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뚜기 인생'에 '파리목숨' 수행기사..'갑질'에도 침묵하는 이유
정규직도 오너 한 마디에 '해고'..포괄임금제·파견직 노동의 구조적 원인
스스로를 만년 '을'이라 칭하는 수행기사들의 고달프고 서글픈 삶은, 사실 지난 수년간 곪고 문드러져 있었다. 옛날이야 그렇다쳐도, 2010년 전후로 스마트폰도 빠른 속도로 보급됐고 각종 녹음기나 블랙박스 등 이들의 만행을 세상에 알릴 만한 수단은 많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그동안 왜 수행기사들은 참고만 지냈을까.
◇ "돈 있는 사람들이 사람 부리는 것, 말해 뭐해"…보복도 두려워 '체념'
"정말 너무 맞고 싶지 않아서, 매일 아침마다 휴대전화에 녹음했다 고소하겠다"고 다짐했다던 수행기사 15년차인 A 씨는, 뒷좌석 임원 몰래 녹음버튼을 눌렀다가도 이내 꺼버렸다.
10년차 B 씨 역시 "노조가 있기를 하나, 수행기사 카페말고는 고충 털어놓을 데도 없고, 그렇다고 재벌을 상대로 싸울 수도 없다"면서 "힘들면 그냥 그만두고 나와서 다른 데 찾아보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무엇보다도, 대부분 수행기사들이 이미 인격적인 대우는 포기, 이른바 '갑질'에 익숙해져 있다.
이들에겐 처우 개선을 부르짖는 것보다 체념을 하는 게 살아가는 데 훨씬 현명한 방법이라고 말한다.
한 수행기사는 "그들은 정말 돈이 많은 사람들이고, 돈 있는 사람들이 자기 방식대로 돈을 쓰는 것일 뿐"이라면서 "세상이 아무리 비난해도 재벌은 절대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단념하듯 말했다.
◇ "언제 잘릴지 몰라" 정규직이여도 '불안'…'"일한 만큼만 받고 싶다"
"한국 재계를 쥐락펴락하는 오너 일가를 경영 현장으로 모시고, 도로 위에서 안전과 목숨을 책임진다"는 자부심 하나로 버티고 있지만 이들의 고용형태는 불안하기 짝이 없다.
정규직은 거의 없고 대부분 파견, 도급, 계약직이라 근무기간이 기껏해야 2년이다. 1~3개월 수습 뒤 계약직 혹은 정규직 채용이라는 조건으로 보통 근로계약서를 쓰지만 수습 떼기 하루 이틀 전에 해고당하는 것도 부지기수다.
한 대기업 사택기사였던 A 씨는 "웃지 않는다"는 사모의 한 마디에 운전대를 놓아야 했다. 그는 "수습기간에는 보통 기본급 80%를 받는데 싼 값에 계속 사람을 부리기 위해 정규직 전환 하루 이틀 전에 그냥 잘라버리고 수습만 계속 채용하는 악질 재벌들도 허다하다"며 씁쓸해 했다. 한달, 일주일은커녕 하루 만에 잘리기도 해, 그저 이리저리 뛰어다녀야하는 '메뚜기 인생'인 셈이다.
파견직이다보니 이중으로 4대보험료와 각종 세금이 빠지기도 하고, 파견업체 혹은 인력소개소에 줘야하는 수수료도 상당하다. 또 회사와 파견업체의 장난에 임금이 떼이는 경우도 종종 있다.
'정규직'이 이들에겐 꿈이지만 그렇다고 이게 또 완벽한 해결책은 될 수 없다는 게 수행기사들의 얘기다. 아무리 정규직이더라도 오너나 임원 마음에 안들면 '끝'이다. 또 오너 일가가 아닌 회사 임원이 바뀌면 수행기사도 같이 갈아치워지기도 한다.
출근은 있지만 퇴근 시간은 일정치 않은 것도 이들을 더욱 고달프게 만든다. 자정이든, 새벽 2시, 3시든 시간은 중요하지 않다. 사장이 "집에 가라"고 해야 퇴근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수당은 없다.
수행기사들은 '포괄임금약정'이라고 해서 연봉에 연장·휴일근로에 대한 수당 등의 법정 수당을 합한 금액을 포함, 근로시간 수에 상관없이 지급하는 방식으로 계약이 체결된다. 포괄임금제는 근로기준법상 법정수당 산정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지만 대법원은 근로시간 산정이 어려운 경우 등 일정한 요건을 갖춘 경우에 한해 예외적으로 포괄임금제에 의한 계약을 유효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수행기사들은 이같은 임금제가 부당한 것을 알면서도 딱히 방법이 없다. 연봉 2500~3500만원에 하루 16~18시간씩, 주 7일 근무로 따지면 최저 임금도 안 나오지만 일자리를 구하려면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10년차 수행기사 B씨가 "많은 것 바라지 않는다. 일한 만큼만 받고 싶다"고 얘기하는 이유다.
박종천 청담법률사무소 노무사는 수행기사들이 횡포를 당해도 "안타깝게도 크게 답이 없다"면서도 "지금으로서는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폭행을 당했을 때는 진단서를 꼭 떼고, 폭언을 하면 반드시 녹음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근로계약서를 쓸 때 포괄임금제인지 잘 확인을 한 뒤 계약을 하고, 번거롭더라도 몇 시 출근, 이동, 대기 시간 등 시간대별로 근무 일지를 써 두는 게 나중에 추가 수당을 요구할 때 증거로 제시할 수 있다"고 당부했다.
◇ 불안한 수행기사의 삶…'파리 목숨' 다름없는 파견직 노동의 구조적 원인
성공회대 하종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는 "수행기사 대부분은 비정규직에서도 가장 열악한 파견직 간접고용 노동자"라면서 "언제든 갈아치우는 소모품으로 취급받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기업의 노동비용보다 국가 경제를 위해서라도 노동자 경제력을 갉아먹는 파견직 형태의 노동을 정규직으로 전환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이남신 소장도 "수행기사들이 노조를 갖춘 정규직 노동자라면 갑질같은 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며 "파견직 노동자라는 개별화된 약자들이기 때문에 겪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또 "극단적인 양극화로 돈, 권력을 쥔 사람들의 이같은 행태가 워낙 비일비재해지면서 심지어 피해자조차 이를 내면화하고 당연한 일, 어쩔 수 없는 일로 받아들인다"고 지적했다.
그는 아울러 "돈만 있으면 사람을 물건처럼 부릴 수 있다는 우리 사회의 저임금 노동자에 대한 잘못된 시각이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폭언·폭행만 갑질? "웃지 않는다" 사모 한 마디에 '해고'
(CBS노컷뉴스 2016-04-09 06:15)
대기업 오너들의 '갑질'매뉴얼·폭언과 폭행이 연일 폭로되고 있는 가운데 수행기사들은 "결국 터질 게 터졌다"는 반응이면서도, '재벌가 사모님' 갑질도 도마에 올랐다. 수행기사들은 "수면 아래 묻힌 사모님들의 갑질이 더 무섭다"고 입을 모은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기업 수행기사 A 씨는 수습 3개월 뒤 계약직 전환 고작 이틀 앞두고 해고됐다. "웃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사고는커녕 지각 한 번 없었고, 일을 못해 지적을 받은 적도 없었다던 A 씨는 대기업 회장·사장도 아닌 '사모'를 모시는 일명 사택기사로 일하다 예고 없이 잘렸다.
기사들에 따르면 사택 기사는 사장 등 임원 기사보다 그야말로 '자동차 키를 내던지고 싶은' 상황에 자주 직면한다. 사택기사의 주업무는 사모의 개인 일정, 자녀의 등하교·하원이다. 정원에 물 주기, 잡초 뽑기, 창문 닦기, 반려동물 사료 주기 등 집안일도 떨어진다. 해야하는 일은 임원수행기사보다 다양하고 많지만 임금은 낮다. 그렇다고 대우를 잘해주는 것도 아니다.
눈에 띄지도 않는다. 주위에 지켜보는 직원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전용차'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1대 1로 대면 상황이 많다. 아무리 갑질을 해도 주변에 드러나지 않아 묻혀버리기 쉽다.
한 재벌가의 사모차를 몰았던 수행기사 B씨는, 길이 막히기라도 하면 "아저씨 바보에요? 왜 이길로 와요? 생각 같은 거 안해요?"라는 말은 물론 "멍청이냐?"는 막말까지 참아야 했다.
또다른 사택기사 C씨는 "에어컨이나 히터를 뒷자석에만 켜고 앞에는 틀지 못하게 한 사모도 있어 한여름이나 한겨울에 그만두는 기사들이 많았다"고 증언했다.
사택기사 D 씨는 "명품백을 잘못 둬 구겨졌다는 이유로 사모가 월급에서 감봉하라는 지시를 내린 적도 있다"면서 "그 가방이 1천만원을 호가하는 명품백이어서 일년동안 월급에서 일정액씩 제외하라는 보고서가 작성된 적도 했다"며 진땀 흘린 경험담을 취재진에 들려주기도 했다.
또 "해외연수를 간 자녀에게 화장품을 건네기 위해 회사 직원이 당일 치기로 중국에 다녀온 걸 본 적도 있다"고 증언했다. "그 로션은 워낙 유명해서 중국에서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P제품"이었다고 그는 덧붙였다.
또다른 한 재벌가 수행기사는 "회장차를 몰다가도 사택 기사가 해고거나 그만두면, 내 의사는 조금도 묻지도 않고 그 자리로 그냥 보내버리면서 임금은 또 깎는다. 그런데 일은 더 힘들고 인격적으로 무시도 많이 당한다"면서 "이것도 일종의 갑질 아니냐"며 서러움을 나타냈다.
다만, 그는 "모든 재벌가가 그런 것은 아니다"라며 "싸잡아 욕할 필요는 없다"고 두둔하기도 했다.
삼성그룹 수행기사는 정규직. 보너스, 상여, 휴가비도 나오고 인격을 모독하거나 그런 경우는 들어보지 못했다"면서 "그래서 기사들 사이에서 꿈의 직장으로 불린다"고 전했다
어느 대기업 오너가에 일했는지 밝히기 꺼린 한 기사는 "오랫동안 수행한 기사에게 일부 오너들은 퇴직금이라며 노후를 보낼 땅을 사주거나, 택시기사가 되도록 도움을 주기도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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