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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우리가 겪고 있는 불평등은 ‘새로운 현상’이다 (경향신문 2013-05-31 23:10:44)

[책과 삶]우리가 겪고 있는 불평등은 ‘새로운 현상’이다

▲ 불평등의 대가…조지프 스티글리츠 지음·이순희 옮김 | 열린책들 | 624쪽 | 2만5000

세상은 본래 불평등하다. 더 열심히 일해서 더 많이 기여한 사람이 더 많이 버는 건 당연하다. 가난은 게으른 네 탓이다.

많은 한국 사람들도 그렇겠지만, 대부분의 미국 사람들도 철석같이 믿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계속된 경제의 ‘대침체’는 이런 믿음을 흔들어놨다. “규칙을 준수하며, 성실하게 공부하고, 성실하게 일했는데도”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 생계유지조차 어려운 사람들이 급격하게 늘어난 것이다

저자는 미국의 현재 상황을 이렇게 요약한다. “부자는 갈수록 부자가 되고, 부자 중에서도 최상층은 더욱 큰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갈수록 가난해지고 그 수가 많아지며, 중산층은 공동화되고 있다.” 30여년 전 미국의 상위 1% 소득 계층은 국민 소득의 12%를 차지했다. 2002~2007년에 이르러서는 국민 소득의 65% 이상을 거머쥐게 됐다. 금융위기로 일부 손실을 봤지만 곧 빠른 속도로 회복했다. 2010년 추가 창출된 소득의 93%를 차지한 것이다. 월마트의 후계자 여섯 명이 소유한 재산은 697억달러로, 하위 30% 소득 계층의 전 재산을 모두 합친 것과 맞먹었다. 1에 가까울수록 소득이 불평등하다는 걸 나타내는 지니계수는 0.48로 이란·터키보다도 심각했다.

 

 



“미국은 건국 당시부터 자본주의 국가였지만,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불평등은 ‘새로운 현상’이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저자는 시장 만능을 외치는 보수 우파도, 자본주의 자체를 부인하는 급진 좌파도 아니다. 전통적인 주류 경제학 틀 안에서 자본주의의 실상을 추적해 온 정통 경제학자다. 그 또한 “불평등은 불가피하며, 더 노력을 기울인 이들에게 보상을 해줘야 한다”고 말한다. 주류 경제학의 ‘한계 생산성 이론’ 또한 사회에 기여하는 몫이 클수록 높은 소득을 가져간다고 말한다. 그런데 오늘날 ‘노력’은 새로운 부를 창출하기보다 다른 사람들의 부를 빼앗는 데 집중되고 있다. 아무 기여도 없이 많은 몫을 가져간다. 이걸 ‘지대 추구’라고 부른다.

‘지대’란 원래 토지 소유자에게 주어지는 보상을 뜻한다. 일하지 않아도 단지 소유권이 있기 때문에 수익을 얻는다. 이 말은 점점 어떤 권리를 독점적으로 소유함으로써 얻는 이윤이란 뜻으로 확장됐다. 예컨대 풍부한 천연자원을 가지고 있는 나라에서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부를 창출하기보다 특정 자원에 독점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얻어내는 편이 훨씬 쉽고 빠르다. 이런 경우는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정부로부터 독점적 권리를 받거나, 독점적 권리를 유지하도록 보장받으면 그만이다. 이라크 전쟁 초기, 당시 딕 체니 부통령이 최고경영자를 맡았던 핼리버턴은 70억달러의 정부 계약을 무입찰로 따냈다. 어수룩한 서민들의 등골을 빼내는 약탈적 대출도 지대 추구의 일부다. 국가자산을 헐값에 인수하거나 독과점을 이뤄 초과 이윤을 뽑아내는 기업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이 경영상의 일대 혁신을 하거나 천재성을 발휘해서 그만큼의 몫을 가져갔다고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더구나 금융위기 뒤에도 임원들에게 보너스를 지급한 은행들처럼 실적이 형편없는데 높은 보수를 받는 경우도 있다. 이것이야말로 상위 계층들이 이룩한 ‘진짜 혁신’이었다.

월가 점령 시위가 터져나왔을 때 공화당을 포함한 우파들은 “우리는 결과의 평등보다 기회의 평등을 추구한다”고 맞받았다. 미국은 오랫동안 ‘기회의 땅’이라 불렸다. 그런데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순회 강연을 다닌 저자에게 숱한 대학생들은 어려움을 호소했다. “취업할 곳이 없다. 대학원 진학이 최선의 방법이었지만 학자금 대출을 받아서 빚만 늘었다. 개인 파산을 신청해도 학자금 대출은 면제 못 받는다. 부모가 부유해서 무보수 인턴으로 일하며 경력을 쌓는 또래 학생들을 보면 절망감만 늘어간다. 이제 장래성이고 뭐고 임시직 일자리라도 잡아야 할 것 같다.” 미국 명문대 재학생 중 하위 50% 계층 출신은 9% 정도에 불과하다. 상위 25% 계층 출신은 74%에 이른다. 학업 성취도가 높은 빈곤층 자녀들은 상대적으로 낮은 부유층 자녀보다 대학을 졸업할 확률이 훨씬 낮다. 대학을 졸업한다 해도 그들보다 훨씬 가난하게 산다. 하위 20% 계층의 자녀 중에 계층 이동을 할 가능성은 절반 정도에 불과하며 그것도 소폭 이동에 그치고 있다. 반대로 하위 계층으로 떨어지는 건 그보다 훨씬 쉽다. 주택 담보금을 딱 한번 연체했을 뿐인데 집을 빼앗긴다.

우파들은 상위 계층에게 일단 더 많이 몰아주면 구성원 모두가 그 혜택을 볼 것이라는 ‘낙수효과’를 설파한다. 상위 계층이 가져가는 ‘파이’의 크기를 따지지 말고 일단 전체 ‘파이’를 키워야 한다는 말이다. 어쨌든 더 많은 부를 부유층에게 몰아줬고, 파이는 커졌다. 1인당 국내총생산은 1980년부터 30년 동안 75%나 상승했다. 상위 1%의 임금은 150%, 상위 0.1%의 임금은 300% 넘게 인상됐다. 그럼에도 비슷한 기간 하위 90%의 임금은 15% 인상에 그쳤다. 정규직 일자리는 2007~2011년 사이 870만개나 사라졌다. 99주 이상 실업 상태에 놓인 ‘나인티나이너스(99ers)’라는 새로운 집단이 등장했다. 미국은 ‘유연한 노동시장’의 선두주자였지만 경제 실적은 노동자를 강력하게 보호하는 독일·스웨덴에 못 미쳤다.

저자는 이 불평등이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시장의 힘이기도 하지만 그 시장을 만들어낸 정부의 문제다. 금융위기 이전에도 약탈적인 대출관행을 막아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지만 연방 정부는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정치는 이미 상위 1%가 점령해 버렸다. 공화당과 민주당을 통틀어 대통령 선거 운동에 투입된 20억달러 넘는 돈이 대부분 상위 1%가 기부한 것이다. 이들 1%는 정치 혐오를 부추기면서 하위 계층들이 아예 투표장에 나오길 꺼리게 만든다. 그러는 사이 레이건 대통령이 포문을 연 지속적인 감세정책에 따라 이제 부자들보다 가난한 사람들의 세율이 더 높아졌다. 2007년 상위 400위 고소득 가구들의 평균 담세율이 16.6%인 데 비해, 일반 납세자들은 20.4%였다.

그러나 이 불평등은 결국 시장 만능을 외치는 이들이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성장’을 저해하며 ‘효율성’을 떨어뜨리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핵심 논지다. 바로 ‘불평등의 대가’다. 감세와 재정적자로 인해 정부의 공공투자가 줄어들다 보니 기간시설, 기초 연구, 교육 같은 공공재 즉 다음 세대의 혁신을 몰고 올 수 있는 ‘우물’은 점점 말라붙게 된다. 빈곤층 자녀들은 잠재력이 있다고 해도 점점 그 발현 기회를 찾지 못한다. ‘지대 추구’가 심해짐에 따라 다른 사람들의 몫을 빼앗는 데만 골몰하게 되니 파이 전체 크기는 줄어든다.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일할 의욕을 상실한다. 사회보장 축소로 삶이 불안정해지면서 하루 종일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에게 생산성 향상을 기대하긴 어렵다. 일이 잘못되더라도 보호받을 안전망이 있어야 고위험 고수익 활동에 투자할 수 있다. 그렇기에 사회보장이 잘되는 나라들은 미국보다 훨씬 높은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럼에도 미국인들 가운데 지난 10년간 불평등이 심화됐다고 여기는 이들은 42%에 불과했다. 정부가 하는 일은 늘 실패가 과장되고 개인이 지출하는 돈은 설사 도박에 쓰일지라도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사용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규제 완화와 세금 인하만을 지고지선으로 여긴다. 하지만 레이건 이후 계속된 그 정책이 과연 자신들에게 얼마만큼의 혜택을 주었는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복잡한 이야기를 이해하려 들기보다 단순하고 왜곡된, 감정에 호소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상위 1%는 이런 인식과 신념을 만들어내기 위한 충분한 자원을 가지고 있다. 조지 오웰의 <1984>에 등장하는 ‘빅 브러더’가 지배하는 사회를 점점 닮아가고 있다.

저자는 ‘지대’에 세금을 물리자고 주장한다. 1%의 부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공공재 생산을 위해 당연히 부담해야 돈을 내게 하자는 것이다. 또 투자를 활성화하기 위해 세금을 감면하기보다 실제 투자를 하는 기업에 세금을 깎아주자고 말한다. 그냥 더 많은 돈을 줘 봤자 돈은 더 많은 수익을 좇아 해외로 떠다닌다. 핼리버턴에 지출하는 건 경제 성장과 무관하다. 대신에 장기 실업자들에게 주는 실업보험 혜택을 늘리면 그들은 돈이 들어오는 대로 바로 지출할 것이다. 최상위 계층에 대한 세금을 인상할 경우 이들의 지출 감소분은 많아야 80%에 그치지만, 하위 계층에 대한 세금을 인하하면 이들의 지출 증가분은 100%에 가깝다. 낙수효과는 없지만 ‘분수효과’는 있다는 것이다. 국내총생산이 증가하면 상위 1% 또한 함께 이익을 보게 된다.

우파들은 정부 재정이 적자면 큰일 날 것처럼 얘기하지만 저자는 정부 예산은 한 가정의 예산과는 다르다고 반박한다. 한 가정이 수입을 넘어서는 지출을 하면 파산을 맞을 뿐이지만 정부가 그렇게 하면 거시경제의 변화가 온다. 재정 지출이 늘면 실업자들에게 일자리가 생기고 그들은 세금을 낸다. 재정적자에 시달리는 미국 정부는 불과 10년 전만 해도 국내총생산의 약 2%에 해당하는 큰 폭의 흑자를 내고 있었다. 경기 침체는 무엇보다 수요의 부족에서 온다. 재정적자는 경기침체의 원인이 아니라 그 결과다. 허버트 후버 대통령의 예산 긴축이 1929년의 주식 시장 붕괴를 대공황으로 심화시킨 전력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재정 지출로 이뤄지는 사회보장이 ‘공짜’라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미 그만한 세금을 낸 사람들이 혜택을 받는다. 오히려 저자는 정부의 후한 지원을 받고 있는, ‘지대’로 먹고사는 이들이 정부의 적극적인 지출을 반대한다고 꼬집는다.

불평등을 낳는 근본적 원인은 실업이다. 저자는 중앙은행이 통화정책으로 인플레이션을 낮추려는 정책 또한 부유한 채권 보유자들에게 자산가치가 하락할 것이란 우려를 떨쳐줬을 뿐 정작 실업률 상승을 불러일으켰다고 비판한다. 인플레이션보다는 불평등과 분배, 구체적으로는 실업률을 낮추는 데 초점을 맞춰야 현재 침체기의 문제인 ‘총수요 부족’을 해결할 만한 소비가 늘고 경제가 활성화될 것이란 주장이다. 1830년대 미국을 여행한 프랑스 역사학자 토크빌은 미국 사회의 독특한 특징을 창출한 주요인으로 ‘개인적 이익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꼽았다. 약삭빠른 미국인들은 다른 사람들을 보살피는 행위가 비단 영혼을 살찌우는 데 그치지 않고 사업을 살찌운다는 사실을 이해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상위 1%가 이것을 깨달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책을 따라가다보면 미국의 상황이란 걸 잠시 잊고 마치 한국의 이야기인 것처럼 빠져들게 된다. 선대인 선대인경제연구소 소장은 “이 책의 지적과 분석이 가장 잘 들어맞는 나라는 미국 다음에 한국일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마지막 장에서 촘촘한 개혁 방안을 제시하는데, 무엇보다 이 정책들이 채택되도록 허용하려면 정치 개혁이 선행돼야 한다고 말한다. 문제는 시장과 경제가 아니라 ‘정치’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