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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 육/취업전쟁

청소년 우울증 해법은 … (중앙일보 2009.06.03)

[열려라 공부] 청소년 우울증 해법은 …

창 밖은 저렇게 밝은데 마음은 왜 이리 어둡지

아침에 일어나 등교. 교실에서 네 시간 수업, 점심, 다시 네 시간 수업, 저녁, 학원. 월·화·수·목·금·토 항상 똑같은 리듬. 이것은 아주 오랫동안 편안했던 길이다. 그러나 어느 날 “왜”라는 질문이 고개를 쳐든다. 알베르 카뮈의 주문처럼 말이다. 지난주 너무 푸르러 오히려 처연한 신록의 일상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왜”와 대면했다. 이를 통해 삶이 어떻게 보였는가. 여전히 무의미하고 고통스러운가. 아니면 이미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어 무의미함에 저항하고 있는가.

박모(21)씨의 이력서를 보자. 과학고 3학년 재학 중 국제과학올림피아드 금메달 수상, 명문대 의대 입학, 성적 최상위권 유지, 성적 우수 장학생. 의대 본과 1학년까지 엘리트 코스를 밟아 왔다. 모든 학생이 가고 싶어 하는 과학고, 의대까지. 자녀 교육에 열심인 학부모들이라면 그런 박씨의 이력을 따라가도록 자녀들을 몰아붙였을 것이다.

하지만 부러울 것 없어 보이던 박씨는 지금 세상에 없다. 지난달 17일 오전 서울 중구의 P호텔 객실에서 유리창을 깨고 뛰어내렸다. 경찰 조사 결과 박씨는 전날 오후 3시 이 호텔에 투숙했다. 객실에서는 “자세한 사연은 e-메일로 보냈다”는 유서가 발견됐다. 경찰 관계자는 “유서 내용으로 미뤄 박씨가 진로 문제에 대해 고민을 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박씨는 대학 진학 후 시간 절약을 위해 학교 기숙사에 머물면서 학업에 열중했다. 같은 과 친구들은 “집이 서울인데도 불구하고 집에 오가는 시간이 아까워 기숙사에 살았던 것으로 안다”며 “워낙 성적이 좋고 지적 호기심이 강한 친구였다. 진로를 걱정했다는 건 믿기 힘들다”고 말했다.

알베르 카뮈는 저서 『시지프의 신화』에서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는 질문이 가장 근원적인 질문”이라고 했다. 박씨는 일상에서 마주친 “왜”라는 질문에 직면해 극단을 선택했다.

이처럼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라고 해서 모두가 행복한 것은 아니다. 과학고의대가 행복의 보증수표는 아니다.

의대생들의 미술 치료를 담당하는 차(CHA)의과학대 대체의학대학원 김선현(41·임상치료) 교수는 “의과대의 특성상 아무리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라도 계속된 경쟁 속에서 학업에 대한 중압감과 성적 스트레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며 “스트레스 발산 기회와 자기 탐색 시간 없이 기숙사 등 한정된 공간에서 책에만 몰입하면서 외로움을 느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장협의회가 2006년 11월부터 2007년 4월까지 6개월간 34개 의과대 학생 713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의대생들의 정신건강 실태 조사에 따르면 1000명 중 64명이 “지난 1년간 주요 우울장애를 경험한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우울증 발병 원인으로는 공부 스트레스라는 답이 가장 많았다. 여학생이 남학생에 비해, 저학년이 고학년에 비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었다.

정신과 전문의 최혜원(44·여) 박사는 “성적이 우수한 아이들은 특히 좌절 경험이 없다”며 “고난을 맞닥뜨렸을 때 헤쳐 나갈 능력을 키우지 못한 탓”이라고 말했다. 공부만 잘하면 모든 것을 용서받고, 누구보다 우대받는 일이 집이나 학교에서 당연시돼 오다 보니 좌절에 직면해 쉽게 꺾이는 것이다.

공부와 입시, 대학은 중요하다. 하지만 이제 학생과 학부모 모두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삶의 근원적인 질문에 직면했을 때 “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대답할 수 있는가. 있어야 한다. 

강함 속에 감추어진 연약함과 우울함. 국내의 한 의대생이 자신의 내면을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