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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테크/창 업

홍익희 교수의 ‘유대 창업마피아’ - 무섭도록 치밀한 그들만의 단결력 중앙일보 2015.02.21 00:01)

홍익희 교수의 ‘유대 창업마피아’ - 무섭도록 치밀한 그들만의 단결력

 ‘페이팔 마피아’ 넘어 세계 창업세계 뒤흔드는 유대인 네트워크 분석

 

 창업만이 살 길이다’. 새로운 성장동력을 창업에서 찾자는 목소리가 높다. 실제로 많은 청년이 창업에 뛰어들고 있다. 정부도 각종 지원책을 마련해 이들을 독려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뚜렷한 성과는 없다. 무엇이 문제일까. 창업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집단은 유대인이다. 이들의 창업 생태계에서 성공의 실마리를 찾아보는 건 어떨까. 그들만의 창업네트워크를 분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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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팔·구글·페이스북은 모두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태어났다. 세계의 창업 허브인 실리콘밸리에서는 세상을 바꾸는 기업들이 수없이 탄생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미래의 주커 버그를 꿈꾸며 창업에 도전한다. 투자자들은 이 가운데 될성부른 싹을 찾아내 투자한다. 이곳에선 실패도 성공을 위한 당연한 과정으로 받아들여진다. 성공한 창업회사들은 거대 기업에 인수되거나 나스닥에 상장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억만장자가 된 창업가들은 투자자로 변신한다. 새로운 창업 후배들에게 투자하거나 자신이 다시 새로운 창업가가 된다. 이렇게 끝없는 창업의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진다. 실리콘밸리의 창업 생태계다.

이런 실리콘밸리는 유대인이 주도하고 있다. 이들이 창업 생태계의 핵심이다. 페이팔·구글·페이스북의 또 다른 공통점은 모두 유대인이 창업한 회사라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맞닥뜨리게 된다. 왜 창업 생태계의 주인공 대부분이 유대인일까? 그들의 공통적 특징은 뭘까? 그들의 장단점은? 새로운 창업 생태계를 조성하고 가꾸어 나가야 할 우리에게 절실한 질문이다.

미국 인구의 2% 밖에 안 되는 유대인들이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실리콘밸리에서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창의력 덕분이다. 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게 있다. 바로 그들이 지켜온 관습, 곧 디아스포라(팔레스타인 밖에 살면서 유대교적 종교 규범과 생활관습을 유지하는 유대인 또는 그들의 거주지를 가리키는 말) 시절부터 준수해온 유대인 커뮤니티의 수칙으로부터 기인한 단결력 덕도 크다. 역사적으로 유대인 사회는 툭하면 박해를 받았다. 때문에 생존을 위해서는 서로 도우며 단결해야 했다. 이런 원칙이 오늘날 실리콘밸리에서도 그대로 작용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독특한 민족이다. 그들은 기원전 600년경 나라를 잃고 방랑하는 고난의 역사를 겪었다. 세계 곳곳에 흩어져 디아스포라를 이뤄 살았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동질성과 민족혼을 잃지 않았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바로 그들의 신앙심과 단결력 덕분이다. “너희는 모두 한 형제다. 서로 도우라”라는 야훼의 말씀을 오늘날까지 굳건히 지키는 게 유대인들이다. 그들은 서로를 철저히 도와 상권을 장악하고 무역을 발전시켰다. 그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사는 곳에서 늘 경제가 발전했다. 역사적으로 상업, 무역과 금융업에서 그랬듯, 오늘날 지식산업계에서도 그들은 창의력과 단결력으로 시장을 제패하고 있다. 유대인 창업기업을 보면 창업 생태계의 유대인들끼리 똘똘 뭉쳐 성공시킨 사례를 쉽게 볼 수 있다. 밀어주고 당겨주는 그들의 단결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유대인 중심의 실리콘밸리 창업 생태계

그들은 중세부터 창업자들을 위한 ‘무이자대출협회’를 운영해오고 있다. 중요한 것은 망해도 3번까지는 밀어준다는 점이다. 확률적으로 창업자들이 일반적으로 성공하는 횟수는 평균 2.6회째다. 두 번의 실패를 겪어보아야 다음 번 3번째 창업에서 성공한다는 얘기다. 한 번 망하면 곧 신용불량자가 되는 한국 창업자에게는 꿈도 꾸기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이런 대출제도조차 그리 잘 이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대부분 투자를 받기 때문이다. 실리콘밸리에서 유대인 창업가들이 투자 받는 확률은 97%다. 한국 창업가들이 투자 받는 확률은 1.5%에 불과하다.

유대인들은 물질적 지원에 그치지 않는다. 더 중요한 건 창업가가 성공할 수 있도록 필요한 인맥을 붙여주고 그들의 지식을 나누어 준다. 이스라엘 창업회사들이 나스닥에 상장한 숫자가 전 유럽 국가들의 창업회사들이 나스닥에 상장한 수보다 더 많다는 것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실리콘밸리 유대인들은 같은 동족이라면 일단 물불 가리지 않고 지원한다. 우선 유대계 창업가를 해당 콘퍼런스에 참석시켜 필요한 인맥을 연결시켜 준다. 여기에는 당연히 엔젤 투자가들과 벤처캐피털리스트들도 포함된다. 그리고 글로벌 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마케팅 네트워크도 소개한다. 물론 나중에는 M&A와 상장 전문가도 연결시켜 준다.

유대인 창업가가 투자 받을 확률 97%

유대인의 창업 이야기에서 늘 등장하는 단어가 ‘페이팔 마피아’다. 혁신적인 e메일 결제서비스 ‘페이팔’은 창업 초기 유대인 케빈 하츠로부터 투자를 받았다. 그 뒤 빠르게 성장해 2년 만에 나스닥 상장에 성공했다. 같은 해 이를 눈여겨본 세계 최대 온라인 쇼핑몰 이베이가 페이팔을 15억 달러에 인수했다. 이베이 역시 줄곧 유대인들이 경영해왔다. 페이팔을 함께 만든 유대인들, 엘론 머스크, 피터 틸과 맥스 레브친을 포함한 주요 인사들은 페이팔을 판 뒤에도 끊임없이 다시 창업하고, 서로 돕고 투자했다. 끈끈한 결속력은 마치 마피아를 닮았다. 그래서 이들을 ‘페이팔 마피아’라 부른다. 이후 페이팔 마피아들이 창업하거나 투자한 기업이 유튜브, 전기자동차 테슬라모터스, 2011년에 상장한 페이스북 기반 게임회사 징가와 링크드인, 2012년에 상장한 옐프와 마이크로소프트에 인수된 야머 등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창업 네트워크는 페이팔을 넘어 훨씬 더 광범위하다. 그래서 ‘창업마피아’라 할 수 있을 정도다. 앞으로 연재할 '유대 창업마피아’는 실리콘밸리 핵심 유대인을 중심으로 유대인 창업세계의 상호협력 관계를 살펴본다. 먼저 페이팔 마피아를 중심으로 그들로부터 파생된 기업들과 그 과정에서 구글과 페이스북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 나가려 한다. 무섭도록 치밀한 유대인의 창업세계를….

글=홍익희 배재대 교수. KOTRA 근무 32년 가운데 18년을 뉴욕· 밀라노·마드리드 등 해외에서 보내며 유대인들을 눈여겨보았다. 유대인들의 경제사적 궤적을 추적한 <유대인 이야기> 등을 썼으며 최근에 <달러 이야기>, <환율전쟁 이야기>, <월가 이야기>를 출간했다.

 


 

홍익희 교수의 ‘유대 창업마피아’ ② 페이팔 마피아의 대부 피터 틸 - 부에 안주하지 않고 창업 또 창업

(중앙일보  2015.02.20 01:42)

철학·법학 전공에 금융업 경험 … 페이팔 매각 후 페이스북 등에 투자

 

창업만이 살 길이다’. 새로운 성장동력을 창업에서 찾자는 목소리가 높다. 실제로 많은 청년이 창업에 뛰어들고 있다. 정부도 각종 지원책을 마련해 이들을 독려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뚜렷한 성과는 없다. 무엇이 문제일까. 창업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집단은 유대인이다. 이들의 창업 생태계에서 성공의 실마리를 찾아보는 건 어떨까. 그들만의 창업네트워크를 분석한다.

피터 틸. / 사진:중앙포토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페이팔’은 하나의 신화다. e메일을 이용한 세계 최대 상거래 결제서비스 회사로 성공한 것도 중요하지만, 거액을 받고 회사를 판 뒤 창업 멤버들의 행보가 더욱 눈길을 끌어서다. 그들은 부에 안주하지 않고 모두 다시 험난한 창업의 길로 나섰다. 그들은 비록 흩어져 각자의 길을 걸으면서도 한 형제처럼 서로 도왔다. 끌어주고, 밀어주고, 투자해주고, 정보를 공유했다. 비정기적이나마 일주일에 한 번 꼴로 모여 서로의 아이디어를 놓고 질문과 토론을 거듭했다. 전형적인 유대인 학습방법이다. 이렇게 끈끈한 조직력을 보이자 언론은 이들을 ‘페이팔 마피아’라고 불렀다. 이들의 대부가 바로 피터 틸(Peter Thiel)이다.

이들이 세운 창업회사 가운데 10억 달러 이상 가치를 가진 회사는 무려 7개나 된다. 엘런 머스크의 ‘테슬라’와 ‘스페이스엑스’, 리드 호프먼의 ‘링크트인’, 스티브 첸, 채드 헐리, 자웨드 카림의 ‘유튜브’, 제러미 스토플먼, 러셀 시먼스의 ‘옐프’, 데이비드오 삭스의 ‘야머’, 그리고 피터 틸의 ‘팰런티어’가 바로 그것이다.

유대인답게 단결력 가장 중시


1967년생인 틸은 자유분방하면서도 인생의 중요한 터닝 포인트에 강했다. 스탠퍼드 대학에서 철학을 수학했으나 그 뒤 진로를 바꿔 대학원에서는 법학을 전공했다. 이 시기 틸은 국가의 법적 규제가 자유로운 사상을 억압한다고 보고 이에 반대해 ‘자유지상주의’를 옹호했다. 이를 위해 뜻있는 친구들을 모아 대학신문 ‘스탠퍼드 리뷰’를 창간해 편집장으로 일했다. 졸업 후 틸은 뉴욕의 한 법률사무소에서 변호사로 일했으나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는 또 진로를 바꾸기로 결심했다. 7개월 만에 변호사 생활을 청산한 후 이번에는 금융계로 눈을 돌렸다. 그는 크레딧스위스(Credit Suisse)에서 파생상품 트레이더로 일했다. 그가 금융 자본주의의 속성을 잘 아는 이유다. 그 뒤 틸은 3년 간 경험을 쌓아 어느 정도 금융계 생리를 터득하자 독립을 결심했다.

그는 1996년 캘리포니아로 이사와 주변 사람들로부터 100만 달러를 모집해 ‘틸캐피털(Thiel Capital)’이라는 헤지펀드 회사를 차렸다. 1998년 틸은 모교 스탠퍼드 대학에서 여름학기 강의를 했다. ‘화폐시장의 글로벌 개방과 정치적 자유와의 관계’에 대한 강의였다. 신출내기 강사라 수강생은 6명에 불과했다. 이 강의에서 그는 24살의 유대인 맥스 레브친을 만났다.

이들은 상대방 e메일 주소만 알면 송금할 수 있는 서비스를 최초로 개발했다. 컨피니티의 이념은 중앙집권적 정부 제도를 반대하는 틸의 개인적 이상과도 일치했다. 사람들에게 편리하고 안전한 온라인 계좌를 제공해 특히 개도국 국민들이 환율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화폐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컨피니티의 송금방식은 혁신적인 모델이었다. 한번만 신용카드 정보를 입력해 놓으면 언제든 e메일을 이용해 송금할 수 있었다. 간편할 뿐 아니라 개인정보도 유출되지 않았다. 이른바 금융과 IT기술의 결합인 핀테크의 시작이었다. 그 뒤 컨피니티라는 회사 이름을 ‘페이팔’로 바꾸었다.

틸은 투자 받은 돈으로 능력 있는 사람들을 모았다. 기준은 하나였다. 같이 즐겁게 팀을 이루어 일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했다. 그는 유대인답게 단결력을 가장 중시했다. 이를 위해 리드 호프만, 데이드 삭스, 키스 라보아, 로엘로프 보다 등 대학 시절 친구들을 페이팔에 합류시켰다. 대부분 유대인이었다. 그는 지금도 벤처 투자를 할 때 창업자들의 성향을 최우선적으로 본다.

그 뒤 빠르게 경쟁사들이 나타났다. 이베이는 ‘빌포인트’를 내놓았고 그 외에도 여러 서비스가 나왔다. 그 가운데 하나가 엘론 머스크의 ‘X.com’이었는데 송금방식이 컨피니티와 똑같았다. 틸은 유대인 특유의 ‘독점에 대한 철학’을 갖고 있었다. 그는 독점을 위해서는 두 회사가 합쳐야 된다고 판단했다. 2000년 3월 ‘페이팔’과 엘론 머스크의 ‘X.com’은 50:50의 합병을 단행했다.

페이팔은 출시 후 사용자 늘리기를 최우선 목표로 정했다. 페이팔 회원이 비회원에게 e메일로 송금하면 송금자와 수신자 모두에게 10달러를 주는 바이럴 캠페인을 실시했다. 그러자 가입자가 기하 급수적으로 늘어났고 회사는 빠르게 성장했다. 페이팔은 서비스 규모를 빠르게 키우고 비즈니스 모델을 도입해 매출을 불려 나갔다. 그 뒤 벤처거품 붕괴로 주식시장이 무너졌음에도 2002년 2월 페이팔은 나스닥 상장에 성공해 7000만 달러를 확보했다. 당시 이베이를 이끌고 있던 맥 휘트먼은 결단을 내렸다. 그녀 또한 유대인답게 경쟁하기보다는 인수를 택해 페이팔을 15억 달러에 사들였다. 이를 통해 틸은 약 5500만 달러의 재산을 갖게 됐다.

페이팔 마피아 관련 기업 가치 30조원 넘어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틸은 페이팔 매각 후 1000만 달러를 투자해 헤지펀드 ‘클래리움캐피털’을 세웠다. 이어 2004년에는 빅데이터 분석 플랫폼을 제공하는 ‘팰런티어 테크놀로지스’를 설립했다. 사기 방지와 범죄 예방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회사였다. 세계의 정보를 분석하고, 시각화하고, 통합할 수 있는 플랫폼이다. 실제 팰런티어는 아프가니스탄 반군의 폭탄설치 지점을 찾아내고 아동 포르노 단체를 색출해 냈다. 미국 정부가 빈 라덴을 추적하는데 활용했다는 소문도 있다. 그 뒤 FBI와 CIA는 팰런티어를 적극 활용했고, 기업가치는 약 93억 달러(약 10조원)로 불어났다.

또한 2004년 8월에 틸은 리드 호프만, 마크 핀커스와 함께 페이스북의 첫 엔젤 투자자가 된다. 당시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주커버그는 실리콘밸리로 막 이사해 자기를 지도해 줄 멘토를 찾던 중이었다. 틸은 페이스북에 50만 달러를 투자해 10.2%의 지분을 받고 이사회에 합류한다. 그는 벤처사업에 문외한이었던 주커버그를 도와 페이스북의 체계를 잡았고 골드먼삭스 등 ‘큰손’들로부터의 투자를 이끌어냈다. 이후 페이스북이 상장되고 난 뒤 그는 지분 일부를 팔아 약 10억 달러를 벌었다. 현재도 2억 달러 상당의 지분을 갖고 있는 페이스북 이사이다.

그는 이외에도 2005년 ‘파운더스 펀드’라는 벤처캐피털을 설립해 이를 통해 엘프·슬라이드·링크드인 등에 투자했다. 또한 2012년에는 기술기반 기업을 위한 투자회사 ‘미스릴캐피털매니지먼트’를 세웠다. 틸은 여러 형태 투자회사들과 개인 투자를 통해 실리콘밸리의 창업생태계를 키웠다. 페이팔 마피아로부터 파생된 모든 기업의 가치를 합산하면 30조원이 넘는다.

틸은 자유 증진을 위해 ‘틸 재단’을 설립해 다방면에서 후원과 기부를 하고 있다. 더불어 ‘틸 펠로우십’에서는 현재 ‘20 under 20’이라는 장학금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매년 대학을 중퇴하고 회사를 창업하는 20명에게 각 10만 달러를 투자하는 프로그램이다. 세상을 바꿀 인재들에게 일찍부터 기회를 준다는 취지다. 틸에게는 꿈이 있다. 바다에 인공 섬을 만들어 규제 없는 자유주의 국가를 만든다는 꿈이다. 첫 프로젝트가 이미 시작돼 인공 섬을 건설 중이다. 틸은 이런 섬을 계속 이어 붙여 베네치아처럼 큰 섬을 만들 계획이다.

글=홍익희 배재대 교수. KOTRA 근무 32년 가운데 18년을 뉴욕· 밀라노·마드리드 등 해외에서 보내며 유대인들을 눈여겨보았다. 유대인들의 경제사적 궤적을 추적한 <유대인 이야기> 등을 썼으며 최근에 <달러 이야기>, <환율전쟁 이야기>, <월가 이야기>를 출간했다.

 

 

홍익희 교수의 ‘유대 창업마피아’ ③ ‘페이팔의 두뇌’ 맥스 레브친 - 천문학적 재산의 거부 ‘놀기엔 너무 젊다’

(중앙일보 2015.02.22 00:01)

인생에서 가장 괴로웠던 순간은 페이팔 매각 직후 … 엘론 머스크와 영화 제작도

 

‘창업만이 살 길이다’. 새로운 성장동력을 창업에서 찾자는 목소리가 높다. 실제로 많은 청년이 창업에 뛰어들고 있다. 정부도 각종 지원책을 마련해 이들을 독려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뚜렷한 성과는 없다. 무엇이 문제일까. 창업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집단은 유대인이다. 이들의 창업 생태계에서 성공의 실마리를 찾아보는 건 어떨까. 그들만의 창업네트워크를 분석한다.

맥스 레브친

유대인들은 창업에 성공한 뒤 거금을 받고 회사를 팔아 부자가 돼도 쉬는 법이 없다. 요즘 미국에서 한창 뜨는 것이 소셜 네트워킹 리뷰 사이트 ‘엘프’(yelp)다. 엘프 사이트에 올라오는 업소의 품평은 소비자들의 선택을 좌우할 정도로 막강하다. 엘프의 기업 가치는 2012년 상장 시점 기준 8억4000만 달러다. 엘프의 맥스 레브친 회장은 이른바 ‘페이팔 마피아’ 가운데 한 명으로 페이팔의 실질적 창업주다. 그는 페이팔 이후에도 여러 창업에 관여해 ‘연쇄 창업가’로 유명하다.

온라인 송금시장에 등장한 해커 공격 막아

레브친은 1998년 스탠퍼드대 인근에서 피터 틸과 점심을 먹다 암호화 저장 소프트웨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이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창업을 제안했다. 이렇게 해서 레브친과 틸은 ‘컨피니티’란 보안 소프트웨어 회사를 만들었다. 하지만 레브친의 아이디어는 실패했다. 개인용정보단말기(PDA)는 보급이 느렸을 뿐 아니라 보안 요건이 까다로웠다. 그는 계획을 수정했다. PDA가 아닌 PC용 보안 소프트웨어로 방향을 바꿨다. 하지만 이마저도 실패했다. 그 뒤에도 계속되는 실패를 거치면서 레브친은 다른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정보를 암호화해 보낼 수 있다면 돈도 암호화해 송금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마침내 그들은 일곱 번째 도전에 성공했다. 이 회사는 인터넷 결제시스템인 페이팔로 진화해 오늘날 온라인 결제 분야를 장악했다.

레브친은 1975년 우크라이나 키에프 태생이다.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고를 피해 16살 때 미국 시카고에 정착했다. 새로운 시작을 기념하며 레브친은 중고 컴퓨터를 선물 받았다. 그는 일리노이대에서 컴퓨터 공학을 전공했다. 특히 암호화에 관심을 가졌다. 창업에 관심이 많았던 레브친은 대학을 다니며 3번 창업했다. 이 가운데 자동화 마케팅 툴 ‘넷메리디안 소프트웨어’는 마이크로소프트에 팔렸다.

그는 더 큰 무대인 실리콘밸리에 가서 제대로 창업을 해보고 싶었다. 1998년 팜 파일럿(Palm Pilot) 등 당시 유행한 휴대용 컴퓨터에 암호화된 정보를 저장하는 필드링크(Fieldlink)라는 보안 서비스 아이디어를 사업화하고 싶어 했다. 대학 동기인 유대인 루크 노섹이 실리콘밸리에서 피터 틸로부터 투자를 받자 레브친도 틸을 찾아가기로 마음먹고 러셀 시먼스와 제러미 스토펠만을 함께 데려갔다. 24살의 맥스는 틸에게 자신을 소개하며 필등링크에 대한 의견을 구했다. 틸은 레브친의 아이디어에 끌렸다. 그는 필드링크 아이디어에 투자 의사를 밝히고 공동 창업을 제안했다. 틸이 CEO로 경영을 맡고, 레브친은 최고기술책임자(CTO)로 기술을 담당했다.

소문이 나자 빠르게 경쟁사들이 나타났다. 이 가운데 하나가 페이팔을 본떠 만든 엘론 머스크의 ‘X.com’이었다. 둘은 경쟁을 피해 2000년 3월 합병했고 엘론 머스크가 대표이사를 맡았다. 또한 ‘X.com’에 투자했던 세쿼이아캐피탈의 유대인 투자자 마이클 모르치가 이사회에 합류했다. 2000년 10월 엘론 머스크와 실무진 사이에 의견차가 심해지자 피터 틸이 페이팔의 대표를 맡게 된다. 이때 우후죽순처럼 기업이 늘어난 온라인 송금 업계에 큰 사건이 터진다. 해커들이 물 만난 고기처럼 활약 하면서 허위 정보로 돈을 빼내가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도산하는 기업이 많아졌다. 해커들로부터 공격을 받고 힘들어 하기는 페이팔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가장 실력 있고 악랄한 해커는 러시아의 ‘Igor’였다.

페이팔의 기술이사 레브친에게는 절대절명의 위기였다. 그는 인턴이던 가우스벡과 해커들의 공격을 막기 위한 연구에 몰입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가우스벡 - 레브친 테스트’다. 기계나 컴퓨터가 아닌 사람의 눈으로만 판독 가능한 숫자판 형태다. 그리고 컴퓨터가 허위로 생산한 가짜 정보들을 식별해 내는 솔루션 ‘IGOR’도 발명했다. 프로그램 이름에 아예 해커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 공로로 MIT는 올해의 발명가로 레브친을 선정했다.

실리콘밸리에서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들인 젊은 유대인 창업주들은 여생을 편안히 지내기보다 다시 투자가가 되거나 새로운 창업에 도전한다. 레브친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괴로웠던 시기가 페이팔을 이베이에 매각해 거금을 손에 쥔 뒤라고 했다. 처음에는 자신의 내면을 찾는 생활을 하자며 1년여 간 멋진 해변에서 여자 친구와 놀았다. 하지만 금방 시들해졌다. 자신이 놀기에는 너무 젊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더구나 ‘게으름은 죄’라는 유대인 고유의 죄의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는 결국 실리콘밸리의 한 벤처캐피털 회사에 취직했다. 그러다 핫오어낫(HotOrNot)을 공동창업해 거금을 번 후 회사에 들어온 제임스 홍과 신세한탄을 하며 지내다 둘은 다시 창업의 길로 나섰다. 레브친은 2004년에 사진과 동영상 공유 사이트인 슬라이드닷컴을 만들어 하루 18시간씩 일했다. 그는 2004년 슬라이드닷컴 창업과 동시에 투자 활동도 열심히 했다. 그는 페이팔 엔지니어였던 제레미 스토플만이 만든 ‘옐프’의 창업을 도우며 100만 달러를 투자해 현재 옐프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다.

‘게으름은 죄’ 끊임없는 창업과 투자



레브친은 영화 제작에도 관심을 보여 2005년 틸, 머스크와 함께 영화 <생큐 포 스모킹>의 공동기획자로 참여했다. 2010년에는 구글이 슬라이드닷컴을 1억 8200만 달러에 인수하면서 그는 현재 구글의 이사이기도 하다. 페이팔 이후 그가 창업한 두 번째 회사도 잘 키워 매각에 성공한 것이다.

레브친은 그 뒤에도 야후와 에버노트 이사로 활동하며 초기 단계 스타트업에 꾸준히 투자하고 있다. 핀터레스트(Pinterest)·유누들(YouNoodle)·위페이(WePay) 등 10개가 넘는 회사에 투자했다. 현재는 ‘Kaggle’이라는 대용량 데이터 분석회사 회장이다. 그는 현재 실리콘밸리에서 ‘Hard, Valuable, Fun(HVF)’이라는 테크 인큐베이터를 운영하며 투자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레브친이 결국 엘프를 비롯해 현재 관계를 맺고 있는 회사들도 떠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기업을 키우는 것보다, 새로운 기업을 창업하는데 더 큰 재능이 있기 때문이다. 실리콘밸리 유대인들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글=홍익희 배재대 교수. KOTRA 근무 32년 가운데 18년을 뉴욕·밀라노·마드리드 등 해외에서 보내며 유대인들을 눈여겨보았다. 유대인들의 경제사적 궤적을 추적한 <유대인 이야기> 등을 썼으며 최근에 <달러 이야기>, <환율전쟁 이야기>, <월가 이야기>를 출간했다.

 

 

홍익희 교수의 ‘유대 창업마피아’ ④ 엘론 머스크 - “사람의 그릇은 자신의 생각보다 크다”

(중앙일보 2015.03.01 00:01)

꿈 이뤄가는 극적인 삶에 대중 열광 … 우주화물선, 전기자동차 등 끊임없이 도전

 

 

‘창업만이 살 길이다’. 새로운 성장동력을 창업에서 찾자는 목소리가 높다. 실제로 많은 청년이 창업에 뛰어들고 있다. 정부도 각종 지원책을 마련해 이들을 독려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뚜렷한 성과는 없다. 무엇이 문제일까. 창업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집단은 유대인이다. 이들의 창업 생태계에서 성공의 실마리를 찾아보는 건 어떨까. 그들만의 창업네트워크를 분석한다.

미국 경제잡지 [포춘]은 ‘2013년 비즈니스 분야 톱 인물’ 1위로 엘론 머스크를 선정했다. 이에 앞서 [타임]도 ‘가장 영향력 있는 세계 100대 인사’를 선정하면서 엘론 머스크를 커버스토리로 내세웠다. 왜 미국인들은 엘론 머스크에 열광할까?

그의 삶 자체가 한 편의 드라마이며 그의 꿈이 한 편의 공상과학 판타지소설처럼 원대하기 때문이다. 영화 [아이언맨]의 실제 모델이 바로 엘론 머스크다. 그는 무일푼으로 시작한 창업이 대박을 쳐 거부가 되었다. 하지만 무리한 연속 창업과 투자로 부도 일보직전까지 몰렸다가 다시 회생했다. 삶 자체 극적이다. 그리고 그는 인류에게 3가지 원대한 꿈을 전하고 있다. 8만여 명이 거주할 수 있는 화성 주거지를 2030년쯤 완성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류를 화석연료로부터 해방하겠다고 말했다.

파산 직전 받은 크리스마스 선물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태어난 머스크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독학해 12살에 비디오 게임 코드를 직접 짜 500달러에 팔았다. 스탠퍼드 대학 박사과정에 입학한 그는 창업을 위해 이틀 만에 학업을 접고, 24살에 ‘집투(Zip2)’라는 회사를 창업했다. 각종 매체에 온라인 콘텐트를 제공하는 회사였다. 뉴욕타임스·시카고트리뷴 등이 고객이었다. 머스크는 당시 돈이 없어 작은 임대사무실을 빌려 담요 위에서 자고 샤워는 근처 YMCA회관에서 해결해야 했다.

집투는 컴팩이 인수한 알타비스타가 3억700만 달러에 인수했다. 머스크는 현금 2200만 달러를 받아 28살에 억만장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온라인 금융 시장에 뛰어들었다. 1999년 1000만 달러를 투자해 ‘X.com’이라는 인터넷 전자상거래 서비스 회사이자 인터넷 은행을 창업했다. ‘X.com’은 유대계인 피터 틸과 막스 레브친이 세운 ‘페이팔’과 합쳤다. 머스크는 페이팔의 CEO가 돼 ‘페이팔 마피아’의 일원이 됐다. 그 뒤 페이팔은 2002년 나스닥 상장에 성공하고, 얼마 안 돼 15억 달러라는 거액으로 이베이에 팔렸다. 머스크는 1억6500만 달러 상당의 이베이 주식을 받았다.

10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두 번의 큰 성공을 거둔 그는 더 큰 꿈을 위해 도전했다. 그는 우주탐사에 쓰일 재생 가능한 로켓을 만들기로 했다. 이를 위해 2002년 민간우주선 개발회사 ‘스페이스X’를 창업했다. 그리고 2003년 전기자동차 개발회사 ‘테슬라 모터스’, 2004년에 태양광 패널 제작회사 ‘솔라시티’를 잇따라 창업했다. 이후 몇 년간 투자는 계속됐다. 하지만 돈은 벌 수 없었다. 머스크는 2008년 크리스마스 직전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고 말한다. 스페이스X 로켓 발사는 세 번째 실패했고, 테슬라 모터스는 자금 확보에 차질을 빚고, 솔라시티 투자자들은 자금지원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며칠 뒤면 파산 신고를 해야 하는 막다른 상황이었다. 이때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일이 일어났다. 크리스마스 전날 오후 6시에 펀딩을 받은 것이다. 기막힌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한 달 뒤 스페이스X는 미국항공우주국(NASA)과 16억 달러 프로젝트 용역계약을 맺었다. 국제우주정거장(ISS)에 화물을 수송하는 사업자로 스페이스X가 선정됐다. 같은 해 5월에는 테슬라 모터스가 독일 다임러사로부터 50억 달러를 투자받았다. 스페이스X는 마침내 2010년 우주선 발사에 성공했다. 그리고 2014년 5월에는 우주 화물선 발사에도 성공해 상업용 우주비행 시대의 서막을 열었다.

우주사업보다 더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은 전기자동차다. 설립 후 7년 간 전혀 수익을 내지 못한 사업이다. 2005년 구글 창업자인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이 개인 자격으로 테슬라 모터스에 투자했다. 래리 페이지의 유일한 투자였다. 2010년 테슬라 모터스의 첫 번째 양산형 제품인 ‘로드스터’ 출시 가격은 무려 10만9000달러였다. 하지만 목표 대수 이상은 팔았다. 그 뒤 머스크는 2012년 스포츠카 스타일의 전기자동차 ‘모델s’를 선보였다. 멋진 디자인으로 배터리 용량 40kWh 사양의 경우 미국 시장 기본 가격은 5만9900달러였다. 85kWh 사양은 7만7400달러다. 한 번 충전으로 400㎞ 이상을 주행하고 전기충전소 확대로 실용성은 점차 나아졌다. 전기자동차 보급을 위해 충전소 이용 가격은 무료로 책정했다. 궁극적으로 자동차 연료비를 없애겠다는 머스크의 포부에 따른 것이다.

공해 없는 전기자동차에 도전

미국 2위의 태양광 패널 회사인 솔라시티는 20년 내 미국 가정집 지붕 대부분을 태양열판으로 바꾸어 놓을 계획이다. 설치는 공짜로 해주고 전기료보다도 적은 임대료를 받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2014년 고효율 태양광 발전판 생산 기술을 보유한 벤처기업을 사들였다. 그리고 뉴욕에 세계 최대 태양광 발전판 생산 공장을 짓겠다고 선포했다. 머스크는 어릴 적 다짐했던 원대한 꿈 3가지 ‘인터넷, 청정에너지, 그리고 우주로의 진출’을 모두 이뤄내고 있다.

2015년 들어 그는 저궤도 위성 수백 개를 띄워 지구 전역을 연결, 인터넷 접속이 가능토록 한다는 구상을 냈다. 향후엔 화성에서도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최근 구글과 피델리티 인베스트먼트가 스페이스X의 지분 10%를 10억 달러에 인수했다. 구글은 지형적인 문제나 경제적인 이유로 인터넷에 접속하지 못하는 지역 주민에게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망 보급 사업에 관심이 많다. 사람들이 엘론 머스크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그가 대담한 이상에, 기술과 디자인과 상업성을 접목시켜 연속적으로 혁신을 주도하기 때문이다. 원대한 꿈을 꾸고 하나씩 실천해 가는 모습은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더구나 1971년생이니 아직 젊은 44세다. 머스크는 “사람들의 그릇은 그들이 깨닫는 것보다 훨씬 더 크다”며 “그저 ‘시도(try)’하는 것만이 혁신의 비결”이라고 강조한다.

글= 홍익희 - 배재대 교수. KOTRA 근무 32년 가운데 18년을 뉴욕· 밀라노·마드리드 등 해외에서 보내며 유대인들을 눈여겨보았다. 유대인들의 경제사적 궤적을 추적한 [유대인 이야기] 등을 썼으며 최근에 [달러 이야기], [환율전쟁 이야기], [월가 이야기]를 출간했다.

* 미국의 유대계 매체에서는 엘론 머스크나 리드 호프만를 유대인인듯 다루고 있으나 그들이 유대인인지 여부는 확실치 않다. 엘론 머스크의 경우 그가 페이팔 마피아의 일원이지만, 필자가 유대계 매체나 그에 대해 책을 쓴 랍비에게 문의하여 조사한 바, 그가 유대인이란 증거나 자료는 확인되지 않았다.

 

 

홍익희 교수의 ‘실리콘밸리 창업마피아’ 리드 호프만 - 실패까지 즐기는 벤처업계 팔방미인 

(중앙일보 2015.03.20 03:38)

창업가이자 경영자·엔젤투자가… 피터 틸에게 주커버그·숀파크 소개 

 

[이코노미스트]



실리콘밸리에서 창업하려고 한다면 찾아가 조언을 듣고 싶은 사람이 있다. 창업가이자 최고경영자·엔젤투자가, 벤처캐피털(VC) 투자가, 이사회 이사 등 거의 모든 부문을 다 거쳤기에 무슨 문제든 상담을 해줄 수 있는 사람, 바로 리드 호프만이다. 그는 이성적으로만 상황을 분석해주는 데 그치지 않고 상대방의 감정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까지 갖춘 조언자다.

호프만은 창업자들이 겪는 힘든 문제를 함께 풀어가는 게 행복하다고 한다. 그래서 초기엔 개인투자인 ‘엔젤투자’를 활발히 하다 2009년부터 큰 규모 기업투자를 위해 ‘그레이락파트너스’에 합류했다. 그가 투자한 회사에는 그루폰(Groupon)·에어비엔비(AirBnB)·플리커(Flickr) 등 세계적인 회사들이 있다. 개인 돈으로 투자한 회사만도 60개가 넘는다. 물론 페이팔 동료였던 마크 핀커스가 창업한 징가(Zynga)에도 투자했다. 호프만이 투자한 회사 가운데에는 한국인 문지원·호창성 부부가 창업해 일본 전자상거래 업체 라쿠텐에 2억 달러에 인수된 비키(Viki)도 있다.

피터 틸과 스탠퍼드에서 만나

2004년 페이스북의 숀파커는 투자를 받기 위해 리드 호프만을 찾아왔다. 호프만은 자기 몫의 투자를 결정한 후, 그들을 돕기 위해 투자계 큰 손인 피터 틸에게 주커버그와 숀파커를 소개했다. 틸은 당시 페이스북의 가치를 490만 달러로 계산하고 50만 달러를 투자했다. 엔젤투자로서는 거액이었다. 그리고 의리의 호프만이 자기 몫 8만 달러의 투자를 친구인 마크 핀커스와 나눠 투자했다. 이로써 페이스북은 결정적인 성장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들은 훗날 이 투자로 조 단위 차익을 남긴다.

호프만은 1967년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나 알래스카와 뉴욕에서 자랐다. 중학생 땐 롤플레잉게임(role playing game)에 빠졌다. 한 친구가 게임회사 신규 게임 테스팅 참가를 권해 게임 회사에 발을 들여 놓았는데 학교 외 모든 시간을 게임회사에서 보내며 스스로 게임 매뉴얼을 다시 썼다.

스탠퍼드에 진학한 호프만은 친구 피터 틸을 만났다. 비록 리드 호프만의 사회주의 사상과 피터 틸의 자유지상주의 사상은 서로 반대였지만 둘은 빠르게 친해졌다. 그는 자신이 창업하는데 필요한 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가장 짧은 길이 취업이라고 봤다. 그래서 스티브 잡스가 그만 둔 지 9년이 넘은 애플에 들어 갔다. 인재들은 많았지만 창의성과 혁신이 죽어있었다. 호프만은 애플에서 ‘이월드(eWorld)’라는 초기 형태 소셜네트워크를 기획했다. 그 뒤 그는 후지쯔를 거쳐, 1997년 마침내 첫 스타트업인 ‘소셜넷닷컴(SocialNet.com)’을 창업했다.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남녀를 매칭시키는 온라인 데이팅 서비스였다. 그는 서비스명에 ‘소셜네트워크’라는 단어를 썼다. 시대를 앞선 작명이었다. 그러나 소셜넷의 성장전략에 대해 이사회와 호프만 간에 의견 충돌이 잦았다. 결국 호프만은 자신이 설립한 회사를 떠났다.

이 시기 피터 틸은 막스 레브친과 함께 ‘컨피니티’를 창업했고 후에 페이팔 최고운영책임자(COO)로 호프만이 합류한다. 호프만의 역할은 온라인 결제에 핵심적인 비자·마스터카드 등 신용 카드사들과의 관계를 관리하는 업무였다. 이와 더불어 사업개발, 정부 관계 일과 법무 관련 업무도 함께 보았다. 마당발의 특기를 살린 업무 분장이었다. 페이팔과 ‘엑스닷컴’의 인수·합병 과정에서도 호프만은 중개역할을 담당했다. 페이팔이 15억 달러라는 고가에 팔리자 호프만은 하루아침에 백만장자가 됐다. 그러나 이것은 그에게 시작에 불과했다. 그 돈으로 쓴 사치라고는 혼다 승용차를 산 게 전부였다.

그에게는 스타트업에 대한 철학이 있다. 바로 ‘크게 생각하고 행동은 재빠르게(Think big, act fast)’였다. 목표가 크든, 작든 이를 이루기 위해 들여야 할 땀과 노력은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같은 값이면 큰 목표, 좋은 아이디어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또한 좋은 아이디어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네트워크를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보았다. 이를 통해 힘을 합쳐야 아이디어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의 특성상 속도 역시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첫 번째 서비스에서 당황하거나 부끄럽지 않다면, 이는 너무 늦게 서비스를 시작한 것이라고 봤다. 속도가 중요하기 때문에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빨리 추진하라는 뜻이다. 이는 그의 또 다른 철학인 ‘긍정적으로 보기(Be positive)’에 근거한 것이다. 실패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갖는 게 중요하며, 실패는 부끄럽거나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소중하고 중요한 경험이라는 것이다.

호프먼은 날이 갈수록 사람들의 직장 이직 주기가 짧아진다고 봤다. 따라서 이제는 직장인들이 각자 스스로 프로급 인맥 관리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36살의 호프만은 이 아이디어를 가지고 창업하기로 했다. 페이팔 매각 때 받은 돈과 페이팔 동료였던 틸과 키스 라보아로부터 초기 투자를 받았다. 그는 비즈니스용 소셜네트워크 ‘링크드인(www.linkedin.com)’을 창업해 2003년 5월에 출시했다.

크게 생각하고 행동은 재빠르게

링크드인은 ‘세상 사람은 누구라도 6단계만 거치면 모두 연결될 수 있다’는 개념을 내세웠던 ‘식스디그리스닷컴(SixDegrees. com)’의 이론에 주목했다. 창업자 앤드류 베인리치가 관련 특허를 갖고 있었는데 식스디그리스닷컴이 망하자 링크드인은 이 특허를 70만 달러에 샀다. 링크드인은 세쿼이아캐피탈로부터 470만 달러 투자를 받았는데 이를 엮어낸 사람이 페이팔 이사였던 유대인 마이클 모리츠였다. 이들은 초기에 사용자 확보에 전적으로 집중하는 전략을 택했다. 링크드인은 2011년 5월 뉴욕증권거래소(NYSE)에 상장돼 현 시가총액은 280억 달러에 이른다. 호프만의 자산은 42억 달러(약 4조6000억원)에 달한다.

호프만은 어릴 적부터 세상에 큰 영향을 미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원래 교수나 지식인이 되고 싶어 했으나, 대학교를 졸업하면서 ‘나는 50명이 읽을 논문을 쓰기보다는 수백 만명의 삶에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으로 창업가의 길을 걸었다. 현재 그는 수 억명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창업가이자 투자가로 활동하고 있다. 미국 유대계 매체에서는 리드 호프만를 유대인인 듯 다루고 있으나 그가 유대인인지 여부는 확실치 않다.

글=홍익희 - 배재대 교수. KOTRA 근무 32년 가운데 18년을 뉴욕·밀라노·마드리드 등 해외에서 보내며 유대인들을 눈여겨보았다. 유대인들의 경제사적 궤적을 추적한 [유대인 이야기] 등을 썼으며 최근에 [달러 이야기], [환율전쟁 이야기], [월가 이야기]를 출간했다.

 

 

홍익희 교수의 ‘실리콘밸리 창업마피아’ 마크 핀커스 - 소셜 게임 개척, ‘징가’로 억만장자 대열에

(중앙일보  2015.03.28 00:01)

  [이코노미스트] 초기 투자한 페이스북 십분 활용 … 돈 된다 싶으면 모방도 불사

 

 



인터넷 시장을 검색·공유·쇼핑이라는 3개의 키워드가 장악하고 있을 때 ‘소셜 게임’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낸 개척자가 마크 핀커스다. 그가 만든 ‘징가’ 게임을 즐기는 사람은 월 3억 명이 넘는다. 1966년생인 마크 핀커스는 아버지를 통해 ‘후츠파’ 정신을 이어받았다. 후츠파란 동구권 유대인 언어인 이디시어로 ‘자신만의 방식으로 일을 이루어내는 도전정신’을 뜻한다. 마크는 아버지를 통해 유대인 특유의 기질인 ‘무엇을 하던지 하려면 자기의 온 힘을 다 바쳐 제대로 하라’는 삶의 신조를 배운다.

컬럼비아캐피탈 부사장이던 마크는 1994년 세계 최초 인터넷 브라우저 ‘모자익’(Mosaic)을 보고 한눈에 반했다. 그는 그날 밤을 새며 인터넷이 가져올 미래의 모습에 대한 에세이를 쓴다. 그 에세이는 프래드 윌슨이라는 벤처캐피털 투자가와의 만남으로 이어진다. 4개월간 25만 달러 대출을 제안받았다.

핀커스는 제안을 수락하고 ‘프리로더(Freeloader)’라는 회사를 창업했다. 프리로더는 관심 콘텐트를 정기 구독할 수 있도록 기능을 브라우저에 추가하는 툴바다. 관심 콘텐트를 자동으로 다운받는 서비스로 인터넷 기반의 첫 푸시기술이었다. 프리로더는 4개월이라는 약속은 못 지켰지만 회사설립 7개월 만인 1996년 6월 3800만 달러에 팔렸다. 마크 핀커스는 약 750만 달러의 자산가, 곧 백만장자가 되었다. 이후 핀커스는 약 1년을 백수로 지내며 실리콘밸리에서 많은 사람을 사귀었고, 다음 창업을 준비했다.

이 시기 마크 핀커스는 ‘링크드인’ 창업자 리드 호프만을 만난다. ‘프랜드스터(Friendster)’라는 소셜네트워크에 함께 투자를 한 인연이었다. 그들은 ‘인터넷이야말로 사람들에게 힘을 줄 수 있는 기술’이라는 생각이 서로 같았다. 또한 세계적 규모의 프로젝트들에 관심을 갖는 것도 서로 같았다. 이내 둘은 자주 만나며 서로 생각을 나누는 사이로 발전했다. 두 사람은 개인 투자일 경우, 동일한 기업에 동일한 금액을 함께 투자하자는 독특한 약속을 했다. 핀커스는 호프만을 통해 페이팔마피아 친구들을 사귀게 된다. 그는 그들과 같이 어울려 각자의 아이디어에 대해 품평해 주고 토론하면서 ‘똑똑한 친구 대여섯 명만 있으면 못할 일이 없다’는 걸 느꼈다. 프랜드스터는 수백만 명의 사용자가 몰리면서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마크는 이런 소셜네트워크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2003년 37살 나이에 세 번째 창업인 ‘트라이브닷넷’(tribe.net)이라는 소셜네트워킹 서비스를 시작했다.


‘똑똑한 친구 대여섯 명이면 된다’

그즈음 마크 핀커스는 ‘라이즈오브네이션스(Rise of Nations)’라는 게임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마크는 게임에서 처참하게 지는 경우가 많았다. 자신이 활을 쏘는 동안 청소년 또래의 상대방은 핵폭탄을 던지기 일쑤였다. 이때 마크는 ‘내가 이들을 이길 수 있다면 돈이라도 쓸테야’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게임과 돈의 연관관계를 생각하게 되는 계기였다.

이때 마크 핀커스는 마크 주커버그가 막 새롭게 창업한 페이스북에 투자했다. 주커버그는 엔젤 투자를 받기 위해 리드 호프만을 찾아왔고, 리드 호프만은 마크 핀커스와 피터 틸을 함께 엮어 총 60만 달러를 투자한다. 이로써 핀커스는 페이스북 초기 주주가 된다. 이후 핀커스는 2007년 4월 네 번째 창업회사 ‘프레지도 미디어(Presido Media)‘란 게임회사를 만들었는데 페이스북 플랫폼에 게임을 올리면 사람들을 끌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마침내 그는 ‘인터넷 보물’을 발견했음을 깨닫는다. 2007년 7월, 창업회사 이름을 ‘징가’(Zynga)’로 바꾸었다. 징가라는 이름은 핀커스가 기르던 불독 이름에서 따왔다.

그가 페이스북에 올린 첫 게임은 포커의 한 종류인 ‘텍사스 홀뎀 포커’ 게임이었다. 소셜 게임은 여러 사람이 함께할수록 게임 진행이 수월해져 친구들을 게임에 끌어들이는 특성이 있다. 게임은 무료였다. 매출은 광고를 통해 올렸다. 징가는 카일 스튜어트, 스캇 데일, 존 도어를 투자자로 받아들여 사업을 진행했다. 징가의 히트작 ‘마피아워즈(Mafia Wars)’와 ‘팜빌(FarmVille)’ 등은 먼저 출시됐던 타사 제품들을 표절했다는 이유로 소송을 당한다. 결국 이런 문제는 비공개 합의를 통해 해결해야 했다. 징가는 수익이 난다면 모방도 불사했다.


70억 달러 기업공개 성공했지만

징가 성장의 핵심은 매출의 90% 이상이 나오는 페이스북이었다. 징가의 빠른 성장과 바이럴 마케팅으로 페이스북은 징가 게임으로 도배되다시피 했다. 게임을 하지 않는 사용자들은 이를 귀찮게 여겨 불만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결국 페이스북은 게임의 노출을 줄였고, 징가는 수천만 사용자들을 잃었다. 또 다른 악재도 있었다. 페이스북은 징가가 벌어들이는 수억 달러의 매출에 대해 수수료를 받고 싶어했다. 이로 인해 핀커스와 쥬커버그는 갈등에 쌓인다. 페이스북 플랫폼의 형태는 클릭 몇 번으로 누구든 네트워크를 사용할 수 있다. 징가의 엄청난 사업규모에도 징가와 페이스북 간에는 서면협약서가 없었다. 만약 페이스북이 일방적으로 징가의 문을 닫아버린다면, 징가는 하루아침에 망할 수도 있었다.

이 시기에 존 도어가 중재에 나서 2010년 5월 두 회사는 전략적 합의점을 찾는다. 페이스북은 징가에 5년간 플랫폼을 열어주고, 징가는 가상 상품 판매액의 30%를 페이스북에 지급하기로 했다. 큰 문제가 해결되자 핀커스는 공격적 확장에 나선다. 적극적인 인수·합병을 통해 175개국에 월 이용자 2억4000만 명을 거느린 회사로 성장했다. 2007년 연매출 70만 달러의 작은 개발사가 2011년에는 연매출 11억 달러가 넘는 대기업으로 성장한 것이다. 연평균 성장률 635%에 달하는 놀라운 성장이었다. 그해 말 징가가 상장되었는데 70억 달러(약 7조원) 가치였다. 웹서비스로는 구글 이후 가장 큰 금액의 기업공개였다.

아쉽게도 상장 이후 징가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시가총액도 20억 달러(약 2조원)로 주저앉았다. 핀커스는 결국 2013년 7월 CEO자리에서 물러나 이사회 의장으로만 남아있다.

글=홍익희 - 배재대 교수. KOTRA 근무 32년 가운데 18년을 뉴욕·밀라노·마드리드 등 해외에서 보내며 유대인들을 눈여겨보았다. 유대인들의 경제사적 궤적을 추적한 [유대인 이야기] 등을 썼으며 최근에 [달러 이야기], [환율전쟁 이야기], [월가 이야기]를 출간했다.

 


 

홍익희 교수의 ‘실리콘밸리 창업마피아’ 채드 헐리와 스티브 챈 - ‘유튜브 시대’ 연 다국적 천재들

(중앙일보 2015.04.04 00:01)

[이코노미스트] 자넷 잭슨 가슴 노출 사건이 창업 계기 … 페이팔 초기 멤버로 활약

 

채드헐리(왼쪽)와 스티브챈. / 사진:중앙포토


 

방송사들이 제작한 영상을 일방적으로 보던 TV시대에서, 누구든 동영상을 찍어 공유할 수 있는 ‘사용자 생성 콘텐트(User Generated Content)’의 시대를 연 사람들이 있다. 유튜브를 창업한 다국적 인재들인 채드 헐리(미국), 스티브 챈(타이완 출신) 그리고 자웨드 카림(방글라데시 아버지·독일 어머니)이다. 이들은 ‘페이팔’ 초기멤버기도 하다. 개발자와 디자이너로 만나 함께 근무한 이른바 ‘페이팔 마피아’ 일원이다. 채드 헐리는 펜실베이니아 인디아나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해 감각적인 화면을 만들 줄 아는 웹디자이너이며, 스티브 챈과 자웨드 카림은 페이팔 공동창업자 맥스 레브친과 함께 일리노이대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개발자들이다.


호흡이 맞는 게 중요하다

이들은 페이팔에서 같이 일하며 호흡이 잘 맞았다. 개발자와 웹디자이너가 호흡이 잘 맞으면 일하기 편할 뿐 아니라 효율도 높아 개발에 가속이 붙었다. 특히 스티브 챈은 개발자와 웹디자이너가 긴밀하게 협력하는 페이팔 업무방식을 좋아했다. 개발자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생각날 때마다 주저 없어 디자이너들에게 제안했고 웹디자이너들은 그에 따라 즉각 화면을 설계하고 다시 엔지니어들과 의논했다. 이들은 어떤 새로운 기능도 3~4일이면 뚝딱 만들어졌다.

채드 헐리는 페이팔에서 창업경영을 배웠다고 술회했다. “페이팔 사람들이 아이디어를 내고 그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사업을 시작할 때 정말 많은 걸 느끼고 배웠다. 비즈니스 관련 학위가 없어도 전체 프로세스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험을 통해 나는 창업회사가 하는 모든 일이 아주 의미 있음을 배웠다.”

페이팔이 이베이에 팔리면서 개발자였던 챈은 이베이의 매니저가 됐다. 하지만 이베이의 경영방식이 마음에 들진 않았다. 페이팔과 달리 이베이에서는 엔지니어의 발언권이 약했다. 그는 이베이를 벗어나 새로운 사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사업 아이템을 물색하던 중 2004년 미식축구 슈퍼볼에서 가수 쟈넷 잭슨 가슴 노출사건이 터졌다. 대중들은 문제의 동영상을 구하지 못해 답답해 했다. 그들은 텍스트·이미지·오디오는 자유롭게 공유가 되는데 왜 동영상만 여전히 제한적으로 유통되느냐는 문제의식을 가졌다. 그리고 잠재적인 비즈니스 모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들은 스탠퍼드대 인근 카페에서 밤새 브레인스토밍을 하며 동영상 관련 소프트웨어 회사를 만들기로 하고 채드 헐리의 차고에 함께 모였다.


벤처의 장점, 탄력적인 사업 방향 전환

이들은 2005년 2월 ‘유튜브닷컴(Youtube.com)’도메인을 사들였다. 당신 또는 모든 사람을 뜻하는 ‘유(You)’와 텔레비전을 의미하는 ‘튜브(Tube)’를 결합해 모든 사람이 시청자 겸 제작자라는 걸 강조했다. 같은 해 5월에 베타 사이트를 열었지만 그다지 사용자는 늘지 않았다. 하지만 유튜브 사용자들이 다른 사이트에 유튜브 콘텐트를 얼마든지 퍼 나를 수 있도록 허용했다. 로그인하지 않고도 링크를 통해 누구나 영상을 볼 수 있게 했다. 이 결정으로 유튜브는 급성장한다. 사용자들은 다른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동영상을 퍼뜨렸다. 동영상 유통을 허용하자 별도의 마케팅도 필요 없었다. 늘 동영상에 유튜브 마크와 링크 주소가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그 무렵 채드와 스티브가 새로운 서비스를 개발했다는 소문이 페이팔 마피아 사이에 퍼졌다. 페이팔 이사였던 키스 보아가 유튜브 소식을 로엘로프 보다에게 이메일로 알렸다. 맥킨지 출신인 로엘로프는 페이팔 CFO(최고재무이사)로 페이팔 상장과 이베이 매각을 추진한 바 있다. 이듬해 그는 실리콘 밸리 대표 벤처캐피털인 ‘세쿼이아 캐피탈’에 파트너로 합류했다. 그 해 11월 로엘로프의 추진 아래 세쿼이아 캐피탈이 시리즈A(첫 번째 투자 라운드를 일컫는 투자용어)로 유튜브에 350만 달러를 투자했다. 이 돈은 서버와 데이터센터를 구축하는 데 쓰였다. 사무실도 차고에서 일식당 위 2층 사무실로 옮겼다. 다음달 직원이 20명으로 늘었고, 유튜브 사이트가 대중에게 정식 공개됐다. 회원 수가 늘면서 유튜브는 서버 비용으로만 월 100만 달러 이상을 지출해야 했다. 세퀘이아 캐피탈은 아르티스 벤쳐스와 함께 800만 달러의 시리즈B(2차 투자)를 단행했다. 세퀘이아 캐피탈이 투자한 회사라는 소식이 퍼지면서 유튜브는 관심의 대상이 됐다.

직원이 30명이던 유튜브는 하루 조회수 1억 건를 넘기며 떠오르는 별이 됐다. 날이 갈수록 관심은 높아졌다. 한 시간에 전화가 무려 260통씩 걸려오는가 하면 일주일에 인터뷰 요청만 400건이 넘었다. 창업한 지 얼마 안 되어 유투브의 영향력은 기존의 미디어 대기업들과 맞먹는 수준이 됐다. 하지만 일이 너무 많아지자 직원 모두가 한계를 느꼈다. 해외 진출, 모바일 서비스 시작 등으로 하루 24시간 꼬박 일에 매달리는 직원이 한둘이 아니었다. 직원들은 매주 100시간 이상 일했다. 데이터센터도 필요했고 서버와 인터넷 망도 확충해야 했다. 큰 기업의 도움이 절실하다는 데 직원 모두가 공감했다.


구글 동영상팀을 압도한 정예 멤버

유튜브는 세쿼이아캐피탈이 가진 네트워크에 힘입어 여러 곳에서 인수제안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구글과 야후를 저울질 한끝에 그들은 구글을 택했다. 공식 출시가 채 1년도 안 된 2006년 10월 구글은 유튜브를 16억5000만 달러(약 1조8500억원)에 인수했다. 당시 유튜브 직원 수는 70명이었다. 그 해 시사주간지 [타임]은 유튜브를 ‘올해 최고의 발명’으로 선정했다. 유투브가 구글에 인수될 때 기술책임자는 4명밖에 없었다. 그 4명이 세계에서 트래픽이 가장 많은 사이트를 구축하고 유지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직원 70명 대부분이 대학 중퇴생들이지만 고학력자로 구성된 구글 동영상팀을 제압했던 것이다. 현재 유튜브의 하루 동영상 검색 횟수는 수십억 회를 넘는다. 지난해 매출은 40억 달러를 넘었다. 오늘 날 유튜브는 구글과 페이스북 다음으로 많은 방문객을 보유한 사이트다.

글=홍익희 배재대 교수. KOTRA 근무 32년 가운데 18년을 뉴욕·밀라노·마드리드 등 해외에서 보내며 유대인들을 눈여겨보았다. 유대인들의 경제사적 궤적을 추적한 [유대인 이야기] 등을 썼으며 최근에 [달러 이야기], [환율전쟁 이야기], [월가 이야기]를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