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공 국시 처음 본 박정희 "이거 나 때문에 썼겠구먼 … " 거사 전날 JP "배 속 아이, 아들일 거요" 아내의 눈물을 봤다
(중앙일보 2015.03.03.01:34:16)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1> ‘5·16 혁명공약’의 탄생
미국은 '박정희 사상'을 의심했고
미 8군 사령관은 대놓고 예편 요구
6·25 때 북한군과 맞서 싸운 박정희
그에 대한 좌익 혐의는 부당
"인생은 짧다, 시시하게 굴지 말자"
혁명의 물결 앞에 나는 섰다
둘째 임신한 아내와 비감의 이별
"아비가 헛일 안 했다고 가르치구려"
1961년 8월 최고회의 회의 모습. 앞줄 왼쪽부터 김신 공군참모총장, 박정희 의장, 박병권 국방장관(테이블 건너). 박정희 뒤는 김종필 정보부장(사복 차림), 박병권 뒤는 장성환 공군참모차장.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김종필(JP) 전 국무총리는 “5·16군사혁명은 구질서를 붕괴시킨 것”이라고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5·16의 지휘자라면 JP는 5·16의 설계자다. JP의 현대사 증언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밤이 깊어가던 1961년 5월 14일(일요일). 나는 아내에게 군복을 준비해 달라고 했다. 석 달 전 군 수뇌부의 퇴진을 요구하는 ‘하극상(下剋上) 사건’으로 강제 예편되면서 벗어뒀던 카키색 군복이다. 중령 계급장은 달려 있지 않았다. 날이 밝으면 나는 이 군복을 입고 먼 길을 나설 것이다. 형언할 수 없는 마음이 가슴 온 구석을 채웠다. 이미 벗었던 군복을 다시 꺼내 들 정도로 나는 그해 그 봄, 그렇듯 결연(決然)했다. 사생(死生)의 각오로 덤비지 않으면 안 될 그런 절박함이 내 마음속 깊숙이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당시의 내 나이는 서른다섯. 일제 강점기를 겪고 동족상잔의 참혹했던 6·25전쟁을 군인의 신분으로 치러낸 내 생각은 영글어 있었다. 그럼에도 마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서른다섯의 생을 모두 접어야 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나는 전날부터 꼬박 이틀 동안 무엇인가를 끄적거리고 있었다.
목숨을 걸어야 했던 글이었다. 이틀 동안 내가 머리를 싸매면서 썼던 선언문은 다름 아닌 ‘혁명공약’이었다. 그것은 구질서를 붕괴시키고 신질서를 만드는 일이다. 세상을 뒤집는 거사다. ‘역사는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기록해 나가는 것이다.’ 그 말이 나의 뇌리를 스쳐간다. 예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바꾸는 일, 그 혁명의 물결 앞에 서야 하는 상황이 나와 내 조국 대한민국에 닥치고 말았다.
글 솜씨가 제법 괜찮다는 평을 듣기도 했던 나였지만 그 격문만큼은 잘 써지지 않았다. 끙끙대며 썼다가 지웠다. 이틀 동안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나열했다.
52년 4월 김종필 대위의 가족사진.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전해인 60년 4·19가 벌어졌다. 자유당 말기의 암울함이 가셨을까. 전혀 아니었다. 우유부단함의 극치를 선보였던 민주당 장면 내각은 상황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민주당 정권은 정쟁과 누습(陋習), 극도의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정부의 무능과 함께 국가안보의 초석인 군(軍)은 썩고 있었다. 학생들의 시위가 잇따랐지만 정부는 어쩔 줄 몰랐다. 수수방관했다고 할 정도다.
혼돈이 점차 극을 향해 가고 있었다. 6월엔 경찰관 데모가 있었고 9월엔 초등학생들도 시위에 나섰다는 기사가 신문의 주요 면을 장식했다. 61년 3월 21일 대구에선 횃불시위가 벌어졌다. 혁신계 정당과 일부 대학생이 반공법과 데모규제법을 폐지하라면서 횃불을 들고 행진한 것이다. 5월 13일 서울운동장에선 남북학생회담을 촉구하는 ‘민족자주통일 궐기대회’가 열렸다.
전쟁을 치른 지 10년도 안 지난 상황이었다. 내 마음은 타들어갔다. 다수 국민도 사회 혼란을 걱정했다. 국민 대부분이 결정적인 전환을 기다리는 분위기였다. 망각의 늪에 던져버린 전쟁의 기억, 그로써 우리 대한민국이 맞이할 위험은 거세고 높은 파도처럼 우리 사회에 닥칠 기세였다. 육군사관학교 8기 동기생 1300여 명 가운데 전쟁 때 절반을 잃은 나로서는 이 혼란스러운 풍조에 종지부를 찍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부패 무능한 기성 정치인들에게 민족의 운명을 맡길 수 없다는 결의였다.
거사를 앞에 두고 펜 끝으로 상념이 모아지고 있었다. 영국 명재상 벤저민 디즈레일리의 금언(金言)이 떠올랐다. “인생은 짧다. 시시하게 굴지 말자.” 10대 후반 시절 내가 감명을 받았던 말이다.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났다. 나는 다시 문장을 다듬었다. ‘은인자중(隱忍自重)하던 군부는 금조(今朝) 미명(未明)을 기해….’ 펜은 거침이 없었다. 내 글에 제법 힘이 담겼다고 여겨졌다. 은인자중하던 군부의 중심은 나였다.
궐기취지문의 서두를 그렇게 시작했다. 이제 구체적인 공약을 썼다. ‘반공(反共)’을 먼저 꺼냈다. ‘혁명공약 제1조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1의로 삼고…’ 우리 대한민국이 가야 할 방향, 그러나 놓치고 있는 곳을 먼저 향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공이 앞에 놓여야 한다. 혼돈을 정리하고 국가의 안위(安危)를 먼저 따져야 했던 것이다.
결정적인 이유는 숨겨져 있었다. 거사의 중심, 박정희 전 대통령과 관련이 있는 일이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공산주의자라는 의심을 받았다. 49년 그가 소령 시절 남로당에 휘말려 들어간 사건 때문이었다. 그러나 좌익의 혐의는 부당했다. 그는 잠시 길을 잃었는지는 몰라도 결국 대한민국의 군에 복귀해 공산주의 북한과 맞서 싸웠다. 누구보다 나는 그 점을 잘 알았다.
그럼에도 적지 않은 사람이 그를 의심했다. 이들은 공공연히 “박정희는 빨갱이다”고 떠들 정도였다. 미국도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한국에 주둔 중인 미 8군 사령관 매그루더는 박 소장을 예편시키라고 한국 정부에 요구했다. 따라서 나는 궐기군 지도자인 박 소장에게 걸린 그런 혐의를 불식하기 위해서도 반공을 공약 1호로 내세워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뒤에 벌어진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격이지만 궐기문을 인쇄하러 가기 전 박 소장이 이 반공 국시 조항을 읽으면서 나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그러면서 혼잣말 비슷하게 ‘이거 나 때문에 썼겠구먼…’이라고 말했다. 거사를 앞둔 박 소장의 마음이 매듭처럼 뭉쳐져 있던 대목이었다.
시계의 시침이 자정을 훌쩍 넘겼다. 우리가 계획한 디데이, 5월 16일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15일 아침 혁명취지문과 포고문 원고를 주머니에 넣고 현관을 나섰다. 아내 박영옥(朴榮玉)이 말을 꺼냈다. 당시 아내는 첫째 예리(禮利)를 낳고 10년 만에 둘째 진(進)을 임신한 상태였다. 아들인지, 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정말 하시는 거예요?’ ‘응, 하느님이 도우시면 당신과 또 만날 수 있겠지.’ 아내는 대꾸도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나는 불룩해진 아내의 배 언저리에 손을 얹었다. ‘자고로 유복자는 대개 아들이라고 하니까 설령 내가 죽더라도 그놈은 아들이 틀림없을 거요. 잘 키워서 훗날 녀석에게 이 아비가 헛일 하다가 죽지는 않았다고 가르치라고.’
비감(悲感)이라면 그때의 내 마음이 그랬을 것이다. 아내는 아무런 말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군복을 차려입은 나는 아내와 함께 문을 나섰다. 지금의 서울 청파동 숙명여대 앞에 있던 집 앞의 언덕을 내려갔다. 아내는 문밖에서 떠나는 나를 바라봤다. 조금 언덕을 내려가다가 뒤를 돌아봤다. 아내가 저만치 보였다. 역시 눈물만 하염없이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내 심정이 그랬을까. 장미의 5월 속 적막한 봄날이었다.
"박정희 권력의지 약해 내가 장도영 체포"
(중앙일보 2015.03.03.10:41:41)
'현대사 연출가' 김종필 증언록 본지 독점 연재
5·16초기 툭하면 "나 그만둘래"
60년대 말에야 "대통령 할 만"
1962년 1월 20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서울 태평로 국회별관에 있는 중앙정보부를 처음 공식 시찰하고 있다.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왼쪽)이 지부 사무실과 전화하고 있다. 그 옆은 이영근 중정 차장, 박 의장 뒤는 박종규 경호대장.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1년부터 79년까지 18년간 집권했지만 그중에서 대통령을 할 만하다고 생각한 것은 60년대 후반에 들어와서였다”고 말했다.
김 전 총리는 최근 중앙일보 증언에서 “5·16 혁명 뒤 박 전 대통령은 권력의지가 약했다. 자신에게 쏠리는 좌익 의혹과 혁명을 성공한 뒤엔 군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순수한 발상 등이 의지를 약하게 했다”고 회고했다. 그의 회고는 오늘부터 본지에 연재되는 ‘김종필 증언록-소이부답(笑而不答)’에 게재된다. 김 전 총리는 “60년대 초중반까지 박 전 대통령은 무슨 일이 생기면 ‘어이, 나 그만두겠다’는 말을 여러 번 했지. 내가 ‘혁명을 하셨는데 결자해지(結者解之), 일으킨 사람이 끝머리까지 해야 합니다’며 말리곤 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중앙정보부장이었던 나는 5·16뒤 두 달 만에 장도영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반혁명 혐의로 체포했다. 박정희 부의장에겐 보고하지 않았다. 박 전 대통령에게 의지를 실어 주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박정희 복직' 건의한 장도영
(중앙일보 2015.03.04.01:45:50)
장병 통솔, 수원에 나타나자 "유능한 사람, 사상 의혹 버려"
국군에 의해 폭파돼 끊어진 한강 인도교. [중앙포토]
6·25 남침은 문관 박정희의 평판과 이미지를 바꿨다. 장도영 당시 육군 정보국장의 시각도 그랬다. 장도영 회고록에 따르면 박정희 문관은 정보국 장병들을 직접 지휘 통솔해서 수원으로 후퇴해왔다. 정보상황도 등 중요 문서들까지 깨끗이 보존해 가지고 왔다. 이를 본 장도영 국장은 이렇게 생각했다. “28일 적정으로 봐서 그가 원했다면 다르게 행동할 수도 있지 않았는가. 근거 없이 부하를 의심하는 게 아니었다. 저렇게 유능하고 믿을 만한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나는 이때부터 그에 대한 사상적 의혹을 깨끗이 버렸다.”
정보국은 작전정보 활동에 박차를 가했지만 이를 실행할 장교가 부족했다. 장도영 국장은 육본 정보상황실 한쪽 구석에서 낡은 민간 작업복을 입은 채 근무에 열중하고 있는 박정희에 주목했다. 장교가 부족한 상황에서 그를 계속 문관으로 둘 이유가 없다고 봤다. 정일권 참모총장에게 박정희의 현역 복직을 건의했다. 처음엔 “쓸데없는 말이 나올 수 있다”며 주저하던 정 총장은 거듭된 건의에 마음을 바꿨다. 신성모 국방부 장관의 승낙을 받아 박정희는 소령으로 복직됐다(정식 복직일은 1950년 7월 31일). 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과 함께 파면형을 선고받은 지 1년5개월여 만이었다. 장도영은 그렇게 박정희와 인연을 맺었다. 하지만 5·16 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시절 둘의 운명은 극명하게 갈렸다.
개전 초 박정희 34시간 행방 … 육사 동기들과 내기 했다, 돌아온 그에게 파이버 씌워주자 "자네가 임명하는구먼"
(2015.03.04.01:45:43)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2> 박정희 문관, 소령으로 복귀
임시 육본은 이미 수원으로 후퇴
그가 안 나타나면 좌익의혹 증폭
한강 다리 코앞에 두고 큰 폭발음
사람 피와 살이 내 얼굴에 묻었다
"구미서 올라가는데 차편이 없네"
박정희가 전화 … 100% 확신 못해
육본 정문 앞서 그와 감격의 재회
마음속 '의심 덩어리' 눈 녹듯 풀려
1952년 8월부터 53년 5월까지 당시 김종필 대위는 6사단 19연대 수색중대장으로 강원도 금성 구두고지 전투에 참여했다. 김 대위가 81㎜ 박격포 발사를 준비하는 장면.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박정희에겐 좌익이란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JP는 6·25 개전 초기 박정희가 좌익이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를 갖게 됐다. JP가 확보한 흔들리지 않는 증거는 무엇일까.
1950년 6월 25일 새벽 김일성의 기습적인 남침이 시작됐다. 나는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 북한반장(중위)이었다. 며칠 전부터 휴전선 쪽 적정(敵情)이 크게 불안했다. 6월 24일 밤 나는 정보국 당직을 자처했다. 밤새 뜬눈으로 전쟁을 맞았다.
대비 없이 맞은 전쟁이었다. 하지만 오판은 우리가 했다. 육군 정보국은 적의 동향을 정확하게 예측했다. 정보국 작전정보실장인 박정희와 우리 전투정보과는 적정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군과 정부의 수뇌들은 이를 불신했고 활용할 줄 몰랐다. 우리는 적을 알고서도 당한 것이다. 27일 밤 적의 탱크가 서울 미아리에 출몰하고 있었다. 상황이 다급해졌다. 육군본부는 그날 경기도 시흥으로 옮겼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나는 적정을 파악하느라 주위를 돌아볼 틈 없이 바빴다. 28일 자정을 넘긴 새벽, 지하 벙커에서 일하다 나와 보니 상황장교와 사병 몇 명만이 보였다. 육본 수뇌부는 임시본부가 차려질 수원을 향해 이미 출발한 상태였다. 병기감실 앞에 GMC 트럭이 보였다. 차에 올라 키를 꽂아보니 시동이 걸렸다.
나는 그 트럭을 몰아 육사 8기생인 동기 몇 명을 태우고 길을 나섰다. 새벽 2시30분쯤이었다. 한강 인도교(지금의 한강대교)를 200m쯤 남겨둔 지점이었다. 그때 앞에서 번쩍하더니 큰 폭발음이 일었다. 한강 인도교에는 피란을 가려는 사람들이 가득 몰려 있었다. 국군이 후퇴하면서 인도교를 폭파한 것이다. 무엇인가가 후두둑 떨어져 내 얼굴에 묻었다. 사람들의 피와 살점이었다. 내가 몰던 차가 조금만 일찍 인도교에 진입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등에 식은 땀이 났다. 우리는 차를 버리고 서빙고 나루를 향했다.
할아버지 한 분이 바지선으로 우리를 건네 주었다. 남쪽으로 건너가는 배 안에서 노를 젓던 할아버지가 말했다. “꼭 돌아들 와, 꼭 돌아오라구….” 서울을 탈환해 주길 바라는 간절함이 배어 있는 말이었다. 우리는 강을 건넌 뒤 시흥을 거쳐 수원으로 걸었다.
김종필 대위가 1952년 강원도에 근무할 때 탱크 앞에서 찍은 사진(위)과 중위 때인 50년 6월 27일 육본 정보국 북한반장으로 서울 창동 전선에 나가는 모습.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조국이 백척(百尺)의 간두(竿頭)에서 흔들리고 있는 암담한 상황이었다. 우리는 새벽의 어둠을 헤치며 걷고 또 걸었다. 나는 하나의 상념에 빠져들었다. 박정희 문관은 돌아올 것인가?
전쟁이 터지자 박정희 문관의 좌익 문제가 내게 다시 다가왔다. 1949년 군 내부의 남로당 연루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벌인 숙군(肅軍) 때였다. 박정희 소령은 사형의 위기에 처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그는 군복을 벗고 정보국 문관(작전정보실장)으로 근무하면서 우리와 만났다.
그는 우리가 존경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사람이었다. 말이 없어 과묵한 인상이었다. 업무는 정밀했고 사고는 조직적이었다. 그와 함께 일했던 우리였지만 ‘박정희가 이념적으로 어떤 사람인가’에 관한 의구는 전부 해소하지 못한 상태였다.
박정희 실장의 행방이 점점 궁금해졌다. 그는 전쟁이 터질 때 모친의 1주기 제사를 지내기 위해 고향 경북 구미에 내려가 있었다. 6·25가 발발한 그날 그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구미경찰서에서 전화를 건다는 그는 “서울에 올라가려는데, 당최 가는 교통편이 없다. 정보국장에게 보고해 달라”고 했다. 27일 오전 7시에야 박정희 실장은 육본에 도착했다. 구미역에서 화물열차를 얻어 타고 상경했다는데 그 시간 이후론 보지 못했다.
박 실장의 소재는 나만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후퇴하면서도 정보국 동료들과 “우리 내기를 하자”고 할 정도였다. 박정희 실장은 남으로 갈 것인가, 북으로 갈 것인가. 수원으로 내려갈 것인가, 서울에 남을 것인가. 박 실장이 돌아와 인민군과 싸우게 되면 좌익 의혹은 사라질 것이다. 그가 돌아오지 않으면 조국을 배반했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동료 두어 명은 “박정희는 의심스럽다.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후퇴하지 않았을 거다”고 주장했다. 나는 “박정희는 수원으로 갔다” 쪽에 걸었다. 우선 구미에서 걸려왔던 그의 전화를 믿었다. 그럼에도 100%의 확신은 아니었다.
오후 5시 무렵 우리는 수원 농업시험장에 도착했다. 장병을 태운 지프들이 분주하게 오가고 있었다. 육군의 수뇌부 모습은 형편이 없었다. 미군 고문단이 이미 자리를 잡은 2층의 낮은 건물 한쪽에 육군본부를 차렸다. 우리 정보국은 인근 수원초등학교에 자리 잡았다. 내 눈길은 어느새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아! 박정희 실장이 초등학교 정문 앞에 서 있었다. 34시간 만의 만남이었다. 옆에는 장도영 정보국장이 있었다. “휴… 빨갱이가 아니었구먼요.”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따뜻한 생각이 가슴속에 번졌다. 암담한 후퇴 상황에서 발견한 믿음과 환희였다. 박 실장은 “오느라 정말 수고 많았다”면서 내 어깨를 두드렸다. 예의 그 멋쩍어하는 미소도 지어 보였다. 비로소 내 마음속의 큰 응어리가 풀렸다. 봄에 녹아 내리는 깊은 얼음 구덩이 같았다. 그에게 둘러씌워진 좌익 중죄(重罪) 이미지는 단단했다. 박 실장을 옥죄는 사람들의 태도 또한 집요했다.
수원 육본에서 해후하면서 박 실장이 좌익이다, 아니다는 논란은 육본 정보국 내부에서는 사라졌다. 수원에서 박정희 실장은 1년여 전 벗었던 군복을 다시 걸친다. 장도영 당시 정보국장이 문관인 그의 현역 복귀 문제를 해결했다.
전쟁 통이라 모든 것이 부족했다. 당시 우리는 철모의 내피인 파이버를 쓰고 있었다. 나는 그의 복귀 결정 소식을 듣고서는 파이버 하나를 얼른 구해 왔다. 그 위에 그리스펜슬(종이말이 색연필)로 태극 무늬를 그렸다. 소령 계급장을 달리 구할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파이버를 들고 가서 그에게 씌워 줬다. 그러자 박정희 소령이 씩 웃으며 말했다. “자네가 날 임명하는구먼.”
지동도합(志同道合)이라는 말이 있다. 동지(同志)라는 한자 단어가 유래한 성어다. 품은 뜻과 가려는 길이 같은 경우를 말한다. 사상과 신념의 일치도 말해 준다. 5·16의 거사와 완성을 위한 멀고도 긴 여정에서 JP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그때 그렇게 뜻을 맞추기 시작했다.
정리=전영기 기자, 유광종 작가
6·25 개전 초기 국군 혼란상
북한의 남침은 개전 뒤 사흘 동안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극도의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의 침략 개시 6시간 뒤인 6월 25일 오전 10시 경복궁 경회루에서 낚시를 하던 중 전쟁 발발 소식을 처음 접했다. 25일 오후 2시에 열린 대통령 주재 국무회의에서도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북한의 공격은 공비 두목 이주하와 김삼룡을 살려내기 위해 벌인 책략으로 전면 남침은 아니다”는 내용으로 보고했다. 그러나 미국의 주한 대사 무초는 오전 10시26분 국무부에 “북한군이 전면 남침했다”는 보고서를 보냈다.
이어 미 국무부는 대통령 주재 국가안보회의(NSC)를 거쳐 유엔 안보리 소집을 요구하는 등 긴급 대처에 나섰다. 주미 한국대사 장면의 요청을 받아들여 오후에는 도쿄의 맥아더 극동사령부에 “한국에 탄약을 추가로 공급하라”는 명령도 내렸다.
유엔 안보리는 26일 오전 3시(한국시간) ‘적의 즉시 철퇴’를 요구하는 미국의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튿날인 26일 국군은 모든 전선에서 반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북한군은 옹진반도 대부분을 점령하는 등 공세를 이어갔다.
27일에는 북한군이 의정부를 통과해 서울로 향했고 동부전선의 춘천과 강릉을 점령했다. 육군본부는 28일 오전 2시30분 한강 인도교를 끊기 직전 강을 넘어 수원의 농업시험장으로 옮겼다.
유광종 작가
"휴~ 빨갱이 아니었구먼요"
(중앙일보 2015.03.04.01:53:40)
6·25 남침 사흘 뒤, 수원 육군본부 나타난 박정희 … JP는 안도했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 진압을 위해 광주 토벌사령부에 내려간 박정희 소령(왼쪽)이 송호성 사령관과 협의를 하고 있다. 박 소령은 서울에 복귀한 뒤 남로당 군사책 혐의로 숙군 대상에 올라 사형 위기를 맞았다. 사진 전문잡지 라이프에 실린 사진.
1950년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문관으로 근무하던 박정희 작전정보실장은 6·25 남침 당시 구미 고향 집에 있었다. 그가 화물차를 얻어 타고 서울에 도착한 건 27일 오전 7시. 그 시점부터 28일 오후 5시 수원에 마련된 임시 육본에 그가 나타날 때까지 ‘박정희 문관’의 34시간 행방은 정보국의 큰 관심이었다. 김종필 중위는 정보국 북한반장이었다. 박 실장은 49년 숙군(肅軍) 때 남로당 연루 혐의로 사형 구형을 받고 강제 예편됐다.
박 실장이 한강을 건너 수원 육본에 나타나면 좌익 의혹을 씻을 수 있는 반면 나타나지 않으면 의혹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김종필(JP) 전 총리는 중앙일보 증언에서 “28일 새벽 한강 다리가 폭파돼 나는 바지선으로 강을 건너 수원까지 걸어갔다. 박정희 문관이 나타나주길 간절히 바랐다. 오후에 육본에 도착하니 박 전 대통령은 이미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휴~ 빨갱이는 아니었구먼요.’ 혼잣말이 저절로 나왔다”고 회고했다.
'인간관계 > 별난인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성조선] "어머니는 흔들림 없는 작가였다" (조선일보 2015.03.15 18:10) (0) | 2015.03.15 |
---|---|
[주간조선] 용접봉업체 사장으로 변신한 최희암 전 농구감독 (조선일보 2015.03.03 14:52) (0) | 2015.03.08 |
'천재비자'받고 미국으로 떠나는 초밥 장인 (조선일보 2015.03.01 13:25) (0) | 2015.03.02 |
"北韓 지원 비료값을 떼이고… 내가 물정 몰라 정치인들에게 이용당해" (조선일보 2015.01.26 03:05) (0) | 2015.01.28 |
가족 17명이 의사, 은혜산부인과 김애양 원장 (중앙일보 2015.01.10 18:23) (0) | 2015.0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