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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장희빈·인현왕후에 가려진 ‘정치적 군주로서의 숙종’ 다시 보기 (경향신문 2013-05-31 23:44:33)

[책과 삶]장희빈·인현왕후에 가려진 ‘정치적 군주로서의 숙종’ 다시 보기

▲ 국왕 숙종, 잊혀진 창업주 태조를 되살리다…윤정 지음 | 여유당 | 360쪽 | 1만6000원

숙종 때의 장희빈과 인현왕후, 영조의 어머니 최숙빈의 이야기는 사극에서 단골로 다뤄지는 소재이다. 장희빈은 특히 ‘본처를 내쫓은 요부’ ‘정치권력에 도전한 진취적 여성’ ‘사랑에 울고 웃는 인간 장옥정’ 등 끊임없이 재해석되며 드라마가 새로 만들어지는 동력을 제공했다. 반면 숙종은 정치보다 사랑에 몰두하는 유약한 인물로만 그려진다. 하지만 실제 역사는 다르다. 역사가들이 평가하는 숙종은 그 누구보다도 정치적인 군주였다.

숙종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는 책이 출간됐다. 책은 숙종이 태조 이성계를 대상으로 벌인 과거사 작업을 다루고 있다. 창업주임에도 불구하고 태조의 위상은 조선 전기 내내 미약했다. ‘왕자의 난’을 일으킨 태종은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이 ‘개국공신’임을 강조했고, 태조의 업적을 상대적으로 축소시켰다. 태종의 의지에 의해 장남 양녕대군을 제치고 왕위에 오른 세종과 그의 후손들은 태종의 노선을 충실히 따랐다.

건국 이후 약 280년이 지나 왕이 된 숙종은 선왕들과 달리 사적지 발굴 등 대대적인 태조 재평가 작업에 돌입했다. 약 100년을 이어온 붕당정치를 무너뜨린 자신의 행보 때문이었다. 붕당정치는 왕의 일방적 권위가 아닌 신하들의 공론에 의해 움직이는 정치시스템을 의미한다. 공교롭게도 선조, 광해군, 인조 등 방계왕족이나 후궁 소생 군주들이 잇달아 즉위하던 시대에 붕당정치가 꽃을 피웠다.

숙종은 오랜만에 등장한 적장자 출신 왕이었다. 왕비에게서 태어나 원자와 세자의 과정을 거쳐서 왕위에 올랐다. 숙종은 이 같은 혈통에서 오는 권위를 바탕으로 공론을 무시하고 자의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장희빈 소생 아들의 원자 책봉에 반대하는 신하들을 역모로 몰아 숙청한 것이 단적인 예다. 하지만 변덕에 의한 정치라는 비판을 무마하려면 공론을 대신할 강력한 권위와 상징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끌어온 것이 왕조의 창업자 태조였던 것이다.

‘만들어진 태조’와 ‘태조를 만들 수밖에 없었던 숙종’은 조선 후기 정치사를 보는 안목을 높여준다. 숙종은 태조의 권위를 등에 업고 체제 정비와 왕실의 중흥을 표방했고, 영·정조가 이를 계승했다. 붕당이 환국과 탕평을 거쳐 세도정치로 이어지는 흐름이 보인다. 오늘날 정치권에도 과거사 논쟁이 끊이지 않는 이유를 추론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