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의겸의 우충좌돌 (24)

박근혜 대통령이 다음달 3일 중국 베이징에 갈지 말지를 놓고 고민 중이라고 한다. 중국은 ‘항일 전쟁 승리 70주년’ 열병식에 오라고 하는데, 미국은 말리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두 강대국 사이에 끼인 우리나라의 현실을 보여주는 듯해 우리 대통령의 처지가 안쓰럽고 딱하다.

골치가 아프실 터인데 영화 <암살>을 한번 보셨으면 한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한-중 관계를 돌아보게 하는 영화다. 영화에서 중국은 무대로만 쓰일 뿐이고 중국인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진짜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와 중국은 피를 나눈 형제처럼 똘똘 뭉쳐 일본 제국주의에 맞섰음을 알 수 있다. 9월3일 전승식은 중국만의 행사가 아니라 우리와 중국 나아가 아시아 전체의 공동 축제인 것이다.

■ 저격수 안옥윤

영화 ‘암살’. 사진 쇼박스 제공
영화 ‘암살’. 사진 쇼박스 제공

 

 깨진 안경을 써도 이쁜 저격수 안옥윤(전지현 분)은 자신을 “한국독립군 이청천 부대 제3지대 저격수”라고 소개한다.

실제 한국독립군은 1930년 총사령관 이청천을 중심으로 결성된 독립군으로 1931년 일본의 만주 침공이 시작되자 본격적인 전투 태세를 갖추기 시작한다. 이청천 장군이 ‘서로 돕자’고 손을 내민 상대는 중국 호로(護路)군이다. 호로군은 원래 일본 소유의 남만주 철도를 지키는 용병들이었는데 만주사변 이후에 일부가 반일 투쟁에 참여하게 된 세력이다.

한국독립군과 호로군으로 구성된 한-중 연합군은 일본군에 맞서 이른바 ‘4대 대첩’을 벌이는데 특히 최대의 승전은 대전자령(大甸子嶺) 작전이었다. 1933년 7월 대한독립군 2천500명과 중국군 6천명이 힘을 합친다. 일본군 이즈카 연대가 ‘대전자’라는 고개를 반쯤 넘어서 후미 부대가 산중턱에 이르렀을 때 한-중 연합군은 일제히 공격을 퍼부어 불과 4시간 만에 이즈카 연대를 궤멸시켰다. 살아서 도망간 자는 한 줌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암살>에서 본 듯한 장면이지 않은가. 그렇다. 안옥윤이 동굴 기지를 떠나다 총알 4발로 일본군 기관총 사수 4명을 죽이는 장면이 나오는데, 대전자령 전투 장면과 흡사하다. 시기도 1933년으로 일치하니 아마도 감독이 이 전투를 염두에 두고 영화를 만든 듯하다. 영화에서는 중국 사람이 나오지 않지만 실제 전투에서는 우리 독립군보다 2배가 넘는 중국군이 참여했다는 게 역사적 사실이다.

■ 약산 김원봉

영화 ‘암살’. 사진 쇼박스 제공
영화 ‘암살’. 사진 쇼박스 제공

영화에서 약산 김원봉(1898~1958)은 백범 김구(1876~1949)와 손을 잡고 암살단을 조직하는 걸로 나온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거리가 있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인 1933년에는 백범과 약산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또 약산은 이미 암살, 폭파 등의 테러를 포기한 상태다.

사실과 근접한 건 약산의 외모다. 약산을 연기하는 조승우처럼 김원봉도 미남이었다. 옛날 사진을 보면 약산이 조승우보다 선이 더 굵었다고나 할까. 님 웨일즈가 쓴 <아리랑>에 보면 김원봉의 외모를 묘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약산은 대단히 미남이고 로맨틱한 용모를 가졌기 때문에 아가씨들이 그를 좋아하였지만 그는 아가씨들을 멀리하였다.”

약산은 1919~1924년 암살과 폭파를 주된 투쟁 수단으로 삼은 의열단을 이끌었으나 노선을 바꾸게 된다.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서는 정규 군대가 필요하다는 걸 절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1926년 중국 국민당 정부가 세운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한다. 당시 약산은 28살의 젊은이였지만 이미 크고 작은 테러 수백건을 지휘해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거물이었다. 그런데 일개 사관학교 생도가 된다니 주변 사람들이 만류한 건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약산은 원래 계획을 밀어붙였다. 체면보다는 실질을 중시하는 그의 면모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당시 교장이 장개석, 정치부 부주임이 주은래였다. 중국 혁명의 핵심들과 돈독한 인간관계를 맺고 한-중 연합전선을 펼치는 데 필요한 인적 토대를 쌓은 것이다.

김원봉은 이후 중국 국민혁명군 소위로 임관해 북벌에까지 참여한다. 북벌은 중국 사람들끼리의 내전이지만 당시 조선 청년들은 중국의 북벌전쟁이 조선의 독립과 직결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는 몽양 여운형의 한 연설 대목에서도 드러난다. “이제 중국 혁명은 양자강을 건너 도도히 북상중이다. 멀지 않은 장래에 중국은 통일될 것이다. 중국이 통일 되는 때에는 조선의 해방도 곧 실현될 줄로 안다.” 중국 혁명이 조선 독립이었고, 조선 독립이 중국 혁명이었던 시대였다.

약산은 1945년 귀국했으나 1947년 경찰에 검거된다. 약산을 체포한 사람은 일제 고등계 형사 출신으로 악질 친일파로 유명한 노덕술이었다. 약산은 노덕술에게 구타와 고문을 당했다. 일제 경찰의 끈질긴 추적과 엄청난 현상금에도 체포되지 않았던 약산으로서는 고국에 돌아와 수모를 당하니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약산은 경찰서를 나와 3일 낮과 3일 밤을 울었다. 그는 “여기서는 왜놈 등쌀에 언제 죽을지 몰라. 내가 조국 해방을 위해 중국에서 일본놈과 싸울 때도 한번도 이런 수모를 당한 일이 없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악질 친일파 경찰 손에 수갑을 차다니 이럴 수가 있소”라고 울분을 토했다. 약산이 노덕술에게 잡혀 철창 생활을 하는 동안 부인이 두 번째 사내 아이를 낳았다. 약산은 철창 생활 동안에 태어났다 하여 아기의 이름을 철근(鐵根)이라 지었다고 하니 그의 한이 얼마나 깊었는지 짐작이 간다. 영화로 보자면 해방 후 김원봉이 염석진(이정재 분)에게 고문을 받는 꼴이나 마찬가지다. 영화에서는 노덕술을 떠올리게 하는 염석진(이정재 분)이 안옥윤과 명우에 의해 총알 세례를 받고 죽는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실제 노덕술은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다 나이 70까지 천수를 누리고 서울대 병원에서 편안히 생을 마감한다.

■ 백범 김구

영화 ‘암살’. 사진 쇼박스 제공
영화 ‘암살’. 사진 쇼박스 제공

김구가 대표하는 임시정부와 광복군이 장개석의 지원을 받은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장개석의 마음을 흔들어놓은 건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였다. 백범 일지의 한 대목을 보면 백범이 도와 달라고 손을 벌리면서도 얼마나 당당했는지를 알 수 있다. 백범은 장개석과 만났을 때 주위를 물리친 뒤 장개석이 직접 갖다준 붓과 벼루로 필담을 나눈다. “선생이 100만원을 허락하면 2년 이내에 일본, 조선, 만주 3방면에 대폭동을 일으키게 하여 일본의 대륙 침략의 교량을 파괴할 터이니 그대의 뜻은 어떠시오?” 배포가 대단하다. 이에 장개석이 붓을 들어 “청컨대 계획서를 자세히 제시하여 주시오”라며 지원을 약속한다.

김구나 김원봉 모두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받았으나 그 통로가 달랐다. 김구는 비밀 정보기관인 CC단(진과부, 진립부 형제의 이름에서 따온 이니셜)을 통해 지원을 받았으나, 김원봉은 황포군관학교 동기생들이 주축을 이룬 삼민주의역행사(일명 남의사(藍衣社))의 도움을 받았다. 영화로 다시 돌아가보면, 염석진이 마약굴에서 약에 취한 채 총질을 해대며 자신의 정당성을 강변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염석진은 당시 독립군이 여러 분파로 나뉘어 서로 싸우는 이유로 “나오는 돈 줄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독백한다. 당시 이리저리 분열됐던 우리 독립운동사의 그늘을 보여주는 씁쓸한 대목이다.

영화 ‘암살’. 사진 쇼박스 제공
영화 ‘암살’. 사진 쇼박스 제공

영화 후반부 임시정부 요원들이 뉴스를 보며 환호성을 터뜨리는 장면이 나온다. 1945년 9월3일 미 해군 군함 미주리 호에서 일본이 공식적으로 항복 문서에 도장을 찍는 장면이다. 중국의 ‘항일 전쟁 승리 70주년’ 기념식도 이날을 기념하는 것이다. 다리를 절뚝거리며 미주리호에 올라와 일본을 대표해 문서에 날인하는 사람이 외무대신 시게미츠 마모루다. 그가 다리를 저는 이유는 바로 1932년 윤봉길 의사가 던진 도시락 폭탄에 의해 한쪽 다리를 잃어 의족을 착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중국이 일본의 몸통에 타격을 가했다면 우리의 독립투쟁은 일본이라는 나라의 다리 한쪽은 부러뜨린 셈이다.

■ 명분과 실리

과거의 의리에만 매달리자는 게 아니다. 중국과 함께 한 역사적 인연이 현재 우리의 이익이 되니 내세우자는 게다.

당장 경제적으로 우리는 중국과 같이 갈 수 밖에 없는 처지다. 요즘은 주춤하고 있다고 하지만 중국은 여전히 7% 안팎의 경제 성장률을 이어가고 있는 14억 인구의 거대 시장이다. 우리가 중국을 외면하고 도대체 어떻게 경제 성장의 활력을 찾을 수 있겠는가. 우리 아들 딸들의 일자리는 어디에서 마련하란 말인가. 중국이 기침을 하면 한국은 폐렴을 앓는 게 요즘 두 나라 관계다. 메르스 사태로 중국인 관광객이 발길을 끊자 우리 경제가 휘청거린 경험이 엊그제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중국의 전승절 행사에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해야 한다(51.8%)가 불참해야 한다(20.6%)보다 두배가 넘게 나왔다. 정치성향별로 보수층(참석 64.0% vs 불참 23.1%)이 진보층(40.8% vs 24.3%)보다 훨씬 높게 나왔다. 우리 국민은 이미 낡은 이념 대결의 틀을 벗어나 중국이 차지하고 있는 경제적 비중을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

통일을 생각하면 우리는 중국과 더 가까워져야 한다. DMZ 지뢰 폭발 같은 일이 벌어져 남북의 긴장이 격화될수록 중국의 역할은 더 중요해진다. 북한과 의사소통이 이뤄지고 있는 유일한 나라가 중국이다. 나아가 어떤 형태로든 통일이 이뤄지려면 중국의 지지를 확보하는 게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일본 아베 정부의 행태를 고치는 데 중국은 대단히 유용한 이웃이다. 지금 아베 담화에 ‘사과’가 담겨있는지조차 불투명한 상황이다. 대통령이 아베를 만나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으면 일본이 손해라는 걸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중국과는 담장 너머 많은 대화를 나눠야 한다.

물론 미국이 섭섭해 할 것이다. 하지만 항일 투쟁에서 한-중 두 나라 공통의 역사 경험을 명분으로 내걸면 미국도 무작정 반대하지는 못 할 것이다. ‘베이징으로 가라’는 여론조사 결과도 덧붙여 설득하면 국내여론에 민감한 미국 정부이니 그 효과는 더 커지리라 본다. 그러니 역사적 자산을 최대한 활용한다는 전략적 차원에서라도 영화 <암살>을 관람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 1000만 관객을 동원할 것으로 예상되는 이번 주말 쯤 영화관을 찾으면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처럼 영화를 본 뒤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민국 만세’를 외칠 필요까지는 없다. 그저 영화 관람 자체만으로도 광복 70주년을 맞는 우리의 자세를 충분히 내보일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속 하와이 피스톨의 영감(오달수 분)이 “3천불, 우리 잊으면 안 돼”라는 요청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기도 하다.

아, 참! 영화에는 대통령이 보시기에 좀 거북스러운 대목이 하나 나온다. 기차역사에서 사이렌이 울리자 사람들이 일장기를 향해 일제히 고개를 조아리는 장면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영화 <국제시장>에 나온 국기 하강식 장면을 보고 ‘애국심’을 강조한 적이 있는데, <암살>의 최동훈 감독이 이를 살짝 꼬집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역사학자들 말을 들어보면 1933년에는 그런 의례가 없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말에야 정오에 사이렌이 울리면 모든 사람이 서서 황군을 위한 묵도를 했다고 한다. 그러니 대통령은 너무 마음에 담지 마시고 영화 자체를 즐겨주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