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0년 성균관박사로 있으면서 정몽주 등 교관과 매일같이 명륜당에서 성리학을 수업, 강론했으며, 이듬 해 태상박사(太常博士)에 임명되고 5년간 전선(銓選 : 인사행정)을 관장하였다. 1375년(우왕 1) 권신 이인임(李仁任)·경복흥(慶復興) 등의 친원배명정책에 반대해 북원(北元) 사신을 맞이하는 문제로 권신 세력과 맞서다가 전라도 나주목 회진현(會津縣) 관하의 거평부곡(居平部曲)에 유배되었다.
1384년 전교부령(典校副令)으로서 성절사 정몽주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다음 해 성균좨주·지제교·남양부사를 역임하고,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관대사성으로 승진하였다. 1388년 6월에 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 일파가 실권을 장악하자 밀직부사로 승진해 조준(趙浚) 등과 함께 전제개혁안을 적극 건의하고, 조민수(曺敏修) 등 구세력을 제거해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닦았다.
그러나 구세력의 탄핵으로 봉화에 유배되었다가 이듬 해 봄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중에 낙마한 사건을 계기로 고려 왕조를 옹호하던 정몽주·김진양(金震陽)·서견(徐甄) 등의 탄핵을 받아 보주(甫州 : 지금의 예천)의 감옥에 투옥되었다. 이유는 “가풍이 부정(不正)하고 파계(派系)가 불명(不明)하다.”든가, "천지(賤地)에서 기신(起身)해 당사(堂司)의 자리에 몰래 앉아 무수한 죄를 지었다.”는 것으로, 특히 신분적 약점이 많이 거론되었다.
같은 해 겨울에 사은 겸 정조사로서 두 번째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3년(태조 2)<문덕곡 文德曲>·<몽금척 蒙金尺>·<수보록 受寶籙> 등 3편의 악사(樂詞)를 지어 바쳐 이성계의 창업을 찬송했으며, 문하시랑찬성사로서 동북면도안무사(東北面都安撫使)가 되어 동북면 개척에도 힘을 기울였다.
1395년정총(鄭摠) 등과 더불어 ≪고려국사 高麗國史≫ 37권을 지어 올리고, ≪감사요약 監司要約≫을 저술해 전라도관찰사 이무(李茂)에게 주었으며, ≪경제문감 經濟文鑑≫을 저술해 재상·대간·수령·무관의 직책을 밝혔다. 1396년 이른바 표전문(表箋文) 문제로 명나라에서 이를 트집잡아 내정을 간섭하자, 전부터 추진해오던 요동(遼東) 수복운동에 박차를 가해 군량미확보, 진법훈련(陣法訓鍊), 사병혁파를 적극 추진하였다.
9월에 진법훈련을 강화하면서 요동 수복계획을 추진하던 중 이방원의 기습을 받아 희생되었다. 죄명은 세자 방석(芳碩)에 당부(黨附)해 종사를 위태롭게 했다는 것이었다. 이를 공소난(恭昭難)·무인난(戊寅難) 혹은 제1차 왕자의 난이라고 한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노약 노비(老弱奴婢) 약간 명을 상속받았을 뿐, 오랫동안 유배·유랑 생활을 보내면서 곤궁에 시달렸다. 더욱이, 부계혈통은 향리(鄕吏)의 후예로서 아버지 때에 이르러 비로소 중앙 관료의 벼슬다운 벼슬을 했으며, 어머니와 아내가 모두 연안 차씨(延安車氏)공윤(公胤)의 외예 얼속(外裔孽屬)이었다. 특히 모계에 노비의 피가 섞여 있었다.
그가 청·장년의 시기를 맞았던 고려 말기는 밖으로 왜구·홍건적의 침구로 국내가 어수선했고, 안으로는 구가세족의 횡포로 정치기강이 무너지고 민생이 곤핍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9년간의 시련에 찬 유배·유랑 생활은 그로 하여금 애국적이며 애민적인 의식을 깊게 만들었으며, 그의 역성혁명운동은 이러한 개혁의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된다.
≪주자가례 朱子家禮≫라든가, ≪자치통감강목 資治通鑑綱目≫, 그리고 주자학에서 중요한 사회정책으로 간주되는 사창제(社倉制)·향약(鄕約) 등에 관해서는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또 주자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이단시하는 한당(漢唐)의 공리적 사상(功利的思想)이나 부국강병에 유용한 제도·문물에 대해서는 포용적이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층신앙(基層信仰)으로 굳어진 불교·도교·참설(讖說) 등을 부분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그의 사상체계는 기본적으로 주자학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음성적으로 이단을 포용하는 절충성을 띠었음이 특색이다.
≪경제문감≫은 재상·감사·대간·수령·무관의 직책을 차례로 논하고, ≪경제문감별집≫에서는 군주의 도리를 밝혔다. 그가 이상으로 생각하는 정치제도는 재상을 최고실권자로 하여 권력과 직분이 분화된 합리적인 관료지배체제이며, 그 통치권이 백성을 위해 기능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민본사상을 강조하였다. 통치자가 민심을 잃었을 때에는 물리적인 힘에 의해 교체될 수 있다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을 긍정했고, 실제로 혁명 이론에 입각해 왕조 교체를 수행하였다.
한편, 여말에 나라가 가난하고 민생이 피폐하였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농업생산력의 증대와 토지균분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해결책으로서 민구수(民口數)에 따른 토지재분배와 공전제(公田制) 및 10분의 1세의 확립, 공(工)·상(商)·염(鹽)·광(鑛)·산장(山場)·수량(水梁)의 국가 경영을 실현시키고자 하였다.
저서로는 위에 적은 것 이외에 경세(經世)에 관한 것으로 ≪경제의론 經濟議論≫·≪감사요약 監司要約≫이 있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고, 고려 역사를 편년체로 엮은 ≪고려국사≫가 있다. 이 책은 뒤에 김종서(金宗瑞) 등이 찬한 ≪고려사절요≫의 모체가 되었으나 지금 전하지 않는다.
그는 또 많은 악사(樂詞)를 지어 <문덕곡>·<몽금척>·<수보록>·<납씨곡 納氏曲>·<정동방곡 靖東方曲> 등을 남겼으며, 회진현의 유배시절과 삼각산·부평·김포·영주 등지에서의 방랑시절에 쓴 수많은 시문들이 지금 ≪삼봉집≫에 전해지고 있다.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태조실록(太祖實錄)』
- 『태종실록(太宗實錄)』
- 『삼봉집(三峰集)』
- 『해동잡록(海東雜錄)』
- 『대동기문(大東奇聞)』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정도전(鄭道傳)사상의 연구」(한영우, 『한국문화연구총서』 15, 1973)
- 「삼봉인물고(三峰人物考)」(이상백, 『진단학보』 2·3, 1935)
- 「정삼봉(鄭三峰)의 유불관(儒佛觀)」(이병도, 『백성욱박사회갑기념논총』, 1959)
- 「정도전(鄭道傳)의 벽불론(闢佛論)비판」(이종익, 『불교학보』 8, 1971)
- 「정도전(鄭道傳)의 벽불(闢佛)사상과 그 논리적성격」(금장태, 『민태식박사고희논총』, 1972)
- 「고려국사의 편찬내용과 사론(史論)」(변태섭, 『학술논총』 3, 1979)
- 「정도전(鄭道傳)의 인간과 사회사상」(한영우, 『진단학보』 50, 1980)
- 「삼봉집(三峰集)에 나타난 정도전(鄭道傳)의 병제개혁안(兵制改革案)의 성격」(정두희, 『진단학보』 50, 1980)
- 「정도전(鄭道傳) 성리학의 특성과 그 평가문제」(윤사순, 『진단학보』 50, 1980)
- 「三峰集編刊考」(末松保和, 『朝鮮學報』 1, 1951)
정도전 [鄭道傳]고려·조선 정치가·학자 | 브리태니커
정도전 요약정보
태어난 때 | 1342(충혜왕 3) |
---|---|
죽은 때 | 1398(태조 7). |
소속 국가 | 한국 |
소속 국가 부속정보 | 고려·조선 |
직업 | 정치가·학자 |
고려말 조선초의 정치가·학자.
개요
조선 개국의 핵심 주역으로서 고려 말기의 사회모순을 해결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하여 새로운 왕조를 개창했다. 각종 제도의 개혁과 정비를 통해 조선왕조 500년의 기틀을 다져놓았다.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峰).
고려말의 활동
향리집안 출신으로 고조할아버지는 봉화호장 공미(公美)이고, 아버지는 중앙에서 벼슬하여 형부상서를 지낸 운경(云敬)이다. 어머니는 우연(禹延)의 딸로서 노비의 피가 섞여 있었다. 어려서 경상북도 영주에서 살다가, 아버지를 따라 개경에 와서 아버지의 친구인 이곡(李穀)의 아들 색(穡)의 문하에서 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이존오(李存吾)·김구용(金九容)·김제안(金齊顔)·박의중(朴宜中)·윤소종(尹紹宗) 등과 함께 유학을 배웠다. 1360년(공민왕 9) 성균시(成均試), 1362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충주사록·전교주부·통례문지후 등을 지냈다. 1366년 아버지와 어머니가 연이어 죽자, 영주에 내려가 3년간 여묘(廬墓)하면서 지방 자제들과 동생들을 가르쳤다. 1370년 성균관이 중영(重營)되고 이색이 대사성이 되자, 성균박사가 되었다. 이듬해 태상박사가 되고, 이어 예의정랑이 되었다. 1374년 공민왕이 암살당하자 이 사실을 명나라에 고할 것을 주장하여 이인임(李仁任)의 미움을 받았다. 1375년(우왕 1) 성균사예·지제교가 되었으나, 이인임·경복흥(慶復興) 등이 친원정책(親元政策)으로 돌아가려 하고 원나라 사신이 명나라를 치기 위한 합동작전을 위해 오자, 이를 반대하고 관련되는 업무를 거부하다가 전라도 나주목 회진현 거평부곡(居平部曲)으로 귀양갔다. 1377년 고향으로 옮겨져 4년간 머물다가 유배가 완화되자 삼각산(三角山) 밑에 초려(草廬:三峰齋)를 지어 제자들에게 유학을 가르쳤다. 그러나 이곳 출신 재상(宰相)이 삼봉재를 헐어버려 제자들을 이끌고 부평부 남촌(南村)에 거주했으나 이곳에서도 재상 왕모(王某)가 별업(別業)을 만들기 위하여 헐어버려 다시 김포로 이사했다. 유배·유랑 기간에 그는 초라한 모옥(茅屋)에 살면서 향민(鄕民)과 사우(士友)에게 걸식하기도 하고 스스로 밭갈이도 했다.
1383년 함주(咸州) 막사로 동북면도지휘사 이성계(李成桂)를 찾아가 세상사를 논하고 그와 인연을 맺었다. 1384년 전교부령으로 있을 때 성절사 정몽주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가서 승습(承襲)과 시호(諡號)를 청했다. 이듬해 성균좨주(成均祭主)·지제교를 지내고, 1387년 남양부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고,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 이듬해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자, 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세워 밀직부사가 되었다. 조준(趙浚)·윤소종 등과 함께 전제개혁을 추진했는데, 전국의 토지를 공가(公家)에 귀속시켜 민구(民口)수에 따라 토지를 지급하려는 철저한 개혁을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스승인 이색과 친구인 정몽주와 의견이 달라 멀리하게 되었다. 1389년 11월 이성계·조준 등과 협의하여 우왕과 창왕 부자가 왕씨가 아니라는 이유로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즉위시켰다. 이 공으로 봉화현 충의군(忠義君)과 윤충논도좌명공신(輪忠論道佐命功臣)에 봉해지고, 삼사좌사(三司左使)가 되었으며 공신전 100결과 노비 10명을 받았다. 1390년 성절사 겸 변무사(聖節使兼辨誣使)로 명나라에 가서 윤이(尹彛)·이초(李初)가 이성계가 명을 치려한다고 모함한 것을 변명하고 돌아와 동판도평의사사사 겸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 1391년 삼군도총제부가 설치되자 우군총제사가 되어 이성계·조준과 함께 병권을 장악했다. 이어 개혁반대세력을 제거하려는 일환으로 성균관 학생들과 함께 척불(斥佛) 상소를 올려 불교 배척의 기치를 들고, 이색과 우현보(禹玄寶) 등을 신우(辛禑)·신창(辛昌) 옹립의 죄를 물어 처형할 것을 상소했다. 그해 9월 평양윤에 임명되었으나 반대세력들이 "가풍(家風)이 부정(不正)하고, 파계(派系)가 불명함에도 큰 벼슬을 받아 조정을 어지럽히고 있다"라고 탄핵하여 봉화로 유배당하고, 이어 나주로 옮겨졌으며 두 아들은 서인(庶人)이 되었다. 이듬해 봄 귀양에서 풀려나 영주로 돌아왔다.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하다가 낙마(落馬)하여 부상을 입자 이성계 세력을 제거하려는 정몽주 등에 의해 "천지(賤地)에서 기신(起身)하여 당사(堂司)의 자리를 도둑질했고, 천근(賤根)을 감추기 위해 본주(本主)를 제거하려고 모함했다"라는 탄핵을 받고 보주(甫州)의 감옥에 투옥되었으나 곧 풀려나 개경으로 소환되어 충의군에 봉해졌다.
조선개국과 개혁정치
1392년 4월 정몽주가 이방원(李芳遠)에게 살해되고 반대세력이 제거되자, 7월 조준·남은(南誾) 등과 함께 이성계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여 조선왕조를 개창했다. 개국직후 17조목의 편민사목(便民事目)에 관한 태조의 교지(敎旨)를 지어 새 왕조의 국정방향을 제시했다. 이어 개국공신 1등으로 문하시랑찬성사·동판도평의사사사·판호조사·겸판상서사사·보문각대학사·지경연예문춘추관사·겸의흥친군위절제사를 겸직하여 정권과 병권을 장악했다. 같은 해 10월 사은사 겸 계품사로 명나라에 가서 조선 건국의 당위성을 알렸다. 1393년(태조 2) 7월 문하시랑찬성사로 동북면도안무사가 되어 여진족을 회유했으며, 〈문덕곡 文德曲〉·〈몽금척 夢金尺〉·〈수보록 受寶〉 등의 악사(樂詞) 3편을 지어 왕에게 창업의 쉽지 않음과 수성(守成)의 어려움을 반성하게 하는 자료로 삼게 했다. 1394년 1월 판의흥삼군부사로 병권을 장악하여 병제개혁에 대한 상소를 올리고, 3월 경상·전라·양광 삼도도총제사가 되었다. 조선왕조의 제도와 예악(禮樂)의 기본구조를 세운 〈조선경국전 朝鮮經國典〉·부병제(府兵制)의 폐단을 논한 〈역대부병시위지제 歷代府兵侍衛之制〉를 찬진했다. 한편 태조가 세자로 책봉한 강비(康妃) 소생 방석(芳碩)의 세자이사(世子貳師)로 교육을 담당했다. 1394년 8월부터는 고려의 구신과 세족이 도사리고 있는 개경을 피해 새로운 도읍 건설을 추진하여, 서울의 궁궐과 문의 이름을 짓고 수도의 행정분할도 결정했다. 그해 〈심기리편 心氣理篇〉을 지어 불교·도교를 비판하고 유교가 실천 덕목을 중심으로 인간문제에 가장 충실하다는 점을 체계화했다. 1395년 1월 정총(鄭摠) 등과 함께 〈고려국사 高麗國史〉를, 6월에는 정치제도·재상·대관(臺官)·간관(諫官)·부병제도·감사(監司) 등의 임무와 실례를 논하고 방침을 제시한 〈경제문감 經濟文鑑〉을 찬진했다. 1396년 명나라에서 그가 추진하던 공료(攻遼)운동에 불안을 느껴 표전문(表箋文)을 트집 잡아 명나라에 입조(入朝)하라는 압력을 가했으나, 병을 이유로 거부했다. 1397년 사은사가 가지고 온 자문(咨文)에서 명나라는 그를 '화(禍)의 근원'이라고 했다. 그해 6월 요동정벌을 목적으로 진도(陣圖) 훈련을 하면서 왕에게 출병을 요청했으나 조준의 반대로 실행하지 못했다. 그해 12월 동북면도선무순찰사가 되어 주군(州郡)의 구획을 확정하고 성보(城堡)를 수리했으며 호구와 군관(軍官)을 점검했다. 또한 〈경제문감별집 經濟文鑑別集〉을 저술하여 군주의 도리를 제시했으며, 〈불씨잡변 佛氏雜辨〉을 저술하여 불교의 여러 이론을 비판했다. 1398년 진법 훈련을 강화하면서 요동정벌을 추진하고, 태조로 하여금 절제사를 혁파하여 관군(官軍)으로 합치고 왕자와 공신들이 나누어 맡고 있던 군사지휘권을 박탈하게 하고, 이방원을 전라도로, 이방번(李芳蕃)을 동북면으로 보내려 했으나, 8월 이방원 세력의 기습을 받아 방번·방석·남은·심효생(沈孝生) 등과 함께 살해되었다(→ 방원의 난). 이때 네 아들 가운데 유(游)가 살해되고, 담(湛)은 집에서 자살했다. 종친을 모해(謀害)했다는 죄명이 씌워졌다
정도전
(엔하위키미러
이름 | 정도전(鄭道傳) |
자 | 종지(宗之) |
호 | 삼봉(三峰) |
생몰연도 | 1342년(고려 충혜왕 복위 3년)[1] ~ 1398년(조선 태조 7년) 8월 26일 |
국적 | 고려→조선 |
시호 | 문헌(文憲) |
"백성(下民)은 지극히 약하지만 힘으로 위협할 수 없고 지극히 어리석지만 지혜로써 속일 수 없는 것이다. 백성(民)의 마음을 얻으면 백성(民)은 복종하지만 백성(民)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백성(民)은 인군(人君)을 버린다."
"옛날에 사해를 다스리며 천자가 관작을 설치하고 봉록을 지급한 것은 신하를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 백성을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성인의 동작과 시설, 명령, 법제는 그 하나하나가 반드시 백성에 근본을 둔 것이다. …(중략)…임금이 관리에게 책임을 지우는 것도 오로지 백성을 근본으로 한 것이며, 관리가 임금에게 보답하는 것도 하나같이 백성을 근본으로 한 것이었다. 이처럼 백성은 존중되었다." -출처는 모두 《조선경국전》
임금을 따라 동북면에 이르렀는데, 도전이 호령이 엄숙하고 군대가 정제된 것을 보고 나아와서 비밀히 말하였다.
"훌륭합니다. 이 군대로 무슨 일인들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
이에 임금이 말하였다.
"무엇을 이름인가?"
도전이 대답하였다.
"왜구를 동남방에서 치는 것을 이름입니다."[2]
개국할 즈음에 왕왕 취중에 가만히 이야기하였다.
"한 고조가 장자방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곧 한 고조를 쓴 것이다."[3]
무릇 임금을 도울 만한 것은 모의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마침내 큰 공업을 이루어 진실로 상등의 공훈이 되었던 것이다. —《태조실록》 7년 8월 26일 정도전 졸기.[4]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 문신 겸 학자, 사상가.
1 일대기 ¶
2 인물됨 ¶
대사헌 성석용(成石瑢) 등이 상언하였다. “전하께서 무신(武臣)들에게 《진도(陣圖)》를 강습하도록 명령한 지가 몇 해가 되었는데도, 절제사(節制使) 이하의 대소 원장(大小員將)들이 스스로 강습하지 아니하고 그 직책을 게을리 하오니, 그 양부(兩府)의 파직(罷職)된 전함(前銜)은 직첩(職牒)을 관품(官品)에 따라 수취(收取)하되 1등을 체강(遞降)시킬 것이며, 5품 이하의 관원은 태형을 집행하여 뒷사람을 감계(鑑戒)하게 하소서.” 임금이 말하였다. “절제사 남은·이지란(李之蘭)·장사길(張思吉) 등은 개국 공신(開國功臣)이고, 이천우(李天祐)는 지금 내갑사 제조(內甲士提調)가 되었으며, 의안백(義安伯) 이화(李和)·회안군(懷安君) 이방간(李芳幹)·익안군(益安君) 이방의(李芳毅)·무안군(撫安君) 이방번(李芳蕃)·영안군(寧安君) 양우(良祐)·영안군(永安君) 〈이방과(李芳果)〉【상왕(上王)의 예전 이름.】·순녕군(順寧君) 지(枝)·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정안군(靖安君) 〈이방원(李芳遠)〉【우리 전하(殿下)의 이름.】은 왕실(王室)의 지친(至親)이고, 유만수(柳曼殊)와 정신의(鄭臣義) 등은 원종 공신(原從功臣)이므로 모두 죄를 논의할 수 없으니, 그 당해 휘하 사람은 모두 각기 태형 50대씩을 치고, 이무(李茂)는 관직을 파면시킬 것이며, 외방(外方) 여러 진(鎭)의 절제사로서 《진도》를 익히지 않는 사람은 모두 곤장을 치게 하라.” 처음에 정도전과 남은이 임금을 날마다 뵈옵고 요동을 공격하기를 권고한 까닭으로 《진도》를 익히게 한 것이 이같이 급하게 하였다. 이보다 먼저 좌정승 조준이 휴가를 청하여 집에 돌아가 있으니, 정도전과 남은이 조준의 집에 나아가서 말하였다. “요동을 공격하는 일은 지금 이미 결정되었으니 공(公)은 다시 말하지 마십시오.” 조준이 말하였다. “내가 개국 원훈(開國元勳)의 반열(班列)에 있는데 어찌 전하를 저버림이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왕위에 오른 후로 국도(國都)를 옮겨 궁궐을 창건한 이유로써 백성이 토목(土木)의 역사에 시달려 인애(仁愛)의 은혜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원망이 극도에 이르고, 군량(軍糧)이 넉넉지 못하니, 어찌 그 원망하는 백성을 거느리고 가서 능히 일을 성취시킬 수 있겠습니까?” 또, 정도전에게 일렀다. “만일에 내가 각하(閣下)와 더불어 여러 도(道)의 백성을 거느리고 요동을 정벌한다면, 그들이 우리를 흘겨본 지가 오래 되었는데 어찌 즐거이 명령에 따르겠습니까? 나는 자신이 망하고 나라가 패망되는 일이 요동에 도착되기 전에 이르게 될까 염려됩니다. 임금의 병세가 한창 성하여 일을 시작할 수 없으니, 원컨대 여러분들은 내 말로써 임금에게 복명(復命)하기를 바라며, 임금의 병환이 나으면 내가 마땅히 친히 아뢰겠습니다.” - 태조 7년 8월 9일의 기록 |
2.1 토지개혁 ¶
"전하(이성계)께서는 잠저(潛邸·즉위하기 전에 거주하던 집)에 계실 때 친히 그 폐단을 보고 개탄스럽게 여기어 사전 혁파를 자기의 소임으로 정하였다. 그것은 대개 경내의 토지를 모두 몰수하여 국가에 귀속시키고 인구를 헤아려서 토지를 나누어주어서 옛날의 올바른 토지제도를 회복시키려고 한 것이었는데, 당시의 구가(舊家) 세족(世族)들이 자기들에게 불편한 까닭으로 입을 모아 비방하고 원망하면서 여러 가지로 방해하여, 이 백성들로 하여금 지극한 정치의 혜택을 입지 못하게 하였으니, 어찌 한탄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백성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일이 비록 옛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토지제도를 정제하여 1대의 전법을 삼았으니, 전조(前朝·고려)의 문란한 제도에 비하면 어찌 만배나 낫지 않겠는가?"('부전' <조선경국전>)
정도전은 이에 대해서 문제는 있으나 이전보다는 훨씬 나은 개혁이었다고 자평했다.
3 사상 ¶
"군자(君子)가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함은, 마치 좋은 색을 좋아하고 나쁜 냄새를 싫어함과 같아 모두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지 무엇을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번이라도 악명(惡名)이 있게 되면 그 마음에 부끄러워하기를 마치 시장에서 종아리를 맞는 듯이 여기니, 어찌 지옥설 때문에 악한 짓을 하지 않는다고 하겠습니까?" 하였더니, 그 중은 아무 말도 못하였다. 여기에 이 사실을 아울러 써서 그 설에 미혹되는 세상 사람들이 분변할 있도록 하고자 한다. |
4 최후 ¶
양조에 한결같이 공력을 다 기울여, 서책 속 교훈을 저버리지 않고 떳떳이 살아왔네. 삼십 년 긴 세월 쉬지 않고 이룬 공업, 송현방[15] 한 잔 술에 모두 허사가 되었구나. (操存省察兩加功 不負聖賢黃卷中 三十年來勤苦業 松亭一醉竟成空) -자조(自嘲: 스스로를 비웃다) |
5 졸기 ¶
정도전의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峰)이며, 본관은 안동 봉화이니, 형부 상서(刑部尙書) 정운경의 아들이다. 고려 왕조 공민왕 경자년에 성균시에 합격하고, 임인년에 진사에 합격하여 여러 번 옮겨서 통례문 지후(通禮門祗候)에 이르게 되었다. 병오년에 연달아 부모의 상을 당하여 여막을 짓고 상제를 마치니, 신해년에 불러서 태상 박사(太常博士)로 임명하였다. 공민왕이 친히 종묘에 제향하니, 도전이 도(圖)를 상고하여 악기를 제조하였다. 예의 정랑(禮儀正郞)·예문 응교(藝文應敎)로 옮겨서 성균 사예(成均司藝)로 승진되었다. 갑인년에 공민왕이 훙하여, 을묘년에 북원의 사자가 국경에 이르니, 도전이 말하였다. “선왕 께서 계책을 결정하여 명나라를 섬겼으니, 지금 원나라 사자를 맞이함은 옳지 못합니다. 더구나 원나라 사자가 우리에게 죄명을 가하여 용서하고자 하니, 그를 맞이할 수 있습니까?” 그때의 재상이 듣지 않으므로, 도전이 굳이 이를 말하다가, 노여움을 당하여 회진으로 폄직되었다. 갑자년에 하성절사(賀聖節使) 정몽주가 그를 천거하여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아 경사(京師)에 갔다가 돌아와서 성균 사성(成均司成)에 임명되었다. 정묘년에 외직을 자원하여 남양 부사(南陽府使)가 되었다. 무진년에 임금께서 국정을 맡게 되매 불러서 대사성(大司成)에 임명하였다. 여러 번 계책을 올려 밀직 제학(密直提學)과 지공거(知貢擧)로 승진되고, 십학 도제조(十學都提調)가 되어 상명(詳明)·태일(太一) 등 여러 산법을 가르치고, 예문 제학(藝文提學)으로 옮겨서 《진맥도결》을 지었다. 기사년에 조준 등과 더불어 사전을 혁파하기를 청하였다. 공양왕이 왕위에 오르매, 삼사 우사(三司右使)에 승진되고 중흥 공신으로써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졌다. 경오년에 정당 문학(政堂文學)에 승진되고, 윤이(尹彝)·이초(李初)의 무망한 옥사가 일어나자, 도전이 그 의논을 극력 주장하였으나, 정몽주가 임금에게 말하여 이 일을 그만 중지하게 하였다. 도전이 계품사(計稟使)로써 경사(京師)에 갔다. 신미년에 형벌과 상여의 잘되고 잘못된 점에 관하여 말씀을 올리니, 공양왕이 능히 용납하지 못하여 나주로 폄직되었으나, 임신년에 불리어 돌아왔는데, 남은 등과 더불어 계책을 정하여 임금을 추대하였다. 임금께서 왕위에 오르매, 공훈을 책정하여 1등으로 삼고 문하 시랑찬성사 겸 판상서사사(門下侍郞贊成事兼判尙瑞司事)를 가하였다. 또 계품사(計稟使)로써 경사(京師)에 갔다가 돌아와서 판삼사사 겸 판삼군부사(判三司事兼判三軍府事)로 승진되고, 삼도 도통사(三道都統使)가 되어 《진도(陣圖)》·《수수도(蒐狩圖)》·《경국전》·《경제문감》을 제작하고, 또 악가를 지었으니, 몽금척(夢金尺)·수보록(受寶籙)·문덕(文德)·납씨(納氏)·정동방(靖東方) 등의 곡이 있었다. 정총 등과 더불어 《고려국사》를 수찬하였다. 봉화백(奉化伯)으로 봉해지고, 관등은 특별히 숭록 대부(崇祿大夫)로 승진되었다. 병자년에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처음으로 초장(初場) 강경(講經)의 법을 시행하였다. 정축년에 동북면을 선무하여 주군(州郡)의 이름을 정하고 공주성(孔州城)을 수축하였다. 무인년 봄에 돌아오니, 임금이 맞이해 위로하고 후하게 대우하였다. 도전은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많은 책을 널리 보아 의논이 해박하였으며, 항상 후생을 교훈하고 이단을 배척하는 일로써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일찍이 곤궁하게 거처하면서도 한가하게 처하여 스스로 문무의 재간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임금을 따라 동북면에 이르렀는데, 도전이 호령이 엄숙하고 군대가 정제된 것을 보고 나아와서 비밀히 말하였다. “훌륭합니다. 이 군대로 무슨 일인들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 이에 임금이 말하였다. “무엇을 이름인가?” 도전이 대답하였다. “왜구를 동남방에서 치는 것을 이름입니다.” 군영 앞에 늙은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도전이 소나무 위에 시를 남기겠다 하고서 껍질을 벗기고 썼다. 그 시는 이러하였다. “아득한 세월 한 주의 소나무 몇만 겹의 청산에서 생장하였네 다른 해에 서로 볼 수 있을런지 인간은 살다 보면 문득 지난 일이네.” 개국할 즈음에 왕왕 취중에 가만히 이야기하였다. “한 고조가 장자방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곧 한 고조를 쓴 것이다.” 무릇 임금을 도울 만한 것은 모의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마침내 큰 공업을 이루어 진실로 상등의 공훈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도량이 좁고 시기가 많았으며, 또한 겁이 많아서 반드시 자기보다 나은 사람들을 해쳐서 그 묵은 감정을 보복하고자 하여, 매양 임금에게 사람을 죽여 위엄을 세우기를 권고하였으나, 임금은 모두 듣지 않았다. 그가 찬술한 《고려국사》는 공민왕 이후에는 가필하고 삭제한 것이 사실대로 하지 않은 것이 많으니, 식견이 있는 사람들이 이를 그르게 여겼다. 처음에 도전이 한산(韓山) 이색을 스승으로 섬기고 오천(烏川) 정몽주와 성산(星山) 이숭인과 친구가 되어 친밀한 우정이 실제로 깊었는데, 후에 조준과 교제하고자 하여 세 사람을 참소하고 헐뜯어 원수가 되었다. 또 외조부 우연(禹延)의 장인인 김진(金戩)이 일찍이 중이 되어 종 수이(樹伊)의 아내를 몰래 간통하여 딸 하나를 낳으니, 이가 도전의 외조모 이었는데, 우현보의 자손이 김진(金戩)의 인척인 이유로써 그 내력을 자세히 듣고 있었다. 도전이 당초에 관직에 임명될 적에, 고신(告身)이 지체된 것을 우현보의 자손이 그 내력을 남에게 알려서 그렇게 된 것이라 생각하여 그 원망을 쌓아 두더니, 그가 뜻대로 되매 반드시 현보의 한 집안을 무함하여 그 죄를 만들어 내고자 하여, 몰래 황거정 등을 사주하여 그 세 아들과 이숭인 등 5인을 죽였으며, 이에 남은 등과 더불어 어린 서자의 세력을 믿고 자기의 뜻을 마음대로 행하고자 하여 종친을 해치려고 모의하다가, 자신과 세 아들이 모두 죽음에 이르렀다. |
다만 정도전의 출신에 관한 실록의 기록은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방원 세력이 정도전의 출신을 문제삼고 왕자의 난을 정당화 하기 위해 일부러 종의 자식으로 교묘하게 조작하였다는 것이다. 실록의 왜곡을 지적하는 이들은 정도전의 아버지인 정운경의 행장에는 외조부의 이름을 영천 우씨 우연(禹淵)으로 적었지만 실록에서는 단양 우씨 우연(禹延)으로 적어 한자가 다르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관련기사
6 후일담 ¶
- 1865년(고종 2년)에 대왕대비가 정도전의 훈봉(勳封)을 회복해 주고 시호(諡號)를 내리며 봉사손(奉祀孫)의 이름을 물어서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으로 의망하여 들이도록 전교하였다.[20]
- 1867년(고종 4년)에 고종이 경복궁에서 근정전에 앉아서 공식적으로 정도전의 업적을 찬양하면서 정도전에 대한 사면을 반포하였다.[21]
- 1870년(고종 7년) 예조에서 정도전 16대손 정응기(鄭應夔)를 사손으로 정할 것을 청하여 고종이 윤허하였다.[22]
- 1870년 정도전에게 문헌공(文憲公)이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23]
- 1872년(고종 9년)정도전의 묘에 지방관을 보내서 제사를 지내게 하였는데 무덤이 없어서 후손들이 신주에 제사를 받겠다고 하여 예조에서 고종에게 아뢰자 고종이 신주에 제사를 드리라고 하교하였다.[24]
7 묘소 ¶
8 사극에서 ¶
9 기타 ¶
- [1] 이전에는 1337년생 설과 1342년생 설로 나뉘어져 있었지만 현재 학계에서는 1342년생 설을 정설로 보고 있다.
- [2] 태조 7년 8월 26일 정도전의 졸기에 기록된 이성계와 정도전의 첫 대면 당시. 정말 의미심장한 만남이 아닐 수 없다. 드라마 《정도전》 16회 방송분에 이 장면이 나온다.
- [3] 그의 큰 배포와 야망이 잘 드러나는 말이다.
- [4] 위의 기사 출처도 동일하다.
- [5] 혹은 충청북도 단양군 출신으로도 알려져 있다.
- [6] 다만 이 부분은 실록에서도 앞뒤가 안 맞는 대표적인 부분이다. 이방원 집권 이후 이미지 왜곡을 위해서 넣었다고 보는게 맞을지도.
- [7] 이런 얘기까지 나올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지만 후일 그는 유배를 가서 정도전이 보낸 이한테 장살당한다. 그것도 이성계는 살려주려고 굳이 장을 치는 것으로 형을 감했는데도 불구하고 정도전이 몰래 남은과 짜고 때려죽인 것. 이 사건은 후에 다시 조사되어 정도전과 남은이 사후에 다시 비난받는 이유가 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이숭인을 장살한 것은 정치적 이유보다 그가 자신보다 문재가 뛰어나서였다는 말이 있다.
- [8] 다만 이것은 여말 신진사대부라면 드물지 않은 부분이었다.
- [9] 주원장은 사병 혁파 같은 조선의 군제 개혁이 명을 공격하려는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고 그 중심에 선 정도전을 상당히 위험한 인물로 여겼다. 조선에서 사신이 올 때 정도전파는 억류하거나 죽였고 이방원파는 친근히 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 [10] 주원장은 조선을 승인하긴 했지만 이 얘기를 듣고 왕을 상징하는 금인과 고명을 보내주지 않았다. 결국 이성계는 주원장이 금인과 고명을 보내줄 때까지 '조선국왕' 호칭을 쓸 수 없었고(...) 한동안 고려태조 왕건시절부터 쓰던 임시 칭호인 '권지고려국왕사(權知高麗國王事)'라는 칭호를 써야 했다. 안습.
- [11] 정도전은 풍수지리 같은 것도 술수라며 믿지 않고 있었다.
- [12] 물론 이는 불교의 폐단이라기 보다는 타락한 종교의 폐단이라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 [13] 다른 소리지만 그래서 조선 후기의 천주교가 유학자들에게 극딜을 당했다. 유학자 입장에서 보면 이건 뭐 불교 시즌 2였으니까. 다만 제사 문제만 없었다면 천주교는 그럭저럭 조선에 융화될 수 있었을 것이다. 표면적으론 불교를 극딜했던 조선의 선비들이지만 그들도 죽을 때가 되면 불교의 승려들을 찾는 경우가 많았고, 백성의 종교에 대한 수요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
- [14] 하지만 유학의 관점이 크게 변하지 않았으니 같은 논리로 비판을 한 것이고, 또한 이 논리가 크게 틀렸다고 볼 수도 없다. 아니 현대의 회의주의적인 관점으로도 불씨잡변과 같은 맥락에서 불교를 비판할 수 있다. 사실 불교에서 수행과 그를 뒷바침하는 철학적인 텍스트를 거세한다면 다분히 비의적이고 종교적이다. 그리고 유교는 비의적이고 종교적인 것에 대해서 지극히 배타적이다.
- [15] 오늘날의 서울 종로구 한국일보 사옥 주변. 경복궁 동십자각 건너편 일대다. 정도전이 최후를 맞은 곳.
- [16] 한성부를 관할하는 판윤이라는 말로써, 요즘으로 치면 대략 서울시장+서울 고등 법원장+서울 고등 검찰청장 정도에 해당함.
- [17] 다만 적어도 태종은 그를 종친모해죄로 몰았고 정적으로 생각했지, 적어도 역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역적으로 몰았더라면 삼족을 멸했을텐데 그의 후손이 이어져오고 있기 떄문이다. 사실 태종만 그렇게 생각한게 아니라 태종의 숙부인 의안대군 이화도 1차 왕자의 난 당시에 단순한 집안싸움이라고 일축했던 사례가 있었다.그리고 묘하게 태종은 자기가 죽인 정몽주도 직접 복권시킨 전례가 있다.묘하게 관대한 태종(...)
그러면서도 자신을 도운 공신은 모두 죽였다카더라. 좋은 공신은 죽은 공신뿐. - [18] 신숙주가 정도전의 손자였던 정문형과 친분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 [19] 정몽주 본인은 고려의 충신으로 성리학에서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충신이었다. 따라서 그의 행적과 무관하게 이를 활용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 [20] 조선왕조실록 고종 2권, 2년 9월 10일 3번째기사
- [21] 조선왕조실록 고종 4권, 4년 11월 16일 1번째기사
- [22] 조선왕조실록 고종 7권, 7년 8월 21일 2번째기사
- [23] 조선왕조실록 고종 8권, 8년 3월 16일 4번째기사
- [24] 조선왕조실록 고종 9권, 9년 3월 23일 1번째기사
- [25] 같은 족보에 부인 최씨의 묘는 양재역 상초리에 있다고 적혀 있다.
- [26] 또는 몸통만 있고 머리가 없는 유골이라고도 한다. 자료마다 달라서 확실하지 않는데 어느 것이 정확한지 아시면 수정바람.
- [27] 이 장면에서는 특히 NG가 많이 났었다고 한다. 김흥기의 대사나 연기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원인은 다름아닌 소음공해(...) 때문이다. 하필이면 대사를 하는 타이밍에 비행기가 휭~하고 날아가기도 하고 어디선가 자꾸 우렁차게 울어대는 염소 때문에 계속 NG가 나자 김흥기도 결국 대사를 하다 말고 "저 염소X끼!" 하면서 짜증을 내기까지 했다고. 소음공해 이외에도 어디선가 파리가 날아들기도 해서 NG가 많이 나자 나중에는 "참으로 죽기 힘들구나"라는 말을 사극체 그대로 드립치기도 했다. 방영 이후 특집편의 NG기록을 보면 정말 죽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
- [28] 역사상 세종은 정도전에 대해 이렇다할 언급이나 평가를 내린 적은 없지만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고 생각했으며 의정부서사제를 실시하여 재상중심체제를 구현한 세종의 정치 이념이나 사상 등을 보면 궁극적으로 정도전의 민본주의 사상과 일맥상통한다.
'역사 바로알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용헌의 야설천하] ⑥ 공자철학의 혁명적 해석 주대환 (중앙일보 2014.06.06 20:23) (0) | 2014.06.06 |
---|---|
고려대장경 '밀교대장' 발견 (한국일보 2014.05.16 21:45:33) (0) | 2014.05.24 |
"조선 왕, 오전 5시 신하 만나" "미국 대통령도 그렇다" (중앙일보 2014.04.26 09:56) (0) | 2014.04.26 |
[Weekly BIZ] 절망서 革命 이룬 정도전처럼… 수퍼 기업 되려면 위기의식 있어야 (조선일보 2014.04.11 14:31) (0) | 2014.04.13 |
압록강 가운데 자리한 섬 위화도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6 - 북한, 2012.10.5, 다음생각) (0) | 2014.04.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