에 대한 신념이 대단했으며 ‘귀신사생론(鬼神死生論)’을 지었을 때는 동방(조선)에서 학자가 배출되었음을 중국과 세계에 널리 알릴 수 있다고 자부했을 정도다. 화담의 이런 믿음에는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 자득을 강조한 서경덕의 학문적 성과는 중국인이 아닌 동양의 외국인으로서 유일하게 청대 국가학술사업의 대결산인 ‘사고전서(四庫全書)’에 수록되는 영광을 누렸다. 18세기에 유득공(柳得恭·1749~1807)이 연행사로 중국을 방문했을 때 청의 저명한 학자 기윤(紀昀)이 서경덕의 ‘사고전서’ 인명수록을 언급하며 ‘화담집’을 극찬했다.(유득공의 ‘熱河紀行詩註’)
   
   무엇이 서경덕의 학문을 특별한 논설로 만들었을까? 당시 서경덕의 학문에 대해 장재의 기철학과 소옹(邵雍·1011~1077)의 상수학(象數學)을 모방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상수학은 ‘주역’의 괘상(卦象)과 괘상에 배당된 숫자를 통해 자연현상을 설명한 유교 전통의 자연과학이라고 볼 수 있다. 서경덕은 상수학 관련 글을 썼지만, 자신은 수학으로 인해 깨달은 자가 아니며 수(數)라는 것은 목적이 아니라 이(理)를 살피기 위한 방편이라는 점을 명시했다.(‘화담집’ 중 유사 遺事)
   
   의구심을 확대시킨 것은 서경덕의 기철학이 장재의 그것과 무엇이 다르냐는 점이었다. 여기선 화담이 중시한 학문 태도를 엿볼 필요가 있다. “성현의 말은 이미 경전에 있고 선배들이 주석을 단 것에 대해선 다시 덧붙일 필요가 없다. 오직 논파하지 않은 것만 말하고자 한다.”(‘화담집’ 중 연보年譜) 서경덕은 선유(先儒)가 이미 말한 것이라면 자신이 굳이 반복할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그럼 어디까지를 서경덕의 고유한 기론(氣論)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는 맑고 형체 없는 담연무형(湛然無形)의 태허가 기의 본래 모습, 즉 선천(先天)이라고 말한다.(原理氣) 태허는 공간적으로 외부가 없고 시간적으로 시작이 없다. 태허의 일기(一氣)는 스스로 움직여 음양 이기(二氣)로 나뉜다. 화담은 이것을 ‘기자이(機自爾)’, 즉 기(氣)의 모습이 저절로 그런 것이라고 했고, 음양이 작용하여 천지와 일월성신을 이루는 것을 후천(後天)이라고 불렀다.
   
   그는 선천과 후천이 시공간적으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점, 태허가 곧 기고 기가 곧 태허라는 점을 강조한다.(理氣說) 허(虛)가 그 자체로 기(氣)라는 말은, 허무의 상태에서 존재하지 않던 기가 갑자기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太虛說) 이기(理氣)의 미묘한 관계를 아는 자라면 기에 시작과 끝이 없으며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 다른 원인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하며, 화담은 이것을 “기 바깥에 이가 없다(氣外無理)”라고 표현했다.(理氣說) 주자학의 이기론(理氣論)처럼 이(理)가 기(氣)를 주재한다고 말했지만, 이때의 주재란 기 밖에서 기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기의 변화무쌍한 작용이 바름을 잃지 않는 모습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후대에 화담의 사유를 기(氣) 중심적 이기론 혹은 기철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는 기보다 먼저 존재하는 이(理)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경덕이 태허의 일기(一氣)와 음양의 작용을 말한 점은 북송(北宋)의 장재 철학과 다를 것이 없었다. 화담은 무엇을 두고 자기 학설이 장재, 정호, 주희와 다르며 그들이 미처 명료하게 논파하지 못한 것을 밝혔다고 자부했을까? ‘귀신사생론’의 의문에 답할 만한 대목이 있다. 서경덕은 기의 본래 상태에 취산(聚散), 즉 모이고 흩어지는 작용이 있을 뿐, 있다가 소멸되거나 다시 발생하는 유무(有無)현상은 없다고 말한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처럼 미미한 존재라도 이 기가 ‘끝내 흩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계속 강조한다. 영명한 정신 지각뿐만 아니라 거칠고 조야한 풀 한 포기까지 결국 어떤 것도 흩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한 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일까? 바로 여기에 화담의 독창적 답이 있다.
   
   장재는 객형(客形)의 임시적 기가 태허의 본래 기로 돌아가지만 흩어져도 원래의 기이고 다시 모여도 마찬가지의 기이기 때문에 죽어도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正蒙’의 ‘太和’편) 일견 유사해 보이는 이 대목에서 서경덕은 태허로 흩어지는 것(散)이 결코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不散)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기의 취산(聚散)을 말하지만 이곳에서 기의 불취(不聚)와 불산(不散)을 통관(通觀)할 수 있어야 비로소 ‘역(易)’의 신비한 이치를 알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화담의 창견(創見)이었다. 담일청허의 기는 글자 그대로 시작도 끝도 없는 무시무종(無始無終)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한 수사(修辭)가 아니라 모든 구체적 사물 속에서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는 영원한 상(象), 즉 태허를 직관했던 화담의 가장 절실한 전언이다. 비록 정신지각의 아이덴티티, 즉 개체의 자의식과 기억이 유지되는 것은 아니지만 화담은 모든 사물이 그 자체로 담일청허의 기에서 영원히 존재한다고 보았다. 불교의 윤회나 천주교의 영혼불멸처럼 사후세계를 따로 말하지 않더라도, 삶의 내재적 지평에서 개체를 뛰어넘는 영원한 세계, 즉 내재적 초월의 이상향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현세 유학에 종교적 초월의 영역을 설정함으로써 서경덕은 유학의 지평을 영원의 도상으로 끌어올렸다. ‘줄 없는 거문고로 소리 나지 않는 소리를 듣는다’고 한 화담의 시구는 유한하면서도 무한한 인간 삶의 모습을 미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다.(‘無絃琴銘’)
   
   그러나 담일청허의 기로 모든 사물의 영원성을 강조한 화담의 논법은 후대의 격렬한 비판에 시달렸다. 특히 이황의 비판이 신랄했다. 그는 화담의 학설이 어느 것 하나 성현의 발언에 부합하지 않는데도 깊고 오묘한 경지를 터득했다고 스스로 오만하게 자평했고, ‘이(理)’ 자를 투철하게 이해하지 못해서 결국 형기(形氣) 일변도에 그쳤을 뿐이라고 혹평했다.(퇴계전서 중 ‘非理氣一物辨證’) 이(理)와 기(氣)가 완전히 다른데도, 화담은 영원하고 보편적인 이(理)의 고유한 속성을 기에 배속시켜서 기를 이로 혼동했다고 본 것이다.
   
   선천·후천 사이에 존재하는 이(理)의 강력한 주재성을 이해하지 못한 점을 지적하며 퇴계는, 화담이 기를 이(理)처럼 상존불멸(常存不滅)하는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의도치 않게 불교의 윤회설에 근접하는 또 다른 오류를 범했다고 평가했다.(퇴계전서 중 ‘答南時甫’) 객형이 태허로 돌아가고 또 다른 객형으로 출현한다고 본 장재의 기론도 주희에 의해 대윤회설(大輪廻說)의 일종으로 비판받았는데, 화담의 논설 역시 마찬가지 폐단을 가졌다고 본 것이다. 사실 윤회나 영혼불멸을 말하려면 다른 존재와 구별되는 개체의 고유한 자의식과 기억능력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장재나 서경덕은 태허 기의 세계에서 구체적 사물의 자기정체성을 강조하지 않았다. 다만 개별 존재를 구성하는 담일청허한 기의 영원성을 말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퇴계와 율곡이 동일한 목소리로 이들의 기론을 공격한 것은, 기의 영원불멸성 그 자체 때문이다.
   
   퇴율은 기의 속성이 ‘생생불식(生生不息)’, 즉 기존의 것이 사라지고 새로운 것이 끊임없이 다시 발생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한 번 쓰인 기가 완전히 사라지고 새로운 기가 끝없이 발생해야 무궁한 조화를 말할 수 있다고 본 정이(程頤·1033~1107)의 우주론을 차용한 것이다. 이들에게 영원한 것은 태극의 이(理) 하나뿐이며, 기는 생멸(生滅)을 겪는 유한한 존재를 의미했다. 그런데도 유무지간(有無之間)에 놓인 기를 불멸하는 것으로 본다면, 이것은 귀신과 혼령의 상존(常存) 및 윤회를 말한 불교와 다를 게 없다. 율곡은 화담이 총명했지만 유한한 담일청허의 기 위에 ‘이통기국(理通氣局·理는 보편적으로 존재하고 氣는 제한되어 있다)’의 차원이 더 있는 것을 몰랐다고 비판한다.(‘율곡전서’ 중 ‘答成浩原’) 율곡이 화담을 조광조, 이황에 이어 제일 마지막에 꼽은 것도 이 때문이다. 율곡은 조광조에 대해서는 출사하여 수기치인(修己治人)을 함께 달성했다고 했고, 퇴계에 대해서는 성실하게 공부했지만 주자를 모방한 것(依樣)이 심했다고 봤고, 화담에 대해서는 자득한 맛이 있지만 홀로 공부한 탓에 투철하게 이(理)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율곡별집)
   
   조선 유학자 중 북송시대의 신유학과 이기론을 가장 먼저 깨우쳤음에도 불구하고 서경덕에 대한 당대 사림의 평가는 곱지 않았다. 16세기 초 붕당이 조성되기 전 화담은 수많은 문인제자를 배출했지만 이들은 동인·서인, 북인·남인으로 갈라서면서 정맥(政脈)에 따라 화담학파의 성격을 달리 평가했다. 화담의 직전 제자들은 스승의 우주론과 기철학을 대단히 높이 평가한 반면, 퇴계와 그 문인은 학식도 낮고 시문도 뛰어나지 못한 화담의 자질을 극존(極尊)하는 화담 제자들의 태도를 비웃었다. 광해군 6년(1614년) 문묘종사 논의에서도 이항복(李恒福)의 청원이 있었지만, 화담은 기수(氣數)에 치우쳐 이(理)를 몰랐다고 본 전대 사림의 부정적 평가로 인해 제대로 논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화담집’ 중 연보) 화담과 그 제자를 배향한 화곡서원(花谷書院)을 사액(賜額·국가가 인정한 공식서원으로 정부 후원을 받도록 함)하는 것으로 논의가 마무리됐다. 서경덕 학풍에 대한 이런 부정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이황과 이이의 철학이 조선 유학의 근간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화담 철학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통해서 가능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사실 북송시대 장재의 기철학, 정호의 만물일체론, 조선에서 서경덕의 담일청허(湛一淸虛) 기론 등은 고대 유학의 이상향에 맥이 닿는 오래된 사유전통을 잇고 있다. ‘성인은 천하를 한 가족으로, 중국을 한 몸으로 여긴다’는 ‘예기’의 ‘대동사회론’이 그것이다. 대동사회란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약한 자, 병든 자, 불구자, 홀로 된 자 등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사회, 내 집 자식과 남의 집 자식, 내 집 부모와 남의 집 부모를 분간하지 않고 두루 사랑할 수 있는 이상사회를 뜻한다. 주자학자들은 대동사회론이 자기 혈친과 타인 간의 친소(親疎·가깝고 먼) 관계를 무너뜨리는 묵가류의 겸애설(兼愛說)에 빠졌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오민동포(吾民同胞)와 만물일체(萬物一體)를 주장한 기철학자들에겐 유학의 협소한 가족주의가 오히려 시대의 한계로 자각되었다. 나와 친족, 타인의 구별이란 곧 흩어질 일시적 객형에 불과한 것이고(장재), 모든 존재는 외형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담일청허의 기로 엮인 하나의 몸체라고 이해했기 때문이다.(서경덕) 오늘날 공동체에선 사회적 역할분담과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기 위해 개체 혹은 개인의 독립된 위상을 철학적으로 자리매김하려고 한다. 그러나 단절된 개인이 어떻게 타인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우리가 사회에서 함께 공존할 수밖에 없는 상호의존적 존재라는 점을 구명하기 위해서도 장시간의 철학적 성찰이 필요하다. 이 점에서 보면 조선 유학의 기철학 전통은 이미 상호 공존을 위한 중요한 형이상학 이념을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백민정
   
   ‘정약용 철학의 형성과 체계’로 연세대박사학위. 저서 ‘정약용의 철학:주희와 마테오 리치를 넘어 새로운 체계로’ ‘강의실에 찾아온 유학자들’ ‘맹자:유학을 위한 철학적 변론’

 

 

‘소학’ 동자들이 어떻게 권력을 바꿨나?

 (주간조선 2013.05.20)

진리의 계보(道統)를 만든 조선의 운동권 지식인들

 

▲ (왼쪽부터) 김종직.김굉필. 조광조.

 

미국의 진보적 정치학자 셸던 월린(Sheldon Wolin)은 정치적인 것의 고유성을 말하면서 기존의 정치관을 비판했다.(‘정치와 비전’) 그의 비판을 받았던 기존의 정치관 중 하나가 윤리적 판단에 정치를 종속시키는 규범적 정치학이다. 유학은 월린이 지적한 규범적 정치학에 해당된다. 도덕적 기준에서 현실 정치를 비평하고 정치를 윤리화하는 것을 최종목표로 삼았기 때문이다. 조선 유학도 정치가의 도덕성(修己)을 바탕으로 정치운영(治人)의 정당성을 도출했기에 윤리(도덕)와 정치의 연속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오늘날 정치 논리를 윤리적 판단으로 환원해서 설명하는 규범적 정치학은, 전근대 시기 보편적으로 유포된 정교일치(政敎一致)의 미분화된 정치 관행을 연상시킨다.
   
   정치의 고유성을 탐색해온 근대 서양정치학은 정치를 종교와 윤리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을 일차적 목표로 삼았다. 종교나 윤리의 가르침은 사회의 평화와 협력을 증진하기보다 절대선과 정의의 이름으로 잔혹한 분쟁과 폭력의 역사를 양산했다. 우리에게는 구성원 다수의 평균적 결함을 인정하면서 사회적 공존이 가능한 차선의 방책을 제공해줄 정치 논리가 필요했다.
   
   사회과학의 권위자 막스 베버는 정치와 윤리 문제를 성찰하면서 ‘신념’의 윤리가 아닌 ‘책임’의 윤리가 수반될 때 바람직한 정치 운영이 가능하다는 점을 역설한다.(‘직업으로서의 정치’) 베버는, 자신들이 신봉하는 절대적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극단적 폭력을 사용한 러시아 볼셰비즘과 독일 사회주의 혁명단 스파르타쿠스주의자를 실례로 들면서, 신념과 동기의 순수성만 믿고 독단적으로 행동한 이들의 무책임과 유치함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들 윤리적 엘리트주의자들은 자기신념의 절대성과 민중의 어리석음이라는 이분법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베버에 따르면, 정치란 선(善)으로부터 선이 귀결되는 단순한 과정이 아니며, 오히려 선과 정의의 맹목적 추구는 분열과 싸움을 낳을 뿐이다. 따라서 책임의 윤리를 갖춘 정치가라면 우발성과 결함에 노출된 평범한 인간의 한계를 고려하고 예상 가능한 결과를 염두에 두면서 자기 행위에 대해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
   
   조선 유학의 대표적 지식인들, 특히 유학적 진리의 계보라고 할 ‘조선도학계보사(朝鮮道學系譜史)’를 만든 사림파(士林派) 지식인은 전형적인 신념의 정치가다. 이들은 정통과 이단, 선과 악, 군자(君子)와 소인(小人) 등 대립 개념들을 구사하면서 정치공동체의 성격을 규정했다. 15세기 말 성종의 언론 삼사(三司) 우대정책에 따라 관료사회에 입성한 신진사대부들은 훈구공신 및 대신에 대한 강력한 정치 공세를 폈지만 결국 연산군 때 두 차례 사화(士禍)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중종반정 이후 왕과 대신·대간의 역학관계에서 다시 중앙정치에 간여하게 된 사림파는 ‘붕당을 조성한다(交結朋黨)’는 훈구파의 공세를 방어하던 중 보다 적극적으로 ‘진붕론(眞朋論)’을 내세우며 ‘군자소인’ 논쟁을 촉발시켰다.
   
   중종의 총애로 급성장한 조광조는 폐조(廢朝·연산군) 때의 사화가 재발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군자·소인을 엄격히 준별할 수 있는 군주의 식견과 공부가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했다.(중종실록 13년 4월 28일) 그는 소인들의 기미가 엿보일 때 통렬히 응징해야 한다고 중종을 채근했다.(중종실록 13년 5월 18일) 소인이 군자를 모함할 때 명분을 찾기 어려우면 흔히 ‘당(黨)’을 만든다는 죄목으로 비방하지만, 공심(公心)으로 함께 도를 추구하고 선을 행하는 군자의 참된 모임(眞朋)은 소인이 사심(私心)으로 영리를 추구하는 거짓 모임(僞朋)과는 다르다고 보았다. 조광조는 사족층의 붕당 결성 및 여론 조성이 죄가 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이에 훈구공신들도 같은 방식으로 사림파의 ‘동당벌이(同黨伐異·같은 편이면 무조건 옹호하고 다른 편이면 배척하는)’ 태도를 공격했다. 적과 동지, 내 편과 네 편을 구분하는 이러한 운동권적 발상은, 윤리적 신념을 공유할 수 없는 반대파에 대한 극단적 정치공세와 분쟁을 야기한다. 당시 지식인들은 자기 신념에 대한 확신이 정치공동체의 분열을 조장하고 급기야 공동체의 존립 자체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점을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도덕적 근본주의·원리주의에 집착함으로써, 상이한 신념의 소유자들이 공존할 수 있게 하는 정치 자체의 고유한 논리를 망각했던 것은 아닐까? 오늘날 정치를 종교와 윤리 문제로 환원해서 이해하는 규범적 정치학이 비난받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가 흔히 사림파로 부르는 성종 연간의 신진관료와 유생들은 도덕적 진리와 대의명분으로 기득권에 저항한 투사적 존재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이들에 대한 첫인상은 몹시 우스꽝스러웠다. 일례로 그들은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기초적 예의범절을 수록한 ‘소학(小學)’ 텍스트를 강독하는가 하면 향약(鄕約)을 만들어 주기적 계모임을 가졌는데, 이를 두고 항간에서 ‘소학계(小學契)’다 ‘효자계(孝子契)’다 말이 많았다. ‘소학’은 남송(南宋)의 주희(朱熹)가 유청지(劉淸之)와 함께 편찬한 것으로 유교의 여러 경전을 선별해서 만든 수신(修身) 교과서다. ‘대학(大學)’ 등 사서오경(四書五經)에 들어가기 전 배워야 할 기초덕목으로 구성된 ‘소학’은 효제(孝悌), 공경(恭敬), 성의(誠意), 예교(禮敎) 등을 강조한 일종의 윤리적 생활지침서였다.
   
   소학계라는 명칭은 사림파가 만든 ‘진리의 계보(道統)’에 등장하는 인물 김굉필(金宏弼)과 그의 제자 그룹에서 처음 등장한다. 평생 ‘소학동자(小學童子)’를 자칭한 김굉필은 남들 눈에 이상하게 보일 정도로 ‘소학’ 규범을 그대로 재현한 인물이다. 꼭두새벽부터 의관(衣冠)을 바르게 정제하고 가묘(家廟)에 들어가 절한 뒤 부모에게 문안인사를 드리고, 온종일 서재에 소상(塑像)처럼 꿇어앉아 ‘소학’을 암송하던 김굉필의 기이한 행적은 세상 눈총을 받기도 했지만 수많은 추종자를 낳았다. 성균관을 중심으로 김굉필 제자들이 계파를 만들어 ‘소학’ 규범을 똑같이 따라한 이상한 풍속이 형성된 것이다. 초기에 이들의 행동은 동년배 유생들뿐만 아니라 국왕과 대신의 비웃음마저 샀다. 시대가 어느 때인데 아직도 공자와 안연 등 수천 년 전 유학자 모습을 흉내 내냐며 이들의 도학(道學) 선생인 양하는 이상한 행동을 비웃은 것이다.
   
   ‘소학’을 곧이곧대로 따라하던 이들의 괴이한 행적은 성종에게 올린 한명회의 상소문에 잘 나타난다.(성종실록 9년 4월 24일) “성명(聖明)하신 주상 밑에 어찌 붕당(朋黨)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남효온(南孝溫), 강응정(姜應貞), 박연(朴演) 등이 소학계를 만들어 소학의 도를 실천한다고 떠벌리고 때로 여럿이 모여 강론하면서, 강응정을 공자로 박연을 안연이라고 부르며 스스로 그렇게 표방하고, 혹은 세간에서 그들을 희롱하고 업신여기는 것의 자세한 의미를 알 수 없지만, 한때 유생이 된 자들로 이들을 비웃지 않는 자가 없을 정도입니다.” 상소문에 인용된 기사관(記事官) 안윤손(安潤孫)의 발언에 성종은 “저들이 편당(偏黨)을 만들었어도 무슨 대단한 일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허황된 어린애들(狂童) 짓거리를 어찌 국문할 수 있겠는가”라며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성종은 수차례 소학계 멤버들을 ‘광동(狂童)·광생(狂生)’이라고 지목하며 이들의 어리석은 행동을 추국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우리 어감으로 ‘미친 놈(狂童)’이라고 불릴 만한 당시 나이 어린 젊은 유생들은 사실 미쳤다기보다 허황된 혹은 비현실적 이상을 좇는 연소(年少)한 무리를 일컫는 말이었다. 이는 공자가 중도(中道)의 선비를 얻지 못하면 광자(狂者·이상만 높고 실천력이 부족한 사람)와 견자(狷者·지식은 부족하지만 절개가 굳은 사람)를 찾아 가르치겠다고 말한 데서 연유한 표현이다.(論語, 子路) 그런데 연소한 무리들이 떼로 몰려다니면서(朋比·朋黨) 위협적인 여론을 조성했던 점이 문제가 되었다. 당시는 “재조관원(在朝官員)이 교결붕당(交結朋黨)해서 조정의 정사를 문란케 하는 자가 있으면 참형(斬刑)에 처한다”는 ‘대명률’ 조항이 엄존하고 있을 때다. 김굉필 제자그룹의 광동들은 내수사(內需司)를 혁파하여 왕실 재산을 국가 공적 자산으로 돌리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세조 때 공신은 더 이상 관직에 등용하지 말 것,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를 모신 소릉(昭陵)을 추복(追復)할 것 등을 집단적으로 주장하면서 민감한 정치 사안을 자극했다. 이들의 집단 행동은 결국 연산군 때 사화를 일으키는 빌미를 제공한다.(연산군일기 4년 8월 16일) 이로부터 ‘소학’은 사화의 발생과 맞물려 조선사회에서 일종의 불온문서로 취급되다가 다시 해금되는 과정을 몇 차례 반복했다.
   
   건국에 참여한 초기 신흥관료들은 ‘주례(周禮)’를 중심으로 중앙정부조직 등 일국 차원의 방대한 운영전략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은 사대부 개인의 덕성 함양보다는 왕권과 의정부 재상, 육조관리의 역할분담 및 이들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인 국가운영에 골몰했다. 성종의 문치주의 이후 등장한 사림파 지식인들은, 개인적 생활규범을 밝힌 ‘소학’과 관혼상제의 예법을 망라한 ‘주자가례(朱子家禮)’, 자연세계와 인간심성의 이치를 밝힌 ‘근사록(近思錄)’ 및 ‘심경(心經)’을 소의(所依) 경전처럼 귀중하게 다뤘다. 김굉필의 제자인 조광조도 ‘소학’의 실천궁행으로 이름이 높았고, 김안국은 지방 유향소, 서원, 향교를 중심으로 ‘소학’을 유포시키는 한편 여기 수록된 북송시대 ‘여씨향약’을 경상도 향약 운영의 모델로 삼았다. ‘소학’과 ‘여씨향약’ 그리고 ‘주자가례’의 전국적 보급과 재현은, 사대부들의 향촌 및 향민에 대한 자율적 통제와 교화를 가능하게 했다.
   
   18세기 대표적 실학자 유수원(柳壽垣)은 성종~중종시대 사림의 정치 행적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오직 소학계(小學契), 현량과(賢良科·인재추천제), 향약(鄕約) 등의 일만 급선무로 삼고 위로 선왕들이 나라 다스리는 법도를 제정했던 뜻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아래로 노련한 간신들의 교활한 작태를 다스리지도 못해서, 속류의 무리로 하여금 유학자란 아무 쓸모가 없다고 비방하게 만들었다.”(‘迂書’) 사림이 개인적 도덕 실천과 지방의 향민 교화에 치우쳐 국가 전장제도와 문물을 흥기시키지도, 훈구세력에 맞선 정치대응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소학’ ‘가례’에 대한 사림파의 존숭은 개인의 실천궁행에서 나아가 대민 교화의 효과적 바탕이 됐고 결국 중앙 삼사에 포진한 신진관료의 정치적 발언권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도덕을 근본으로 삼는 점에서 삼공(三公) 대신도 선비이며 국왕도 결국 사기(士氣)의 종주(宗主)일 뿐 일반 포의(布衣·선비)와 다를 바 없다고 강조한 조광조의 등장은, 중앙 및 지방 사족의 윤리적 공감대가 형성됨으로써 가능했다.(중종실록 11년 6월 2일)
   
   사림파의 개별적 ‘소학’ 실천과 문중에서의 ‘가례’ 시행은 국가 차원의 문묘(文廟) 설립, 그리고 문묘향사(文廟享祀)라는 정치적 의례들과 밀접히 연관돼 있었다. 문묘란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공자에게 제사 지내던 사당(祠堂)이다. 성균관의 교육 기능과 문묘의 제사 기능은 국가가 주관하는 중요한 학술·정치 행사의 하나였다. 주희가 공자로부터 맹자로, 북송(北宋) 오현(五賢)과 자신에게 이어지는 도학의 계보를 만들었듯이, 16세기 조광조 일파도 조선도학(朝鮮道學)의 계보, 즉 유학적 진리를 담지한 도(道)의 전수자들을 선정했다. 그리고 진리의 계보에 오른 인물들을 문묘에 종사(從祀)토록 함으로써 자신들이 선정한 도학자를 국가의 공식인물로 승격시켰다. 조선 유학의 도를 전수한 인물로 거론된 자들은 다음과 같다.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 이 도학계보의 형성에 실제 영향력을 미쳤던 인물은 조광조 한 사람뿐이다.
   
   문묘종사(文廟從祀) 논의가 본격적으로 개진된 것은 중종 때며 이것은 왕조사회에서 왕통(王統)에 대한 도통(道統)의 위상, 즉 군왕에 대한 사대부 지식인의 윤리적·정치적 권한을 명시하는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조광조 등 기묘(己卯) 사림들은 도덕적 명분으로 정치권력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자신들의 스승 김굉필을 도학의 계승자로 추대했고, 멀리 고려 말의 유신 정몽주로까지 소급해 올라갔다. 사실 정몽주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정도전과 함께 한 개혁파 관료였으나 태종 이방원에 의해 살해됨과 동시에 고려왕조의 절개를 지킨 충절과 의리의 화신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정몽주가 사림파 도학의 시조로 설정된 것은, 국가에 의한 충신 정몽주 선양사업과 사림에 의한 도학자 정몽주 추숭사업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기묘사림은 스승의 문묘종사를 성사시키진 못했지만 정몽주의 문묘배향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권력비판, 즉 군주권을 정치비평의 대상으로 삼고 정치의 최종목표가 도학적 윤리의 실현이라는 것을 국가로부터 승인받았다. 국왕도 ‘도통’의 계보에 포괄되는 존재로서 선비의 우두머리일 뿐 도덕적으로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점을 천명했다.
   
   정몽주가 충신이자 도학자로 평가됨과 동시에 세조에 의해 죽은 사육신, 연산군 때 사화로 목숨을 잃은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등 초기 사림파, 중종 때 기묘사화로 사사된 조광조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모두 왕권에 의해 살해되었지만 국가에 의해 다시 충절과 의리의 표상이 되었다. 현실 권력의 향배와 관계없이 문묘종사의 성취는, 사림의 역사적·사상적 승리를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물론 반대세력의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특별한 학문적 공로도 없는 김굉필을 내세워 도학 계보를 날조한 것은 스승을 빙자해 당(黨)을 만들려는 조광조 일파의 모략이며 처음부터 정몽주에 대해선 아무 관심도 없었다고 본 것이다.(중종실록 12년 8월 7일) 조광조와 기묘사림의 죽음 이후, 선조에 이르면서 문묘종사 논의는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의 오현(五賢)으로 축약된다. 여기에는 선배 사림들의 도학사(道學史) 계보에 대한 이황 본인의 불만과 정치적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退溪先生言行錄/退溪集, ‘答金而精’) 이황은 충절과 의리라는 도의적 덕목 외에 학문적·사상적 공로를 좀 더 부각시키고자 했다. 이황과 기대승 등 선조 때 저명한 관료들의 입장을 반영해 1610년 광해군 2년에 오현(五賢)의 문묘종사가 확정되었다.
   
   연소한 무리배, 광동(狂童)의 집단행동은 이렇게 국가적으로 공인된 도통(道統)의 계보와 정치권력을 평가하는 최종 준거로서 도학(道學)의 절대적 위상을 만들어냈다. 도학 선생은 우스꽝스럽고 바보스러운 인물로 매도되기도 했지만, 유교국가 조선은 국가이념에 부합하는 그들의 충절과 효행을 폄하할 수 없었다. 네 차례 사화(士禍)의 큰 벽을 뚫고 이제 사림들은 실질적으로 왕권을 논평하고 견제할 수 있는 정치적 권위를 확보했다. 이들은 정권이 재상(宰相)에게 있어야 한다고 본 정도전의 발상도 넘어섰다. 정도전은 권력이 대간(臺諫)으로만 넘어가도 위험하다고 했지만, 조광조 시대에는 ‘정귀대각(政歸臺閣)’ ‘정귀외의(政歸外議)’란 표현처럼 정치권위와 공론(公論)의 형성이 삼사 관원을 넘어 재야 사족층의 일로 확장되었다. 이것은 진리의 계보를 형성함으로써 국왕을 포함한 재조(在朝)·재야(在野) 모든 지식인을 사상적으로 통일시켰기 때문이다. 왕통의 계승자인 군주는 수양을 통해 도통을 확보해야 성왕(聖王)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도학을 앞세운 사림파 지식인은 왕조사회에서 권력의 속성 자체를 변화시켰다.
   
   이제 막스 베버의 물음을 다시 상기해보자. 베버는 자기 신념의 희생자들을 날카롭게 비판했지만 정치세계에서 윤리의 필요성을 부정하지 않았다. 정치가는 행위의 결과를 책임질 수 있는 윤리를 견지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우리는 도대체 어떤 결과를 원하며 어떤 책임을 요구하는가? 이것이 다수결의 원리처럼 보다 많은 사람들의 욕구를 대변하는 것을 말한다면, 베버가 말한 책임과 결과의 성격에 대해 우리는 다시 장시간의 논쟁을 벌어야 하며 여기선 결국 개인의 신념이 중요한 관건이 된다. 신념의 윤리가 정치공동체에서 배제되기 어렵다는 말이다. 정치는 공학이 아니며 오차 없는 엄밀한 기술도 아니다. “한정된 가치를 권위적으로 배분함으로써 사회 전체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행위”로 규정된 정치의 정의(데이비드 이스턴·David Easton)를 돌아볼 때, 우리는 신념 대 신념을 건 끈질긴 논쟁이 다시 필요하다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어떤 신념을 어떤 방법으로 실현할지 결정하는 데 우리의 진정한 정치역량이 놓여 있는 것이 아닐까

 

 

“조선 유학, 민주주의에 답할 수 있나”

 (주간조선 2013.04.29)

왕과 사대부의 나라, 조선의 정체성

 

▲ 1784년 8월, 조선 정조의 아들 문효세자의 책봉의례도.
19세기 말 이후 서양은 우리의 절대적인 지식·문화 수입원이었다. 특히 조선 후기의 유교지식인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 것은 서양의 과학과 정치제도다. 엄청난 위력의 과학지식과 민중에 의한 정치가 선출 방식(민주정)은 지난 세기 동양인을 깊은 열등감에 빠뜨렸다.
   
   이 가운데 민주주의 문제를 살펴보자. 유학의 정치이념은 흔히 민본주의(民本主義)·위민주의(爲民主義)로 불린다. 이것은 소수의 뛰어난 정치가가 천심(天心)을 담은 백성의 마음, 즉 백성의 원망(願望)과 요구를 헤아려 백성을 다스린다는 의미다. 당연히 국민의(of), 국민에 의한(by), 국민을 위한(for) 정치제도로서 민주주의 이념에 부합되지 않는다. 기껏해야 ‘백성을 위한’ 정치를 수행하도록 정치가 개인의 도덕심을 고무시켰을 뿐이다. 가령 민(民)이 직접 정치에 참여해서 다수의사를 정책에 반영하는 ‘다수결’의 원리 같은 것은 유교지식인 입장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무지(無知)한 이들에 의한 정치폭력을 의미할 뿐이다. 이들에게 ‘정치(政)’란 모든 것을 ‘바로잡는(正)’ 윤리적 행위였기 때문에 뛰어난 식견과 통찰력을 가진 성인(聖人)이 세계의 운영원리(天理·天道)에 따라 백성을 가르치고 계몽해야(敎化) 했다.
   
   조선 유학도 이 점에서는 예외가 아니어서 오백 년간 철저한 엘리트 의식과 관행을 고수했다. 정약용 같은 인물도 신국가건설안을 담은 ‘경세유표’에서 왕실귀족, 관료, 양인(良人), 천민(賤民)의 위계와 신분질서를 강조했다. 유교지식인은 모든 사람이 선한 본성을 갖고 있고 누구나 학문을 익힐 수 있다고 보았지만, 현실적으로 먼저 깨닫고 먼저 인격함양이 된 선각(先覺)·선배(先輩)와, 이들에 의해 교화될 후생(後生)·후배(後輩)의 서열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도덕적 인격수양에 따른 정치권위의 차등화라는 독특한 신분차별화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조선은 세습이 아닌 국가공식시험(科擧)을 통해 문무(文武)·양반(兩班)·관료를 선발했고, 이들은 세습국왕과 왕실에 대해서도 강력한 비판의식을 가졌다. 하지만 양천제(良賤制·백성, 노비)라는 태생적 신분차별제도가 엄존했고, 같은 양인이라도 관료사회에 입성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사회적 대우가 완전히 달랐다. 따라서 사회구성원 간의 신분차별을 당연시한 조선 유학의 정치이념을 ‘민주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한 가지 문제점이 더 있다. 유학은 기본적으로 종교와 학문, 정치가 유기적으로 어우러진 총체적 이념이자 사유 체계다. 따라서 정치를 도덕·윤리로부터 해방시킨 서양 근대의 정치관에서 볼 때 조선 유학은 오히려 퇴행적이다. 정도전은 참된 사대부(士大夫)란 도덕군자인 ‘유(儒)’와 뛰어난 행정관료인 ‘이(吏)’의 능력이 결합되어 백성을 도덕적으로 교화할 수 있는 자라고 믿었다. 조선 후기의 정약용도 ‘정교일치(政敎一致)’를 말하면서, 유교정치란 백성의 도덕심을 고양시켜 도덕공동체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유교지식인에게 ‘정치’란 뛰어난 소수의 정치가가 그렇지 못한 다수의 백성을 가르치고 이끌어서 도덕적 사회를 실현하는 윤리의 극대화 과정을 의미했다. 정치를 유학적 진리를 실현하는 수단으로 간주함으로써, 오늘날 서양에서 말하는 정치공학 혹은 기술로서의 고유한 정치논리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비난받는 것은 이런 점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민주주의 이념에 위배되는 조선왕조의 정치 체제와 그것을 떠받든 유학 이념을 다시 보려는 것일까. 여기에는 두 가지 물음이 놓여 있다. 도대체 민주주의란 무엇이길래 오늘날 모든 정치제도와 가치관을 판가름하는 절대기준으로 군림하는가. 민주주의 자체로 칼날을 돌릴 때 조선 유학의 이념과 조선왕조의 정체성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유의미하게 말할 수 있을까.
   
   이상적인 정체(政體)로 간주된 ‘민주정’과 그것의 이념인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은 서양에서도 초미의 관심사다. 오늘날 대의민주정에서 주장하는 다수결 원칙, 선거제, 대표제는 서양학자들 사이에서도 민주주의 이념에 맞지 않는 것으로 부정되고 있다,(폴 우드러프 ‘최초의 민주주의’) 특히 국민의 권리를 대행할 정치지도자를 선발하는 ‘선거’ 제도에 대한 불신은 이미 극에 달했다.
   
   논리적으로 개인의 권리란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것이지만, 현실적으로 더 큰 문제는 선거제도가, 기존에 습득한 부와 권력에 따라 특정집단과 사회성원에게만 유리한 비민주적 결과를 초래한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서양에서도 참된 민주정의 유일한 역사적 선례는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있었던 아테네의 ‘추첨제’밖에 없다고 평가한다. 다시 말해 기득권, 계파나 인맥, 조직이 어떤 영향력도 발휘할 수 없도록 무작위적인 우발적 선출방식으로 ‘추첨제’를 활용한 것이다. 이것은 아테네 법원의 배심원단 선발, 의회 입법단 구성, 민회 운영 등 모든 정치 분야에서 적용되었다.
   
   지금까지 조선 유학 연구자들은 정약용이나 최한기 같은 대표적 실학자에게서 서양 민주주의에 비견될 만한 선거(선출)의 맹아적 관념이 있었는지 찾으려고 고심했다. 하지만 지방 향촌의 유력자에게 덕행과 학문이 뛰어난 자를 정계에 천거하도록 한 ‘향거리선(鄕擧里選)’의 추천제가 제도화되었을 뿐 민(民)에 의한 정치가의 직접선출(선거)이란 관념은 왕조사회에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층민에 대한 양반지도층의 철저한 통제와 지배가 있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요점은 이상적 정치제도나 정치운영에 대해 논할 때 우리가 ‘선거’라는 한 가지 쟁점에 매몰되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가령 정치가의 선출은 고사하고 조선에는 동아시아에서 그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엄격하고 잔혹한 노비제가 있었다. 부모 한쪽이라도 노비면 후손 대대로 노비가 되어 모든 세대마다 노역에 종사토록 한 종천제(從賤制)나 세역법(世役法), 도망간 사노비를 추적하는 데 국가공권력을 동원했던 추쇄법(推刷法) 등이 법전에 명문화되어 인구 절반 이상의 천민을 세습시켰던 곳은 동시대 한·중·일을 비교할 때 조선이 거의 유일했다.
   
   잘 알려져 있듯이 그리스 아테네의 민주주의도 철저한 노예제 사회에 기초했다. 은광 채굴에 투입되었던 상당수 노예들이 아테네 경제력을 담당했으며 지중해에서 수백 년간 지속된 폴리스 간의 치열한 살육전을 통해 아테네인은 전리품으로서 수많은 노예를 충당했다. 일반 자유민에 대한 정치권한을 ‘추첨’을 통해 실질적으로 우대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아테네가 귀족 및 중간층의 기보병 부대에 이어 해상 전투를 담당할 도시 자유민의 군사력 확보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공간을 달리한 조선에서든 아테네에서든, 우리는 과거로부터 정치제도에 대한 어떤 완벽한 모범답안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우리 시대에도 부족하지만 여전히 의미있는 중요한 정치적 통찰들, 이념을 현실 속에 제도화하면서 그들이 겪었던 파행과 갈등을 살펴보고 그 원인을 반면교사 삼으면 된다.
   
   조선의 정체(政體)는 군주정(君主政) 혹은 왕정(王政)이다. 전자가 특정 왕실의 세습군주를 정치 주체로 본 것이라면, 후자는 군주이면서 성인인 이상적 정치지도자(철인왕)가 왕도정치를 편다는 윤리적 의미까지 함축한다. 신종 유교국가 조선을 건립한 지식인들, 정도전·조준 등은 군주정을 수용했지만 정치 운영은 뛰어난 지식인 관료가 전담해야 한다고 믿었다. 정도전의 ‘조선경국전’과 ‘경제문감’에 반영된 총재론(冢宰論), 재상 중심의 국정운영론은 유교지식인에게 정치·경제·군사·재정의 모든 권한을 위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국공신 조준도 재상이란 임금의 다음 지위지만 임금과 천위(天位)를 함께 나누고 천공(天工)을 대신하므로 함부로 대할 수 없다고 보았다.(‘高麗史’ 列傳 31, 趙浚) 개혁파 동료 윤소종도 마찬가지다. 군왕의 자리는 천위이고 백성은 천민(天民)인데 임금이 가진 명기(名器)와 관작(官爵)은 하늘의 소유이므로 군왕이 사사롭게 다룰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高麗史’ 列傳 33, 尹紹宗)
   
   군주정에서 왕의 권력을 상징적 권위에 가두려고 한 사대부들의 정치 운영은 결국 태종·세조의 무력에 의한 정변과 쿠데타를 불러일으켰다. 이성계만 해도 정도전이 작성한 국왕 수교를 통해 천직(天職)을 재상과 함께 다스린다는 점을 인정했다.(태조실록 4년 4월 24일) 초기 법전인 ‘경제육전’도 의정부 중심 육전 체제를 고수함으로써 “정권이 재상에게 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본 정도전의 정치 감각을 공유했다.(경제문감·상권) 그러나 태종은 정사를 홀로 감당하겠다고 자청하면서, 하륜의 발의를 통해 의정부서사제를 위축시키고 육조 업무를 왕에게 직접 보고토록 한 육조 직계제를 강행했다.(태종실록 14년 4월 17일) 세조도 모든 명령 계통을 일원화해서 한 사람(왕)에게 명령을 듣도록 하는 정치의리를 펼쳤다.(세조실록 7년 6월 23일) ‘경제육전’ ‘속육전(續六典)’ ‘속대전(續大典)’ 등 여러 법령이 차례로 개편되면서 ‘경국대전’ 편찬사업이 세조 때 속행된 것도 결국 왕권강화를 위해서다. 왕실 업무를 관장하는 이조(吏曹) 부서들,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 언론과 감찰을 맡은 사간원·사헌부, 수도 및 도성 방위를 맡은 군영아문(軍營衙門)이 직계권(直啓權)을 갖고 국왕에게 직속되었다.
   
   ‘경국대전’은 왕권과 재상권을 둘러싼 건국 이후 백 년간 정치 투쟁의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 강력한 왕권강화에도 불구하고 법전에서는 백관(百官)을 통솔하며 온갖 정무(政務)를 담당하는 재상의 막강한 권한을 명시했다. 더구나 ‘경국대전’이 최종 완성된 1485년, 성종은 기득권을 독점한 훈구공신 및 대신을 견제하기 위해 신진관료로 구성된 대간(臺諫)제도를 활성화했다. 홍문관마저 언론기관으로 만들어 사헌부·사간원·홍문관 삼사(三司) 관료가 모두 고관대작을 감찰·탄핵하도록 했다. 사실 정도전이 ‘경제문감’에서 고려한 것이 바로 왕권(王), 재상권(冢宰), 언론권(臺諫) 간의 권력견제와 균형이었는데 이런 정치 구상이 몇 세대를 지나 현실화된 것이다. 군사력을 독점한 태종조차 대간(臺諫)의 반대가 너무 심해 관직을 제수하는 임금의 명령이 용납되지 않는다고 개탄했을 정도다.(태종실록 11년 4월 14일) 정5·6품의 이조전랑(吏曹銓郞)과 이들이 천거해서 선발한 삼사(三司) 관리들은 고위공직자 인사적부심제인 ‘고신서경권(告身署經權)’을 독점하면서, 조선의 공직사회에 막강한 정치권력을 행사했다.
   
   대소(大小) 신료 간의 권력견제 장치로 고안된 대간제도는 점차 왕의 통제마저 벗어났다. 언관(言官)의 발언 수위는 대신을 사람 행실을 못하는 자(不人), 간사한 귀신(奸鬼), 아첨꾼 등으로 묘사한 정도를 넘어 빈번히 극형에 처할 것을 주장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연산군 3년 7월 21일, 정6품 정언(正言) 조순(趙舜)은 30세 나이로 70이 넘은 전직 영의정 노사신(盧思愼)을 공격하며, 죽여도 시원치 않을 노사신의 ‘인육을 먹고 싶다(欲食其肉)’는 표현까지 서슴지 않고 내뱉었다. 노사신이 젊은 언관들을 비판하며 이들이 공경 대신뿐만 아니라 이제 왕까지 능멸한다고 주장한 것이 빌미가 되었다. 연산군은 “선왕께서 유생을 벌주지 않았기에 이렇게까지 왕을 능멸하는 풍속이 생겼다. 일마다 모두 의견을 수렴해서 처리한다면 임금의 권한이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라고 불만을 토로했다.(연산군 1년 1월 30일) 대간제도를 옹호한 부친 성종조차 회의를 표명했다. “대간이 들어가라고 하면 들어가고 대간이 나오라고 하면 나온다면 어찌 이것이 임금의 체통이겠는가!”(성종실록 23년 12월 25일), “지금은 대신과 대간이라는 두 마리 호랑이가 서로 싸우는 격이니 참으로 불미스럽다.”(성종실록 25년 5월 5일) 왕권이 최고로 강화된 숙종 때도 중국 명나라 조정은 “조선 왕의 세력이 미약하고 오히려 신료가 강성하다”고 평가했다.(숙종실록 1년 윤 4월 29일)
   
   여말선초의 사대부, 조선 초기의 훈구세력, 성종·중종의 비호로 정계에 진출한 사림파 지식인까지 이들에게는 차이점보다 더 중요한 공통점이 있었다. 중국 왕조처럼 이민족의 침입과 전란으로 완전히 세대가 단절된 경우가 없었기에 조선 지식인들은 대대로 쌓인 문벌을 자랑하며 권세를 누렸고 왕권에도 결코 주눅 들지 않았다. 원나라를 세운 몽골이 남송을 무너뜨리고 중원을 차지했을 때 그토록 화려했던 송대 사대부의 위상은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바닥에 떨어졌다. 몽골 정복군의 포로가 되거나 노예로 전락한 사대부들은 창기(娼妓)보다 못하고 거지(丐)와도 같은 사회의 가장 무능력한 존재로 간주되었다. 어렵게 주자학을 원제국의 관학으로 등극시켰지만, 이들의 주자학은 더 이상 정교한 학문이나 원대한 치국방략이 될 수 없었다. 중앙에서는 관리 진출을 위한 고식적 제도로, 재야에서는 이민족과의 긴장 속에 저항을 위한 과도한 실천윤리학으로 그 성격이 편향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훈구·사림에 관계없이, 심지어 정약용처럼 유배의 처지에서도 사족(士族)이라면 누구나 새로운 국가 체제를 구상했고 중앙의 정치권력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정조의 총애를 받고 왕권강화를 위해 뜻을 함께했다고 알려진 정약용도, 정조가 사대부를 존경하지 않고 사인(私人)으로 삼는 것에 반발, 규장각과 초계문신제도를 없애라고 주장했다.(‘경세유표’ 春官禮曹, 弘文館) 이것은 영조·정조가 왕권강화를 위해 군사(君師)를 자처하면서 사대부의 권력을 중앙에서 일률적으로 통제하는 탕평 논리를 구사했기 때문이다. 특히 정조는 사대부가 국왕을 가르치던 경연(經筵)을 무시하고 대신 자신이 만든 새로운 경사강의제(經史講義制)를 내세웠다. 이것은 정치 일인자인 국왕이 학자가 되어 지식인 관료를 가르친 일종의 중앙공무원 재교육 시스템이었다. 정조는 유학의 학문적 권위자를 자처하면서 정치권력을 독점하려고 했다. 1920년대 식민지 지식인 안확(安廓)이 ‘조선문명사’에서 지적했듯이, 영·정조시대 국왕의 권력 독점은 왕권과 신권, 사대부 정파 간의 미묘한 권력균형을 깨뜨림으로써 조선왕조의 운명을 재촉하는 계기가 되었다. 화려한 미사여구로 장식된 탕평 정치는 일인자의 사망 이후 권력을 특정 가문에 몰아주는 19세기 세도정치로 귀결되고 만다.
   
   이질적인 학파를 모집단으로 해서 성립된 조선 중·후기의 붕당(朋黨)은 이념을 달리한 오늘날의 정당이며, 이들 간의 치열한 정치 투쟁은 입법·사법·행정의 서구식 삼권분립과는 다른 형태의 권력 균형과 견제 논리를 창출했다. 왕과 사대부, 사대부 간의 첨예한 경쟁과 경합으로 점철된 조선의 정체(政體)는 결코 민주정이 아니었다. 조선은 소수 엘리트 중심의 관치(官治)사회이며 유교지식인들은 사회구성원 간의 위계와 서열이 명백히 나눠져야 국체(國體)가 유지된다고 믿었다. 이들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할 수는 없다. 그들은 적어도 인간과 권력의 속성에 대해 심사숙고했고, 정치권력의 집중과 부패를 막기 위한 실효성 있는 방책을 모색했으며 자신들의 의지를 법전으로 제도화했다.
   
   이제 우리에게 되물어보자. 우리가 염원하는 민주정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진정으로 민주주의를 원하고 있나. 왜 아직도 우리는 제왕학, 최고경영자의 리더십과 카리스마를 동경하며, 누구도 2인자를 기억하지 않으려는 무의식적 욕망을 갖고 있을까. 이 점에서 민주주의에 응답해야 하는 것은 조선 지식인이라기보다 우리 자신이다. 서양에서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아테네 민주정을 다수에 의한 독재로 보고 신랄하게 비판한 이래 많은 지식인들이 민주주의를 거부했다. 18세기 미국 헌법의 초안자들도 자신의 사유재산 보호를 위해 민주정을 회피하고 로마 공화정(共和政)의 정치 전통을 따랐다. 글자 그대로 민중 모두가 주인이 되는 그날을 원치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헌법에 ‘민주공화정’이라고 명시된 오늘날 대한민국의 정체(政體)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고 믿는 것은, 마치 왕조 사회에서 권력찬탈을 평화로운 정권 교체인 선양(禪讓)이라고 공표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 아닐까.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의 초보적 감각을 인정하면 조선 유학의 정치 논리에도 여전히 숙고할 만한 점이 있다는 것을 돌아보게 할 것이다.

 

 

주자학 경계를 넘어 군신의 경계까지 흔들다

 (주간조선 2013.04.15)

철인왕국의 기획자 정도전

 

▲ 정도전

1388년 유명한 사건 하나가 발발한다. 요동 정벌에 나선 고려의 무장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한 것이다. 이 사건은 왕조의 운명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여말선초(麗末鮮初)로 알려진 격동의 14세기, 한반도는 친원(親元)정책에 급급한 고위층 정치가, 사장학(詞章學)에 빠져 현실성을 잃은 낡은 유학, 낯 뜨거울 정도로 세속화된 불교가 혼재했다. 마지막 몸부림처럼 반짝하고 명멸한 공민왕의 짧은 개혁과 뒤이은 죽음은, 권문세족의 횡포에 지친 젊은 지식인들을 격분시켰다.
   
   공민왕의 유교 부흥과 성균관 개혁의 바람을 타고 정도전은 30세(1371년)에 성균박사와 태상박사의 지위에 올랐다. 스승이자 절친한 선배인 이색·이숭인·정몽주가 그를 천거했다. 그러나 3년 뒤 공민왕이 암살되고 우왕이 즉위하며 친원파가 득세하자 의협심에 불탄 정도전은 원의 사신 접대 문제로 마찰을 빚고 전라도 나주 거평부곡에 유배된다. “예부터 사람은 한 번 죽을 뿐이니 살기를 탐하는 것은 편치 않은 일이다.(自古有一死, 愉生非所安)” 정도전은 ‘감흥(感興)’이란 오언시를 읊으며 유배 길에 올랐다.
   
   9년의 긴 유배를 마치고 집터가 있던 개경 삼각산으로 돌아왔지만 그를 미워한 고위관리 때문에 쫓겨났고, 부평부의 남촌으로, 다시 김포로 도망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1382년 함주(咸州) 막사로 이성계를 찾아간다. 이성계는 왜구 토벌로 명성이 높았으며 당시 동북지방의 방위책임자로 있었다. 신국가 건설을 기획한 지식인 정도전과 용맹한 장수 이성계의 극적 만남이 조선 건국을 찬양한 ‘용비어천가’에 전해진다.
   
   막강한 군사력을 등에 업은 젊은 지식인의 개혁안은 순풍에 돛 단 배처럼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위화도 회군 후 본격적으로 합세한 이성계와 정도전 일파는 우왕·창왕을 폐위시키는 일에 착수했다. 공양왕을 후사로 세운 뒤 이들은 땅주인들이 갖고 있던 전국의 토지문서를 불태우고 중앙 정부 관제를 개편하는 등 자신들의 정치 구상을 재빠르게 실행에 옮겼다. 그리고 정몽주가 살해되자 곧바로 이성계를 추대해 왕으로 올리는 ‘역성(易姓)’ 혁명을 감행했다. 1392년 7월 17일이었다. 475년간 존속한 고려왕조는 공양왕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무혈혁명으로 알려진 이날의 왕조교체는 정도전·조준·남은 등 조선의 개국공신이 공양왕을 찾아가 옥새를 요구하고 ‘선양(禪讓·천명을 받은 자에게 평화적으로 왕위를 물려주는 것)’을 공표한 것으로 끝을 맺었다.
   
   정도전과 개혁파에 대한 사후 평가와 관계없이 조선 건국은 오늘날 역성혁명으로 기억된다. 역성혁명의 경전적 근거는 중국 고전 ‘맹자’에서 찾을 수 있다. ‘맹자’ 양혜왕의 ‘군주시해’ 사건, ‘맹자’ 진심(盡心)의 ‘군주방벌론’이 그것이다. 제선왕은 신하인 탕(湯)과 무(武)가, 천자(天子)로 모시던 걸(桀)과 주(紂)를 살해한 사건에 대해 의혹을 제기했다. 맹자는 인의(仁義)를 저버린 평범한 남자(匹夫)를 죽였을 뿐 군주를 시해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고 변명했다. 한편 제자 공손추가 어질지 못한 군주를 방벌(放伐)할 수 있는지 물었을 때 맹자는 이윤 같은 현명한 신하가 잔악한 군주를 방벌할 순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권력의 찬탈이라고 일축했다. 분분한 해석을 낳은 맹자의 발언은 비도덕적 군주를 내쫓거나 죽일 수 있는 명분으로 활용되었다. ‘맹자’를 접했던 정도전과 개혁파들도 역성혁명의 논리와 가능성을 타진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혁명이 그렇듯이 ‘역성혁명’이란, 왕조를 교체할 수밖에 없을 정도의 불가피한 상황에서 초래된 필연적 사건이란 점을 사후에 정당화한 표현이다. 혁명으로 불리는 모든 역사적 사건들은 기본적으로 권력의 찬탈이자 일종의 쿠데타다. 그것이 혁명인지 아닌지는 이후의 역사가 판단할 뿐이다. 정도전 일파의 왕조교체는 당대에 역성혁명으로 포장된 쿠데타였고, 자신들이 세운 공양왕의 권력을 찬탈한 것이었다. 정도전은 현실 군주까지 포함시킨 ‘경제문감·별집(經濟文鑑·別集)’의 군주품평(君道)에서 주문공(朱子·주희)의 ‘춘추의리’를 빌려 우왕·창왕을 논죄했다. 공민왕이 후사가 없으면 종실 친족 중 한 명을 뽑아 계승해야 했는데 근본 없는 신돈의 자식을 양육해 후사로 삼았으니 이것이야말로 주자가 강조한 정통론·대의명분론에 어긋나는 행위라는 것이다.
   
   어떤 왕조를 정통으로 간주할지의 역사인식론, 군신 간의 충절과 의리를 강조한 대의명분론은 중국이 여진족 금(金)의 침략 때문에 남송(南宋)으로 내몰린 정치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이민족의 침입으로 국토를 상실한 남송의 한족(漢族) 지식인들은 무력에 의한 왕조교체나 권력찬탈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주희도 이런 시대 분위기에서 이른바 ‘촉한(蜀漢)’ 정통론을 주장했다. 이것은 삼국시대의 실력자인 위나라 조비(曹丕)를 권력의 찬탈자로, 후한(後漢) 헌제(獻帝)의 계승자인 왕실의 친척 유비(劉備)와 그의 촉나라를 정통왕조로 인정한 주자학적 대의명분론을 말한다. 구양수나 사마광 등 북송시대 지식인만 해도 위나라를 정통으로 인정한 반면 남송의 주희는 촉한만을 정통으로 간주했는데, 정도전은 ‘경제문감·별집’에서 주희의 ‘촉한’ 정통론을 따랐다. 이것은 정도전은 공자의 정명론(正名論)에서 연원한 대의명분론, 즉 군신·부자·장유의 사회적 위계질서와 도덕적 역할을 인정한 것을 의미한다.
   
   정도전은 주희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뿐만 아니라 호안국의 ‘춘추호전(春秋胡傳)’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호안국은 군주와 아비를 높이고 난신적자(亂臣賊子)를 토벌하는 것을 ‘춘추의리’로 삼았다. 정도전은 1391년 공양왕에게 올린 상소문에서 호안국을 인용하며 신돈의 자식인 우(禑)와 창(昌)이 왕씨의 왕위를 찬탈한 고려왕조의 대역죄인임을 역설, 난신적자를 토벌할 것을 주장했다.(‘三峰集’ 3권 上恭讓王疏) 그런데 자신이 내세운 춘추의리론이 무색할 정도로 이듬해 공양왕 폐위사건을 일으켰을 때 정도전은 권력찬탈을 정당화했다. 공양왕이 보위(寶位)에 올라 겨우 왕씨의 나라를 보존했는데 유신(維新)의 정치를 도모하기는커녕 충직한 신하와 선량한 사람을 해쳐 천심(天心)을 이반함으로써 스스로 필부로 전락, 왕씨의 제사를 끊어버렸다는 것이다.(‘경제문감·별집’) 이것은 맹자의 군주필부론을 개혁파의 정변 논리로 이용한 것이다. 맹자가 주창한 왕도정치론, 인의예지설, 성선설 등은 송대 지식인의 인간관과 사회관에 중요한 논거를 제공했다. 그러나 사마광·소식·장구성 등 상당수 북송시대 유학자들이 그런 것처럼 주희도 맹자의 역성혁명론에 위화감을 느꼈다. ‘맹자’의 군주시해에 대한 주희의 발언을 살펴보면, 질문 당사자인 제후를 경계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 신하를 추동하려는 말이 아니라고 본 것을 알 수 있다.
   
   왕조 교체와 권력 이양에 민감했던 주희는 군신 간의 대의명분을 훼손하는 정치행위를 극도로 경계했다. 여말선초의 정권 교체는 주희 시선에서 볼 때 권력찬탈로 간주될 만한 사건이었다. 정도전은 주희의 명분론을 공유하여 군신의 위계질서를 인정하면서도, 군신의 서열과 분계를 넘어서는 지식인의 도덕적 우월성과 이에 따른 권력 공유(共有)의 정치적 정당성을 강조했다. 무장이 아닌 학자로서 왕조를 전복시킨 모험을 감행한 것도 이 같은 신념의 소산일 것이다. 이 점에서 정도전의 정치 감각은 주희와는 사뭇 달랐다. 그는 “한(漢) 고조(古祖)가 장자방(張子房)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한 고조를 쓴 것이다”라며 조선 건국에 대한 자신의 소회를 밝힌 적이 있다.(‘鄭道傳來記’) 이성계에 대한 자기 속내를 드러낸 것이다. 정도전은 왕정(王政)에서 왕위세습이야 어쩔 수 없는 한계 상황이지만, 실질적인 권력 운영은 최상의 유능한 인재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믿었다. 흔히 ‘총재(冢宰)’ 중심론으로 알려진 정도전의 국정운영론이 재상을 최고의 권력집행자, 즉 군사·행정·예산의 총괄책임자로 상정한 것도 이 때문이다. 단순히 국왕을 보좌하는 것을 넘어 국정운영 전반을 통제·조율하도록 정부조직을 입안했던 데서 사대부의 정치역량에 대한 정도전의 전폭적 지지와 기대를 읽을 수 있다.
   
   물론 정치현실은 정도전이 구상한 이념적 상황과는 달랐다. 사병(私兵)혁파에 반발한 태종 이방원의 반격과 암살, 왕권강화가 보여주듯이 사대부들은 무력을 독점한 왕권의 전횡을 견제하지 못했다. 이처럼 왕권이란 단순한 상징적 권위에 가둘 수 없는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정도전의 정치구상을 음미하는 것은 지식인의 이념적 지향 때문이다. 국가란 공공(公共)의 것임에도 세습 왕조에서는 국가를 왕실의 소유로 간주, 최대의 사가(私家)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 점은 조선시대 형법의 기초가 되는 ‘대명률직해’의 형률조항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나라를 훔치는 대역죄나 모반죄를 일반 도적죄와 동일한 항목에서 취급한 것이다. 역모죄를 왕실의 소유물을 훔치는 도적행위로 간주하던 풍토에서 정도전은 왕권을 공적(公的) 권력의 상징, 도덕적 인격의 화신으로 한정할 필요가 있었다. 이 점이야말로 정도전 일파의 권력찬탈이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지 재고하도록 하는 중요한 정치적 변수가 된다.
   

▲ 동궐도


   과연 정도전의 신국가 건설 기획은 국가적 공공성을 얼마만큼 제고시켰을까? 우리가 급진개혁파의 왕조 교체를 미완의 혁명으로나마 간주할 수 있다면 그것은 권력운영의 공공성 확보에 달려 있다. 고려는 당률(唐律·당나라의 법령)에 따라 삼성육부(三省六部) 체제로 운영되었는데, 특히 귀족적 의사협의체인 도평의사사가 그 중심에 있었다. 고대 중국의 이상적 관제(官制)인 주관(周官)을 기록한 유교경전 ‘주례’가 오래전부터 주목받았지만, 고려의 중앙관제는 주관과는 거리가 멀었고 일정한 형태의 법전도 없었다. 고려 말 개혁파들은 중앙관제를 새롭게 정비하기 위해 ‘주례’의 육전(六典·治典,賦典, 禮典, 政典, 憲典, 工典) 체제를 도입했고, 중앙부서뿐만 아니라 포괄적인 법전까지 마련했다. 중국에서 육전 체제를 처음 반영한 것은 ‘당육전(唐六典)’인데 이것은 중앙 직제(職制)만 규정한 것으로 형률이 포함되지 않은 미완의 작품이다. 북송시대 왕안석의 신법도 ‘주례’에 근거한 법전 편찬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원나라 때 황제의 조칙(詔勅)을 반영한 ‘경세대전(經世大典)’(1331년)이 만들어지면서, 육전 체제를 바탕으로 재상의 역할, 황제의 위상을 기록한 첫 법전이 등장했다. 정도전의 사찬서(私撰書)인 ‘조선경국전’(1394년), 공동편찬한 조선 최초의 법전 ‘경제육전(經濟六典)’(1397년)도 원나라 ‘경세대전’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육전 체제의 기본구성, 재상 중심의 관제(官制)만을 언급한 ‘주례’에 국왕의 지위·역할까지 함께 첨가했다는 두 가지 성격만 같을 뿐, 원나라와 조선의 법전은 서로 그 내용이 상이했다. 따라서 ‘경제육전’ 및 ‘경국대전(經國大典)’(1485년)의 기초를 마련한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은 조선의 국가체제와 독자적 이념을 담은 가장 기본적인 법전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경국전’의 총론(總論)은 국왕의 이상적 지위와 성격에 대해 규정하고 있다. ‘주례’의 재상론(宰相論)과 달리 국왕의 지위를 구체적으로 기술했다는 점에서, 이 저작은 군주와 재상의 공치(共治), 상보적 정치운영을 주장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군주를 천리(天理)를 실현한 내성외왕(內聖外王)의 도덕적 인격자로, 재상을 실무적 관료의 대표자로 설정함으로써 정치의 이념과 현실을 모두 갖추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정도전의 국정운영을 단순히 재상 중심의 ‘신권(臣權)’ 강화책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국왕의 지위를 초월적 자리에 남겨 두지 않고 구체적으로 기술했던 것은, 달리 보면 왕조사회의 절대자인 국왕의 위상을 제한했다는 말과도 같다. 국왕은 절대권력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도덕적 인격을 구현해야 하고, 아직 그런 성인의 인격에 이르지 못했다면 현인(賢人) 재상과 학자관료의 제왕학수업(書筵·經筵)을 의무적으로 받아야 하는 유한한 존재로 그려졌다. 정도전이 ‘경제문감’ ‘상업(相業)’에서 군주의 마음을 바로잡는 재상의 격군(格君) 역할을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바르게 해서(正己) 임금을 바로잡고(格君), 인재를 등용하여(知人) 온갖 실무를 잘 처리하는(處事) 것을 재상의 핵심과업으로 삼았다.
   
   ‘조선경국전’ 치전(治典) 총서(總序)에서 정도전은 총재만이 백관을 지휘하며 만민을 다스릴 수 있기에, 군주의 역할은 재상 한 사람을 선발하는 것에 달려 있다고 했다. 임금의 직분이 재상을 뽑아 전권을 위임하는 것이라고 본 것은, 조선시대 맹위를 떨친 군주무위(無爲)정치론과 재상위임통치론을 연상시킨다. 총론(總論) ‘정보위(正寶位)’에 따르면 국왕의 자리는 만물을 낳고 기르는 세계의 근원적 힘(天地生物之心)을 덕(德)으로 삼고 인(仁)을 구현하는 자리다. 하지만 주자학의 우주론으로 치장된 이런 보위에 걸맞은 현실군주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한편으로 정치실무를 담당할 재상을, 다른 한편으로 도덕성과 공공성의 담지자인 군왕을 내세웠지만, 정치실무뿐 아니라 도덕성조차 사대부에 의존해야 하는 것이 세습왕조의 군주다. 이 때문에 정도전은 재상 중심의 국정운영만이 왕권의 자의성을 막고 국가적 공공성을 제고할 효과적 전략이라고 믿었다. 정치 공공성에 대한 정도전의 집요한 관심은 대관(臺官)과 간관(諫官), 오늘로 치면 검찰과 언론을 독립시켜 국왕 및 정치인에 대한 감찰·탄핵·간쟁이 가능한 정치체제를 구상하게 했다. 정변으로 시작된 정도전의 정치기획이 과연 얼마만큼의 혁명적 의미를 창출했는지는 공적 국가 구상에 관한 그의 공헌을 어떻게 평가할지에 달려 있다.
   
   국가법전의 기초를 마련한 정도전의 ‘조선경국전’과 ‘경제문감’은 성인 군주, 다시 말해 철인왕(哲人王)을 국가의 수장으로 상정했다. 도덕적 완성자가 일국의 통치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여말선초 사대부들이 받아들인 주자학의 이념적 지향이었다. 주희는 ‘대학장구’ 서문에서 하늘은 똑같은 인의예지의 본성을 주었으니 누구라도 자기 본성을 다 실현할 수 있으면 백성의 군사(君師·군주이자 스승)가 되어 요순 같은 성왕(聖王), 즉 철인왕을 이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귀족 자제들만 읽던 ‘대학’이란 경전을 대인(大人)의 학문, 즉 보통 사람 누구든 배워 익힐 수 있는 보편적 텍스트로 전환시킨 주희의 공로였다. 이런 세계에서 세습 군왕과 지식인 관료 사이의 위계질서란 도리어 작위적 구분이 아닐까? 조선 건국을 도모한 정도전은 군신을 막론하고 누구든 최고의 도덕적·정치적 인재가 국정운영과 권력의 향배를 결정해야 한다고 보았다.
   
   찬탈이냐 혁명이냐의 위태로운 경계를 넘나든 철인왕국의 지도자 정도전은 어떤 면에서는 주자학 이념을 한계까지 밀어붙인 장본인이다. 주자학의 이상을 좇다가 결국 주자학의 경계를 넘어선 것이며 이로써 조선유학에만 가능했던 사유실험을 감행했다. 주희는 누구나 군사가 될 수 있다고 했지만 생의 마지막까지 군신의 엄격한 위계를 고수했다. 방대한 중국제국에서 지방향촌의 문인 관료에 머물 수밖에 없던 남송 이후 대다수 지식인들은 황제 권력과의 경계를 넘나드는 위험을 감수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조선 건국의 주체들은 중앙의 정치 일선에서 군주를 훈도하고 견제하며 유교적 철인왕국을 수립했다. 여기서는 규모의 적정성, 즉 사상과 이념을 실험하기 위한 최적의 지리적 조건이라는 조선 특유의 상황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강대국 변방에 처한 지정학적 조건 때문에 일정한 사유 경향을 갖듯이, 적정 규모의 국가 형태는 유학 이념을 극적으로 실현하기 좋은 물리적 여건을 제공했다. 불교와 전면전을 벌이며 새로운 인간상·인륜공동체를 구상하고, 유교적 소양의 관료를 흡수할 정부조직과 법전을 정비하고, 한양 수도 건설사업에까지 뛰어든 전방위지식인 정도전이 가능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한편으론 위태로웠지만, 이것은 조선유학이 스스로 변신하며 현실 생명력을 이어간 탁월한 조건이 되었다

 

조선 유학은 혁명이고 건국이념 중국의 아류가 아니었다

 (주간조선 2013.04.01)

왜 다시 유학인가_ 조선 유학으로 들어가는 문

 

▲ 중국 난징의 공자상

유학은 아직도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에게 조선시대의 철 지난 풍속, 삼강오륜의 경직된 윤리규범을 상기시킨다. 우리 것이 좋다고 무조건 선양하는 것이 아닌 한 왜 다시 옛날 일을 거론하느냐는 것이 통념이다. 이것은 나를 포함해서 지나가다 우연히 만난 어떤 여성에게라도 다음과 같이 질문하면 금방 확인할 수 있다. “당신은 조선시대에 여자로 태어나서 살고 싶은가?” 아마도 대다수 여성들이 고개를 가로저을 것이다. 이게 유학의 현주소다.
   
   왜 우리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유학의 사유를 탐색하려는 것일까? 과거로의 지적 여정이 미래를 위한 자원이 아니라면, 더구나 그것이 우리의 삶을 보다 자신 있고 당당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과거의 유산 때문에 골머리를 앓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는 달라도 사람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는 점, 이것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옛일을 돌아보게 하는 원초적 이유다. 역사의 구조와 논리는 반복되는데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비슷한 실수를 되풀이한다. 더구나 일대 문명의 전환기, 역사의 극적인 터닝 포인트라고 한다면 이것은 더 심각한 문제가 아닐까?
   
   이제 바야흐로 정치·경제·문화의 세계적 중심축이 지난 세기의 대국 미국으로부터 중국으로 선회 중이라고 많은 사람이 전망하고 있다. 인민폐의 위력이 십여 년 사이 달러화를 능가할 것이라는 경제 전망은 물론이려니와 민주주의·자유주의에 기반한 서구식 정치 권위에 대해서도 동양의 전통사유를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강력히 일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중국의 유학사상이 집중적인 조명을 받고 있다. 오늘날 중국에서 유교 혹은 유학은 문화 보수주의 사상으로 간주된다. 이미 1966년 이후 문화혁명의 거센 회오리바람을 겪고, 1980년대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경제)만 잘 잡으면 된다)’이 회자된 이후 자본주의 시장논리조차 주저 없이 활용해 온 중국 상황에서 볼 때, 유학은 여전히 보수적 가치와 신념을 견지한 사유 체계로 간주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모든 구악(舊惡)의 상징이요, 봉건주의의 화신인 ‘공가점(孔家店)’을 타도하자던 젊은 홍위병들의 격렬한 유학 비판은 어쩌면 아직도 중국 지성인들의 뇌리를 자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오늘날 중국의 신자유주의, 신좌파 등 첨예한 현대사유의 동향에서 볼 때 이들의 유학 전통은 어쩔 수 없이 보수적 좌표 안에 들어가는 것으로 규정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미 십여 년 전부터 유학에 대한 중국의 사회적 관심과 안목은 예전과 확연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2002년 11월 중국인민대학에서 공자연구원을 창설하면서 성대한 개막식을 개최한 적이 있다. 당시 개막식에는 중국공산당 핵심간부뿐만 아니라 해외의 수많은 유력인사들이 방문했고, 공산당 이론지의 하나인 광명일보(光明日報)를 통해 중화민족의 영원한 정신을 상징하는 유학사상을 극적으로 선전하기도 했다. 이듬해인 2003년 전국 500만명 이상의 중국 가정이 참여한 호남성의 ‘전국아동경전송독회(全國兒童經典誦讀會)’도 세간의 큰 관심을 불러 모았으며, 중국유교협회를 중심으로 전통적 교육공간인 서원을 재창건하고 활성화하려는 움직임도 일었다. 유교경전을 암송하고 이해하는 전통 교과목들이 정식으로 중국 교육계에 수용되면서 정부 차원을 넘어 민간에서도 적극적으로 유학에 접근하는 다양한 현상이 발생했다. 광명일보의 중화정신 선양에 뒤이어 2004년 중국청년보(中國靑年報)에서도 당대 지식인들의 ‘갑신문화선언’을 대서특필하면서 앞서와 유사한 주장을 피력했다. 선언문에서는 서양의 개인주의·이기주의·물신숭배·악성경쟁을 비판하고, 이를 극복할 만한 대안으로 중국전통의 윤리성·이타성·인격성을 강조했는데, 이러한 사상자원을 당연히 자신들의 유학사로부터 찾았다. 이 같은 중국의 최근 사회 분위기는 유학과 한참 거리가 먼 급진사회주의 또는 신자유주의 계열의 중국 지식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유학 전통을 돌아보게 만들고 서양과 대결할 만한 중국의 전통모델을 모색하도록 추동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경우는 과연 어떤가? 2007년 공영방송 KBS는 아시아 문명기획 ‘인사이트 아시아’라는 다큐멘터리를 몇 차례 내보낸 적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유교, 2500년의 여행’이라는 작품인데 방송 이후 ‘유교, 아시아의 힘’(예담출판사·2007)이라는 책으로도 출간되어 주목을 받았다. 2012년에도 수많은 학회에서 조선시대, 유학, 공공성, 공동체, 전통윤리와 교육 등 조선의 유학사상 관련 주제어와 테마가 온갖 학술 심포지엄과 포럼, 강연회장의 공공연한 쟁점으로 부상되었다. 이제 한국 사회에서도 한국 문화의 세계 전파, 국가경쟁력 강화 등을 등에 업고 한국의 전통사상, 특히 조선시대의 유학을 새로 보기 위한 지적 욕망이 일고 있다고 간단명료하게 정리할 수 있을까? 그러나 아쉽게도 이런 물음에 손쉬운 답변을 금방 내놓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상의 문제들이 복잡하게 뒤얽혀 있기 때문이다.
   
   우선 한국 사회에서의 유교 재발견이란 현상은 인접한 중국의 최신 동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강대국 중국의 정치·경제적 부상과 그들의 전통사상에 대한 관심에 편승해서 우리 역시 덩달아서 조선시대의 유학사상을 치켜세우는 것은 아닌지 자성할 필요가 있다. 서구 학문이 부흥하면 과거의 전통유산을 전근대적인 것으로 싸잡아 비판하고, 이제 서구가 점차 쇠락하는 듯하면 다시 문명의 전환기를 맞아 중국과 조선의 전통사상을 재조명해야 한다며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미 세계제국이었던 중국과 우리와의 관계는, 서양과의 얼마 되지 않는 백여 년의 시간을 뒤로하고 오늘의 우리에게 새삼스럽게 다시 귀환한, 천년 이상의 오래 묵은 과거를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사상적 측면에서 볼 때 대(對)서양 전략과 방책보다 대중국 전략이 우리에게 보다 더 세심한 주의와 반성을 요하는 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700년 이상을 거슬러 올라가서 고려가 한창 몽골제국의 정치적·문화적 지배를 받고 있을 무렵, 고려인 사이에서 몽골식 이름 짓기가 일대 유행이었던 적이 있다. 가령 고려 26대 왕인 충선왕은 원나라 쿠빌라이 칸의 딸이었던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가 어머니였다. 고려시대 실록 자료를 살펴보면 그가 자신이 몽골인의 피를 이어받은 것을 매우 자랑스러워하면서 ‘익지보례화(益知禮普花)’라는 몽골식 이름을 애용했던 것을 여러 대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 ‘보탑실리(普塔失里)’라는 이름의 충혜왕, ‘팔사마타아지(八思麻朶兒只)’라는 이름의 충목왕 등 어쩔 수 없는 정치적 역학관계에서 친원정책을 펼 수밖에 없었던 왕들뿐만 아니라 변방의 신흥 무장세력에서 발원해 새 왕조를 건립한 이성계 가문 역시 이러한 당시의 유행을 추종했다.
   
   조선을 세운 이성계의 조부, 부친도 모두 ‘패안첩목아(悖顔帖木兒)’ ‘오로사불화(吾魯思不花)’ 등 몽골 이름으로 개명하는가 하면 여·몽연합군의 대일본원정에 참여한 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삼았던 것이다. 말하자면 이미 수백 년 전 여말선초 때도 몽골제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화(글로벌스탠더드) 열풍에서 우리는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이다. 몽골 이름을 짓고 몽골로 유학 가고 몽골인과 혼인하고 급기야 대제국 몽골의 관료가 되거나 대학교수가 되는 것은 당대 지식인이 품을 수 있는 최고의 꿈이자 성공의 요건이었다. 최근 세계 기준이 된 아메리칸 스타일에 대한 요즘의 우리 감각도 과거를 돌아보면 결코 낯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점에서 보면 우리는 되돌아온 중국과의 관계에서 유학이란 문제를 보다 예민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강대국에 접한 우리의 지적 상태를 이와 같이 비관적으로만 볼 필요도 없다. 사상의 고유성, 오리지낼러티라는 것은 사실 존재하지 않으며 이러한 이념적 순정주의 혹은 근본주의에 대한 집착은 더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오히려 모든 사유는 접점과 변경지대에서 보다 창조적으로 재생산되고 재전유(再專有)된다.
   
   이 점에서 여말선초의 유학은 사유의 경계점, 사상의 임계점에서 만들어진 혼종적 성격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조선 유학은 한편으로는 중국 성리학(性理學, 주자학·朱子學)의 연장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만의 독특한 성향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제국과의 대면은 사대적이고 굴욕적인 정치 상황을 연출케도 하지만 달리 보면 가장 보편적인 세계정신, 즉 당대의 코스모폴리타니즘을 파급시키는 실제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고려 말에 성장한 신흥 관료지식인들(사대부·士大夫)은 제국의 경험, 즉 원나라가 전파한 세계주의에 공명하면서 고려의 오래된 권문세족들을 논리적으로 견제할 수 있었고 급기야 새로운 이상국가에 대한 그들의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조선 건국에 적극 가담한 사대부들은 중국의 새로운 유학(신유학), 즉 주자학을 수입해서 재가공한 뒤 구왕조를 무너뜨리는 이념적 무기로 활용한 것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중국 주자학과도 성격이 다른 조선 지식인들의 지적 성향과 욕구를 읽어낼 수 있다.
   
   중국 송나라 사대부들은 당대(唐代)에서부터 발달해온 과거제(科擧制)를 배경으로 중앙관계에 진출한 학자 관료들이다. 특권적인 신분세습제가 붕괴되고 구귀족들의 정치권력이 무너진 중국의 당송 변혁기 이후 이들 사대부들은 황제를 중심으로 중앙집권화된 중국의 정치질서에 공적인 관료로 선발되어 정계에 대거 진출했다. 또한 지방에 일정한 자작농을 소유한 중소지주층으로서 향촌의 경제운영과 교육정책 등에 깊숙이 간여한 지방관으로서도 활약했다. 이들은 전통적인 왕조국가에서 황제를 비롯한 어떤 권력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발언을 구사할 정도로 사대부로서의 지적 자부심과 자존감이 강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유교이념으로 무장한 일군의 사대부들이 스스로 정치 주체가 되어 왕조를 무너뜨리는 일에 집단적으로 가담한 경우는 거의 없다. 송대 이후 유교 지식인들은 중앙권력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황제권을 비판하는 등 권력비판에는 적극적이었지만, 여말선초의 정도전·조준 등에서 보듯 자신들이 전면에 나서 권력과 연합, 왕조를 바꾸는 역성혁명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원제국에서 수입해온 주자학을 공유하면서도, 조선의 지식인들이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중국에서 발원한 주자학을 변형시켰던 것을 알 수 있다.
   
   변방의 소국, 어찌 보면 조선이나 오늘의 우리는 강대국의 틈새에서 언제고 편안할 날이 없는 긴장의 연속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서양이 뜨면 서양을 좇고 어느새 문명의 전환기가 도래해서 중국이 뜨면 중국을 다시 좇아야 하는 피곤한 지적 운명이 변경(邊境)에 처한 우리의 불가피한 사상적 행보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강대국의 사상동향, 지적 패권의 자장(磁場)에 놓인 우리의 처지를 단순하게 평가할 수 없는 두 번째 이유는, 앞서 보았듯이 어떤 사상적 충돌과 접촉도 동일한 사유의 결과를 낳을 수 없기 때문이다. 조선의 유학, 조선 주자학을 단순히 중국 주자학의 아류나 속류로 폄하하는 것 자체가 이미 특정한 의도와 논리를 반영한 편향된 평가의 산물이다.
   
   다음 회에 말하겠지만, 중국의 유학은 한대(漢代)와 원대(元代)를 통해 드러나듯이 정부의 비호하에 관학(官學)으로 입성하면서부터 그 생명력을 잃고 당대의 정치권력에 복무하는 이데올로기로 변질되었다. 그러나 조선의 경우 주자학은 기존의 정권을 무너뜨리고 신국가를 건설하는 건국의 이념으로 기능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자기변신, 자기분열하면서 왕조사회의 최고권력(王權)을 겨누는 이념적 예봉으로 성장했다. 스스로 권력의 정점에 섰던 초기의 건국 사대부들, 그리고 권력의 칼에 맞선 조선시대 대다수 사대부들의 의식세계는 중국 지식인의 내면과는 상당히 달랐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지금 이 시점에서 조선 유학을 되돌아보는 것은, 반복되는 역사의 전환점에서 과거의 실책을 반성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왜 우리 자신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는지, 중국인도 일본인도 아니며 더구나 서구인도 아닌 우리 스스로의 자화상을 살펴보기 위한 것이다. 말하자면 조선 유학의 거울에 비친 오늘의 우리 모습을 반추하면서 스스로를 성찰하는 것이, 과거로 지적 여행을 떠나는 우리의 목표인 셈이다.
   
   지금 중국에서 유학의 재등장에 주목하는 새로운 사유의 탐색자들은 스스로 정치유학 혹은 제도유학을 자신들의 기치로 내걸고 있다. 이것은 과거 대만과 영미권의 유학 연구자들이 서양제국주의의 강력한 무력 앞에 무의식적으로 움츠러들면서 심성의 문제로, 내면세계로 침잠했던 자신들의 과거에 대한 사상적 반발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과연 유학의 정치적 변신 혹은 제도와의 강력한 결탁이 미래 세대의 새로운 전망, 그것도 서양근대사유에 대한 대안이 되리라고 낙관할 수 있을까? 사실 이 점은 중국의 사상적 변방에 놓인 우리만이 던질 수 있는 심각한 물음이다. 다시 한번 세계제국으로 변신하려는 중국은 유학을 자신들의 신중국모델, 서양에 내놓을 만한 정치사회적 대안으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우리 역시 불가피하게 중국의 사상조류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지만 이제 우리의 물음은 과거와는 달라져야 한다.
   
   유학에 새로운 생명을 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무엇이 이천 년도 더 지난 유학의 생명을 새롭게 복원시킬 수 있을까? 이미 정치화된 유학의 한계상황을 경험한 우리로서는 정치와 유학의 접속을 단순한 시선으로 낙관할 수만은 없다. 조선유학 수백 년의 역사 속에는, 이미 중국 유학과 중국 주자학의 전개에서 펼쳐진 유학의 권력화, 학문의 관학화가 초래한 사상적 경색에 대한 뼈아픈 자성이 담겨 있다. 유학은 오직 자기 스스로를 넘어섬으로써만이 새로운 시대에 부응할 만한 사상적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었다. 이제 조선 유학의 첫 관문으로 들어가면서 우리는 수백 년의 지속적 사유실험을 통해 갱생해온 조선 유학의 정신사를 엿보게 될 것이다. 과거의 오래된 사유의 자산들을 들춰내 햇빛 아래 내어놓고 이제 그 진면모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적절한 시점이 도래했다. 특정한 강대국의 발호에 맞서, 그리고 우리의 무의식적 사유경향에 저항하면서 자신을 재발견하는 조선 유학의 미로를 탐색해보자.

 

백민정
   
   ‘정약용 철학의 형성과 체계’로 연세대에서 박사학위. 저서로는 ‘정약용의 철학:주희와 마테오 리치를 넘어 새로운 체계로’ ‘강의실에 찾아온 유학자들’ ‘맹자:유학을 위한 철학적 변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