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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정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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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글씨
 
1342(충혜왕 복위 3)∼1398(태조 7). 고려 말 조선 초의 정치가·학자.

[개설]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峰). 봉화호장 공미(公美)의 고손자로, 아버지는 형부상서 운경(云敬)이다. 선향(先鄕)은 경상북도 영주이며, 출생지는 충청도 단양 삼봉(三峰)이다.

 [생애]

아버지와 이곡(李穀)의 교우관계가 인연이 되어, 이곡의 아들 색(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정몽주(鄭夢周)·박상충(朴尙衷)·박의중(朴宜中)·이숭인(李崇仁)·이존오(李存吾)·김구용(金九容)·김제안(金齊顔)·윤소종(尹紹宗) 등과 교유했으며, 문장이 왕양혼후(汪洋渾厚)해 동료 사우의 추양(推讓)을 받았다. 1360년(공민왕 9) 성균시에 합격하고, 2년 후에 동 진사시에 합격해 충주사록(忠州司錄)·전교주부(典校注簿)·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를 역임하였다.

1370년 성균관박사로 있으면서 정몽주 등 교관과 매일같이 명륜당에서 성리학을 수업, 강론했으며, 이듬 해 태상박사(太常博士)에 임명되고 5년간 전선(銓選 : 인사행정)을 관장하였다. 1375년(우왕 1) 권신 이인임(李仁任)·경복흥(慶復興) 등의 친원배명정책에 반대해 북원(北元) 사신을 맞이하는 문제로 권신 세력과 맞서다가 전라도 나주목 회진현(會津縣) 관하의 거평부곡(居平部曲)에 유배되었다.

1377년에 풀려나서 4년간 고향에 있다가 삼각산(三角山) 밑에 초려(草廬:三峰齋)를 짓고 후학을 가르쳤으나, 향인(鄕人) 재상이 서재를 철거해 부평으로 이사하였다. 그곳에서도 왕모(王某)라는 재상이 별업(別業)을 만들기 위해 재옥(齋屋)을 철거하자 다시 김포로 이사하였다. 1383년 9년간에 걸친 간고한 유배·유랑 생활을 청산하고, 당시 동북면도지휘사로 있던 이성계(李成桂)를 함주 막사로 찾아가서 그와 인연을 맺기 시작하였다.

1384년 전교부령(典校副令)으로서 성절사 정몽주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다음 해 성균좨주·지제교·남양부사를 역임하고,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관대사성으로 승진하였다. 1388년 6월에 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 일파가 실권을 장악하자 밀직부사로 승진해 조준(趙浚) 등과 함께 전제개혁안을 적극 건의하고, 조민수(曺敏修) 등 구세력을 제거해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닦았다.

1389년 이성계·심덕부(沈德符)·지용기(池湧奇)·정몽주·설장수(偰長壽)·성석린(成石璘)·조준·박위(朴葳) 등과 모의해 폐가입진(廢假立眞)의 명분을 내걸어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해 좌명공신(佐命功臣 : 中典功臣)에 봉해지고, 삼사우사(三司右使)·지경연사(知經筵事)를 지냈다. 그 뒤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서 성절사 겸 변무사(聖節使兼辨誣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윤이(尹彛)·이초(李初)의 무고사건을 해결하고 돌아와 동판도평의사사 겸 성균관대사성(同判都評議使司兼成均大司成)이 되었다. 그리고 1391년 삼군도총제부 우군총제사(三軍都摠制府右軍摠制使)가 되어 병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구세력의 탄핵으로 봉화에 유배되었다가 이듬 해 봄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중에 낙마한 사건을 계기로 고려 왕조를 옹호하던 정몽주·김진양(金震陽)·서견(徐甄) 등의 탄핵을 받아 보주(甫州 : 지금의 예천)의 감옥에 투옥되었다. 이유는 “가풍이 부정(不正)하고 파계(派系)가 불명(不明)하다.”든가, "천지(賤地)에서 기신(起身)해 당사(堂司)의 자리에 몰래 앉아 무수한 죄를 지었다.”는 것으로, 특히 신분적 약점이 많이 거론되었다.

그러나 정몽주이방원(李芳遠) 일파에 의해 격살되자 유배에서 풀려 나와, 같은 해 7월에 조준·남은(南誾) 등 50여 명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해 조선 개창의 주역을 담당하였다. 조선 개국 후 개국1등공신으로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郎贊成事)·동판도평의사사사·판호조사(判戶曹事)·겸판상서사사(兼判尙瑞司事)·보문각대학사(寶文閣大學士)·지경연예문춘추관사(知經筵藝文春秋館事)·겸의흥친군위절제사(兼義興親軍衛節制使) 등의 요직을 겸임해 정권과 병권을 한 몸에 안았다.

같은 해 겨울에 사은 겸 정조사로서 두 번째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3년(태조 2)<문덕곡 文德曲>·<몽금척 蒙金尺>·<수보록 受寶籙> 등 3편의 악사(樂詞)를 지어 바쳐 이성계의 창업을 찬송했으며, 문하시랑찬성사로서 동북면도안무사(東北面都安撫使)가 되어 동북면 개척에도 힘을 기울였다.

1394년 정월에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로서 경상·전라·양광삼도도총제사(慶尙全羅楊廣三道都摠制使)가 되어 재정 및 지방 병권을 장악하였다. 한편, 같은 해 6월≪조선경국전 朝鮮經國典≫을 지어 올리고 이 해 ≪심기리 心氣理≫ 3편을 저술했으며, 한양 천도를 계획, 실천해 수도 경영에 주동적으로 참획하였다.

1395년정총(鄭摠) 등과 더불어 ≪고려국사 高麗國史≫ 37권을 지어 올리고, ≪감사요약 監司要約≫을 저술해 전라도관찰사 이무(李茂)에게 주었으며, ≪경제문감 經濟文鑑≫을 저술해 재상·대간·수령·무관의 직책을 밝혔다. 1396년 이른바 표전문(表箋文) 문제로 명나라에서 이를 트집잡아 내정을 간섭하자, 전부터 추진해오던 요동(遼東) 수복운동에 박차를 가해 군량미확보, 진법훈련(陣法訓鍊), 사병혁파를 적극 추진하였다.

1397년≪경제문감별집 經濟文鑑別集≫을 저술해 군도(君道)를 밝히고, 12월에 동북면도선무순찰사가 되어 군현의 지계(地界)를 획정하고 성보(城堡)를 수선하며 참호(站戶)를 설치하였다. 1398년권근(權近)과 더불어 성균관제조가 되어 4품 이하의 유사(儒士)들에게 경사(經史)를 강습시키고, 여름에 ≪불씨잡변 佛氏雜辨≫을 저술해 배불숭유(排佛崇儒)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하였다.

9월에 진법훈련을 강화하면서 요동 수복계획을 추진하던 중 이방원의 기습을 받아 희생되었다. 죄명은 세자 방석(芳碩)에 당부(黨附)해 종사를 위태롭게 했다는 것이었다. 이를 공소난(恭昭難)·무인난(戊寅難) 혹은 제1차 왕자의 난이라고 한다.

[활동사항]

그는 문인이면서 동시에 무(武)를 겸비했고, 성격이 호방해 혁명가적 소질을 지녔으며, 천자(天資)가 총민해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군서(群書)를 박람해 의론(議論)이 정연했다 한다.

개국 과정에서 자신의 위치를 한(漢)나라 장량(張良)에 비유하면서, 한고조(漢高祖 : 劉邦)가 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고조를 이용했다고 하면서 실질적인 개국의 주역은 자신이라고 믿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노약 노비(老弱奴婢) 약간 명을 상속받았을 뿐, 오랫동안 유배·유랑 생활을 보내면서 곤궁에 시달렸다. 더욱이, 부계혈통은 향리(鄕吏)의 후예로서 아버지 때에 이르러 비로소 중앙 관료의 벼슬다운 벼슬을 했으며, 어머니와 아내가 모두 연안 차씨(延安車氏)공윤(公胤)의 외예 얼속(外裔孽屬)이었다. 특히 모계에 노비의 피가 섞여 있었다.

이러한 혈통 때문에 구가세족이나 명분을 중요시하는 성리학자들로부터 백안시 당하는 경우가 많았고, 조선시대에도 3노가(奴家)의 하나라는 세인의 평을 받았다. 그와 건국사업을 함께 한 조영규(趙英珪)·함부림(咸傅霖) 등 개국공신과 태종 때의 중신 하륜(河崙) 역시 연안 차씨의 외척 얼손(孽孫)으로서, 조선 개국에는 신분적 하자가 큰 인물들이 적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청·장년의 시기를 맞았던 고려 말기는 밖으로 왜구·홍건적의 침구로 국내가 어수선했고, 안으로는 구가세족의 횡포로 정치기강이 무너지고 민생이 곤핍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9년간의 시련에 찬 유배·유랑 생활은 그로 하여금 애국적이며 애민적인 의식을 깊게 만들었으며, 그의 역성혁명운동은 이러한 개혁의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된다.

그의 개혁운동이나 그에 수반된 왕조건국사업은 단순한 정치적 실천운동으로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고 제도로서 정착시켜 사상·제도상으로 조선의 기초를 놓았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발견된다.
그는 ≪학자지남도 學者指南圖≫·≪심문천답 心問天答≫(1375)·≪심기리편≫(1394)·≪불씨잡변≫(1398) 등의 철학서를 차례로 저술해 고려 귀족사회의 정신적 지주였던 불교의 사회적 폐단과 철학적 비합리성을 비판, 공격하고, 성리학만이 실학(實學)이요 정학(正學)임을 이론적으로 정립해 유교 입국의 사상적 기초를 다졌다. 그러나 성리학을 강력하게 옹호했다 해서 주자학의 전 체계를 다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주자가례 朱子家禮≫라든가, ≪자치통감강목 資治通鑑綱目≫, 그리고 주자학에서 중요한 사회정책으로 간주되는 사창제(社倉制)·향약(鄕約) 등에 관해서는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또 주자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이단시하는 한당(漢唐)의 공리적 사상(功利的思想)이나 부국강병에 유용한 제도·문물에 대해서는 포용적이었다.

그것은 주자학만으로는 당시의 시대적 과제인 부국강병 달성이나 천민·서얼의 인심 수람, 무인세력의 지위 안정, 무전농민(無田農民)의 구제 등 새 왕조 개창에 필요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까닭이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층신앙(基層信仰)으로 굳어진 불교·도교·참설(讖說) 등을 부분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그의 사상체계는 기본적으로 주자학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음성적으로 이단을 포용하는 절충성을 띠었음이 특색이다.

그의 경세론(經世論)은 ≪조선경국전≫(1394)·≪경제문감≫(1395)·≪경제문감별집≫ 등에 제시되어 있다. 특히, 조선의 통치규범을 종합적으로 제시한 ≪조선경국전≫≪주례 周禮≫에서 재상 중심의 권력체계와 과거제도, 병농일치적인 군사제도의 정신을 빌려오고, 한당(漢唐)의 제도에서 부병제(府兵制)·군현제(郡縣制, 守令制)·부세제(賦稅制)·서리제(胥吏制)의 장점을 받아들였다. 또, 명나라로부터는 ≪대명률 大明律≫을 빌려왔다.

 ≪경제문감≫은 재상·감사·대간·수령·무관의 직책을 차례로 논하고, ≪경제문감별집≫에서는 군주의 도리를 밝혔다. 그가 이상으로 생각하는 정치제도는 재상을 최고실권자로 하여 권력과 직분이 분화된 합리적인 관료지배체제이며, 그 통치권이 백성을 위해 기능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민본사상을 강조하였다. 통치자가 민심을 잃었을 때에는 물리적인 힘에 의해 교체될 수 있다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을 긍정했고, 실제로 혁명 이론에 입각해 왕조 교체를 수행하였다.

사·농·공·상의 직업분화를 긍정하고, 사를 지배층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사의 직업은 도덕가·철학자·기술학자·교육자·무인 등의 역할을 겸비해야 하고 사에서 능력위주로 관리가 충원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또한, 적서(嫡庶)나 양천(良賤)과 같이 혈통에 의한 신분차별을 주장하지 않은 것이 주목된다.

한편, 여말에 나라가 가난하고 민생이 피폐하였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농업생산력의 증대와 토지균분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해결책으로서 민구수(民口數)에 따른 토지재분배와 공전제(公田制) 및 10분의 1세의 확립, 공(工)·상(商)·염(鹽)·광(鑛)·산장(山場)·수량(水梁)의 국가 경영을 실현시키고자 하였다.

따라서 경세론은 자작농의 광범한 창출과 산업의 공영을 통해 부국강병을 달성하고, 능력에 토대를 둔 사 위주의 관료정치를 구현하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의 개혁안은 상당 부분이 법제로서 제도화되었지만 모두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저서로는 위에 적은 것 이외에 경세(經世)에 관한 것으로 ≪경제의론 經濟議論≫·≪감사요약 監司要約≫이 있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고, 고려 역사를 편년체로 엮은 ≪고려국사≫가 있다. 이 책은 뒤에 김종서(金宗瑞) 등이 찬한 ≪고려사절요≫의 모체가 되었으나 지금 전하지 않는다.

이 밖에 병법에 관한 것으로 ≪팔진36변도보 八陣三十六變圖譜≫·≪오행진출기도 五行陣出奇圖≫·≪강무도 講武圖≫·≪진법 陣法≫ 등이 있다. 의서(醫書)로는 ≪진맥도결 胗脈圖訣≫, 역산서(曆算書)로서 ≪태을72국도 太乙七十二局圖≫≪상명태을제산법 詳明太乙諸算法≫ 등이 있다.

그는 또 많은 악사(樂詞)를 지어 <문덕곡>·<몽금척>·<수보록>·<납씨곡 納氏曲>·<정동방곡 靖東方曲> 등을 남겼으며, 회진현의 유배시절과 삼각산·부평·김포·영주 등지에서의 방랑시절에 쓴 수많은 시문들이 지금 ≪삼봉집≫에 전해지고 있다.

≪금남잡영 錦南雜詠≫≪금남잡제 錦南雜題≫는 특히 유배시절의 시문을 모은 것으로 그의 시련기의 사상을 살펴보는 데 좋은 자료이다. 동시에, 당시의 부곡(部曲)의 실상을 이해하는 연구 자료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삼봉집≫은 1397년(태조 6)에 처음 간행되고, 1487년(성종 18)에 중간되었다. 그 후 1791년(정조 15) 누락된 것을 수습해 재간했으며, 이것이 오늘날 전해지고 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태조실록(太祖實錄)』
  • 『태종실록(太宗實錄)』
  • 『삼봉집(三峰集)』
  • 『해동잡록(海東雜錄)』
  • 『대동기문(大東奇聞)』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정도전(鄭道傳)사상의 연구」(한영우, 『한국문화연구총서』 15, 1973)
  • 「삼봉인물고(三峰人物考)」(이상백, 『진단학보』 2·3, 1935)
  • 「정삼봉(鄭三峰)의 유불관(儒佛觀)」(이병도, 『백성욱박사회갑기념논총』, 1959)
  • 「정도전(鄭道傳)의 벽불론(闢佛論)비판」(이종익, 『불교학보』 8, 1971)
  • 「정도전(鄭道傳)의 벽불(闢佛)사상과 그 논리적성격」(금장태, 『민태식박사고희논총』, 1972)
  • 「고려국사의 편찬내용과 사론(史論)」(변태섭, 『학술논총』 3, 1979)
  • 「정도전(鄭道傳)의 인간과 사회사상」(한영우, 『진단학보』 50, 1980)
  • 「삼봉집(三峰集)에 나타난 정도전(鄭道傳)의 병제개혁안(兵制改革案)의 성격」(정두희, 『진단학보』 50, 1980)
  • 「정도전(鄭道傳) 성리학의 특성과 그 평가문제」(윤사순, 『진단학보』 50, 1980)
  • 「三峰集編刊考」(末松保和, 『朝鮮學報』 1, 1951)

 

 

정도전 [鄭道傳]고려·조선 정치가·학자 | 브리태니커

 

 

 

정도전 요약정보

세부정보 확인
태어난 때 1342(충혜왕 3)
죽은 때 1398(태조 7).
소속 국가 한국
소속 국가 부속정보 고려·조선
직업 정치가·학자
1342(충혜왕 3)~ 1398(태조 7).

고려말 조선초의 정치가·학자.

개요

조선 개국의 핵심 주역으로서 고려 말기의 사회모순을 해결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하여 새로운 왕조를 개창했다. 각종 제도의 개혁과 정비를 통해 조선왕조 500년의 기틀을 다져놓았다.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峰).

고려말의 활동

향리집안 출신으로 고조할아버지는 봉화호장 공미(公美)이고, 아버지는 중앙에서 벼슬하여 형부상서를 지낸 운경(云敬)이다. 어머니는 우연(禹延)의 딸로서 노비의 피가 섞여 있었다. 어려서 경상북도 영주에서 살다가, 아버지를 따라 개경에 와서 아버지의 친구인 이곡(李穀)의 아들 색(穡)의 문하에서 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이존오(李存吾)·김구용(金九容)·김제안(金齊顔)·박의중(朴宜中)·윤소종(尹紹宗) 등과 함께 유학을 배웠다. 1360년(공민왕 9) 성균시(成均試), 1362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충주사록·전교주부·통례문지후 등을 지냈다. 1366년 아버지와 어머니가 연이어 죽자, 영주에 내려가 3년간 여묘(廬墓)하면서 지방 자제들과 동생들을 가르쳤다. 1370년 성균관이 중영(重營)되고 이색이 대사성이 되자, 성균박사가 되었다. 이듬해 태상박사가 되고, 이어 예의정랑이 되었다. 1374년 공민왕이 암살당하자 이 사실을 명나라에 고할 것을 주장하여 이인임(李仁任)의 미움을 받았다. 1375년(우왕 1) 성균사예·지제교가 되었으나, 이인임·경복흥(慶復興) 등이 친원정책(親元政策)으로 돌아가려 하고 원나라 사신이 명나라를 치기 위한 합동작전을 위해 오자, 이를 반대하고 관련되는 업무를 거부하다가 전라도 나주목 회진현 거평부곡(居平部曲)으로 귀양갔다. 1377년 고향으로 옮겨져 4년간 머물다가 유배가 완화되자 삼각산(三角山) 밑에 초려(草廬:三峰齋)를 지어 제자들에게 유학을 가르쳤다. 그러나 이곳 출신 재상(宰相)이 삼봉재를 헐어버려 제자들을 이끌고 부평부 남촌(南村)에 거주했으나 이곳에서도 재상 왕모(王某)가 별업(別業)을 만들기 위하여 헐어버려 다시 김포로 이사했다. 유배·유랑 기간에 그는 초라한 모옥(茅屋)에 살면서 향민(鄕民)과 사우(士友)에게 걸식하기도 하고 스스로 밭갈이도 했다.

1383년 함주(咸州) 막사로 동북면도지휘사 이성계(李成桂)를 찾아가 세상사를 논하고 그와 인연을 맺었다. 1384년 전교부령으로 있을 때 성절사 정몽주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가서 승습(承襲)과 시호(諡號)를 청했다. 이듬해 성균좨주(成均祭主)·지제교를 지내고, 1387년 남양부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고,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 이듬해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자, 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세워 밀직부사가 되었다. 조준(趙浚)·윤소종 등과 함께 전제개혁을 추진했는데, 전국의 토지를 공가(公家)에 귀속시켜 민구(民口)수에 따라 토지를 지급하려는 철저한 개혁을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스승인 이색과 친구인 정몽주와 의견이 달라 멀리하게 되었다. 1389년 11월 이성계·조준 등과 협의하여 우왕과 창왕 부자가 왕씨가 아니라는 이유로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즉위시켰다. 이 공으로 봉화현 충의군(忠義君)과 윤충논도좌명공신(輪忠論道佐命功臣)에 봉해지고, 삼사좌사(三司左使)가 되었으며 공신전 100결과 노비 10명을 받았다. 1390년 성절사 겸 변무사(聖節使兼辨誣使)로 명나라에 가서 윤이(尹彛)·이초(李初)가 이성계가 명을 치려한다고 모함한 것을 변명하고 돌아와 동판도평의사사사 겸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 1391년 삼군도총제부가 설치되자 우군총제사가 되어 이성계·조준과 함께 병권을 장악했다. 이어 개혁반대세력을 제거하려는 일환으로 성균관 학생들과 함께 척불(斥佛) 상소를 올려 불교 배척의 기치를 들고, 이색과 우현보(禹玄寶) 등을 신우(辛禑)·신창(辛昌) 옹립의 죄를 물어 처형할 것을 상소했다. 그해 9월 평양윤에 임명되었으나 반대세력들이 "가풍(家風)이 부정(不正)하고, 파계(派系)가 불명함에도 큰 벼슬을 받아 조정을 어지럽히고 있다"라고 탄핵하여 봉화로 유배당하고, 이어 나주로 옮겨졌으며 두 아들은 서인(庶人)이 되었다. 이듬해 봄 귀양에서 풀려나 영주로 돌아왔다.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하다가 낙마(落馬)하여 부상을 입자 이성계 세력을 제거하려는 정몽주 등에 의해 "천지(賤地)에서 기신(起身)하여 당사(堂司)의 자리를 도둑질했고, 천근(賤根)을 감추기 위해 본주(本主)를 제거하려고 모함했다"라는 탄핵을 받고 보주(甫州)의 감옥에 투옥되었으나 곧 풀려나 개경으로 소환되어 충의군에 봉해졌다.

조선개국과 개혁정치

1392년 4월 정몽주가 이방원(李芳遠)에게 살해되고 반대세력이 제거되자, 7월 조준·남은(南誾) 등과 함께 이성계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여 조선왕조를 개창했다. 개국직후 17조목의 편민사목(便民事目)에 관한 태조의 교지(敎旨)를 지어 새 왕조의 국정방향을 제시했다. 이어 개국공신 1등으로 문하시랑찬성사·동판도평의사사사·판호조사·겸판상서사사·보문각대학사·지경연예문춘추관사·겸의흥친군위절제사를 겸직하여 정권과 병권을 장악했다. 같은 해 10월 사은사 겸 계품사로 명나라에 가서 조선 건국의 당위성을 알렸다. 1393년(태조 2) 7월 문하시랑찬성사로 동북면도안무사가 되어 여진족을 회유했으며, 〈문덕곡 文德曲〉·〈몽금척 夢金尺〉·〈수보록 受寶〉 등의 악사(樂詞) 3편을 지어 왕에게 창업의 쉽지 않음과 수성(守成)의 어려움을 반성하게 하는 자료로 삼게 했다. 1394년 1월 판의흥삼군부사로 병권을 장악하여 병제개혁에 대한 상소를 올리고, 3월 경상·전라·양광 삼도도총제사가 되었다. 조선왕조의 제도와 예악(禮樂)의 기본구조를 세운 〈조선경국전 朝鮮經國典〉·부병제(府兵制)의 폐단을 논한 〈역대부병시위지제 歷代府兵侍衛之制〉를 찬진했다. 한편 태조가 세자로 책봉한 강비(康妃) 소생 방석(芳碩)의 세자이사(世子貳師)로 교육을 담당했다. 1394년 8월부터는 고려의 구신과 세족이 도사리고 있는 개경을 피해 새로운 도읍 건설을 추진하여, 서울의 궁궐과 문의 이름을 짓고 수도의 행정분할도 결정했다. 그해 〈심기리편 心氣理篇〉을 지어 불교·도교를 비판하고 유교가 실천 덕목을 중심으로 인간문제에 가장 충실하다는 점을 체계화했다. 1395년 1월 정총(鄭摠) 등과 함께 〈고려국사 高麗國史〉를, 6월에는 정치제도·재상·대관(臺官)·간관(諫官)·부병제도·감사(監司) 등의 임무와 실례를 논하고 방침을 제시한 〈경제문감 經濟文鑑〉을 찬진했다. 1396년 명나라에서 그가 추진하던 공료(攻遼)운동에 불안을 느껴 표전문(表箋文)을 트집 잡아 명나라에 입조(入朝)하라는 압력을 가했으나, 병을 이유로 거부했다. 1397년 사은사가 가지고 온 자문(咨文)에서 명나라는 그를 '화(禍)의 근원'이라고 했다. 그해 6월 요동정벌을 목적으로 진도(陣圖) 훈련을 하면서 왕에게 출병을 요청했으나 조준의 반대로 실행하지 못했다. 그해 12월 동북면도선무순찰사가 되어 주군(州郡)의 구획을 확정하고 성보(城堡)를 수리했으며 호구와 군관(軍官)을 점검했다. 또한 〈경제문감별집 經濟文鑑別集〉을 저술하여 군주의 도리를 제시했으며, 〈불씨잡변 佛氏雜辨〉을 저술하여 불교의 여러 이론을 비판했다. 1398년 진법 훈련을 강화하면서 요동정벌을 추진하고, 태조로 하여금 절제사를 혁파하여 관군(官軍)으로 합치고 왕자와 공신들이 나누어 맡고 있던 군사지휘권을 박탈하게 하고, 이방원을 전라도로, 이방번(李芳蕃)을 동북면으로 보내려 했으나, 8월 이방원 세력의 기습을 받아 방번·방석·남은·심효생(沈孝生) 등과 함께 살해되었다(→ 방원의 난). 이때 네 아들 가운데 유(游)가 살해되고, 담(湛)은 집에서 자살했다. 종친을 모해(謀害)했다는 죄명이 씌워졌다

 

 

 

정도전

(엔하위키미러 


권오창 화백이 그린 문헌공 정도전 표준영정. 흥선대원군 섭정 때 복권되기 전까지 450년 넘게 역적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당대에 그려져 전해지는 정도전의 초상화는 없다.

이름 정도전(鄭道傳)
종지(宗之)
삼봉(三峰)
생몰연도 1342년(고려 충혜왕 복위 3년)[1] ~ 1398년(조선 태조 7년) 8월 26일
국적 고려조선
시호 문헌(文憲)

"백성(下民)은 지극히 약하지만 힘으로 위협할 수 없고 지극히 어리석지만 지혜로써 속일 수 없는 것이다. 백성(民)의 마음을 얻으면 백성(民)은 복종하지만 백성(民)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백성(民)은 인군(人君)을 버린다."
 
"옛날에 사해를 다스리며 천자가 관작을 설치하고 봉록을 지급한 것은 신하를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 백성을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성인의 동작과 시설, 명령, 법제는 그 하나하나가 반드시 백성에 근본을 둔 것이다. …(중략)…임금이 관리에게 책임을 지우는 것도 오로지 백성을 근본으로 한 것이며, 관리가 임금에게 보답하는 것도 하나같이 백성을 근본으로 한 것이었다. 이처럼 백성은 존중되었다." -출처는 모두 《조선경국전》
 
임금을 따라 동북면에 이르렀는데, 도전이 호령이 엄숙하고 군대가 정제된 것을 보고 나아와서 비밀히 말하였다.
"훌륭합니다. 이 군대로 무슨 일인들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
이에 임금이 말하였다.
"무엇을 이름인가?"
도전이 대답하였다.
"왜구를 동남방에서 치는 것을 이름입니다."[2]

개국할 즈음에 왕왕 취중에 가만히 이야기하였다.
"한 고조장자방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곧 한 고조를 쓴 것이다."[3]
무릇 임금을 도울 만한 것은 모의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마침내 큰 공업을 이루어 진실로 상등의 공훈이 되었던 것이다. —《태조실록》 7년 8월 26일 정도전 졸기.[4]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 문신 겸 학자, 사상가.

조선왕조의 건국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자 한국 역사상 희대의 풍운아. 조선 창업과 개혁작업을 이끈 정치가로서도 중요하지만 철학자이자 사상가로서도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다.

작위는 봉화(奉化伯).

모 소설에 의하면 갓난아기 때 버려진 이상과 예수를 킬러로 키워낸 암흑가의 보스로 잔인무도한 인물이다.

Contents

1 일대기
2 인물됨
2.1 토지개혁
3 사상
4 최후
5 졸기
6 후일담
7 묘소
8 사극에서
9 기타

1 일대기

경상도 영주 지방 향리 집안 출신이다.[5] 부친 때부터 벼슬을 시작해서 본인도 개경에서 이제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젊은 시절 신진 사대부로서 강직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과거 급제 후 젊은 신진파로서 공민왕의 총애를 받기도 했으나, 공민왕 시해 이후 고려의 토지개혁의 남은 성과 마저 무너지고, 친원파 권문세족의 세도와 부패한 불교계의 폐단, 왜구의 침탈과 학살 등으로 민생이 무너지는 현실을 목도하게 된다.

중국 대륙에서는 원나라가 서서히 몰락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정도전은 권문세족들을 비판하고 원과의 관계를 단교하고 명나라와 친해지자는 주장을 피고 있었는데 이것 때문에 권문세족의 눈 밖에 나 결국 관리 자리를 잃고 낙향하게 된다. 우왕의 실세이자 친원파 세족이던 이인임의 정책에 반대한 것이 원인이 되어 유배되었고, 정의로워 불의에 타협할 줄 모르는 강직한 성품으로 인해 복직되지 못한 채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된다. 이때 같이 이인임을 공격하던 동류들은 살해되지 않는 한은 대개 복직되었고, 염흥방처럼 변절하는 무리들도 있었다.

이후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며 후진들을 양성했지만 그때마다 반대 세력에 의해 학당이 박살나는 일이 벌어졌다. 정도전은 유랑을 다니고 후진들을 양성하면서 그동안 몰랐던 백성들의 삶을 직접 보고 깨달으면서 마침내 더 이상 고려 왕조로는 그 어떤 희망도 없으며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것만이 개혁을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정도전은 황산대첩으로 영웅이 된 북방의 이성계를 찾아가 그의 측근이 되었다.

위화도 회군 이후 정도전은 조준, 이행, 조민옥 등과 함께 사전(私田) 개혁을 주장하였다. 공양왕 2년(1390년) 기존의 모든 토지 문서(공사전적, 公私田籍)를 서울 한복판에 쌓아놓은 다음 불을 질렀다. 그리하여 여러 날 동안 토지 문서가 불타는 것을 백성들이 보게 되었다고 한다.(고려사 식화지) 그리고 공양왕 3년(1391년)에는 과전법(科田法)을 발표했다.

공양왕을 압박하는 한편, 정적인 정몽주 등과의 정쟁에서 한때 위기에 몰려 정몽주에 의해 유배된 채 살해될 지경까지 이르렀으나, 정몽주가 피살되면서 해배되어 복직, 마침내 고려 왕조를 무너트리고 조선 왕조를 건국하는 데 큰 공을 세우게 된다. 공양왕 말기의 전제개혁에서도 남은, 조준과 함께 강경개혁파로서 개혁 달성에 큰 공을 세운다. 그러나 그가 처음 주장하던, 모든 사전을 몰수하고 백성에게 재분배하는 것이나 노비 해방까지는 이루어지지 못한 채 조준의 비교적 온건한 대안으로 진행되기는 했다.

이후 정도전은 이성계의 무한한 신뢰로 사실상 왕 다음으로 가장 큰 권력을 가지게 되어 나라가 세워지는 과정 거의 모든 부분에 참여해 조선의 기틀을 잡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성계의 한양천도 계획에 찬동하였고 궁과 성벽 건설을 주도했으며, 경복궁의 전각이나 문 등의 이름을 대부분 정했고, 국정제도 전반을 개혁했으며, 삼군부를 설치하고 사병을 혁파하여 군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급진적인 개혁 성향과 강한 권력을 독점하다시피한 정도전에게 반감을 품은 세력들이 속속 생기게 되고, 사병이 전부 혁파되지 못한 채 남아 있었으며, 진법훈련 등에 명이 의심을 품어 정도전을 소환하는 등 외교적 위기까지 초래되었다. 이런 상황은 정도전이 다른 공신출신 재상들에게서도 고립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결국 1차 왕자의 난에서 정적인 이방원에게 남은과 함께 살해되었다.

2 인물됨

냉철한 지성과 강직함을 지니고 있었던 혁명적 사상가의 이미지와는 달리 상당히 덜렁대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신발을 짝짝이로 신고 외출을 했는데 말을 몰고 가는 하인이 "대감, 서로 다른 신발을 신고 나오셨습니다."라고 지적하자 정도전은 "상관없다. 이렇게 말을 타고 가면 오른쪽으로 지나가는 사람은 오른쪽 신발만 볼 것이고, 왼쪽으로 지나가는 사람은 왼쪽 신발만 볼 테니까."라고 웃으며 그대로 짝짝이로 신발을 신은 채로 있었다고. 쿨가이인지 귀차니스트였던 건지 앞이나 뒤에서 보면 어쩌려고 공양왕 시절에는 반이성계파 인사였던 우현보를 탄핵하려던 계획을 세웠는데, 이것이 사실은 이성계 일파의 참모진들 외에는 기밀사항이었다. 그런데 이를 실수로 주변 사람들에게 흘리는 바람에 반이성계파 대간들이 이를 두고 정도전을 집중적으로 탄핵했고 결국 공신녹권 박탈에 유배 크리까지 당해서 큰 위기를 겪기도 했다. 또 태조가 문득 불쌍해보이거나 안쓰러워 보이면 자리를 가리지 않고 어린아이처럼 대성통곡하고는 했다는 기록이 있어 매우 감정표현에 솔직한 인물임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강직한 성품으로 인해 권신들과 감정적 대립 역시 심했고, 그가 우왕대 복직되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다. 당장 다른 신진 사대부들이 하나 둘 현실과 타협했지만 끝까지 버틴 인물이 바로 정도전이다. 그러나 그런 과정에서 부로를 훈시하던 오만함이, 유배된 부락의 천인들과의 정서적 교류, 그들의 지식과 지혜에 대한 파악과 이해를 거치면서 크게 바뀌었다. 이후 백성을 중시하며 실용을 중시하는 사고관이 자리잡게 된다. 드라마 '정도전'에서도 이 점을 지적한다.

다만 주변사람과 충돌하고 과격하게 행하는 면모는 이후로도 고치지 못했으며 한번 가진 은원을 잊지 않고 있다가 나중에 철저히 갚는 면모도 있었다. 전반적으로 프로 어그로꾼(...) 성질이 매우 다분한 인물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경복흥, 이인임 같은 조정의 권신들에게 개기다가 유배 당했는데 거기서 또 악에 받힌 소리를 하고 떠나서 곤장 맞을 뻔하기도 하고 유배지에서 백성들에게 가서도 그랬다가 반성하기도 하지만 나중에 유배에서 풀려나와 삼각산 등지에서 후학을 가르칠때도 혹세무민하는 요망한 인간을 매우 까는데 같이 까던 승려도 '석가모니나 저놈이나 다를게 뭐냐?'는 식으로 면박을 줘서 데꿀멍하게 만들지 않나...그냥 마음에 안들면 가리지 않고 막 까는 인물이었던 것.

애시당초 정도전을 까는 졸기에서도 처음엔 스승과 동문들간의 사이가 두터웠으나 나중에 원수같이 되었다고 되어 있다. 그리하여 개국에 반대한 이색과 그 동문들은 작정하고 작살낸다. 스승인 이색이나 동문 이숭인, 정몽주와는 나중에 원수가 되었다고 할 정도였으며 이숭인은 유배지에서 정도전이 보낸 사람에 의해 맞아 죽었다. 거기에 또 다른 동문 후배인 하륜은 아예 '술수하는 자 따위의 말은 믿을 수 없습니다'라고 까기도 했다. 또 자신의 내력을 알려 승진을 막았다고 생각한 우현보의 집안을 아주 작살내 버렸다. 가장 압권은 스승 이색이 조선 개국 이후 유배를 갔을때인데 정도전이 외딴 섬인 자연도로 보내려고 하니 그 말을 들은 경기 계정사 허주가 자연도에는 사람이 없다며 난색을 표하자 "섬에 귀양보내자는 것은 바로 바다에 밀어넣자는 것이다" 라고 대답했다. 참고로 이건 너무 심하지 않느냐며 이색을 육지로 유배보내준 게 태조였다(…). 한 마디로 정작 주군인 태조 이성계가 개국 과정에서 많은 이들에게 관용을 베풀려고 했던 것과는 상반된 모습들이다. 이 때문에 많은 반감을 샀으며 1차 왕자의 난 때 이 성격으로 미움받아 죽었다는 말을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편인 남은이 말했을 정도였다.

워낙 문(文) 쪽으로만 치우쳤는지 체구는 뚱뚱했다고 한다. 배가 불룩 나왔다고 하는 묘사가 사서에 있을 정도. 이 점은 본인도 '농부에게 답하다'라는 글에서 '뺨이 풍요하고 배가 나왔다'라고 자신의 외모를 묘사했다. 또한 정도전의 후배이자 정치적으로는 반대 입장이었던 권근은 정도전의 용모를 "온후한 빛과 엄중한 용모는 쳐다보면 높은 산을 우러러 보는 듯하고 다가서면 봄바람 속에 앉은 듯하다. 그 얼굴이 윤택하고 등이 펴진 것이 온화함과 순함이 속에 있음을 알겠다"라고 묘사했다. 실록에서도 정도전이 죽을 때 이웃집으로 도망치자 그 집 주인이 '배 불룩한 사람이 저희 집에 숨었습니다'라고 이방원에게 고발하기도 했다.[6] 이로 미뤄 보면 정도전은 꽤 풍채가 좋은 스타일이었던 것 같다. '등이 펴졌다'는 권근의 묘사를 보면 단순 비만형은 아니라 제법 늠름한 인상이었던 듯. 난 뚱뚱이 아냐! 통통이야!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 서거정의『태평한화』에 의하면 하루는 정도전이 이숭인[7], 권근과 더불어 각자가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바에 대해 얘기했는데, 이숭인은 조용한 산방에서 시를 짓는 것을 평생의 즐거움이라 했고, 권근은 따뜻한 온돌에서 화로를 끼고 앉아 미인 곁에서 책을 읽는 것을 최고의 즐거움으로 꼽았다. 이에 정도전은 “첫눈이 내리는 겨울날 가죽옷에 준마를 타고, 누런 개와 푸른 매를 데리고 평원에서 사냥하는 것이 가장 즐거운 일”이라고 했다 한다. 개국 이후 직접 병서를 지어 직접 군사훈련을 지휘했다는 점을 감안해봤을 때 정도전은 다른 문인들에 비해 무(武)의 성향도 어느 정도 있었다고 할 수 있다.다만 실제로 그가 전장에 나가서 공을 세우거나 병재(兵才)를 입증한 바는 없다.병법을 연구하는 정도였을 가능성이 크다.

사상적으로 보면 오늘날 봐도 진보적인 부분이 꽤 있다(예를 들자면 모든 농민에게 모든 토지를 무상몰수해서 균등하게 무상분배). 민본주의 정치를 이상적으로 삼았던 인물이니만큼 그와 관련한 글들도 많이 남겼다. 그러나 노비해방이나 토지분배 등은 지방 호족이나 향리층 및 관인층의 반발이 극심해 이성계의 힘만으로도 추진하기에는 버거운 일이었고, 개혁파 내부에서도 크게 호응받지 못했다. 사실 윤소종, 조준 같은 강경개혁파들도 여기에는 미치지 못했다. 윤소종은 강경개혁파 선봉장이었으나 노비 문제로 송사를 벌인 전력이 있었고, 귀족 출신이면서도 이성계를 따라 개혁에 앞장섰던 조준도 그보다는 온건하며 현실적인 고려를 담은 방안을 마련했다.

고려말 원의 간섭기를 살아온 경험 때문인지는 몰라도 자주성에 대해서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듯하다.[8] 명나라가 워낙 막강한 국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 사대의 예로 지극히 섬기기는 했으나 주원장이 고의적으로 조선과 외교적인 마찰을 벌이고 노골적으로 정도전을 중국으로 보낼 것을 요구현피신청하면서 점점 틀어지게 된다.[9] 조선에서는 중국의 침략을 대비해 전시 태세에 들어갔을 정도였고 정도전은 아예 요동을 선제공격할 계획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삐걱거리던 양국 관계는[10] 결국 주원장과 정도전이 죽고 나서야 해결될 수 있었다.

당장 이 문제에 대해선 같은 조선 건국의 주체인 조준을 비롯 다른 개국공신들이나 왕족들도 반대가 심했다. 다음은 요동정벌에 대한 다른 공신들의 반응과 정도전과 조준이 요동공략에 대해서 의견을 주고 받은 부분이다. 조준의 반대 부분도 당시 조선의 사정을 생각하면 현실적인 부분이 많음을 알 수가 있다.

대사헌 성석용(成石瑢) 등이 상언하였다.
“전하께서 무신(武臣)들에게 《진도(陣圖)》를 강습하도록 명령한 지가 몇 해가 되었는데도, 절제사(節制使) 이하의 대소 원장(大小員將)들이 스스로 강습하지 아니하고 그 직책을 게을리 하오니, 그 양부(兩府)의 파직(罷職)된 전함(前銜)은 직첩(職牒)을 관품(官品)에 따라 수취(收取)하되 1등을 체강(遞降)시킬 것이며, 5품 이하의 관원은 태형을 집행하여 뒷사람을 감계(鑑戒)하게 하소서.”
임금이 말하였다.
“절제사 남은·이지란(李之蘭)·장사길(張思吉) 등은 개국 공신(開國功臣)이고, 이천우(李天祐)는 지금 내갑사 제조(內甲士提調)가 되었으며, 의안백(義安伯) 이화(李和)·회안군(懷安君) 이방간(李芳幹)·익안군(益安君) 이방의(李芳毅)·무안군(撫安君) 이방번(李芳蕃)·영안군(寧安君) 양우(良祐)·영안군(永安君) 〈이방과(李芳果)〉【상왕(上王)의 예전 이름.】·순녕군(順寧君) 지(枝)·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정안군(靖安君) 〈이방원(李芳遠)〉【우리 전하(殿下)의 이름.】은 왕실(王室)의 지친(至親)이고, 유만수(柳曼殊)와 정신의(鄭臣義) 등은 원종 공신(原從功臣)이므로 모두 죄를 논의할 수 없으니, 그 당해 휘하 사람은 모두 각기 태형 50대씩을 치고, 이무(李茂)는 관직을 파면시킬 것이며, 외방(外方) 여러 진(鎭)의 절제사로서 《진도》를 익히지 않는 사람은 모두 곤장을 치게 하라.”
처음에 정도전과 남은이 임금을 날마다 뵈옵고 요동을 공격하기를 권고한 까닭으로 《진도》를 익히게 한 것이 이같이 급하게 하였다. 이보다 먼저 좌정승 조준이 휴가를 청하여 집에 돌아가 있으니, 정도전과 남은이 조준의 집에 나아가서 말하였다.
“요동을 공격하는 일은 지금 이미 결정되었으니 공(公)은 다시 말하지 마십시오.”
조준이 말하였다.
“내가 개국 원훈(開國元勳)의 반열(班列)에 있는데 어찌 전하를 저버림이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왕위에 오른 후로 국도(國都)를 옮겨 궁궐을 창건한 이유로써 백성이 토목(土木)의 역사에 시달려 인애(仁愛)의 은혜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원망이 극도에 이르고, 군량(軍糧)이 넉넉지 못하니, 어찌 그 원망하는 백성을 거느리고 가서 능히 일을 성취시킬 수 있겠습니까?”
또, 정도전에게 일렀다.
“만일에 내가 각하(閣下)와 더불어 여러 도(道)의 백성을 거느리고 요동을 정벌한다면, 그들이 우리를 흘겨본 지가 오래 되었는데 어찌 즐거이 명령에 따르겠습니까? 나는 자신이 망하고 나라가 패망되는 일이 요동에 도착되기 전에 이르게 될까 염려됩니다. 임금의 병세가 한창 성하여 일을 시작할 수 없으니, 원컨대 여러분들은 내 말로써 임금에게 복명(復命)하기를 바라며, 임금의 병환이 나으면 내가 마땅히 친히 아뢰겠습니다.” - 태조 7년 8월 9일의 기록

그리고 정도전은 이 일이 있은 지 17일 후에 이방원에게 살해당했다.

2.1 토지개혁

토지개혁 문제에서 정도전의 주장은 과격했는데, "전제(田制·토지제도)가 무너지면서 호강자(豪强者)가 남의 토지를 겸병하여 부자는 밭두둑이 잇닿을 만큼 토지가 많아진 반면 가난한 사람은 송곳 꽂을 땅도 없게 되었다."(부전(賦典) <조선경국전>) "옛날에는 토지를 관에서 소유하여 백성에게 주었으니, 백성이 경작하는 토지는 모두 관에서 준 것이었다. 천하의 백성으로서 토지를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경작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부전')고 고려말의 현황을 비판하였다.

정도전은 국가가 토지를 몰수하여 공전(公田)으로 만든 다음, 경작을 담당하는 백성들 개인에게 나누어주는 계구수전(計口授田) 또는 계민수전(計民授田) 방식을 추구했다. 하지만 반포된 과전법은 권세가들의 반대 때문에 후퇴한 형태였다.

"전하(이성계)께서는 잠저(潛邸·즉위하기 전에 거주하던 집)에 계실 때 친히 그 폐단을 보고 개탄스럽게 여기어 사전 혁파를 자기의 소임으로 정하였다. 그것은 대개 경내의 토지를 모두 몰수하여 국가에 귀속시키고 인구를 헤아려서 토지를 나누어주어서 옛날의 올바른 토지제도를 회복시키려고 한 것이었는데, 당시의 구가(舊家) 세족(世族)들이 자기들에게 불편한 까닭으로 입을 모아 비방하고 원망하면서 여러 가지로 방해하여, 이 백성들로 하여금 지극한 정치의 혜택을 입지 못하게 하였으니, 어찌 한탄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백성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일이 비록 옛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토지제도를 정제하여 1대의 전법을 삼았으니, 전조(前朝·고려)의 문란한 제도에 비하면 어찌 만배나 낫지 않겠는가?"('부전' <조선경국전>)

정도전은 이에 대해서 문제는 있으나 이전보다는 훨씬 나은 개혁이었다고 자평했다.

3 사상

비록 역성혁명을 일으켜 보수적 성리학과 괴리되는 정치현실을 스스로 만들어 냈으나, 성리학에 대한 이상과 믿음이 강했던 그는 당시 유학자들에게 사적으로 용인되거나 학문적으로 타협되던 불교를 정면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불씨잡변》은 그러한 정도전의 사상이 잘 드러난 책이다. 그밖에도 성리학 관련 저서들을 집필했다. 《고려사》 편찬에도 참여했는데, 이 부분은 태종세종대에 공민왕 이후 기록이 왜곡되었다는 지적을 받게 되고 그리하여 개수되기도 했다.

사실 각종 필화사건이 난무하고 일원화된 사상적 압제가 통상화된 조선시대의 사상적 경향성에 있어, 정도전의 그림자가 언뜻 비추고 있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고려조에는 승려 신분이었던 신돈의 경우, '공자는 만세의 스승'이라고 공인하면서 성균관을 재건했을 정도로 다른 사상에 대한 유연성에서 별 다른 경직성이 보이지 않으나, 정도전은 불교는 물론이고 다른 사상[11]에 대해 지독히 배타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도전이 단순히 교조주의라서 다른 사상을 배척한 것은 아니다. 우선 그가 불교를 비판한 것은 불교의 폐단이 극대화된 시기였기 때문이다.[12] 고려 말은 사찰의 난립과 횡포로 인해 국고는 국고대로 탕진되고, 민생은 더 없는 나락으로 떨어졌던 시기이다. 그렇기에 새로운 왕조는 불교와 확실히 선을 그을 필요가 있었고, 그러한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 쓰인 것이 《불씨잡변》이었다. 하지만 정치적인 목적이 아니라고 해도 유학자의 입장에서 불교는 비판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불씨잡변》 중 '불씨지옥의 변'을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옛날에 어떤 이 나에게 묻기를, "만일 지옥이 없다면 사람이 무엇이 두려워 악한 짓을 안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나는 이렇게 답하여 말하기를,

"군자(君子)가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함은, 마치 좋은 색을 좋아하고 나쁜 냄새를 싫어함과 같아 모두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지 무엇을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번이라도 악명(惡名)이 있게 되면 그 마음에 부끄러워하기를 마치 시장에서 종아리를 맞는 듯이 여기니, 어찌 지옥설 때문에 악한 짓을 하지 않는다고 하겠습니까?"

하였더니, 그 중은 아무 말도 못하였다. 여기에 이 사실을 아울러 써서 그 설에 미혹되는 세상 사람들이 분변할 있도록 하고자 한다.

이것은 단순히 정도전 개인의 사상이 아니라 유교의 기본적인 사상이기도 하다. 유교는 뜬구름 잡는 개소리라 여기는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유교는 현실참여형 정치사상이고, 그렇기에 특히 사후세계같은 것을 끔찍할 정도로 싫어한다. 왜냐면 이러한 사후세계관이 결국에는 거지 같은 현실을 바꾸려는 민중의 의지를 꺾어버리기 때문이다. 이건 곧 유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혹세무민이었고, 그래서 비판을 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13]

하지만 위에서 본 것과 같이《불씨잡변》에서 정도전이 전반적으로, 또한 궁극적으로 공박하는 대상은 단순하게 세속화된 불교의 통시적인 폐단 정도가 아니라 연기론이나 윤회론 같은 불교의 핵심적인 이론이다. 유학자로서 사물의 생멸과 무궁한 변화를 전제하는 불교의 관점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 그 비판에 있어 철학적인 사유의 한계가 다분하고 무엇보다 중국 당나라시대 유학자인 한유의 배불론에서의 논리를 기계적으로 되풀이하고 있다.[14] 사실 그의 스승이었던 목은 이색의 불교비판에 접근하는 방법론에 비교하자면 정도전의 불교에 대한 관점은 어디까지나 비판이 아닌 폭력에 더 가까이 접근해 있다.

4 최후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나는 그의 최후는 매우 비굴한데 이방원에게 "예전에 정안군(태종 이방원)께서 저를 살려주셨으니 이번에도 저를 살려주시지 않겠습니까?"라고 빌자 이방원은 "네가 조선의 봉화백이 되고도 그리 부족하냐? 어째서 이 지경으로 악행을 저지르느냐?"라고 일축하며 베어버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바로 뒤에 분위기가 다른 장면을 실어 놓았는데, 아들 정담이 "오늘은 정안대군께 빌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라고 말하자 "내가 이쪽을 배반하고 저편에 붙는다면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겠느냐?"라고 거절했다. 죽기 직전에 남긴 절명시도 비굴한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양조에 한결같이 공력을 다 기울여, 서책 속 교훈을 저버리지 않고 떳떳이 살아왔네.
삼십 년 긴 세월 쉬지 않고 이룬 공업, 송현방[15] 한 잔 술에 모두 허사가 되었구나.
(操存省察兩加功 不負聖賢黃卷中 三十年來勤苦業 松亭一醉竟成空)
-자조(自嘲: 스스로를 비웃다)

이런 기록들 때문에 실록 속의 비굴한 최후는 이방원 일파에 의해 비하된 감이 있다고 보는 의견이 많다. 사실 태조실록에서 왕자의 난 부분은 다소 비판적으로 읽어야 하기도 하고. 단, 정도전의 절명시 자조는 실록에 없고 정도전의 문집인 《삼봉집》에 있는 기록이다. 하지만 아들의 말에 대한 대답 "내가 이쪽을 배반하고 저편에 붙는다면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겠느냐?"는 분명 실록에 있으며 목숨을 구걸하는 장면과는 많이 다른 장면이라서 최후의 비굴한 모습은 정도전을 비하하기 위한 기록일 가능성이 있다.

다만 그의 죄목은 반역을 꾸몄다는 역모죄가 아닌 종친들을 이간질시키고 해하려 했다는 종친모해죄였다.

5 졸기

정도전의 는 종지(宗之), 는 삼봉(三峰)이며, 본관은 안동 봉화이니, 형부 상서(刑部尙書) 정운경의 아들이다. 고려 왕조 공민왕 경자년에 성균시에 합격하고, 임인년에 진사에 합격하여 여러 번 옮겨서 통례문 지후(通禮門祗候)에 이르게 되었다. 병오년에 연달아 부모의 상을 당하여 여막을 짓고 상제를 마치니, 신해년에 불러서 태상 박사(太常博士)로 임명하였다. 공민왕이 친히 종묘에 제향하니, 도전이 도(圖)를 상고하여 악기를 제조하였다. 예의 정랑(禮儀正郞)·예문 응교(藝文應敎)로 옮겨서 성균 사예(成均司藝)로 승진되었다. 갑인년에 공민왕이 하여, 을묘년에 북원의 사자가 국경에 이르니, 도전이 말하였다.

선왕 께서 계책을 결정하여 명나라를 섬겼으니, 지금 원나라 사자를 맞이함은 옳지 못합니다. 더구나 원나라 사자가 우리에게 죄명을 가하여 용서하고자 하니, 그를 맞이할 수 있습니까?”

그때의 재상이 듣지 않으므로, 도전이 굳이 이를 말하다가, 노여움을 당하여 회진으로 폄직되었다. 갑자년에 하성절사(賀聖節使) 정몽주가 그를 천거하여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아 경사(京師)에 갔다가 돌아와서 성균 사성(成均司成)에 임명되었다. 정묘년에 외직을 자원하여 남양 부사(南陽府使)가 되었다. 무진년에 임금께서 국정을 맡게 되매 불러서 대사성(大司成)에 임명하였다. 여러 번 계책을 올려 밀직 제학(密直提學)과 지공거(知貢擧)로 승진되고, 십학 도제조(十學都提調)가 되어 상명(詳明)·태일(太一) 등 여러 산법을 가르치고, 예문 제학(藝文提學)으로 옮겨서 《진맥도결》을 지었다. 기사년에 조준 등과 더불어 사전을 혁파하기를 청하였다. 공양왕이 왕위에 오르매, 삼사 우사(三司右使)에 승진되고 중흥 공신으로써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졌다. 경오년에 정당 문학(政堂文學)에 승진되고, 윤이(尹彝)·이초(李初)의 무망한 옥사가 일어나자, 도전이 그 의논을 극력 주장하였으나, 정몽주가 임금에게 말하여 이 일을 그만 중지하게 하였다. 도전이 계품사(計稟使)로써 경사(京師)에 갔다. 신미년에 형벌과 상여의 잘되고 잘못된 점에 관하여 말씀을 올리니, 공양왕이 능히 용납하지 못하여 나주로 폄직되었으나, 임신년에 불리어 돌아왔는데, 남은 등과 더불어 계책을 정하여 임금을 추대하였다.

임금께서 왕위에 오르매, 공훈을 책정하여 1등으로 삼고 문하 시랑찬성사 겸 판상서사사(門下侍郞贊成事兼判尙瑞司事)를 가하였다. 또 계품사(計稟使)로써 경사(京師)에 갔다가 돌아와서 판삼사사 겸 판삼군부사(判三司事兼判三軍府事)로 승진되고, 삼도 도통사(三道都統使)가 되어 《진도(陣圖)》·《수수도(蒐狩圖)》·《경국전》·《경제문감》을 제작하고, 또 악가를 지었으니, 몽금척(夢金尺)·수보록(受寶籙)·문덕(文德)·납씨(納氏)·정동방(靖東方) 등의 곡이 있었다. 정총 등과 더불어 《고려국사》를 수찬하였다. 봉화백(奉化伯)으로 봉해지고, 관등은 특별히 숭록 대부(崇祿大夫)로 승진되었다. 병자년에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처음으로 초장(初場) 강경(講經)의 법을 시행하였다. 정축년에 동북면을 선무하여 주군(州郡)의 이름을 정하고 공주성(孔州城)을 수축하였다. 무인년 봄에 돌아오니, 임금이 맞이해 위로하고 후하게 대우하였다. 도전은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많은 책을 널리 보아 의논이 해박하였으며, 항상 후생을 교훈하고 이단을 배척하는 일로써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일찍이 곤궁하게 거처하면서도 한가하게 처하여 스스로 문무의 재간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임금을 따라 동북면에 이르렀는데, 도전이 호령이 엄숙하고 군대가 정제된 것을 보고 나아와서 비밀히 말하였다.

“훌륭합니다. 이 군대로 무슨 일인들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

이에 임금이 말하였다.

“무엇을 이름인가?”

도전이 대답하였다.

왜구를 동남방에서 치는 것을 이름입니다.”

군영 앞에 늙은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도전이 소나무 위에 를 남기겠다 하고서 껍질을 벗기고 썼다. 그 시는 이러하였다.

“아득한 세월 한 주의 소나무

몇만 겹의 청산에서 생장하였네

다른 해에 서로 볼 수 있을런지

인간은 살다 보면 문득 지난 일이네.”

개국할 즈음에 왕왕 취중에 가만히 이야기하였다.

한 고조장자방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곧 한 고조를 쓴 것이다.”

무릇 임금을 도울 만한 것은 모의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마침내 큰 공업을 이루어 진실로 상등의 공훈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도량이 좁고 시기가 많았으며, 또한 겁이 많아서 반드시 자기보다 나은 사람들을 해쳐서 그 묵은 감정을 보복하고자 하여, 매양 임금에게 사람을 죽여 위엄을 세우기를 권고하였으나, 임금은 모두 듣지 않았다. 그가 찬술한 《고려국사》는 공민왕 이후에는 가필하고 삭제한 것이 사실대로 하지 않은 것이 많으니, 식견이 있는 사람들이 이를 그르게 여겼다. 처음에 도전이 한산(韓山) 이색을 스승으로 섬기고 오천(烏川) 정몽주와 성산(星山) 이숭인과 친구가 되어 친밀한 우정이 실제로 깊었는데, 후에 조준과 교제하고자 하여 세 사람을 참소하고 헐뜯어 원수가 되었다. 또 외조부 우연(禹延)의 장인인 김진(金戩)이 일찍이 중이 되어 종 수이(樹伊)의 아내를 몰래 간통하여 딸 하나를 낳으니, 이가 도전의 외조모 이었는데, 우현보의 자손이 김진(金戩)의 인척인 이유로써 그 내력을 자세히 듣고 있었다. 도전이 당초에 관직에 임명될 적에, 고신(告身)이 지체된 것을 우현보의 자손이 그 내력을 남에게 알려서 그렇게 된 것이라 생각하여 그 원망을 쌓아 두더니, 그가 뜻대로 되매 반드시 현보의 한 집안을 무함하여 그 죄를 만들어 내고자 하여, 몰래 황거정 등을 사주하여 그 세 아들과 이숭인 등 5인을 죽였으며, 이에 남은 등과 더불어 어린 서자의 세력을 믿고 자기의 뜻을 마음대로 행하고자 하여 종친을 해치려고 모의하다가, 자신과 세 아들이 모두 죽음에 이르렀다.

태조 14권, 7년(1398 무인 / 명 홍무(洪武) 31년) 8월 26일(기사) 2번째기사
다만 정도전의 출신에 관한 실록의 기록은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방원 세력이 정도전의 출신을 문제삼고 왕자의 난을 정당화 하기 위해 일부러 종의 자식으로 교묘하게 조작하였다는 것이다. 실록의 왜곡을 지적하는 이들은 정도전의 아버지인 정운경의 행장에는 외조부의 이름을 영천 우씨 우연(禹淵)으로 적었지만 실록에서는 단양 우씨 우연(禹延)으로 적어 한자가 다르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관련기사

6 후일담

정도전에게는 형제가 둘 있었는데 두 동생 중 첫째 동생인 도복은 한성판윤[16]으로 있었다. 둘째 동생인 도존은 무인정사 당일 정도전과 함께 피살되었고 큰동생 정도복은 정도전이 죽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영주로 낙향했다

정도전에게는 아들이 넷 있었는데 이 중 둘째, 셋째, 막내아들인 정영, 정유, 정담도 아버지, 삼촌과 함께 무인정사 때 운명을 같이 했다. 살아남은 한명의 아들은 바로 맏아들인 정진(鄭津, 1361∼1427)으로 지방에 내려가 있다가 화를 면하였다, 이후 전라도 수군(水軍)의 일개 병사로 신분이 강등되어 수병생활을 9년간 하게 되었다(조선시대 수군은 천역에 속했다).

이 후 태종은 정진을 판 나주목사로 임명하는 방법으로 복권시켰다. 태종이 왜 정적의 아들인 그를 복권시켰는지는 분명치 않다.[17] 어쨌거나 정진은 이후 여러 지역의 목민관을 역임하였고 판한성부사를 지냈으며 세종조에 형조판서까지 역임하는 등 높은 지위에 올랐다. 개인적인 인품이나 평가도 좋았으며 그가 졸했을 때 세종이 조회를 폐하고 부의를 내리기도 했다. 정진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맏이는 용인현령을 지낸 정래이고 둘째는 직산현감을 역임한 정속이다. 이 중 정속의 아들 정문형은 세종때 문과에 급제하여 세조 시기엔 우의정, 성종시기엔 영의정에 이르렀다. 이를 보면 정도전 개인은 거론하는 것조차 금기시된 역적이 되었으나, 그의 후손들이 멸족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사대부로서 영달을 누렸음을 알 수 있다. 그 후로도 정도전의 후손들은 가문을 이어 대대로 고관대작을 지냈다.

다만 정도전 본인은 조선이 끝나기 직전까지 신원되지 못하고 역적으로 지탄을 받았다. 하지만 이건 국가의 공식 입장이었던거고 다른 사대부들에게는 이미 이전부터 '선유(先儒)'로 존경받았던 것 같다. 일례로 그의 문집 《삼봉집》을 재편찬하고 거기에 서문을 쓴 이가 바로 세조 때의 재상인 신숙주[18]였는데 신숙주는 여기서 "당시 영웅호걸이 난립했지만 선생 만한 인물은 없었다"라고 그를 높이 평가했고 사림파의 거두인 김종직도 정도전을 최고의 선비로 평가했다. 광해군 때의 허균은 대놓고 정도전을 대현인이라고 평가했으며 조선 후기의 영조정조도 정도전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송시열을 비롯한 사림파는 정도전을 높게 평가하지 않았으며 정몽주[19]가 태종 때 복권되고 중종 때 문묘에 배향된 것과는 다른 대접을 받았다. 그는 성리학 이상국가를 창조해내었으나, 도리어 그 행동으로 인해 결국 그 국가에서 버림받게 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정도전이 공식적으로 복권되고 명예를 회복한 것은 흥선 대원군 섭정기에야 이루어졌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증건하면서 그 설계자인 정도전의 공로를 인정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 1865년(고종 2년)에 대왕대비가 정도전의 훈봉(勳封)을 회복해 주고 시호(諡號)를 내리며 봉사손(奉祀孫)의 이름을 물어서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으로 의망하여 들이도록 전교하였다.[20]
  • 1867년(고종 4년)에 고종이 경복궁에서 근정전에 앉아서 공식적으로 정도전의 업적을 찬양하면서 정도전에 대한 사면을 반포하였다.[21]
  • 1870년(고종 7년) 예조에서 정도전 16대손 정응기(鄭應夔)를 사손으로 정할 것을 청하여 고종이 윤허하였다.[22]
  • 1870년 정도전에게 문헌공(文憲公)이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23]
  • 1872년(고종 9년)정도전의 묘에 지방관을 보내서 제사를 지내게 하였는데 무덤이 없어서 후손들이 신주에 제사를 받겠다고 하여 예조에서 고종에게 아뢰자 고종이 신주에 제사를 드리라고 하교하였다.[24]

정감록》의 저자로 지목된 인물이기도 하다. 물론 《정감록》은 영&정조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사실이 아니지만, 정도전이 경복궁의 위치를 잡는 등의 일로 인해 민중들에게는 풍수도참에 능통한 인물로 알려졌고 또한 조선왕조에 의해 죽임을 당한 패배자였기 때문에 그런 이미지들이 종합적으로 엮여서 그를 정감록의 저자로 내세우게 된 게 아닌가 하는 분석이 있긴 하다. 그러나 정도전의 이상이 철저한 성리학 국가 건설이었으며, 한양 천도 때 하륜과 대립했을 때 한 말인 술수하는 자들의 말은 믿을 수 없다는 말만 봐도 이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실록에서 실제로도 정도전 본인이 직접 "신은 술수 따위는 배우지 않아서 잘 모릅니다"라는 말을 하고 있다.

7 묘소

정도전은 신원되었지만 오랜 시간 동안 흘러오면서 무덤이 실전되어 후손들은 가묘를 만들어 제사 지내고 있다. 족보에는 경기도 광주 사리원[25], 반계 유형원이 쓴 《동국여지지》에 의하면 '정도전의 무덤은 과천현 동쪽 18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옛날 과천현청이 있던 곳에서 동쪽으로 18리를 떨어진 곳을 분석한 결과 서울특별시 서초구 양재역 인근 외교안보연구원(현 국립외교원) 우면산 기슭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곳에는 오래된 무덤 몇 기가 있었는데 그 중 정도전의 무덤으로 보이는 무덤을 1989년 한양대학교에서 발굴했다.

그러나 이 무덤은 오래 전에 도굴꾼들이 여러번 도굴한 탓에 유물이 적었다. 그러나 내부에서는 질이 우수한 백자들이 다수 발견되었으며 목관에서 머리만 있는 유골이 발견되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몸통이 없는 걸로 보아 애초에 머리만 묻힌 무덤으로 보였다.[26] 무덤의 규모는 조선개국 1등공신이라고 하기에 너무나 초라했지만 부장품의 질, 남아있는 인골의 상태 등으로 볼 때 참수당한 정도전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도굴꾼들이 가져갔는지 지석이 있을 자리에 지석이 사라지고 없었다. 이에 문중에서는 결정적인 증거인 지석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배하고 찾아다녔으나, 지금까지 찾지 못했다. 정황상 유골이 자신들의 조상일 가능성은 높아도 물증이 없었지만 문중에서는 일단 이 분은 그 분(정도전)이 아니시라고 해도 오래 전에 돌아가신 우리의 조상이시다.라면서 삼봉사 뒤편에 일단 가매장했다. 언젠가 정도전의 것으로 확정이 되면 정식으로 매장하려는 듯.

8 사극에서

역사학계의 재평가 바람을 타고 긍정적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는 위대한 혁명가로 묘사되기도.

용의 눈물》에서는 故 김흥기가 배역을 맡아 열연했다. 김흥기는 정도전 역만 세 번한 정도전 전문배우로 단순히 배역만 자주 맡은 것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정도전과 그의 사상에 대해 전문가 수준으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용의 눈물》이 방영되었던 1997년에 김 씨가 국민대학교에서 정도전의 정치사상을 주제로 강연을 했을 정도. #

《용의 눈물》에서 태종으로 출연했던 유동근의 회상에 의하면 촬영장에 올 때마다 항상 극에 대한 고증을 해 온 선배후배들이 역사 공부를 하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이 점은 사극 작가들이나 배우들이 본받을 점이다. 《용의 눈물》의 원작인 박종화 선생의 <세종대왕>에서는 소인배 스타일로 등장했는데 용의 눈물에서는 고증을 통해 폭풍간지 혁명가로 재조명했다. 여기서는 실록의 비굴한 최후와는 달리 영웅적인 최후를 맞는 것으로 각색되었다. 이방원에게 "이제 편히 쉬게 해 주게. 조카"라고 말한 후 절명시인 <자조>를 읊조리는 장면은 정말 압권.#[27]

뿌리깊은 나무》에서는 드라마의 또다른 중심축인 비밀결사 '밀본'을 만든 인물이며 작중에서는 이미 고인이지만 상당히 중요한 역할이다. 공홈의 기획의도에도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이며 사대부의 나라이고 정도전의 나라이다'라고 언급하면서 정도전의 사상과 이상을 보여주는 것을 기획의도로 밝히고 있다. 그런데 작중 밀본의 주장대로라면 여기서의 정도전은 "사대부 중심의 나라"를 부르짖는 귀족주의자. 사실 이 드라마는 퓨전사극의 한계로 가장 기본적인 고증에 문제가 많았다. 정도전의 후손들은 당장 아들대부터 복권되어 영달을 누렸는데 정도전의 생질이 숨어살며 비밀결사를 만든다는 것부터가...

이 드라마를 보면 정기준이나 밀본이 정도전의 사상을 잘못 이해하고 있거나 자신들의 유리한 쪽으로 왜곡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작중에서 세종이 "삼봉이라면 나를 이해할 것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작가들이 정도전의 사상을 잘못 이해한 것 같지는 않다.[28]

17화에서는 아예 세종이 정도전의 제자인 혜강에게 "삼봉은 자신의 문집에서 요순시절에는 언관이 없어도 언로가 안 막혔는데 한자를 아는 관료들이 등장하면서 오히려 언로가 막혔다고 까고 있는 거 모름?"이라며 삼봉의 주장을 한글창제 논리를 옹호하는 데 쓸 정도.

대풍수》에서는 등장하지 않을듯 하다가 30화가 되어서야 등장했다. 헌데 연기톤부터 하는 행동까지 전형적인 간신배. 신덕왕후 편에 붙어서 방석을 세자로 만들고 방원을 죽이려 모략을 꾸미는 게 주된 역할. 정몽주의 죽음도 이방원의 결단이 아니라 이방원이 자신을 죽이려는 정도전의 낚시질에 걸려 저지른 것으로 나온다. 역사를 아는 시청자 입장에서 보면 차곡차곡 사망플래그 적립중.

KBS에서 《대왕의 꿈》 후속 작품으로 그의 이야기를 다룰 대하드라마 《정도전》이 2014년 1월부터 방영되기 시작하였다. 정도전 역에는 조재현이 캐스팅되었다. 일단 극초반 기중으로 드라마는 오랜만에 등장하는 제대로 된 정통사극이라며 호평을 받기는 하나, 조재현의 연기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다소 엇갈리고 있다. 다만, 작품이 초반부를 벗어나 중반에 접어들면서 호평이 늘어가고 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고.

한편 MBC에서도 정도전과 이방원의 대결을 그린 《파천황》을 2014년 4월부터 방영될 예정이었으나, 무기한 연기되었다.

9 기타

조선 건국 후 한양의 주요 건물의 위치를 설계하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경복궁의 경우 정도전은 북악산 남쪽을, 무학대사는 북악산 서쪽을 주장했는데, 무학대사는 북악산 남쪽에 경복궁을 지으면 정룡(장자)이 쇠하고 방룡(장자 이외의 아들)이 흥하기 때문에 정도전과 대치했다고 한다. 정도전이 경복궁을 북악산 남쪽으로 한 이유는 태조의 막내 방석(방룡에 해당)을 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야사가 있다. 조선왕조 장자 수난을 만드신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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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전에는 1337년생 설과 1342년생 설로 나뉘어져 있었지만 현재 학계에서는 1342년생 설을 정설로 보고 있다.
  • [2] 태조 7년 8월 26일 정도전의 졸기에 기록된 이성계와 정도전의 첫 대면 당시. 정말 의미심장한 만남이 아닐 수 없다. 드라마 《정도전》 16회 방송분에 이 장면이 나온다.
  • [3] 그의 큰 배포와 야망이 잘 드러나는 말이다.
  • [4] 위의 기사 출처도 동일하다.
  • [5] 혹은 충청북도 단양군 출신으로도 알려져 있다.
  • [6] 다만 이 부분은 실록에서도 앞뒤가 안 맞는 대표적인 부분이다. 이방원 집권 이후 이미지 왜곡을 위해서 넣었다고 보는게 맞을지도.
  • [7] 이런 얘기까지 나올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지만 후일 그는 유배를 가서 정도전이 보낸 이한테 장살당한다. 그것도 이성계는 살려주려고 굳이 장을 치는 것으로 형을 감했는데도 불구하고 정도전이 몰래 남은과 짜고 때려죽인 것. 이 사건은 후에 다시 조사되어 정도전과 남은이 사후에 다시 비난받는 이유가 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이숭인을 장살한 것은 정치적 이유보다 그가 자신보다 문재가 뛰어나서였다는 말이 있다.
  • [8] 다만 이것은 여말 신진사대부라면 드물지 않은 부분이었다.
  • [9] 주원장은 사병 혁파 같은 조선의 군제 개혁이 명을 공격하려는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고 그 중심에 선 정도전을 상당히 위험한 인물로 여겼다. 조선에서 사신이 올 때 정도전파는 억류하거나 죽였고 이방원파는 친근히 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 [10] 주원장은 조선을 승인하긴 했지만 이 얘기를 듣고 왕을 상징하는 금인과 고명을 보내주지 않았다. 결국 이성계는 주원장이 금인과 고명을 보내줄 때까지 '조선국왕' 호칭을 쓸 수 없었고(...) 한동안 고려태조 왕건시절부터 쓰던 임시 칭호인 '권지고려국왕사(權知高麗國王事)'라는 칭호를 써야 했다. 안습.
  • [11] 정도전은 풍수지리 같은 것도 술수라며 믿지 않고 있었다.
  • [12] 물론 이는 불교의 폐단이라기 보다는 타락한 종교의 폐단이라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 [13] 다른 소리지만 그래서 조선 후기의 천주교가 유학자들에게 극딜을 당했다. 유학자 입장에서 보면 이건 뭐 불교 시즌 2였으니까. 다만 제사 문제만 없었다면 천주교는 그럭저럭 조선에 융화될 수 있었을 것이다. 표면적으론 불교를 극딜했던 조선의 선비들이지만 그들도 죽을 때가 되면 불교의 승려들을 찾는 경우가 많았고, 백성의 종교에 대한 수요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
  • [14] 하지만 유학의 관점이 크게 변하지 않았으니 같은 논리로 비판을 한 것이고, 또한 이 논리가 크게 틀렸다고 볼 수도 없다. 아니 현대의 회의주의적인 관점으로도 불씨잡변과 같은 맥락에서 불교를 비판할 수 있다. 사실 불교에서 수행과 그를 뒷바침하는 철학적인 텍스트를 거세한다면 다분히 비의적이고 종교적이다. 그리고 유교는 비의적이고 종교적인 것에 대해서 지극히 배타적이다.
  • [15] 오늘날의 서울 종로구 한국일보 사옥 주변. 경복궁 동십자각 건너편 일대다. 정도전이 최후를 맞은 곳.
  • [16] 한성부를 관할하는 판윤이라는 말로써, 요즘으로 치면 대략 서울시장+서울 고등 법원장+서울 고등 검찰청장 정도에 해당함.
  • [17] 다만 적어도 태종은 그를 종친모해죄로 몰았고 정적으로 생각했지, 적어도 역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역적으로 몰았더라면 삼족을 멸했을텐데 그의 후손이 이어져오고 있기 떄문이다. 사실 태종만 그렇게 생각한게 아니라 태종의 숙부인 의안대군 이화1차 왕자의 난 당시에 단순한 집안싸움이라고 일축했던 사례가 있었다.그리고 묘하게 태종은 자기가 죽인 정몽주도 직접 복권시킨 전례가 있다.묘하게 관대한 태종(...)그러면서도 자신을 도운 공신은 모두 죽였다카더라. 좋은 공신은 죽은 공신뿐.
  • [18] 신숙주가 정도전의 손자였던 정문형과 친분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 [19] 정몽주 본인은 고려의 충신으로 성리학에서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충신이었다. 따라서 그의 행적과 무관하게 이를 활용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 [20] 조선왕조실록 고종 2권, 2년 9월 10일 3번째기사
  • [21] 조선왕조실록 고종 4권, 4년 11월 16일 1번째기사
  • [22] 조선왕조실록 고종 7권, 7년 8월 21일 2번째기사
  • [23] 조선왕조실록 고종 8권, 8년 3월 16일 4번째기사
  • [24] 조선왕조실록 고종 9권, 9년 3월 23일 1번째기사
  • [25] 같은 족보에 부인 최씨의 묘는 양재역 상초리에 있다고 적혀 있다.
  • [26] 또는 몸통만 있고 머리가 없는 유골이라고도 한다. 자료마다 달라서 확실하지 않는데 어느 것이 정확한지 아시면 수정바람.
  • [27] 이 장면에서는 특히 NG가 많이 났었다고 한다. 김흥기의 대사나 연기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원인은 다름아닌 소음공해(...) 때문이다. 하필이면 대사를 하는 타이밍에 비행기가 휭~하고 날아가기도 하고 어디선가 자꾸 우렁차게 울어대는 염소 때문에 계속 NG가 나자 김흥기도 결국 대사를 하다 말고 "저 염소X끼!" 하면서 짜증을 내기까지 했다고. 소음공해 이외에도 어디선가 파리가 날아들기도 해서 NG가 많이 나자 나중에는 "참으로 죽기 힘들구나"라는 말을 사극체 그대로 드립치기도 했다. 방영 이후 특집편의 NG기록을 보면 정말 죽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
  • [28] 역사상 세종은 정도전에 대해 이렇다할 언급이나 평가를 내린 적은 없지만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고 생각했으며 의정부서사제를 실시하여 재상중심체제를 구현한 세종의 정치 이념이나 사상 등을 보면 궁극적으로 정도전의 민본주의 사상과 일맥상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