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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 상영 중지 되나?…‘뿔’난 배설 후손들 (KBS 2014.09.05 (08:59)

‘명량’ 상영 중지 되나?…‘뿔’난 배설 후손들

 

 

 

■ 배설 후손들 "우리 조상, 그런 분 아니다"

영화 '명량'이 한국 영화 사상 최초로 1,700만 관객을 넘어서며 이른바 '국민 영화'로 자리매김한 가운데, 영화 속에서 가장 비겁한 인물로 묘사된 경상우수사 배설의 후손들이 "영화 때문에 놀림이나 왕따를 당하고 있다"고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져 눈길을 끌고 있다.

배설의 후손들인 '경주 배씨 성산공파 문중 비상대책위원회'는 '명량'이 이순신 장군의 면모를 부각시키기 위해 역사적 실존 인물의 행적을 지나치게 왜곡,과장해 죽은 이의 명예를 훼손시켰다며 정부에 영화 상영 중지를 요청하겠다는 입장을 정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추석 연휴 직후에는 김한민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 등 관계자 4명을 상대로 사자 명예 훼손 및 후손에 대한 인격권 침해 등의 혐의로 경찰에 고발장을 제출하는 방향도 검토중이다.

또 50만여 명의 '경주배씨 대종회'와 함께 도포를 입고 경북도청이나 영화 제작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대국민 호소문을 낭독할 예정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에 대해 영화 제작사 측은 "직접적인 요구를 들은 바 없다"며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제작사 측 입장을 정리하고 있다"고만 밝혔다.



■ 영화 속 배설은 '최악의 비겁자'

명량해전이 일어날 당시 배설은 경상우수사였다. 칠천량 전투에서 12척의 배를 이끌고 도망쳐 살아남은 그는, 또 다시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명량 해전 직전 군영을 탈출해 낙향하고 2년 뒤(1599년) 권율에게 붙잡혀 서울에서 참형된다.

하지만 영화 속 배설(김원해)은 역사적 사실보다 더한 비겁자로 묘사되고 있다.

극중 배설은 이순신 장군(최민식)의 명량대첩을 가장 강하게 반대하고 나서 동료 장수들의 사기를 꺾고, 심지어 전투 직전 이순신 장군을 암살하려 한다.

특히 가장 소중한 전력이었던 마지막 남은 거북선 한 척을 불태워버리고, 쪽배를 타고 도망치다 결국 뒤를 쫓던 아군 장수의 화살에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영화를 본 관객들이 "진짜 적은 왜군이 아니라 배설"이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던 이유다.

영화 명량은 역사적 고증에 상당 부분 힘을 쏟았고 이를 성공적으로 묘사했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하지만 역시 영화라는 특성상 곳곳에서 사실과 다른 부분도 등장한다.

예를 들어 명량해전 당시에는 왜군과 벌이는 백병전 자체가 없었지만 백병전을 통해 조선 수군이 승리한다는 점, 또 어민들이 이순신이 탄 함선을 회오리 속에서 구해 낸다는 설정 등이 대표적이다.

■ 후손들 "영화 속 배설은 완전 허구"

배설 후손들은 한발 더 나아가 영화 속 모든 묘사가 허구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우선 배설이, 전투 직전 겁이 나서 도망간 것이 아니라 전투 보름 전쯤 일찌감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낙향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도 이 같은 사실이 기록돼 있다.

이순신은 '난중일기'에서 "배설이 제 종을 시켜 소장을 냈는데, 병세가 몹시 중하여 몸조리를 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몸조리를 하고 오라고 공문을 써 보냈더니 배설은 우수영에서 뭍으로 내렸다(8월 30일자)"고 적었다.

적어도 배설이 전투 직전 이순신 장군을 암살하려 했거나, 거북선 방화를 저지르고 도주하다 목숨을 잃었다는 영화 속 장면은 사실이 아닌 셈이다.



칠천량 해전에서 몸을 빼 살아 돌아온 것에 대해서도 후손들은 전혀 다른 입장을 내놓고 있다.

비상대책위원회는 "엄청난 열세 속에서 유일하게 적선 8척을 부수는 등 3중 포위망을 뚫고 그나마 남은 전력을 보존해 온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이 같은 공과 억울함을 인정받아 이미 1610년(광해 2년) 선무원종공신 1등에 올라 명예를 회복했고, 1873년(고종 10년)엔 자헌대부 병조판서로까지 추서됐다는 것이다.

배설이 전투 중 도주한 죄로 전쟁이 끝난 후 도원수 권율에게 붙잡혀 참형 당한 것에 대해서도 후손들은 전혀 다른 입장을 내놓고 있다.

이들은 배설이 "임진왜란 이후 흉흉한 민심에 겁이 난 선조와 전쟁 책임을 피하기 위한 동인들의 희생 제물"이었다며 "배설은 오히려 여러차례 조정의 폐단을 들어 상소해 좌천과 투옥을 당했고, 진주목사에서 경상우수사로 갈때는 진주 백성들이 막아 며칠 동안 부임을 못하는 등 진주 백성들이 존경했던 인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 이순신이 본 '배설'은?

그렇다면 정작 이순신 장군은 '배설'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난중일기에 묘사된 '배설'을 통해 이순신 장군의 마음 한자락을 엿볼 수 있긴 하다.

1597년 8월 17일
맑았다.
이른 새벽 길을 떠나 백사정에 도착해 말을 쉬게 했다.
군영 강진과 구미에 도착했더니
모든 지역에 이미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경상수사 배설은 내가 탈 배를 보내지 않았다.
장흥 사람들이 군량을 마음대로 훔쳐가 불러다 곤장을 쳤다.
배설이 약속을 어긴 것이 아주 한탄스러웠다.

1597년 8월 18일
맑았다.
아침 늦게 곧바로 회령포로 갔다.
경상수사 배설은 배멀미를 핑계로 나오지 않았다.
다른 장수들과는 만남을 가졌다.

1597년 8월 19일
맑았다.
장수들에게 교서(敎書)와 유서(諭書)에 숙배(肅拜:임금에 절함)케 했는데
경상수사 배설은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마음이 매우 경악할 일이었기에
그의 이방과 영리를 곤장에 처했다.

1597년 8월 27일
맑았다.
그대로 머물렀다.
경상우수사 배설이 와서 머물렀는데
겁에 질려 떠는 모습이 많았다.
나는 "배 수사는 어디로 피해 옮겨갔던 것 아닙니까?"
하고 물었다.

1597년 8월 30일
맑았다.
벽파진에 머물면서 정탐꾼을 나눠 보냈다.
늦게 배설이 적이 많이 몰려 올 것을 예상해 도망가려했다.
그래서 그의 부하와 장수들을 불러 거느렸다.
나는 그의 속마음을 알고 있었지만
분명히 드러내지 않았고,
먼저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장수의 계책이 아니기에
생각을 숨기고 있을 때
배설이 그의 노비를 시켜 소지를 올렸다.
"병이 아주 심해 몸조리를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는 육지로 올라가 몸조리를 하도록 제송공문을 보냈고
배설은 우수영에서 육지로 올라갔다.

1597년 9월 2일
맑았다.
배설이 도망갔다.

-난중일기는  '진심진력'(박종평/더 퀘스트)에서 부분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