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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 육/취업전쟁

마이스터고 `개천의 용` 들이 몰려들었다 (주간조선 2010.01.13 21:22)

마이스터고 '개천의 용' 들이 몰려들었다

3.55 대 1. 지난해 12월 18일 교육과학기술부(이하 ‘교과부’)가 발표한 2010학년도 산업수요 맞춤형 고교, 일명 마이스터고의 입시 경쟁률이다. 마이스터고는 유망 분야의 특화된 산업수요와 연계, 청년 명장(Young Meister)를 양성하는 전문계 고교. 전문계 고교치곤 꽤 높은 경쟁률도 눈길을 끌었지만 기대를 훌쩍 뛰어넘는 우수한 합격생들로 더욱 화제다. 마이스터고는 “졸업 후 4년간 직장에서 일하면 대학 4년을 다닌 것보다 사회에서 더 나은 대우를 받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의지에 따라 자율형사립고·기숙형공립고와 함께 ‘고교 다양화 300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탄생했다. 정부가 계획 중인 마이스터고의 총개수는 50개. 2010년 개교하는 학교는 이 중 1차분 21개교(2008년 선정 9개·2009년 선정 12개)다.

주간조선은 치열한 경쟁을 뚫고 마이스터고 첫해 신입생 타이틀을 거머쥔 청소년 3640명의 면면이 궁금했다. 너도나도 인문계 고교와 4년제 대학을 외치는 ‘학력 지상주의’의 땅 대한민국에서 이들이 왜 직업교육의 길을 선택했는지부터가 의아했다. 그들을 마이스터고로 이끈 건 선생님의 추천일까, 부모의 권유일까, 본인의 선택일까? 수도권지역 마이스터고 3개교로부터 ‘대표 주자’로 추천 받은 신입생 3명의 사연을 찾아나선 건 그런 연유에서였다. 아울러 이참에 마이스터고 출범을 계기로 전환점을 맞은 우리나라 직업교육의 현황도 들여다봤다. 마지막으로 자기계발전문가 공병호씨가 들려주는 ‘마이스터고 1세대를 향한 응원의 메시지’도 담았다.


뻔한 교육 대신 ‘명장’의 길을 선택한 아이들

1 김아라 서울 신관중 3·미림여자정보과학고 입학 예정

특허 출원만 4개 ‘청소년 발명왕’ “인생 설계 이미 끝났어요”

photo 이구희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서울 관악구 서원동에 있는 김아라양의 단독주택 거실바닥은 김양이 직접 만든 발명품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패션형 우산 커버·세면기 팝업밸브 인출장치·방수 덮개가 내장된 양산 겸용 우산·문 버팀 장치…. 특히 아파트 현관문이나 사무실문을 열어놓도록 하는 문 버팀 장치는 스프링 내장형, 지렛대형, 자기장 원리 활용형 등 다양한 작품이 줄줄이 ‘전시’돼 있다.

김양은 지난해 11월 7일 서울 미림여자정보과학고 홈페이지 신입생 합격자 명단에서 자신의 이름을 확인했다. 미림여자정보과학고는 지난 해 뉴미디어 콘텐츠 분야 마이스터고교로 선정됐다. 그는 지난해 이 학교가 주최한 UCC영상공모전에서 2등으로 입상, 6명을 선발하는 ‘UCC캠프특별전형’으로 입학 관문을 통과했다. 김현수 미림여자정보과학고 교무부장은 주간조선 인터뷰 대상자로 김양을 추천하며 “입학 정원 120명 중 창의력 분야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인재”란 소개를 덧붙였다.

김양이 발명에 관심을 가진 건 신성초교 5학년 때였다. 우연히 이웃 중학교에서 열린 초등생 발명교실에 참여한 게 계기가 됐다. 전기 기술자였던 아버지(김길상·50)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기계와 친했던 그는 금세 발명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특히 중2 때는 대한민국학생발명전시회 은상(21회)·공군참모총장배 고무동력기대회 은상(30회) 등 크고작은 대회에서 입상했다. 이후 3년간 발명 장학생으로 활약했고 서울대 물리영재교육원에서도 3년간 수학했다.

발명 외에 미술에서도 그는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회화나 조각 같은 순수 미술이 아니라 디자인이나 광고 등 응용 미술에 관심이 많다. 그러나 막상 미술공부를 시작한 건 중3 때였다. ‘그림으로는 돈 못 번다’는 부모의 반대가 심했기 때문이다. 그런 부모도 화실 한번 안 다녀본 딸이 만화공모전이며 디자인경연대회에 나가는 족족 상을 받아오자 생각을 바꿨다. 지난해 말엔 두 차례의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야 하는 ‘2010 청소년 아트 페스티벌(KASF)’ 출품 자격도 따냈다.

발명과 그림에 빠져 지내느라 그의 성적은 상위 25% 정도로 그리 높지 않다. 당초 목표했던 과학고나 공군항공과학고 입학이 좌절된 것도 그 때문이다. 딸에게 미림여자정보과학고 입학을 권유한 건 어머니 어은숙(53)씨였다. “아라가 좋아하는 발명과 미술을 아우를 수 있는 분야가 뭘까 고민하던 차에 미림여자정보과학고가 마이스터고에 선정됐단 소식을 들었어요. 손끝이 야문 아이니까 잘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가장 존경한다는 김양은 벌써부터 인생 설계를 거지반 끝내놓았다. “제 목표요? 한국 고유의 문화가 살아있는 저만의 발명품을 만드는 기업을 세우는 거예요. 광고와 디자인도 제가 배워서 직접 하고요. 수천만원씩 돈 들여 대학 나오고도 월 88만원밖에 못 버는 세상이라잖아요. 놀이 같은 발명과 그림을 마음껏 하면서 돈도 벌 수 있는 마이스터고를 선택한 걸 한 번도 후회해본 적 없어요.”

인터뷰 이틀 후 어은숙씨가 전화를 걸어왔다. 김양이 ‘특허청·포스텍(POSTECH) 차세대 IP-기반 영재기업인’으로 최종 선발됐다는 소식이었다. 영재기업인이 되면 산·학·연 연계 시스템을 바탕으로 아이디어 구상에서부터 상품화까지의 전 과정을 전폭적으로 지원받는다. 선발 인원은 전국기준 40명(고등부). 딸의 발명 공부를 돕다가 한국여성발명협회가 주는 여성 발명지도사 초급 자격증까지 획득한 어씨는 “아라가 돈걱정 없이 마음껏 발명할 수 있게 된 게 가장 기쁘다”고 말했다.

2 양기윤 서울 구룡중 3·수도전기공업고 입학 예정

학원 한번 안 다니고서울 강남서 상위 10% “미래는 간판보다 기술”

소유냐 삶이냐, 한국인의 역사의식, 한국사 특강, 과학 혁명의 구조, 기호학이란 무엇인가, 재당(在唐) 신라인 사회 연구, 발해사, 독립군의 전투…. 양기윤군의 책꽂이엔 이런 책들이 꽂혀 있다. 이제 막 중3 기말고사를 끝낸 열여섯 소년의 독서 목록 치곤 수준이 여간 높은 게 아니다. 책꽂이를 가득 메운 서적의 상당수는 종이가 누렇게 바랜 헌 책이다. “어휴, 이게 다가 아니에요. 책이 너무 쌓여 내다버린 것도 얼마나 많은데요.” 어머니 김영덕(47)씨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양군은 지독한 책벌레다. 시간이 날 때마다 개포도서관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관심있는 분야의 책을 빌리고, 읽고 싶은 책을 구하지 못하면 집 근처 헌책방 ‘서적백화점’에 수시로 들러 책을 사모은다. 한 달 용돈 5만원이 고스란히 책값으로 쓰일 때도 부지기수다. 특히 관심있는 분야는 역사. 순전히 개인적 호기심 때문에 독학으로 한국사능력검정시험 3급 자격증을 따기도 했다. 가장 흥미롭게 읽은 책은 레오 버스카글리아의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photo 이상선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그는 에너지 분야 특화 마이스터고인 수도전기공고 첫 신입생 200명 중 한 명이다. 중2 때까지만 해도 일반 고교에 진학해 사학자가 되려 했던 그를 명장(名匠)의 길로 이끈 건 기술 과목 수업이었다. “기술 시간에 형광등을 만든 적이 있었어요. 복잡한 과정을 거쳐 등을 완성한 후 불이 딱 켜지는 순간 엄청난 희열을 느꼈어요. 뭔가를 뚝딱거려 새로운 걸 만들어내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처음 알게 됐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기술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때마침 학교로 배달된 마이스터고 홍보 책자를 접하게 됐고 수도전기공고의 존재도 알게 됐다. 그는 차근차근 정보를 수집하고 마음을 결정한 후 부모를 설득했다. “늘 입버릇처럼 사학을 공부하겠다고 하던 아이여서 그러려니 하면서도 ‘사학이 무슨 비전이 있을까’ 싶어 불안했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마이스터고 얘길 하면서 수도전기공고에 가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걱정은 됐지만 워낙 혼자 잘 알아서 하는 아이라 큰 반대는 안했습니다.”(어머니 김영덕씨)

그렇다고 양군의 부모가 전혀 손놓고 있었던 건 아니다. 아들에게 내색은 안했지만 인터넷으로 마이스터고에 관한 뉴스를 모니터링하고 수도전기공고 홈페이지에 들어가 어떤 학교인지 검색도 했다. 특히 수도전기공고가 한국전력과 산학 협력 관계에 있어 졸업 후 한전 취직이 약속된다는 소식이 부모를 안심시켰다. 아버지 양은복(52·자영업)씨는 “미래사회를 지식사회라고들 하는데 지식 사회에서 타이틀보다 중요한 건 실력 아니겠느냐”며 “본인의 의사가 분명하다면 말릴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의 중3 내신은 학원 한번 안 가고도 늘 상위 10% 이내를 유지했다. 일반고에 진학해 얼마든지 대학 입시를 준비할 수 있는 성적이다. 양군의 마이스터고 진학 소식을 들은 친구들은 농반진반으로 “(그 학교 가기엔) 네가 아깝다”며 입을 모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결정을 ‘잘한 선택’이라고 믿고 있다.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보다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게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좋은 대학 나오고도 행실이 바르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양군의 부모는 “기윤이가 넉넉지 못한 가정형편을 염려해 일반고교 진학의 꿈을 접고 마이스터고를 선택한 건 아닌지해서 미안하기도 하다”고 말했다. 양군의 꿈은 분명하다. 전기에너지과에서 기술을 익히는 틈틈이 전기기능사 등 자격증을 최대한 많이 획득하고 고교 졸업 후 실무 경험을 충분히 쌓은 후 대학에서 전문성을 길러 ‘진짜 명장’이 되겠다는 것이다. 그는 “학교에서 보내주는 해외연수에 대비, 요즘은 한창 영어공부 중”이라고 했다.

photo 이상선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3 김수현 북인천중 3·인천전자공업고 입학 예정

학교 선택부터 스스로남학생 제치고 수석 입학 “내 인생은 내 의지대로”

전자통신 분야 마이스터고인 인천전자공고에 학생 추천을 의뢰했을 때 막연히 남학생을 소개받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인천전자공고 교장실에 나타난 건 단발머리가 단정한 여학생이었다. 김수현양은 인천전자공고가 마이스터고로 선정되며 남녀공학으로 전환된 후 처음 선발된 여학생 중 한 명이다. 입학 성적은 신입생 120명 중 1등. 3년간 학비 면제·기숙사 무료 입주의 혜택은 물론, 수석 입학자에게 주어지는 소정의 성적 우수 장학금까지 받게 된다.

마이스터고는 기존 전문계 고교 중에서 선별됐고 2010학년도 신입생을 지난해 말 처음 모집했다. 여전히 응시생의 상당수는 마이스터고가 정확하게 어떤 학교인지 잘 모르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김양의 경우는 달랐다. 처음 마이스터고란 게 있다는 얘기를 들은 후 그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주도면밀하게 관련 정보를 조사했다. 이후 자신이 진학할 학교로 인천전자공고를 찍었다. 실제로 김양이 재학 중인 북인천중은 인천에 있고 남녀공학인데도 김양 말고는 주변에 인천전자공고를 선택한 학생이 없다.

김양의 중학교 시험 성적은 평균 93점 선이다. 그 역시 2학년 때까지만 해도 여느 친구들처럼 일반고교에 진학해 대학에 갈 계획이었다. 맘이 바뀐 건 친오빠 때문이었다. “오빠가 중3 때 공고에 가고 싶어했는데 부모님 반대에 부딪혀 일반고에 갔어요. 3년 내내 힘들어하더라고요. 노래하는 걸 좋아해 어렵게 올해 보컬 트레이닝 전공으로 대학에 가긴 했지만 처음부터 하고 싶은 공부를 했다면 훨씬 덜 고생하지 않았을까 싶었어요. 마이스터고에 관한 얘길 들려준 것도 오빠였고요.”

장남의 시행착오를 지켜본 때문인지 김양의 부모는 둘째 딸의 마이스터고 진학을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특히 전기 기술자인 아버지의 격려는 큰 힘이 됐다. 처음에 반대했던 어머니도 수석 입학 사실을 전해들은 뒤 “나도 친척에게 자랑할 만한 자식 하나 생겼다”며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의 관심 분야는 전자회로 프로그래밍. 아직 정식으로 배워본 건 아니지만 평소 과학을 좋아했고 차분한 그의 성격과도 어울린다는 생각에서다.

요즘 그는 1월 21일부터 사흘간 인천전자공고에서 열리는 ‘마이스터 마인드 함양 신입생 연수’를 앞두고 모처럼 좋아하는 독서를 즐기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책이라면 장르를 불문하고 닥치는 대로 읽는다는 김양의 추천작은 1930년대 한국 모더니즘소설의 대표작인 이상의 ‘날개’. “날고 싶다는 욕망을 향해 몸을 내던지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자유가 느껴졌다”는 게 그의 감상평이다. 한 권 더 골라달라고 했더니 “‘꽃들에게 희망을’(트리나 폴러스 지음)도 좋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마이스터고 선정 첫해인 올해 인천전자공고에 입학하는 여학생은 모두 23명이다. 김봉영 인천전자공고 마이스터기획운영부장은 “전자 통신이라고 하면 흔히 남학생에게 더 어울릴 거라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취업 시장에 나가보면 군대 문제가 걸려 있는 남학생보다 여학생의 인기가 높다”며 “전자회로를 설계하고 제어프로그램을 짜는 일은 고도의 집중력과 섬세함이 필요해 다른 기능직에 비해 여학생의 수요가 높은 편”이라고 말했다.

4.2 대 1의 경쟁을 뚫고 인천전자공고 신입생이 된 김양에게 ‘몇 년 후 친구들은 여대생이 될 텐데 괜찮겠느냐’고 물었다. 답변이 입에서 나오는 데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친구들이 제 인생 대신 살아줄 것 아니잖아요. 제가 생각해서 결정한 일이니까 후회 안 해요.” 마지막으로 그에게 ‘진로 결정을 앞둔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부탁했다. 곰곰이 생각하던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자기 생각 없이 엄마 아빠 뜻대로 학교를 정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도전해보지도 않고 후회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