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서남북] 詩도 잡아먹는 인터넷
입력 : 2010.11.02 23:06
한국시에서 지적(知的) 세련미를 대표하는 황동규의 시라고 보기엔 너무 감상적이고 직설적이란 느낌이 든다. 최근 "선생님이 쓰신 시 맞나요?"라고 전화로 물었더니 시인은 "제가 쓴 시 800여 편을 전부 다 외우고 있진 않지만 아무래도 그 시는 내 작품이 아닌 것 같네요"라고 했다. "음악에는 성악도 있는데 '인간의 말소리가 나지 않기 때문'이라고 쓸 수 있겠나요"라고 반문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의 시와 착각해 잘못 올렸을 듯하지만 이 시는 라디오 방송에서 황동규의 시로 낭송되기도 했다. 인터넷에선 유명 시인들의 시가 오자와 탈자투성이거나 몇 행이 통째로 빠지고 제목이 바뀐 채 돌아다닌 지 오래다. 정호승 시인의 대표시 '그리운 부석사'는 다른 제목으로 돌아다닌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라는 시에서 첫 행을 누군가 제목으로 잘못 올려놓자 많은 블로그에서 제목이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로 통하게 됐다. 도종환·안도현 같은 유명 시인들도 비슷한 경우를 많이 당했다고 한다.
시를 엉터리로 올리는 것도 문제지만, 시인이 공들여 쓴 시를 허락 없이 인터넷에 통째로 옮기는 것부터 엄밀히 말해 저작권법 위반이다. 시인들도 처음엔 "내 시를 읽어줘서 고맙다"고 했지만, 이젠 인터넷 때문에 시집 판매량이 현저하게 줄어드는 사태에 당황하고 있다.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는 시인의 경우 2만부 넘게 팔리는 게 정상이다. 그러나 인터넷을 통해 공짜로 시를 읽고 퍼나르기가 유행한 탓에 주목받는 시인도 5000부 수준으로 떨어졌다고 한다. 다른 문화산업에 비추어볼 때 하찮은 숫자지만 가난한 '시인 부락(部落)'에선 몇 년 지어야 할 농사에 해당한다.
1970년대 민음사가 세로 쓰기였던 시집 판형을 가로 쓰기로 바꾼 '오늘의 시인 총서'를 내면서 한국 창작 시를 찾는 독자가 크게 늘어났다. 1980년대는 시가 한 시대의 정치적 감성을 이끌었기에 '시의 시대'로 불렸다. 100만부 넘게 시집이 팔린 경우는 세계적으로 보기 드물다. 20대 초반에 시를 즐겨 읽은 사람은 인문 교양서 독자로 발전하기도 했다.
그런데 인터넷이 시를 잡아먹으면서 가뜩이나 실용서에 밀려 크게 줄어든 대형 서점 시집 코너가 오그라든다. 인터넷 횡포가 장기적으로 인문학까지 잡아먹을 수 있다. 시인이 궁핍한 것은 당연하다고 해도 시단에선 '가장 무거운 지갑은 빈 지갑'이라고 한다. 빈 지갑이 상징하는 빈곤의 무게에 짓눌려 시인들의 영혼이 날지 못하는 사회는 바로 '죽은 시인의 사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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