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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향 청정골 화순

희망의 물길 남도민의 발자취 (광남일보 2010.07.13 09:22)

[희망의 물길 남도민의 발자취] 1. 프롤로그

역사·문화가 흐르는 물…새 생명 불어넣는다

70년대 영산강종합개발 사업 후 최대 수리사업
저수지 둑 높여 담수…농업용수 안정적 확보
관광자원 개발 등 새로운 수리문화 창조 기대


 

사람들은 물을 활용하는 이수(利水)기능과 홍수나 가뭄의 피해를 막고 인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치수(治水)기능을 위해 3000여년 전부터 물가두기를 시작해 왔다. 특히 치수사업은 인류의 정착생활시기부터 시작돼 오늘날에도 물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사진은 전남 화순군 서성리 저수지 전경.
 



물길은 역사와 문화가 함께 녹아 흐른다.

긴 유로(流路)를 따라 수 천년 역사를 품은 갖가지 설화가 함께 굽이쳐 흐르고 그 물길을 닮은 문화가 생성되고 발전해 왔다. 물을 다스리는 일 즉, 치수(治水)는 산을 다스리는 일 치산(治山)과 함께 나라를 운영하는데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특히 치수를 경국지대도(經國之大道ㆍ나라의 흥망을 좌우하는 대도)로 여겼고, 그래서 치수는 통치자의 자질과 능력을 가늠하는 중요한 국가정책이었다.

근세에 들어와서도 천재지변에 의한 국토와 백성의 피해는 임금이나 통치자의 실ㆍ덕으로 여겨졌고, 그만큼 치산치수는 중요한 국가의 막중대사로 여겨졌다. 선사시대로부터 시작된 치수사업은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가장 중요한 국가 정책이자 현안사업으로 변함없이 진행되고 있다. 

지난 5월12일 전남 화순군 장치지구 저수지 둑높임 현장을 방문한 홍문표 한국농어촌공사 사장(오른쪽 두번째)이 김종원 전남지역본부장(가운데) 등 관계자들에게 사업방향을 지시하고 있다.

물은 어느 정도 논과 밭에 비로 내린다. 그러나 불행히도 물은 필요한 곳에서 필요한 시점에 필요한 양만큼 사용할 수 없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때문에 사람들은 생활용수, 농업용수, 공업용수, 수상활동 등 물을 이용하는 이수(利水)기능과 홍수나 가뭄의 피해를 막고 인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치수(治水)기능을 수행해 왔다.

치수사업은 인류가 정착생활을 하면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치국의 기본과제 중 하나였다. 그 역사는 이미 3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국 여러 지역에서 출토된 탄화 볍씨나 볍씨 자국이 있는 민무늬토기 등으로 볼 때 청동기시대 이전에 한반도 전역에서 벼를 재배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특히 삼한시대에는 제방을 축조해 저수지를 만드는 기술과 함께 개울의 일부 또는 전부를 가로막아 물길을 돌리는 보를 축조했다. 벼농사를 중심으로 한 농업이 발달했음을 반증하는 시설들이다. 당시 축조된 저수지로는 김제의 벽골제, 상주의 공검비, 제천의 의림지 등이 유명하다.

고려시대에는 1170년(의종 24)에 황해도 연백에 있는 남대지를 개축하였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1415년(태종 15)에 벽골제를 수축하고, 1476년(성종 7)에는 전국 각도에 있는 언제를 수축했다.

1636년(인조 21)에는 김자점이 황해도 봉산군에 어지둔보를 축조하여 약 500정보의 논을 관개하고, 경기 장호원에 김자점보를 축조하여 논을 관개했다. 또한 1645년(효종 1)에는 수차를 제작하여 관개하는 데 사용하였고, 1779년(정종 3)에는 경기 수원시에 축만제를 축조하여 관개에 사용했다.

그 후 개수를 거듭하여 현재 농촌진흥청에 속하는 서호로 된 것이다. 또 고종 때에는 충남 합덕제방을 수축하기도 했다. 1730년(영조 6) 당시의 대소 언제의 수는 3575개소에 달하였으며, 1782년(정조 6)에도 3378개소, 그리고 1909년의 농공상부 발표에 의하면 대소 언제수는 2781개소였다.

조선 태조 때에 권농관을 임명하여 언제의 수축을 감독하게 하였고, 1662년(현종 3)에는 제언사를 설치하여 각 도의 제언 사업을 관장하게 했다. 1778년(정조 2)에는 '제언절목', 즉 저수지대장을 작성하여 각 도에 나누어 주고 그 유지 ㆍ관리를 맡겼다.

그 후 일제강점기 때의 수리사업은 3기로 나뉜다. 제1기는 1906~19년이며 수리조합조례ㆍ국유미간지 이용법 등이 실시됐다. 기존시설의 실태조사를 실시한 결과 저수지 6300개소, 보 20만 7000개소에 대한 농업수리면적은 23만 정보였다. 또 수리조합 15개소를 설치하고 저수지와 보의 개수ㆍ보수를 실시했다.

제2기는 1920~39년으로, 일본 본토를 공업화하고 부족한 식량을 보충하기 위해, 한국의 농업에서 증산을 도모하기 위하여 이른바 산미증식계획을 세웠다.

한국농어촌공사는 광주전남지역 21개지구에서 농업용 저수기 둑높이기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해 12월 24일 개최된 나주 만봉지구 농업용저수지 둑 높이기 사업 기공식 광경.

그래서 토지개량ㆍ수리조합령 등을 공포하여, 조선토지개량 주식회사와 동양척식회사를 설립하는 동시에 173개의 수리조합을 설치했다. 또한 장래 토지개량사업을 실시할 수 있는 지구의 조사를 시행했다.

제3기는 1940년부터 1945년 8ㆍ15광복까지인데, 전쟁 중 군량미를 조달할 목적으로 농지개발영단까지 설립하고 수리사업을 강행했다.

일제강점기 36년간에 남북한을 통하여 598개의 수리조합을 설립하였는데, 그 농업수리면적은 35만 6700정보였다. 8ㆍ15광복 후 정치ㆍ사회의 혼란으로 수리사업은 일시 정체되었지만 미국의 원조로 다시 착수했다.

그러나 6ㆍ25전쟁으로 다시 중단되는 시련을 겪어야 했다. 그 후 농지개혁특별회계법의 공포 실시로 받게 된 농지상환금액 및 미국의 원조 등으로 수리사업은 다시 추진됐다.

1970년대 들어 소규모에서 대규모 방식으로 전환돼 농업구조의 근본적인 쇄신을 꾀했다. 기존의 농지기반조성 사업에서 벗어나 관개배수 뿐만 아니라 토지이용, 영농구조개선, 유리 관리를 겸한 대단위 농업종합개발계획을 추진했다.

영산강, 금강, 남한강지구 등에서 대단위 농업종합개발계획이 본격적으로 실시된 것도 이 때부터다.

이에 따라 1976년 영산강 상류 쪽에 장성댐, 담양댐, 광주댐, 나주댐이 축조되어 홍수조절기능과 농업용수 확보에 일조를 하게 된다. 또 영산강 하류 쪽에는 1977년 영산강 하구언이 축조되어 갯벌이 농경지가 되고 하류 쪽 농업용수가 확보됐다.

또한 섬진강과 보성강 등을 낀 많은 하천과 저수시설이 산재해 곡창 전남의 수리문화를 꽃피워 왔다. 전남 내륙 곳곳에 물을 모으고 효율적으로 관리, 운용하는 수리시설은 총 1만2244 곳에 이른다.

이 중 저수지 4310곳, 방조제 989곳, 양수장 804곳, 배수장 87곳, 양ㆍ배수장 3곳, 취입보 1737곳, 집수암거 260곳, 관정 5076곳 등이다.

댐 건설과 영산호 하구 둑을 막으면서 가뭄때 농업용수를 활용하거나 바닷물로 인한 범람도 줄이는 등 관개농경의 위력을 실감케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수리시설에도 불구 최근 들어 작물재배에 필요한 농업용수는 물론 마시고 사용할 생활용수마저 부족해지면서 수자원에 대한 위기의식이 고조되고 있다. 앞으로도 기후변화에 따른 가뭄이 빈발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어 물 관리에 대한 시름이 더 깊어지고 있다.

때문에 물의 수요와 공급을 과학적으로 통제 관리함으로써 농어촌 지역 주민들에게 친숙하고 재난으로부터 자유로운 수변환경을 돌려줄 수 있는 대책 마련이 요구되고 있다.

한국농어촌공사가 오는 2012년까지 추진 할 '저수지 둑 높이기' 사업은 이 같은 목적과 맥락을 같이 한다.

기존 농업용 저수지를 재개발해 홍수 및 가뭄 피해를 예방하고, 환경유지용수 공급 등을 위해 저수량을 추가 확보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다. 저수지 둑 높이기 사업이 정부의 4대강 사업 일환으로 추진되지만 4대강 사업과 성격이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농어촌공사 전남지역본부에 배정된 사업비는 전체 7640억원으로 대상 사업지구는 21개 지구다. 이 중 영산강수계 14개소와 섬진강수계 4개소, 유역 밖 3개소 등이다.

지난 2009년 12월 착공한 나주시 봉황면 만봉, 장성 유탕, 화순 장치 저수지 등 3개소가 착공에 들어갔다. 올해는 나주 백용, 함평 대동 저수지 등 6개소와 유역밖 2개소가 착공할 예정이다. 장성호, 광주호, 나주호 등 나머지 10개소는 올해 설계를 거쳐 내년에 착공된다.

이를 통해 노후화되거나 오래전 설계기준으로 건설된 저수지의 둑을 덧대 높이 쌓아 시설물의 구조적 안정성을 강화하는 '제당 높임', 홍수조절용 수문 및 방류시설을 보강하기 위한 '구조 확장' 등의 공사를 진행하게 된다.

따라서 저수지 둑 높이기 사업으로 지역에서는 7562㎥의 추가저수량을 확보할 것으로 전망된다. 전국적으로는 2억4000㎥ 상당의 물을 갈수기 및 농번기에 안정적인 공급을 가능하게 할 것으로 점쳐진다.

뿐만 아니라 노후화되고, 과거 설계 기술로 설치된 저수지의 기능을 대거 보강할 수 있게 돼 홍수와 지진 등 재난 때에 저수지의 안정성도 크게 확보할 수 있다. 지난 1970년대 시행된 '영산강 유역 종합개발사업'이래 최대 치수사업이 진행되는 셈이다.

그러나 치수 사업은 단지 토목사업 위주의 경제 살리기 사업에 그쳐서는 안 된다. 새로운 수리 문화를 창출해 내야 한다.

미래를 위한 치수 사업이지만 저수지 주변에 위치한 문화재는 물론, 논과 밭 등 삶의 터전, 풍물과 사람들의 애환 등이 자칫 물속으로 잠길 수 있기 때문이다.

저수지 둑 높이기 사업이 진행되거나 진행될 예정 지역의 유래와 역사를 후손들에게 알리고 고향을 잃은 애환과 향수를 달래 줄 새로운 수리문화의 재창조는 저수지 둑 높임 사업에 부여된 핵심 과제다.

희망의 물길 남도민의 발자취] 2.나주 봉황 만봉리

최종수정 2010.07.14 09:00

다산 정약용도 쉬어가던 꿈길 같은 삶터

지석묘· 가마터 등 고대 역사·문화유산 숨결 오롯이
만봉저수지 반세기만에 둑 높여 미래 수자원 담아

나주시 봉황면 만봉저수지에서 바라본 용반마을 등 수몰지역 전경.


나주를 향해 흐르는 물줄기들은 거대한 영산강을 이룬다.

영산강은 때로는 범람해 위세를 부리기도 하지만 그것이 도리어 기름진 충적토가 쌓인 널따란 기름진 들녘을 만든다. 그러기에 나주에는 아주 일찍부터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농경 정착생활을 한 흔적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영산강 중상류지역에 위치한 나주시 봉황면 만봉리 '만봉저수지'를 찾았다. 정부가 4대강 사업의 하나로 전국 96개 저수지의 둑을 높이는 '둑 높임'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가운데 만봉저수지도 이에 포함됨에 따라 저수지 주변의 문화 유적 등을 취재하기 위해서다.

만봉저수지를 찾는 길은 다소 낯설었다. 광주를 벗어나 나주 봉황으로 가는 국도를 타고 가다 나주정신병원 방면에서 봉황농공단지를 지나 3㎞를 달리면 '덕곡리와 영암ㆍ세지' 표지판이 나온다.

여기서 덕곡리 방면 '만봉리석조여래입상' 표지판을 보고 좌회전한 뒤 820번 지방도로 갈아타고 2㎞ 정도 더 달리면 만봉저수지에 이른다. 영산강 지류인 만봉천 상류 지역이다.

만봉천은 덕곡리 비자나무골에서 발원해 덕용마을을 지나 우왕래들을 거쳐 덕룡저수지로 들어간다. 방죽밑골을 따라 북서류하면서 상쌍ㆍ하쌍 마을을 지나 만봉리 만년동, 우봉마을을 거쳐 만봉저수지에 담긴다.

저수지를 나선 물은 덕림리 신청마을 앞에서 서류해 세지면소재지인 오봉리 동창 마을을 굽이돌아 오열봉 아래 계동을 거쳐 서촌 서쪽에서 금천을 더해 북서류한다.

송제리에 이르러 동쪽 용궁저수지 물을 보태 죽동리로 나가 갓대들에서 굽이돌아 왕곡면 신원리 신원저수지 물을 받아 신원동마을을 거쳐 돌고지 마을 앞에서 감아돌아 왕곡 세지면의 경계를 이룬다. 동곡리, 장산리를 지나 영산포 운곡리 새끼내(석기내) 들을 지나 서닻내들로 나서 영산강에 합류한다.

16.47㎞를 흐르는 물길은 주변 농경지 153㏊의 농작물에 자양분을 공급하고 있다.

1957년 만봉리 저수지가 축조된 이후 53년 동안 한결 같이 물을 대주고 있다. 만봉리 저수지도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정부의 4대강 사업 중 하나에 포함돼 둑을 높이는 사업이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저수지 둑을 높이는 사업을 진행하면 둑이 5m 더 높아지게 된다. 저수지 수변 가장자리에 위치한 만봉리 용반마을 35가구(12.6㏊)는 물에 잠기게 된다.

수십년 동안 일궈 왔던 논ㆍ밭 등 삶의 터전은 물론 저수지 주변에 산재한 문화유산들도 함께 사라지거나 새로운 장소로 옮겨야 한다. 용반마을 주민들은 만봉저수지가 축조되던 당시 이미 한 차례 수몰을 경험한데 이어 또 다시 삶의 터전이 수장될 위기에 놓여 있다.

나주 봉황면 만봉리 용반마을의 당산나무.


'나주시지'에 따르면 용반마을은 마을 뒷산이 용의 형국으로, '뱀머리혈'이라는 풍수지리에 연유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다산 정약용이 전남 강진 만덕산으로 유배가던 중 이곳에서 쉬었다고 해 '만봉'이라 부르게 했다고 한다. 만봉리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마을이다.

'탠보 이씨(이씨)'가 처음 마을을 열었으며, 다음에 '하동 정씨'가 마을로 들어왔다고 한다. '경주 김씨' 김명우가 화순서 살다가 아버지가 당쟁에 휘말려 유배를 당하자 홀로 이 마을에 들어와 살았다 하며, 그 뒤 '함평 이씨', '진주 강씨' 등이 입주해 왔다 한다. 지금은 '김해 김씨', '진주 강씨', '경주 김씨'와 여러 성씨가 살고 있다.

용반마을에서는 정월 대보름에 당산제를 지냈다. 하지만 제는 지내지 않고 굿만 했다는 것이 다른 마을과 구별되는 특징이다.

마을 사람 모두가 몸을 깨끗이 하고 좋은 옷을 입고 한데 모여서 청주와 돼지머리를 비롯한 기타 음식물을 장만하고 굿과 줄다리기 등으로 친목을 도모했다고 한다.

당산나무는 할아버지 할머니 당산 모두 귀목나무로 수령은 500년 정도 된 것으로 추정된다. 마을 앞 노인정 옆에 당산나무 다섯 그루가 있었다. 하지만 당산제는 10여년 전부터 자취를 감췄다.

총 면적은 0.19㎢로, 밭 0.04㎢, 논 0.06㎢, 임야 0.09㎢ 등이다. 마을의 주요 산업은 미맥 재배이며, 주소득원 역시 미맥이다. 특작물로는 콩을 재배하고 있다.

저수지가 생기기 전 60가구가 넘었다는 주민들의 말을 빌면 저수지 축조는 이 마을의 운명을 바꿔놓은 일대 사건이었던 셈이다. 용반마을에는 현재 20여 가구가 20여명이 모여 살고 있다.

이동열(70) 할아버지는 "저수지를 쌓을 때 나도 흙을 날랐제. 논밭이 다 물에 잠겼어. 농사 지을 땅이 물에 잠겼는데 누가 남겠어. 다 떠났지"라며 그 시절을 회고했다. 그는 이어 "저수지 둑 높이기로 우리 집과 논 600평이 물에 또 잠기는데…. 자식이야 도회지로 가서 살겠지 뭐"라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저수지가 만들어진 뒤 생활이 편리해진 점도 있다. 만봉천 상류를 가로지른 저수지가 들어서기 전, 가뭄이 들면 이 일대에서는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주민들은 앞산 꼭대기에 올라가 제물도 없이 불만 피워놓고 비가 내리기를 빌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만봉수리조합이 생긴 뒤 물사정이 좋아져 '기우제'를 지낼 까닭이 사라졌다.

70년대에는 양식장으로 사용되면서 붕어ㆍ가물치ㆍ메기 등이 많이 잡혀 강태공들에게 인기 있던 저수지 중 하나였다. 하지만 몇년 전 수문 수리작업 때문에 물을 완전히 뺀 다음에는 물고기가 자취를 감춰 강태공들에게서도 잊혀지기 시작했다.

만봉저수지 수변내 고인돌 발굴 조사 모습.


만봉저수지 등 이 일대에는 고인돌이 분포돼 있다. 저수지 둑에 올라 보니 수변 가운데 부근에 고인돌이 보였다.

이 고인돌은 저수지 축조 당시 수몰돼 물이 빠질 때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고인돌을 받치고 있는 지석까지 모두 한눈에 들어왔다. 바로 용반지석묘군으로 저수지에는 9기의 지석묘가 물에 잠겨 있다. 하지만 만봉저수지 덕분에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돼 있다.

만봉저수지 상류와 마을입구 논에 남북 2열로 22기의 지석묘가 있다. 이 중 탁자식 고인돌 상판은 280㎝x240㎝x80㎝이고, 무덤방의 크기는 150㎝x40㎝x60㎝. 그리고 마을 안에 '전구장강대련청렴기념비'가 있는데 이 주위에 3기가 더 있어 이 곳에는 모두 33기의 지석묘가 3개의 군을 이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마을 입구 논에 있는 22기의 지석묘 가운데 3기는 단면이 구형으로 크며 그 가운데 1개 규모는 410㎝x250㎝x150㎝다. 여기에는 8개의 지석이 노출돼 있는데 장변의 길이는 160㎝이며 폭은 120㎝이다. 이 고인돌들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군장의 가족묘로 알려져 있다. 전남지역에서는 드물게 보이는 북방식 지석묘로 추정된다.

만봉저수지 여수토(물넘이)가 위치한 부근(쌍계사 방향)에는 '가마터'도 발굴돼 현재 조사가 한창이다. 조선시대 분청사기를 굽던 터로 추측이 된다. 그 만큼 만봉저수지 일대가 오랜 역사를 뽐내면서 옛날 다른 지역보다 선진문화지역이었음을 말해준다.

둑 높이기 사업으로 환경이 바뀌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다.

현재 저수지 주변에 위치한 820번 지방도도 물에 잠기게 된다. 이에 따라 우회도로가 개설될 예정이다. 만봉저수지 상류지역인 덕용마을에서 끝나는 도로도 영암까지 연장된다.

현재 조성 공사가 진행 중인 만봉지구 전원주택단지와 만봉저수지 인근 산자락에 위치한 '석조여래입상(전남유형문화재 64)' 등은 지나는 이들의 눈에 더 잘 띄게 된다.

만봉저수지는 영산강 지류에 건설되고 있는 승촌보(광주 남구)와 죽산보(나주) 가운데 지점에 위치해 농작물에 자양분을 공급하는 것은 물론 영산강의 수량을 유지해 주는 역할을 맡을 것으로 전망된다.

☞만봉지구 농업용 저수지 둑 높이기 사업


한국농어촌공사는 지난해 12월 나주시 봉황면 만봉리 저수지에서 '만봉지구 농업용 저수지 둑 높이기' 사업 기공식을 가졌다.

1957년 만봉리 저수지가 축조된지 53년만에 새로운 제방을 만드는 사업이다.

이 사업은 농어촌공사 전남지역본부 나주지사에서 맡고 있으며, 막바지 용지 매입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2012년 완공을 목표로 258억8600만원을 투입, 저수지 제방 높이 10.7m, 연장 294m, 유효저수량 73.9㎥(총저수량74.7만㎥)의 기존 저수지를 5.0m 올려 유효저수량을 241.6만㎥(추가 확보 166.9㎥)로 보강한다.

저수지 측면에 위치한 69m 규모의 여수토(물넘이)는 고정식으로 바뀐다. 기존 저수지에 없던 취수탑(높이 16.8m)도 들어선다. 그동안 단순히 농업용수로만 쓰였지만 사업이 완성되면 하루 9245㎥의 물이 환경용수로 공급된다.

[희망의 물길 남도민의 발자취] 3. 화순 이양 장치리

최종수정 2010.07.14 09:00

수 백년 흘러내린 설화 속 이야기 '넘실'
 
장치리ㆍ묵곡 2리 등 역사 속 새 장 장식
가마터 등 재발견…70년대 이어 두번째
주민들 "힘들어도 다시 시작해야" 기대
 

화순군 이양면 장치리저수지 둑 높이기 사업이 완료되면 수몰 될 장치리 마을 앞 고추밭.


화순군 이양면 '장치리 저수지'를 찾았다. 취재에 나선 건 지난 9일. 광주를 벗어나 화순을 지나 능주로 향하는 국도를 따라 있는 논에는 벼가 한창 자라고 있었다. 농부들은 물꼬를 들여다보거나 만지고 있었다.

화순읍에서 19㎞ 남쪽에 위치한 입교(갓다리), 옛 경전선의 철도역인 입교역 앞을 지나 이양 방면으로 가다 보면 복내로 갈라지는 표지판이 나온다. 여기서 복내 쪽으로 좌회전해 금능리 방향으로 5㎞ 정도 더 달리면 장치리 저수지를 만난다.

저수지 아래 도착하자 장치지구 농업용 저수지 둑 높이기 사업 현장 사무소가 눈에 들어왔다. 이 저수지는 보성군 복내면 경계 계당산(580.2m)과 화순 한천면 경계 두봉산(631m) 연결 계곡에 자리한 '산악형 저수지'로, 1976년 축조돼 장치리 골짜기와 어시천 물을 담고 있다. 이 물은 강성리와 품평리 등 주변 농경지 347㏊에서 재배되는 농작물에 자양분을 공급하고 있다.

저수지 둑 높이기 사업이 진행 중인 장치리저수지 수변 전경.


이 지역의 논들이 수리안전답으로 바뀐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70년대 기존의 농지기반 조성사업에서 벗어나 관개배수 뿐만 아니라 토지 이용, 영농구조 개선, 유지관리를 겸한 대단위 농업종합개발계획을 추진했다. 장치리 저수지는 이 시기에 비해 다소 늦지만 농업기반시설 확충이라는 같은 목적으로 축조됐다.

이 일대는 저수지가 들어서기 전만 해도 이수 차원의 농경이 주를 이뤄졌다. 따라서 모내기를 끝낸 논에 물을 대기 위한 '물꼬' 싸움이 비일비재했다. 반면 7∼8월 장마철이 되면 마을 앞을 지나는 하천이 범람, 홍수 피해를 당하는 일도 허다했다고 한다. 먹고 살기 힘든 시절 아픈 추억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저수지가 들어선 뒤 곳곳에서 경지정리사업이 진행돼 저수답은 알맞게 건조된 논으로 천수답은 수리안전답으로 모습을 바꿔 갔다. 야산이 논으로 변했고, 목화밭은 벼를 심는 논으로 개발됐다. 지역민들의 생계수단은 물론 농경문화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가뭄이 들면 지냈던 '기우제'도 저수지가 생긴 뒤 사라지게 됐다.

저수지가 축조된 지 34년만에 또 한번 변화의 물결을 만나고 있다. 정부의 4대강 사업의 하나로 추진 중인 저수지 둑 높이기 사업에 장치리 저수지도 포함됐다. 이 사업으로 이양면 장치리, 묵곡2리를 포함해 농경지와 가옥 등 45㏊가 물에 잠긴다.



장치리저수지 둑 높이기 사업이 마무리되면 수변으로 변할 장치리 농경지 전경. 최기남 기자


▲이양면 장치리=장치리 저수지 둑 아래 장치교(1975년 건설)를 건너 저수지 상류쪽으로 도로를 따라 가면 장치리 마을이 있다. 화순군지에 따르면 장치리의 지명은 장치동마을의 이름을 땄다.

장치리는 장치동, 용암리, 운수동 등 3개 자연마을로 구성돼 있었다. 운수동은 장치제 저수지 축조로 수몰됐으며, 용암리는 상장치마을로 불리다가 1970년께 13호가 이농하면서 폐촌됐다고 한다.

장치동은 중몰마을 또는 중장치로 불리며 단일마을로 구성됐다. 장치동 마을의 뜻은 원래 이 마을이 있는 골짜기를 장자굴 골짜기라 부르는데 작은재골〈장자굴〈장재동〈장치동(莊峙洞)으로 변천된 것으로 보고 있다. 장재의 원뜻은 바로 마을 북동쪽에 있는 작은재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중몰의 뜻은 장자굴 골짜기에서 가운데에 형성된 마을이란 의미로 이렇게 부른다.

1759년 여지도서에는 상동변면(上東邊面), 1789년 호구총수에는 능주목(綾州牧) 상동면(上東面) 장치리(莊峙里)로 기록돼 있으며, 1867년 대동지지에는 능주목 인물면(人物面), 1895년에는 나주부(羅州府) 능주군(綾州郡) 송석면(松石面), 1896년에는 전라남도 능주군 송석면,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능주군 송석면 장치동(莊峙洞)으로 기록돼 있다.

1913년 행정구역개편으로 화순군 송석면 장치동, 1914년 지방행정구역개편으로 송석면 장치리(莊峙里)(장치동, 용암리, 운수동)로 편입됐고 1932년 11월 1일 면폐합으로 송석면과 도림면이 합해 이양면이 되면서 화순군 이양면 장치리가 되었다. 1개반으로 구성돼 있다.

이 마을은 처음에 남씨들이 입향 거주했지만 이사를 떠나고 조씨가 마을로 들어왔다고 전한다. 1690년경 창녕조씨 조일복(1657∼1688)이 부춘면 부춘동에서 입향했다.

1920년께 진주정씨 정한중(1894∼1944)이 장흥 유치에서 거주하다가 마을로 들어왔다. 1950년경 제주양씨 양회만(1918∼1988)이 시암내에서 거주하다가 입향했다고 전한다. 지금은 18여명이 살고 있는 작은 산촌마을이다. 창녕조씨재각(1989년 건립), 점골마을터, 서당터, 장치교(1975년 건설) 등의 문화 유산이 있다.

이 마을은 장치리 저수지 수변 인근에 위치한 가옥과 축사 5동과 논밭 등 농경지 일부가 물에 잠긴다.

이날 고추밭을 살피던 주민 조석환씨는 "올 여름 유난히 변덕스런 날씨 때문에 고추농사 짓기가 힘이 든다. 저수지 둑 높이기로 고추 밭이 수몰되게 돼 앞으로 얼마나 더 농사를 지을 수 있을까 싶다"라면서도 "땅이 물속에 잠기지만 예전만큼 힘들기야 하겠는가. 다시 시작하면 되지"라고 아쉬움을 달랬다.

저수지 수변 인근에 위치한 축사도 수몰 대상이다. 축사는 텅 비어 있었다. 축사 인근에 2기의 지석묘가 보였다. 그 중 1기는 반쯤 넘어져 있고 현재 석축으로 사용되고 있다. 상석의 규모는 너비 130㎝, 폭 90㎝ 두께 100㎝이었다.

축사 옆에 위치한 밭은 조선후기 백자가마터로 추정되는 가마터가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가마는 밭을 일구기 위해 나온 잡석으로 쌓여져 있어 그 실체를 눈으로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대접과 접시조각 유약을 바르지 않은 접시 조각, 가마의 벽체 조각 등이 문화재지표조사 결과 드러났다. 이 가마터는 하반기께 시굴조사가 이뤄질 전망이다.

장치리저수지 상류 묵곡 2리(용암마을) 군내버스정류소.


▲이양면 묵곡2리(용암마을)=장치리 마을을 뒤로 하고 묵곡 2리 월암마을로 향했다. 장치리 저수지의 또다른 상류지역으로 저수지 수변도로인 지방도 58호선을 따라 가면 마을이 나온다. 장치리 저수지 둑 높이기 사업이 마무리돼 물이 차면 이 마을의 가옥 20동, 폐교, 농경지 등이 수몰 될 예정이다.

현재 30여명이 삶을 꾸리고 있는 월암마을은 먹실, 어시랑, 도량, 월봉마을 등 자연 마을들과 함께 묵곡리에 속해 있다. 묵곡리는 먹실마을을 한자로 표기한 먹 묵(墨)자와 골 곡(谷)자를 따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월암마을은 마을 남쪽에서 뻗어온 다리산의 형태가 둥그런 산 형태를 하고 있다고 해 붙여진 지명이다.

1759년 여지도서에는 상동변면(上東邊面), 1789년 호구총수에는 능주목(綾州牧) 상동면(上東面), 1867년 대동지지에는 능주목 인물면(人物面), 1895년에는 나주부(羅州府) 능주군(綾州郡) 송석면(松石面), 1896년에는 전라남도 능주군 송석면,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능주군 송석면 월암리로 기록돼 있다.

1913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화순군 송석면 월암리,1914년 지방행정구역 개편으로 송석면 묵곡리(묵곡리, 어시동, 월암리, 도량리, 월봉리)로 편입된데 이어 1932년 11월 1일 면폐합으로 송석면과 도림면이 합해 이양면이 되면서 화순군 이양면 묵곡리가 됐다. 현재 묵곡2리이며 1개반으로 구성돼 있다.

1800년경 여양진씨 진광표(1780∼1821)가 현 도암 정천리에서 거주하다가 입향하고, 1835년경 남원양씨 양온(1808∼1854)이 충남 공주군 이인면 용석리에서 거주하다가 마을로 들왔다.1860년경 장흥마씨 마도록(1840∼1900)이 장흥 장평에서 거주하다가 입향했으며, 1914년경 청도김씨 김영암(1894∼1938)이 춘양 석정리에서 살다가 마을로 들어왔다고 한다.

월암마을 입구에 도착하자 학교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1999년 3월 폐교된 묵곡분교였다. 1958년 4월 4학급에 97명으로 이양북초등학교 묵곡분교로 개교한 이 학교는 1965년 송곡초등학교로 승격됐다. 이후 급속히 학생수가 줄기 시작하면서 1988년 묵곡분교로 지정됐다가 1999년 결국 폐교 됐다. 폐교 당시 3학급에 학생 수는 8명이었다. 개교 이후 총 23회에 걸쳐 699명의 인재를 키워냈던 이 학교는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학교 맞은편 도로 아래에는 '묵곡군내버스정류소' 간판이 걸린 가옥이 한 채 있었다. 색이 바란 간판은 세월의 흔적이 묻어났다. 마을 앞에는 정미소와 느티나무아래 정자가 있었다.

정자에서 만난 진육환(80)할아버지는 "마을이 한창 번성할 때는 인근 마을까지 합쳐 학생수만 300여명이 넘었지. 마을 사람들도 많았어. 그때는 정월이면 굿도 하고 했는데 지금은 그런 풍습은 다 사라지고 나이먹은 노인들만 살고 있다"고 전했다.

저수지 둑 높이기에 대해 말을 건네자 진 할아버지는 "처음 저수지가 만들어질 때 이 마을 사람들이 반대를 많이 했지, 당시 저수지 축조를 맡았던 관리들은 주민들을 피해 도망을 다녔을 정도였다"며 "그때만 해도 농사를 지어 가족들을 먹여 살리던 시절이었으니 농토를 잃게 된 주민들이 반발한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라고 옛일을 회상했다.

"내 땅도 1269평이나 물에 잠기게 됐다"는 진 할아버지는 "평생을 살아온 터전을 잃게 돼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막막할 뿐"이라며 "그것 외에는 별다른 걱정은 없다"고 했다.

장치저수지 상류 묵곡 2리 월암마을 느티나무.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면 옛 회관건물 옆에 느티나무 두 그루가 골목길 한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었다. 수몰예정지구내 위치해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수령은 200여년이 넘어 보이는 느티나무였다. 이 마을에서는 정월 대보름이면 당산굿, 시암굿, 마당볼비를 했다고 한다. 당산제는 이 곳에서 지냈다고 한다. 특히 당산점으로 풍년을 점쳤다. 당산나무 잎이 한번에 피면 풍년이 들고 나뉘어 피면 가뭄이 든다고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당산제는 사라진지 오래됐다.

다시 마을 앞으로 나왔다. 저수지 수변 방향으로 새마을 창고와 폐가 3동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건물 뒷편은 현재 밭으로 이용되고 있지만 문화재 지표조사결과 이 지역에는 유물이 있을 것으로 추정됐다. 그러나 눈으로 볼 수 있는 유물은 쉽게 띄지 않았다. 저수지 둑 높이기 사업이 완료되면 수변으로 바뀌게 될 마을앞 들녁에는 벼들이 한창 자라고 있었다.
 
물길은 역사와 문화가 함께 녹아 흐른다. 긴 유로(流路)를 따라 수 백년 역사를 품은 갖가지 설화가 함께 굽이쳐 흐르고 그 물길을 닮은 문화가 생성되고 발전해 왔다. 장치리 저수지 상류에 위치한 이들 마을들도 새 바람의 물결이 일고 있다.
 

▲장치저수지 둑 높이기 사업=한국농어촌공사 전남지역본부가 추진하는 장치저수지 둑높이기 사업은 화순군 이양면 장치리ㆍ 묵곡리 일원에 298억여원을 투입, 2012년 완료를 목표로 하고 있다.

주요 사업은 수자원 확보 및 홍수 조절 등 기능을 추가로 구비하기 위해 기존 저수지의 둑을 15.3m에서 24.5m 높이는 것으로, 저수량은 기존 172만7000㎥보다 364만9000㎥ 늘어난 537만6000㎥에 달하게 된다. 둑 높이기 사업이 완료되면 장치저수지는 화순관내에서 가장 저수지가 될 전망이다.

기존 저수지에 없던 취수탑이 설치되고, 여수토와 방수로를 확장해 방류시설을 보강한다. 한국농어촌공사 전남지역본부는 지난 3월 이 사업 착공식을 가졌다.



[희망의 물길 남도민의 발자취] 4.장성읍 유탕리

  • 기사입력 2010.07.19 19:15
  • 최종수정 2010.07.20 09:48

맑은 물 저수지 아래 주민들에 제공…마음도 '풍요'
유서 깊은 청정마을…푸른 산 등 그대로 관광자원


장성읍 유통리저수지 상류에 위치한 서동마을의 계단식 농경지.


▲유탕저수지와 주변마을=전남 장성읍에서 전북 고창을 연결하는 국도 1호선을 따라 장성호 방향으로 가다 보면 '유탕마을' 입구 표지석이 나온다.

마을 방향 표시를 따라 오른쪽으로 들어서면 마을입구부터 중앙과 주변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그루의 당산나무가 마을을 감싸 평화롭고 마음의 풍요로움을 한껏 느낄 수 있다. 수령 또한 250~270년 사이인 것으로 보고되고 있지만 400년 이상 된 것으로 추측된다.

유탕리는 원래 읍동면으로 유탕ㆍ서동으로 이뤄졌다. 1789년 호구총수에는 유탕리과 서굴리가 나온다. 행정구역명칭일람(1912)에 상동리, 서굴리ㆍ유탕리가 나오는데 1914년 이 마을을 합쳐 유탕리라고 했다.

유탕(流湯)이란 지명은 마을 앞뒤로 흐르는 원수통과 참샘이 있는데 그 물줄기가 마치 여인네의 젖줄기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처음에는 '유탄(乳灘)'이라 불렸으나 일제 침략기에 '유탕'으로 바뀌었다고 전해진다.

유탕마을은 당산제로 유명하다. 당산제는 장성 삼계면 생촌 오당제와 함께 장성지역을 대표하는 서낭굿으로 450여년의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다.

새마을운동이 한창일 때 주민들 사이에서 미신타파를 주장하며 당산제 폐지를 검토하기도 했다.

그러나 징병에 끌려간 사람들이 무사히 돌아오고 월남에 파병된 마을 출신 장병들이 무사귀환해 현재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당산제를 유지하고 있다. 최근 마을 청년들이 많이 없어지고 당산제에 대한 참여율이 줄어들면서 당산제에 대한 의미도 퇴색되고 있다.

유탕마을을 지나 상류로 약 1㎞ 더 가다 보면 장성~고창간 고속도로 사이로 '유탕저수지' 둑이 눈에 들어온다. 둑은 장성 1터널과 2터널 교각 너머에 자리하고 있다. 바로 '유탕지구 농업용 저수지 둑 높이기 사업' 현장이다.

현재 둑을 축조하기에 앞서 제방이 들어설 산자락의 벌목 작업이 마무리된 상태였다. 장맛비가 내리던 지난 16일 산위에서 흘러내는 물이 도로를 침수시키지 못하도록 물길을 돌리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유탕저수지 제방 전경


1959년 축조된 유탕저수지는 장성읍 유탕리와 담양 대전면 평장동과 경계가 되는 불대재 서쪽 골짜기, 남쪽 불대산 북쪽에서 내린 물, 상동마을에서 용소골 물을 더해 물을 담는다.

909㏊에 달하는 유역에서 흘러내린 물은 방죽밑 하천 골을 지나 수산리 5층 석탑이 있는 토기들로 나가 신천촌 서쪽에서 황룡강과 합해진다. 이 구간을 따라 펼쳐진 농경지 등 144.4㏊에 자양분을 공급하고 있다.

저수지가 축조되기 이전까지 이 일대는 천수답이었다. 장성군 지역이 산악지형으로 이뤄져 평야가 적고 산지가 많은 탓에 농사를 짓는 물을 가두기가 어려웠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매년 모내기철만 되면 저수지 상류에 자리한 서동마을의 계단식 논에서 물꼬를 터주지 않으면 하류지역에서는 모내기를 하지 못했다. 하지만 저수지가 들어서면서 이 일대는 수리안전답으로 바뀌었고, 농사를 짓는 농민들도 물 걱정을 덜게 됐다.

유탕저수지를 왼쪽으로 바라보며 꼬불꼬불 산길로 들어갔다. 도로는 포장이 돼 길을 오르는 데 문제는 없었다. 저수지 둑높이기 사업과 함께 이 도로는 폭 8m 규모로 확장 이설된다. 도로에 편입될 예정인 지역의 분묘는 이미 이장했거나 이장을 준비하고 있었다.

유탕리저수지 인근 지석묘.


도로 끝 지점에는 청동기 시대로 추정되는 지석묘군이 위치하고 있다. 지석이 확인된 것은 3기로 10m 정도의 거리를 두고 일렬로 분포돼 있었다.

이 중 1기는 상석의 일부가 매몰돼 규모를 알 수 없었다. 규모가 가장 큰 2기는 길이 4.5m, 너비 3.5m, 두께 2.2m로 확인됐다. 3기는 분묘 사이에 위치해 매몰돼 파악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하지만 지석묘들이 위치한 곳은 지대가 높은데다 확장 이설될 도로와 경계에 있어 현재 자리에 그대로 보전될 전망이다.

서동마을 입구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상수원보호구역' 표지판이었다. 1997년 마을 아래 유탕저수지와 수원이 되는 절안산 계곡 일대와 마을을 지나 흐르는 천이 모두 '상수원보호구역'로 지정돼 개발이 제한됐다. 장성읍 지역에서 보기 드문 청정 마을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서동마을은 3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졌다. 마을 동남쪽 절안산 자락의 서동(서굴), 마을중앙의 가남정, 남쪽 높은 곳 계곡 좌우에 상동이 있다.

500여년 전 김해김씨가 서굴(서동)에 들어와 마을 이름을 '운동(雲洞)'이라 했다고 한다. 그 후 1770년께 전주이씨, 1890년 탐진최씨, 1900년께 진주강씨와 하동정씨, 1947년께 평산신씨, 1950년께 장수황씨 등이 들어왔다고 한다.

일제말에 마을이 서골과 상등으로 양분됐다가 해방후 다시 합쳐져 서동(西洞)이라 부르고 있다. 유탕 계곡의 위쪽에 있어 상동이라 하고 상동의 서쪽 골이기 때문에 서굴 또는 서동이라 했다고 한다. 마을 중앙의 '가남정'은 옛날 하청사 관음전이 있던 자리라고 한다.



유탕리저수지 둑 높이기 사업으로 이전이 확정된 서동마을의 한 가옥과 돌담.


유탕저수지 둑 높이기 사업이 끝난 뒤 저수지에 물이 차면 이 마을 가옥 2동과 축사 1동 등이 영향을 받게 돼 이전된다. 이전 할 가옥 중 한 동인 김홍동씨의 집에서 골짜기 너머에는 '열녀정씨 기적비'가 세워져 있었다. 이 또한 이전 대상이다.

1994년 이철종씨가 세운 '서동부락 표지석'을 따라 마을로 들어가다 저수지 상류지역과 골짜기를 따라 계단식 논이 눈에 띈다. 주민들은 모래들ㆍ붕어들ㆍ제안들이라 불리는 논에서 주민들은 쌀농사를 재배한다. 산악지대이다 보니 기후 때문에 보리농사 등 다른 작물은 재배하기 힘든 때문이다.

예전에는 저수지를 포함한 주변에 넓게 퍼져 있는 화강암질 편마암을 캐내 돌절구ㆍ맷돌ㆍ확독ㆍ구들장 돌 등을 만드는 채석이 성황을 이뤘다. 산업화와 함께 철ㆍ콘크리트가 출현하면서 이 지역의 채석 업은 쇠퇴했다고 한다.

돌담


마을로 들어서면 낮은 돌담에 60~70년대식의 양철지붕과 슬레이트 지붕이 대부분이었다. 가지런히 쌓아 올린 돌담, 능선에 군락을 이룬 소나무 등. 그 옛날 틀었던 둥지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이 마을 김종휘씨의 집 대문 오른쪽에는 '정3품통정대부 김공용휴시혜비'가 서 있었다. 1901년께 세워진 것으로 추측되는 비각은 사방 1칸의 팔작 지붕형 석조구조물로 사각 돌기둥과 기둥 가운데 3개의 기둥을 세우고 홍살과 같은 형태로 연결돼 있었다.

이 비각 인근에는 '장성부사김일진 교청검부망비'도 볼 수 있었다. 또 송강 정철과 이석탄이 학문을 깨우쳤던 '정이암'도 있었으나 6ㆍ25 전쟁때 소실됐다고 한다.

계곡 끝 절안산에는 옛날 상청사ㆍ하청사ㆍ인월사 등 대사찰들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없어지고 그 흔적들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다만 소죽골 중간에 고려시대에 나웅대사가 창건했다는 나웅암터에 '마여래석불'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이 마을이 얼마나 유서가 깊은 지를 짐작케 했다. 이들 유적들은 저수지와 멀리 떨어져 둑 높이기 사업을 하더라도 큰 영향은 받지 않는다는 게 농어촌공사 관계자의 말이다.

물 시름 잊게 한 50년…식수원으로 활용
홍수ㆍ가뭄 예방, 노후 제방 보강차원 시행

▲유탕저수지 둑 높이기=1989년 7월 25일 장성군 장성읍 일대에 343㎜라는 물 폭탄이 쏟아졌다.

갑자기 쏟아진 폭우로 도로가 유실되고 교량 18곳과 하천제방 17곳, 수리시설 13곳이 부서지면서 폭우에 실린 토사가 장성읍내로 밀려들어 삽시간에 수중도시로 변해 버렸다. 당시 물난리로 9명이 생명을 잃고 피해액만도 118억원에 달했다고 한다. 이 피해액은 당시 1개의 읍을 새로 만들수 있는 액수였다고 한다.

장성읍에서 북서쪽에 위치한 유탕저수지 일대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쏟아진 폭우가 유탕저수지를 넘어 서봉천으로 흘러들던 중 신촌리 인근 하천 제방이 무너졌다. 급류가 그대로 마을을 덮치는 물난리를 겪었다.

서동마을에서 만난 김형동(63)씨는 당시를 1989년이라고 정확히 기억했다. "마치 하늘이 뚫린 것 같이 비가 내렸지, 산은 손톱으로 얼굴을 할 퀸 것과 같이 골이 파였다"며 "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하천으로 쏟아지면서 제방이 무너져 유탕마을 아래 신촌리가 물난리를 겪었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작년에는 유탕 저수지가 바닥을 드러냈다. 2008년 겨울부터 이어진 가뭄이 지난해 여름까지 지속되면서 저수지량이 뚝 떨어졌다.

1959년 둑을 쌓아 저수지를 만들고 1997년부터 상수원으로 활용해 오면서도 물걱정이 없었던 주민들은 저수지 물이 마르면서 농사는 차제하더라고 마실 물 걱정을 해야 했다.

이처럼 이상기후에 따른 홍수와 가뭄 등으로 인한 자연재해를 예방하기 위해 '유탕지구 농업용 저수지 둑높기 사업'이 추진된다.

유탕리저수지 둑 높이기 계획 평면도


영산강 유역내 14개소 저수지 둑높이기 사업 중 하나로, 3월 착공한 이 사업은 한국농어촌공사 장성지사가 맡고 있다. 2012년까지 총 179억6000만원을 투입해 저수지 둑을 지금(20m)보다 7m 높여 저수량을 223.0㎥로 확대한다.

124.9만㎥의 수자원을 추가로 확보해 가뭄에 대비 물부족을 해소하고, 여유수량은 하천 환경용수로 1일 7.71㎥ 흘려 보내는 역할을 맡는다.

무엇보다 1959년 준공된 유탕 저수지는 이미 50년이 경과한 노후시설로 시설물 보수보강이 필요한 상태이다. 하류 유탕1ㆍ2리 주민에게는 노후 저수지를 보강 재설치 함으로써 제당 안전도 향상에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또 저수지 상류 서동마을 주민들의 교통편의를 위해 저수지 수변으로 2차선 포장도로 1.5㎞가 새로 개설돼 주민들의 생활도 변화될 전망이다.

희망의 물길 남도민의 발자취] 5. 함평 대동 운교리

  • 기사입력 2010.07.26 13:13
  • 최종수정 2010.07.26 20:27

나비와 곤충 등 생태체험 수변공간으로



대동저수지 안에 만들어진 '독도 모형'.


'나비의 고장'으로 유명한 전남 함평군. 나비축제가 시작되기 전인 1999년 이전까지만 해도 함평은 이른바 '고구마 사건'외에 특별히 알려진 것이 없는 시골 도시였다.
1976년 고구마 수매를 둘러싼 함평군 농민들의 피해보상 투쟁은 현대 농민운동의 출발점으로 평가된다.

함평(咸平)이라는 이름은 조선시대 태종 9년(1409)에 함풍현과 모평현을 통합하면서 함풍에서 '함(咸)'자를, 모평에서 '평(平)'자를 따서 지었다.

군 전체 면적의 40%를 차지하고 있는 낮은 구릉지와 평양지대는 농업생활을 할 수 있는 지형조건이지만 사방이 산에 둘러싸인 데다 땅까지 척박한 마을 주민들은 고구마로 연명해야 했고 시골의 가난은 대를 이어 후손들에까지 계속됐다.

그러나 나비를 브랜드로 생태체험관광지로 거듭나면서 함평은 전국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대동저수지도 2006년 7월 '함평 자연생태공원'이 개원하면서 일반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는 물만 공급하는 저수지로서 역할만 수행했던 대동저수지가 생태공원으로 거듭나면서 광주ㆍ전남 지역민들의 휴식 공간으로도 자리매김하고 있다.

'함평 고무마사건' 등 현대 농민운동 참여
마량마을 18가구 새 터전서 새 삶 일군다


대동저수지 제방에서 바라본 수몰 예정 농경지. 최기남 기자 bluesky@


▲ 대동저수지 주변 문화= 한낮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23일 함평군 대동면 운 교리에 자리한 대동저수지를 찾았다.

나비축제와 함께 함평이 전국 최고의 생태관광지로 알려지는 데 일조를 하고 있는 생태체험지가 조성돼 있는 저수지로, 영산강 유역내 14개소 저수지 둑높이기 사업지 중 하나이기도 하다.

저수지는 함평읍에서 함평천을 지나 나산면 방면 지방도로를 따라 승용차로 10여분 정도만 가면 바로 대동면 소재지인 향교리를 지나면 운교리가 나온다.

운교리 판교마을 앞을 흐르는 하천을 왼쪽으로 끼고 농로를 따라가면 저수지 제방을 볼 수 있다.

저수지 제방에 올랐다. 제방 왼쪽 야산(236m) 자락에 '화운사'라는 작은 사찰과 함께 제방아래 펼쳐진 28㏊ 규모의 농경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논에서 재배되고 있는 벼는 저수지에서 흘러내린 물과 한여름 뙤약볕을 받으며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다. 인근 밭에는 고추와 콩 등이 재배되고 있었다. 간혹 논밭을 둘러보는 농민들이 보였지만 모내기철만큼 부산하지는 않았다.

이 농경지는 저수지 둑 높이기 사업이 마무리되면 수변으로 바뀌게 된다. 문화재지표조사에 나섰던 전남문화재연구원은 이 농경지 일원에서 '회청색 경질토기편' 등이 확인됐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인근 판교마을에 위치한 고가인 '조지형 가옥', '한양 조씨 쌍효비', '효자함평노공비' 등 충효비는 저수지와 200m이상 떨어져 있어 둑높이기로 인한 영향은 받지 않을 것으로 전망됐다.

저수지 수문 옆 야산 둥지를 튼 '황새'를 뒤로 하고 저수지 인근 운교리 '마량 마을'을 찾았다. 운교리는 원래부터 대동면에 속했던 곳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리제를 시행하면서 대동면 운림, 판교, 갈구, 운제, 용성 전역과 신광면 장산 일부를 합해 운림(雲林)에서 운(雲)자와 운림에서 판교(板橋)에서 교(橋)자를 따 운교리라 했다고 한다.

대동저수지 둑 높이기 사업에 따라 이전 대상지가 된 마량마을 전경. 최기남 기자 bluesky@


운교리에 속한 자연 마을 중 한 곳인 마량마을은 저수지 둑 높이기 사업이 시작되면 새 둑이 들어설 위치에 놓여 이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이 새로운 보금자리를 준비하고 있다.

새 둑이 들어설 자리에 있는 농가 4채는 직접 영향권이지만 나머지 주민들은 뜻에 따라 이주토록 협의가 이뤄졌다.

이 마을은 1789년 호구총수 지명에 마갈산리(馬渴山里)가 지금의 마량(馬洋)인데 그 후 1912년이나 1914년 지명에는 나오지 않는 것을 보아 일단 이 마을이 폐촌된 것으로 추측됐다.

그 후 대동저수지 축조때 수몰지구인 갈구지 마을 주민 4세대가 이곳에 정착해 마을을 이뤘다. 현재는 18세대가 생활하고 있으며, '광산김씨'와 '함평노씨'가 주요 성씨를 이루고 있다.

마량이란 이름은 마을 뒷산 형국이 목마른 말이 물을 찾아 고개를 늘어뜨리고 있는 형국이어서 마갈뫼(馬渴山)라 불렀으니 마갈로 하자고 하였으나 협의 끝에 마량(馬洋)으로 마을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이어 주민들은 마을 앞 하천가에 물레방앗간이 생기면서 마을이 생동하였다고 하며 물방앗간 터는 말 구유터인데 물이 부어지므로 말이 물을 먹고 생동하여 마을이 번성하였다고 한다. 예전의 물방앗간 터는 현재 시설하우스가 들어서 있었다.

함평군 대동면 운교리 마량마을 주민들이 마을의 유래 등을 이야기 하고 있다. 최기남 기자 bluesky@


한여름 뙤약볕을 피해 마을 앞 정자에서 쉬고 있던 주민들을 만나 마을과 관련된 이야기를 묻자 이 같은 마을 유래를 들려줬다.

이 마을 주민들은 1976년 '함평 고구마사건'으로 불리는 현대 농민운동에 동참했다.

그해 11월 초순 농협이 수매 약속을 어기는 바람에 도로변에 야적해 놓은 고구마가 썩어가자 대동면에서 고구마 농사를 짓고 있던 당시 가톨릭농민회 전남연합회 총무였던 서경원 전 의원과 함께 투쟁을 벌였다. 서 전 의원은 1989년 4.26 총선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뒤 같은 해 9월 방북 사건으로 구속돼 의원직을 상실했다.

마을 주민들은 또 84년 '소값파동'때도 투쟁에 나서는 등 현대 농민운동에 적극 참여해 왔다.

마을 주민 노갑춘(73)옹은 "말의 성질이 외면으로는 포악한 듯 하나 내면으로는 온유해 사람을 등에 태워주는 동물인데 마을이 이런 말의 형국이라서 주민들이 모두 화목하게 살고 있다"면서 "그동안 옹기종기 모여 살아왔던 모습으로 주민들이 생활할 수 있을 지 걱정이 앞선다"고 말했다.

마을에서 나와 자연생태공원이 조성된 대동저수지 상류로 발길을 옮겼다.

함평군이 추진한 자연생태공원에는 한국춘란분류관, 나비ㆍ곤충표본전시관, 풍란 및 새우란관, 동양란관, 나비ㆍ생태애벌레 생태관, 양란전시관, 자생란전시관 등 7개 전시관이 들어서 있다.

또 관람시설로는 수서곤충관찰학습장, 장미원, 자란동산, 우리꽃생태학습장, 모란원, 괴석원, 외래꽃생태학습장, 나비먹이식물 및 흡밀원, 무궁화동산, 산삼포관찰학습장 등 16곳이 존재한다. 특히 저수지 안에 만들어진 '독도 모형'은 관람객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이밖에도 벽천폭포 및 노천폭포, 다목적집회장, 취사장, 캠프파이어장 등과 함께 어린이들이 마음껏 뛰어 놀 수 있는 공간도 조성돼 있으며, 현재 수목원 조성 공사가 한창이었다.

대동저수지 둑 높이기 사업의 한 방안으로 기존 제방을 높이는 안이 거론됐지만 이럴 경우 생태공원은 물론 신광면소재지까지 수몰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이에 따라 한국농어촌공사 전남지역본부 함평지사가 기존 제방 높이와 같은 높이의 새 둑으로 둑 높이기 사업을 추진키로 주민들과 협의, 생태공원 등은 수몰되지 않고 더 넓은 수변공간을 확보할 수 있게 되는 효과를 거뒀다.

60년 넘게 농작물 등에 자양분 공급
새 둑 축조 하천생태 보전 역할 맡아

대동저수지 둑 높이기 계획도


▲ 대동저수지 둑 높이기 사업=대동저수지는 함평읍, 대동면, 학교면, 엄다면 등의 농작물에 물을 공급해 주고 있다.

함평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대동저수지의 유역면적만 4390㏊에 이른다. 또 대동저수지 물로 농사를 짓는 수혜면적은 1개읍 3개면에 962.90㏊다. 함평군이 1개읍 8개면으로 이뤄졌는데, 1개읍 3개 면을 담당하고 있는 대동저수지는 '함평군의 대표 저수지'나 다름없다.

대동저수지의 첫 출발점은 신광천이다. 신광천은 함평군 신광면 원산리 덕동안골에서 발원해 학동 원남마을 지나 삼덕리 좌야마을 남쪽으로 흘러내린 뒤 함정리 구봉마을에서 나온 물을 만나 남류한다.

이어 백운교에서 부춘제 물을 더하고 신광면 월암리 가야마을을 감돌아 남동류하다 연천 앞들에 이르러 북동쪽 큰골에서 내린 물을 함께 조선마을 동쪽에서 대동저수지로 들어간다.

대동저수지의 역사는 일제강점기인 194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 저수지 설치확정 승인을 받은 뒤 1941년부터 5년 동안의 공사 끝에 저수지가 완공됐다.

축조 당시 여수로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주야 3일간 쏟아진 폭우로 제방이 유실돼 광복 후 다시 보수하는 우여곡절도 겪었다고 한다.

97년 저수지 시설 정비작업을 통해 9개의 수문을 설치하고, 취수탑을 정비했다. 제방도 안전도를 높였지만 축조된 지 60년이 넘다보니 여수로 등 저수지 시설이 노후화돼 안전에 대한 우려가 깊어지자 '대동지구 농업용 저수지 둑높이기 사업'을 추진키로 했다. 사업은 한국농어촌공사 전남지역본부 함평지사가 맡는다.

총 299억여원을 투입해 16m규모의 제방을 쌓아 저수량을 719만5000㎥로 확대한다. 196만9300㎥의 수자원을 추가로 확보해 가뭄에 대비 물 부족을 해소하고, 여유수량은 하천 환경용수로 흘려보내는 역할을 맡을 전망이다.

[희망의 물길 남도민의 발자취] 6.나주 다시 운봉리

  • 기사입력 2010.08.02 19:13
  • 최종수정 2010.08.02 19:19

역사 숨쉬는 다시벌…맑은 물로 삶터 살찌워



백룡저수지 제방에서 바라본 저수지 전경. 최기남 기자 bluesky@

 

전남 나주시 서남쪽에 위치한 다시면은 국도 1호선과 호남선 복선화 철도가 시가지를 관통하는 교통 요충지다.

신걸산과 백룡산을 비롯해 문평천, 백룡저수지 등 산자수명(山紫水明)한 지역으로 지난 1999년 환경부에서 고시한 청정지역이기도 하다.

금성산(450m)이 솟은 동북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낮은 구릉성 산지이다. 영산강이 남부를 굽이쳐 흘러가며, 그 지류인 문평천 유역에 넓은 다시평야가 형성돼 있다. 농토가 비옥하고 수리가 좋아 오랜 전부터 농업이 발달한 지역이다.

지난 1978년 영산강변 가흥리 늪지대에서 환경변천과정 등 농경의 기원을 밝히기 위한 한일양국 합동으로 화분검사법에 의한 도작 조사를 실시한 결과에 의하면 3000∼3500여 년 전부터 농경문화가 이루어졌던 흔적이 발견됐다.

그 이전까지 한반도에서 발견된 탄화미는 경기도 여주군 점동면 흔암리 제12호 주거지에서 출토된 것으로 그 시기는 BC 7세기 이전으로 추정되고 있어 다시면 가흥리에서 발견된 벼 화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BC 10세기 이전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는 쌀과 보리 등 주곡과 배ㆍ복숭아 등 과일, 수박ㆍ무ㆍ양파ㆍ고추ㆍ참깨 등이 재배된다. 이 같은 농작물이 자라는데 필요한 자양분은 운봉리에 위치한 '백룡저수지'가 맡고 있다.
 
백룡저수지 인근 역사ㆍ문화유산 오롯이
산신제단 등 존치…산간오지 새 길 열려

 

백룡저수지 상류 백운마을 정자


▲백룡저수지 주변 문화


저수지는 나주시 다시면 '다시여객자동차터미널' 삼거리에서 '삼봉 정도전 선생 유배지' 안내판을 따라 터미널 맞은 편 길로 1.8㎞가량 가다 보면 눈앞에 제방이 보인다. 다시면 운봉리 '백룡지구 농업용 저수지 둑 높임' 사업지구다.

'백룡제'라고도 불리는 이 저수지는 나주시 서북쪽의 금성산과 다시면의 백룡산 협곡을 가로막아 만들었으며, 일제 강점기인 1932년 나주 지역의 대지주였던 일본인 구로스미 이타로가 다시면에 수리조합을 결성해 축조했다.

저수지 안에 고인돌 16기가 수몰돼 있고, 용문 장터가 저수지 한복판쯤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저수지 수량이 많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는 없었다.

저수지 제방 왼쪽편 백동마을을 뒤로 하고 지방도를 따라 발길을 상류로 옮겼다. 백동마을은 '삼봉 정도전 선생 유배지'로 유명한 운봉리의 자연마을이다.

백룡저수지를 따라 2㎞정도 더 올라가면 다시면 최북단에 위치한 청정리가 나온다.
청정리는 1980년대 문평면에 속했다가 1983년 다시면으로 편입된 후 지금에 이르고 있다. 본촌(本村)ㆍ회룡(回龍)ㆍ금동(琴洞)ㆍ인동(仁洞) 등 4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돼 있다.

이 가운데 백룡저수지 둑 높임으로 영향을 받는 지역은 인동마을이다.

주민들이 '연바지 들', 쇠금바지 들' 등으로 부르는 마을 앞 농경지 3㏊ 가량이 저수지 둑 높임에 따라 수변으로 편입될 예정이다. 한 여름 들녘에는 벼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사실상 올해가 마지막이 될 풍년 들녘을 지키기 위한 농부들의 바쁜 일손은 불볕 더위도 아랑곳없었다.

백룡저수지 둑 높이기 사업이 완료되면 수변으로 변할 청정리 인동마을 앞 농경지에서 친환경 농약 살포 작업을 하고 있는 농부들. 최기남 기자 bluesky@


병충해 예방을 위한 친환경 농약을 살포하기 위해 논으로 나 온 인동마을 최길운(66)씨는 "먹고 살았던 터전이 없어지는데 마음이 편할 사람이 있겠는가"라며 "올해가 마지막 농사일 지는 모르겠지만 농사를 짓는 데까진 더 노력을 해야겠지"라고 아쉬움을 에둘렀다.

저수지 오른쪽 편 좁은 산길을 따라 1.5㎞를 오르면 백운마을 어귀가 나온다.

이 마을은 원래 사기를 굽던 곳으로 '사기실'이라 했지만 백룡저수지가 만들어지고 난 후 '백운'이라고 명칭이 바뀌었다고 한다. 마을 입구에서 저수지 상류 쪽으로 방향을 틀면 '심량정'이라는 동각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직 농지정리가 되지 않은 동각 밑 들에는 벼들이 자라고 있었다.

운봉리 백운마을 농경지에 자리한 지석묘군


이 농경지에는 약 25기의 지석묘가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지석묘는 대부분 마을에서 저수지로 흘러 들어가는 하천변에 형성된 농경지와 야산 경사면과 만나는 부분에 동서방향의 3열로 위치하고 있었다.

가장 큰 지석묘는 상석의 규모가 길이 540cm, 너비 420cm, 높이 150cm이다. 현재 지석묘는 농경지 조성과정에서 많이 파괴되고 주로 논두렁과 산 경사면 가까운 부근에 분포하고 있다. 농경지와 지석묘는 저수지 둑 높임 영향권에 들어, 홍수가 질 때는 물속에 잠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저수지 둑 높임으로 산간 오지인 백운마을은 새 길이 열린다.

저수지 제방 오른쪽 편 '전주이씨 문중'과 관련된 4기의 비석(백운마을 입구)을 옆으로 농어촌도로가 있다.

폭이 3m정도인 도로는 승용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좁은 길이었다. 자동차 두 대가 마주치게 되면 한 대가 양보를 하고 서서 기다리다가 다른 차가 지난 후에 지나야 되는 산길이다.

이 도로는 저수지 둑 높임과 함께 폭 5m규모로 확장된다. 산간 오지 마을을 오가는 길이 새롭게 열려, 주민들은 물론 추석이나 설 등 명절에 고향을 찾는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줄 것으로 보인다.

저수지 둑 높임과 함께 기존 도로 이설로 백동마을 도로변에 위치한 '백룡산 산신제단' 등도 이전 위기에 놓였었다. 그러나 마을 주민들의 요청에 따라 산신제단을 이설하지 않고 현재 자리에 위치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 농어촌공사 관계자의 말이다.
 
78년만에 새 둑 축조 미래 수자원 확보
자양분 공급ㆍ하천생태 보전 역할 맡아


자연 암반석을 활용해 만든 백용저수지 여수토


▲백룡저수지 둑 높이기 사업
다시벌의 젖줄인 백룡저수지의 명칭은 운봉리에 있는 백룡산(白龍山)에서 유래됐다. 유역면적 2730㏊, 수혜면적 120.5㏊, 만수면적 56.1㏊, 유효 저수량 315만t, 길이 226m, 높이 16.2m이다.

특히 저수지의 형태가 수로처럼 일자로 길게 늘어져 있으며, 제방에서 상류까지의 길이가 최대 1.5㎞에 달한다.

이 저수지는 1983년 문평면 소속에서 다시면으로 편입된 뒤부터 저수지에 물을 담고 흐르는 문평천을 다시천으로 부르자는 다시 주민들의 의견이 일기도 했다고 한다.

문평천은 나주시 문평면 학교리 덕석바위 골에서 발원하여 신방저수지에 담겼다가 촌전평을 지나 남류해 방동, 신동, 신양마을 앞을 타고 내린다.

평전마을에 이르러 석교제 물을 더하고 모전마을을 지나 국동리 국사마을 앞들에서 북동쪽 소학골에서 내려온 물을 보탠다. 중바지들을 거쳐 종명마을 앞에 이르러 동쪽 신촌골 물을 더해 기동을 거쳐 유전마을에서 동막골 물을 합하여 회룡마을을 지나 청정리 인동마을을 거쳐 괴정이들 밑 백룡저수지에 담긴다.

저수지에 담긴 물은 자연암반을 그대로 활용해 만들어진 여수토와 취수탑을 통해 흘러 내린다.

이 물은 운봉리 백동마을을 나서 칠봉마을 앞에서 동쪽 가운리 운암마을 물을 더해 월태리 들을 지나 다시면사무소와 다시장, 다시역이 있는 중앙, 신용, 대용, 월곡마을 시가지를 거쳐 영동리 영촌, 초동, 가흥리 정가, 신흥마을 앞을 거쳐 신석, 죽산리를 지나 터진목 나루로 나가 영산강에 합류한다.



1932년 백용저수지 축조당시 새긴 '백용제' 현판


수십 년 동안 다시평야에 농업용수를 공급해 오고 있는 백룡저수지는 축조된 지 78년이 넘었다. 제방 밑 도수터널에 새겨진 '백룡제(白龍濟)'라는 현판은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월의 흔적만큼 시간이 지난 저수지 시설은 노후화돼 시설물 보수보강이 필요한 상태이다.

[희망의 물길 남도민의 발자취]7.영암 금정 남송리

  • 기사입력 2010.08.09 13:12
  • 최종수정 2010.08.09 20:46

저수지 수변 따라 새길…산간오지 새 바람

영암 하면 딱 떠오르는 것이 월출산이다. 해발 809m로 그다지 높은 산은 아니지만 주변에 큰 산이 없어 유독 눈에 띈다.

특히 땅 속에서 솟구쳐 오른 듯한 기암괴석이 장관을 이룬다. 빼어난 산세가 마치 금강산을 축소해 놓은 것 같다고 해서 '호남의 소금강'으로도 불린다. 서해에 면한 관계로 가장 먼저 달을 맞이한다고 해서 월출산이라 칭한다는 유래가 재미있다.

월출산 위로 떠오른 보름달만큼이나 탐스러운 존재가 있다.

영암 특산물 중 특산물, 대봉감이다. 대봉감 최대 산지는 금정면이다. 영암군 청사가 위치한 덕진면에서 동쪽으로 20분 정도 거리에 있다.

2개 면을 아우르는 작은 고개를 넘어가는 길옆으로는 감나무가 지천이다. 들판의 벼 잎들은 저수지에서 흘러내린 물과 한여름 뙤약볕을 받으며 그 푸름이 진하고 두꺼웠다.

영암군 금정면 남송리 인곡마을과 입석저수지 사이에 자리한 느티나무 주변. 최기남 기자 blursky@


입석저수지 맑은 물 농작물에 자양분 공급
인심 넉넉한 12가구…대부분 대봉감 농사

▲입석저수지 주변 문화
입추를 앞둔 지난 6일 '입석지구 농업용 저수지 둑 높이기 사업 대상지인 금정면 남송리 입석저수지로 가는 길 주변 과수원에서 자라는 감나무에는 어린 대봉감이 속을 채우고 있었다.

영암에서 두 번째 높은 국사봉(614m) 자락에 위치한 금정면은 영암군의 11읍ㆍ면 중의 하나로 동쪽은 장흥군 유치면, 남쪽은 영암읍, 서쪽은 덕진면과 신북면, 북쪽은 나주시 세지면과 봉황면 등과 접경을 이루고 있다.

당시 나주군의 지역으로 사금(砂金)이 많이 나온다고 해 금마면이라 하여 남송 등 57마을과 나주군 원정면의 월평 등 29개 마을, 그리고 나주군 세화면 임천리 일부지역을 병합해 조선 고종 32년(1895년)에 지방관제 개정으로 영암군에 편입됐다.

1914년 4월1일 군ㆍ읍ㆍ면 폐합에 따라 용산 남송 쌍효 세류 아천 안로 연보 연소 와운 용흥 월평 청용 등 12개 리(里)로 개편, 금마면의 '금(金)'자와 원정면의 '정(井)'자를 따서 금정면(金井面)이라 칭하여 현재에 이르다가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2호에 의하여 용산리가 서쪽에 있는 신북면에 가까운 곳이라 하여 신북면으로 넘겨져서 현재 11개 리를 관할하고 있다.

입석저수지가 위치하고 있는 금정면 남송리는 나주군 지역에서 고종 32년 영암군에 편입된 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입석리, 지초리, 용반리, 용동리, 반계리, 인곡리를 병합 남송리라고 칭했다.

인곡마을 정자에서 만난 마을주민이 마을 관련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최기남 기자 bluesky@


입석저수지는 나주 세지면에서 영암 금정면으로 방향으로 난 23번 국도를 따라가다 남송리 남송마을 거쳐 장흥 유치로 넘어가는 송장고개를 넘어가기 전 왼쪽 편에 위치하고 있다. 1966년 축조된 이 저수지는 금정면 남송리와 쌍효리의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을 담아 금정들녘에 자양분을 공급하는 젖줄이다.

송장고개에서 저수지 둑을 타고 '쌍계사' 안내판을 따라 들어가면 남송2리 인곡마을이 나온다. 인곡이란 명칭은 '어질고 착한 사람들이 많이 산다'는 뜻에서 붙여진 마을이름이라고 한다. 이 마을은 최원웅(72)옹을 비롯, 12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산골 마을이다.

그러나 마을이 산촌이다 보니 살림살이는 그리 넉넉지 못했다. 마을 앞 큰들(저수지 수변)에 있던 논밭도 대부분 남송1리 마을 사람들의 소유였다.

이런 가운데 입석저수지가 마을 앞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변화의 시기를 맞았다. 풍부한 수자원과 지리적 여건을 바탕으로 마을 주민들이 대봉감 농사를 시작한 것이다. 지금은 이 마을 주민 대부분이 대봉감 농사로 살림을 꾸리고 있다.

인곡마을 정자에서 만난 최원웅 옹은 "마을 사람 모두가 어른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을 아끼는 마음으로 부지런하게 일하고 있다"며 "30여년 전부터 감나무를 재배하기 시작해 지금은 마을의 주 수입원이다. 이 감으로 자식들을 키워냈다"고 회상했다.

인곡마을 앞 감나무 밭에서 자라고 있는 대봉감이 속을 채우고 있다. 최기남 기자 bluesky@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인곡마을에서 저수지 쪽으로 난 계곡을 따라 형성된 밭에는 수백주의 감나무가 빼곡히 자라고 있었다. 감나무 밭과 저수지 사이에 석축으로 둘러싸인 느티나무가 보였다.

수령이 300여년은 돼 보이는 느티나무를 끼고 난 길을 오가던 마을주민이 잠시 머물며 한 여름 땀을 식히기에 제격이었다. 저수지 둑 높이기 사업이 마무리되면 마을 앞 감나무 밭과 느티나무는 저수지 상류 수변으로 들어갈 전망이다.

이 마을 뒷산 국사봉 남쪽 기슭에 쌍계사 터가 있다. 금정면에서 학교를 다녔던 학생들이 소풍을 다녔던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절터만 남은 쌍계사지에는 당간지주(幢竿支柱)와 선돌, 폐허가 된 건물터, 그리고 장생만이 남아 있다. 장생은 사지(寺址)에서 400~500m 아래 지점에 서있으며 인곡마을에서는 산길 숲속으로 약 2㎞의 거리이다.

이 장생은 장방형 자연석 화강암을 깨지 않고 자연모습대로 살려 괴기스럽게 조각한 수준 높은 걸작이다. 이들 장생의 연대는 쌍계사의 창건, 중건연혁과 연관 지어 볼 때 18세기 말엽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투박하면서도 해학이 넘치는 조각수법으로 미루어 나주 운흥사나 불회사의 석장생과 같은 18세기 초로도 추정된다.

쌍계사지 장생은 잡귀의 침입을 방지하고 성역(聖域)공간을 표시한 금표(禁標)적 기능을 하고 있다. 저수지 둑 높이기 대상 사업지와는 거리가 떨어져 있어 큰 영향은 없을 전망이다.

인곡 마을 역시 산업화 시대의 물결에 등떠밀린 여느 농촌과 비슷한 운명을 맡으면서 여기저기 빈집이 늘어났고, 젊은이들이 떠나면서 노인들만 사는 마을로 변했다.

20여년 전에 새롭게 만들어진 마을을 오가는 길도 폭 3~4m 정도로 승용차 한대가 지나갈 좁을 길이었다. 그나마 도로는 포장이 돼 있지만 한 겨울 폭설이 내릴 경우 눈이 녹지 않아 길이 끊기기 일쑤라고 한다. 지금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인곡마을 주민들이 이용했던 저수지 여수토 위에 설치된 옛길(물넘이 다리). 최기남 기자 bluesky@


이 도로가 만들어지기 전 인곡마을 주민들은 저수지 제방을 따라 가다 제방 왼쪽편 여수토 위로 세워진 폭 2m 정도의 다리를 건너다녔다. 저수지 수변을 끼고 난 이 길은 새 길이 나면서 사람들의 왕래가 줄고, 논밭을 오가는 데만 사용하면서 풀들이 많이 자라, 통행하는 데 불편이 컸다. 이 도로 역시 저수지 둑 높임 후 물이 가득차면 수변으로 변하게 된다.

하지만 저수지 둑 높이기 사업으로 산간 오지인 이 마을에 새 길이 열리게 된다. 저수지 수변에 포함될 이 산길 쪽에 새로운 도로가 만들어진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마을 진입로가 겨울이면 끊기는 등 불편을 겪고 있는 만큼, 저수지 제방 왼쪽편에 1.4㎞ 구간의 새 길을 연다.

길이 열리면 주민들은 물론 추석이나 설 등 명절에 고향을 찾는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줄 것으로 보인다. 저수지 제방 아래 새우양식장과 들판도 새로운 모습으로 바뀔 전망이다.

홍수ㆍ가뭄 예방, 노후 제방 보강
물 부족 시름 잊게 할 새 수리사업


입석저수지 전경


▲입석저수지 둑 높이기 사업
입석저수지는 금정면 일대 들녘의 농작물에 물을 공급해 주고 있다.
입석저수지의 첫 출발점은 영암군 금정면 남송리와 쌍효리의 경계에 있는 서일봉(385m) 남서쪽 사그점골이다. 사그점골에서 흘러내린 물은 남송리 장산골을 지나 인곡마을을 거쳐 감나무밭 골을 따라 입석제에 담긴다.

입석제에서 흘러내린 물은 깟바위들을 지나온 물을 더해 부채봉 밑 세흥마을을 거쳐 신정마을에 이르러 아천리 물도 보태 영암 금정면소재지인 용두마을과 부월마을 가운데를 지나 월평리로 나간다.

와운리 양와마을 북쪽 봉우리(84m) 동쪽 밑에서는 오두재골에서 나온 물이 옛 금정북초등학교 앞을 지나 안로, 금대마을을 거쳐와 배옆들을 만나 나주시 세지면 성산리 덕산마을로 향한다.

여기에서 승자봉(135m) 남쪽 식산제에 나와 구렁질, 식산마을을 거친 물을 더해 양달산(85m) 밑을 타고 벽산리 벽류마을과 교산리 발산마을을 지나 송제리 덕정마을 앞 덕정들 동쪽에서 금천과 합류한다. 금천이란 이름은 만봉천과 함께 쓰이는데 금천을 따라 14.2㎞를 흘러 영산강에 합류한다.

금정면 일대 황금들녘을 일구는데 자양분을 공급하는 입석저수지는 유역면적 516㏊에 유효 저수량이 74만3000t에 이른다. 그러나 저수지의 수혜면적이 203만5000㏊로 저수지 물만으로는 충분한 물을 공급해 주기에 버거운 실정이다.

이로 인해 한국농어촌공사 영암지사에서 계획적인 물 공급을 하지 않을 경우 43.5㏊에 해당하는 농경지가 물 부족을 겪어야 한다. 그 만큼 저수지 포켓 확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물 부족을 예방하기 위해 '입석지구 농업용 저수지 둑높기 사업'이 추진된다. 영산강 유역내 14개소 저수지 둑 높이기 사업 중 하나로 진행되는 이 사업은 한국농어촌공사 영암지사가 맡는다.


2012년까지 총 194억여원을 투입해 저수지 둑을 기존(16.3m)보다 4.3m 높여 저수량을 192만5000㎥로 확대한다. 192만5000㎥의 수자원을 추가로 확보해 부족한 농업용수 문제를 해결한다.

여유수량은 하천 환경용수로 1일 5512㎥를 흘려보내는 역할도 맡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기존 저수지에 없던 취수탑이 설치되고 여수토와 방수로를 확장해 방류시설을 보강한다.

무엇보다 1966년 준공된 입석 저수지는 이미 40년이 지난 노후시설로 시설물 보수보강도 이뤄져 저수지 시설물에 대한 안전 강화에도 한 몫을 할 것으로 보인다.

저수지 둑 높이기 사업으로 새 둑이 축조되면, 추억속으로 사라질 현 제방 모습.


[희망의 물길 남도민의 발자취] 8.화순 한천 금전리

  • 기사입력 2010.08.16 13:43
  • 최종수정 2010.08.16 19:41

40년만에 '물넘이'변경…물소리 공포 벗어난다


화순군 한천면 금전마을 옆 금전저수지 여수토 전경.

영산강 살리기 사업 중 하나로 추진 중인 '금전지구 농업용 저수지 둑 높이기' 사업 대상지인 화순군 한천면 금전리 '금전저수지'를 찾았다.

광주에서 화순을 거쳐 보성방면 29번 국도를 타다 능주에서 한천방향의 822번 지방도로로 갈아타고 2㎞ 가량 달리자 오른쪽으로 저수지가 나타났다.

한바탕 비가 내린 뒤 이제 이삭이 펴기 시작한 벼들이 물이랑을 이루며 출렁거렸다. 밭에는 별다른 잡티 없이 자란 붉은 고추들이 오지게 달려 있었다. 허리 한번 쭉 펴지 못하고 고추를 바지런히 따 내는 농부들의 등과 목덜미에 구슬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홍수대비 원통형 관 8개 설치…방류땐 굉음
제방 왼쪽편으로 여수토 옮겨 주민불안 해소


▲금전저수지 주변 문화

1962년 준공된 금전저수지는 인근 금전마을에서 유래됐다.

금전리의 지명은 마을 뒤에 있는 금오산 아래에 좋은 밭이 있다고 해 금오산의 금(金)자와 밭(田)자를 취해 금전리라 칭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금전의 뜻은 '쇠밭등'이란 지명에서 출발해 쇠밭의 의미를 한자화 하면서 쇠 금(金)자와 밭 전(田)자를 취해 금전이라 한 것으로 보인다.

금전저수지 제방 여수토 옆에 위치한 금전마을 전경. 최기남 기자 bluesky@

현재의 금전마을은 원래 효우동으로 금전저수지의 축조로 인해 원래의 금전마을, 한다곡마을, 예곡마을이 수몰되고 금전저수지 아래에 위치한 효우동으로 이거하면서 효우동 대신 금전마을로 부르고 있다.

효우동마을은 원래 쇠골(쇠우골)이라 부르던 곳으로 전하는 바에 의하면 마을 뒷산이 소같이 생겼다 하여 이렇게 부른다고 전한다. 곧 쇠골(쇠우골)을 한자화하면서 효우동으로 바뀌었는데 이곳에서는 효자가 나온 고을이라 효우동이라 했다고 전한다.

짐쟁이라 부르던 원 금전마을은 저수지 북쪽에 있었다. 한다곡(寒多谷)마을은 원래 한대실이라 부르던 곳이다. 마을의 뒷산이 누런닭 형국이라 황닭곡으로 부르던 것이 와전돼 한다곡으로 불렀다고 전하는데 한대실의 원뜻은 한실과 같이 큰 골짜기 또는 큰 마을이란 의미이다. 저수지 남쪽편으로 있었다.

예곡(禮谷)마을은 약 250년 전에 이곳에 예당사라는 절이 있었다가 소실되고 이후 이곳에 마을이 형성돼 예곡으로 불렀다고 전하는데 예곡은 원래 예당굴이라 했다. 저수지 북편에 있었다.

금전리는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었던 최경회(1532~1593년) 장군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건립한 사당(전남문화재자료 제64호)이 위치했던 곳이기도 하지만 1963년 3월 금전저수지를 축조하면서 화순읍 다지리로 옮겼다. 충의공의 묘는 경남 함양군 서상면 듬당리 방지마을에 있는데 이 묘는 선생이 순절한 후 후손들이 초혼장으로 모신 묘소가 저수지 인근에 있다.

한천주재소터, 금전간이학교터(1935. 4. 28∼1943. 3. 31) 역시 당시 저수지 축조로 물속에 잠겼다. 1949년 설립된 금전교회도 저수지 축조로 수몰마을이 이전하면서 1978년 현재 자리로 신축됐다.

금전저수지 축조로 인근 마을 등에 변화의 물결을 일으킨 데 이어 40년만에 저수지 둑 높이기 사업이 진행돼 또 한번 변화를 준비하고 있다.

지방도를 따라 '한천교'가 놓여 있는 한천면 한계리 지류에 도착했다. 한천교에서 금전저수지쪽으로 100m 정도 떨어진 한천천변에 왕버들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수고 10.5m, 흉고둘레 3.1m의 고목이다.

천변 도로를 따라 저수지 상류로 들어가자 적벽돌로 지은 전원주택 한 채가 있었다. 저수지 둑 높이기 사업으로 이주가 불가피한 가옥이다. 주변에서 자라고 있는 감나무의 규모를 보아 오래전 마을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지만 이 집을 빼곤 산림이 우거져 있다.

금전지구 둑 높이기 사업후 수변으로 바뀔 금전저수지 상류 전경. 최기남 기자 bluesky@

저수지 수변과 한천천 사이에는 12.8㏊ 규모의 나대지와 농경지가 형성돼 있었다. 농경지에는 이삭을 펴기 시작한 벼, 꽃망울을 터트린 배롱나무 묘목 등이 올 가을 마지막 풍년 들녘을 예약한 듯 했다. 수변으로 바뀌게 될 농경지 등의 지대가 저수지 수변보다 높아 하천 수위에 맞춰 성토 작업을 해야 한다고 농어촌공사 화순지사 관계자는 설명했다.

'임란 의병장 충의공 최경회의 묘'를 알리는 표지판이 설치된 인근에 노인복지시설인 '반석복지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무위탁 노인, 독거노인 및 일반 위탁 노인 등 약 60여명의 노인들이 생활하고 있는 개인 운영 복지관으로, 둑 높이기 사업 영향으로 이전하게 된다.
금전저수지 인근 노인복지시설 최기남 기자 bluesky@


저수지 제방으로 발길을 옮겼다. 제방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제방 왼쪽편 금전마을쪽에 위치한 8개의 원통형 관이었다. 홍수에 대비해 저수지 물을 흘러보내는 여수토(물넘이)위에 설치돼 있었다.

콘크리트나 자연석을 활용해 물넘이 시설이 만들어진 저수지와는 달리 그 자리에 8개의 원통형 관 설치돼 있었다. 관 입구에 저수지 물이 차면 압력에 의해 강제로 물을 뿜어내는 시설이다.

이 관들이 모두 작동할 경우 1223㎥의 물을 동시에 방류할 있다고 한다. 홍수에 재빨리 대처하기 위해 일반 저수지와는 다른 원통형 관을 설치한 것이다.

취재에 나선 지난 13일, 전날 내린 비로 저수지 물이 가득 차면서 물이 1번 관을 통해 방류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관으로 빨려 들어가는 물소리가 굉음을 내뿜었다. 8개의 관이 동시에 작동할 경우 물소리가 얼마나 무서울 지 짐작케 했다. 이 관을 통해 뿜어져 나오는 물소리로 인해 금전마을 주민들이 불안해하자 2년 전 2개의 수문을 설치했다.


그러나 이들 여수토는 저수지 둑 높이기 사업과 함께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게 된다. 현재 위치한 금전마을 옆이 아닌 제방 왼쪽편으로 여수토를 옮긴다. 저수지가 축조된지 40년만에 물길이 바뀌게 되는 셈이다. 특히 마을과 200m 이상 떨어지게 돼 그동안 물소리 공포에 시달려 왔던 주민들에겐 더 없는 희소식이다.

저수지는 광주권의 유명 낚시터 중 한 곳이다. 그 중에서도 가을 낚시에 매년 좋은 조황을 기록한다고 한다. 평일과 주말 구분없이 자동차에 낚싯대를 싣고 쉽게 찾아갈 수 있는 곳이다. 붕어는 물론 잉어ㆍ향어 등이 다양하게 분포하고 있다.

1972년에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유료낚시터로 지정되기도 했다. 당시 낚시터 이용료는 100원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콘크리트만 남아 있는 제방 아래 메기 양식장도 이를 입증해 준다. 이 양식장은 둑 높이기 사업과 함께 옛 추억 속으로 간직될 전망이다.

농어촌공사 관계자는 "저수지 둑 높이기 사업 구상 단계에는 여수토 인근에 위치한 제각이 영향권에 들었지만 지역민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제각을 이설하지 않고 현재 자리에 위치할 수 있도록 했다"며 "여수토 위치가 바뀜에 따라 금전마을 주민들도 불안감이 해소되는 등 삶의 질이 더 나아질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금전저수지 물 766㏊ 자양분 공급
홍수ㆍ가뭄 예방, 노후 제방 보강

▲금전저수지 둑 높이기 사업

금전저수지는 화순군 한천면에 위치한 천혜의 자연 계곡지의 물을 담는다. 유역면적 3147㏊, 수혜면적 766㏊, 만수면적 64.3㏊, 유효 저수량 329만9300㎥, 길이 233m, 높이 14.5m이다.

금전저수지로 흘러드는 '한천천' 최기남 기자 bluesky@

한천면 모산리에서는 동쪽에서 발원해 내려오는 한천천을 가둔다. 한천천은 이미 결우천과 정승천을 합해 서편으로 흐르다 금전저수지에 머무른다. 이 물은 인근 금전들녘과 능주들판에 자양분을 공급해 준다.

저수지에서 흘러 내린 물은 영산강의 제1지류인 지석천으로 유입된다. 연주산 아래에 이른 지석천은 능주면 관영리 '영벽보'에서 숨을 고른 뒤 죽청리 앞에서 화순천을 받아들여 서쪽으로 흘러가다 북에서 흘러온 도곡천을 합하고 남에서 흘러온 유곡천을 받아들인다.

더 나아가 대초천과 정천의 합류수를 합하여 서북쪽으로 흘러 나주시 남평 드들강, 광탄으로 흘러간다.

능주들판에 농업용수를 공급해 오고 있는 금전저수지는 축조된 지 48년이 됐다. 오래된 제당을 보강하고, 재해 예방과 하류하천의 수질 개선을 위한 용수 확보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 '금전지구 농업용 저수지 둑높이기 사업'이 추진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업은 한국농어촌공사 전남지역본부 화순지사가 맡는다. 총 266억여원을 투입해 기존 제방을 2.9m 높여 저수량을 482만3000㎥로 확대한다. 1157만5000㎥의 수자원을 추가로 확보해 가뭄과 홍수에 대비하고, 여유수량은 하천 환경용수(1일 1만2800㎥)로 흘려보내게 된다.

둑 높임 공사는 올 하반기 착공해 3개년 계획으로 추진된다. 금전저수지 둑높이기 사업이 완료되면 저수지 일대 766ha 농경지에는 안정된 농업용수 공급이 이뤄지고, 재난ㆍ재해 예방 및 하천의 건천화 방지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으로 전망이다.
금전저수지 제방 전경



'백룡지구 농업용 저수지 둑높이기 사업'이 추진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업은 한국농어촌공사 전남지역본부 나주지사가 맡는다.

총 244억여원을 투입해 기존 제방을 3.3m 높여 저수량을 380만4200㎥로 확대한다. 132만4200㎥의 수자원을 추가로 확보해 가뭄에 대비 물 부족을 해소하고, 여유수량은 하천 환경용수로 흘려보내는 역할을 맡을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