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헌의 야설천하] ⑥ 공자철학의 혁명적 해석 주대환
공자는 좌파 정당의 리더, ‘예악’으로 2천 년 집권당 이끌었다
주대환은 1973년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데모를 시작하여 지금까지 40년을 좌파 운동권으로 살아온 사람이다. 진보정당 건설을 위해 일관되게 노력했지만 남은 것은 일견 적수공권(赤手空拳)의 초라한 여생. 그가 공자의 삶에서 깨닫고 길어 올린 동병상련의 인생관, 변혁의 세계관은 무엇인가?
<논어>는 유교문화권의 성경이다. 서양에 <바이블>이 있다면 아시아에 <논어>가 있었던 것이다. 지난 2천 년간 <논어>는 아무나 함부로 해석할 수 없었다. 성경을 창의적으로 해석하면 이단이라는 죄를 뒤집어 쓸 수 있었다. 조선조에서는 <논어>보다 한참 아래인 주자의 말씀도 함부로 해석할 수 없었다.
조선후기 윤휴가 주자 말씀을 자기 스타일대로 해석하다가 사형당했다.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렸던 것이다. 주자 말씀도 그러한데 하물며 공자말씀을 어떻게 함부로 건드리겠는가. 그러다 보니 <논어>는 체제를 유지하는 이데올로기 내지는 기득권층의 이익을 은연 중에 옹호하는 ‘여당 철학(與黨哲學)’으로 항상 인식된 측면이 있다.
21세기에 들어와서야 비로서 <논어>를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 해석학적 지평이 이제야 처음으로 열린 것이다. 해석학적 지평이 열린 시대에 나온 결과물 가운데 하나가 주대환(周大煥·61) 선생이 최근에 펴낸 <좌파논어>(나무)다. <논어>를 좌파의 입장에서 해석한 책이다.
필자는 이 책을 읽고 깊이 공감했다. 그동안 나온 <논어>에 대한 여러 주석본과는 분명하게 다른 관점이 있었고, 이 다른 관점이 필자에게 공감을 주었다. 그 공감의 원인이 무엇일까? 한마디로 <논어>는 고생을 해봐야 그 속내를 알 수 있는 경전이라는 점이다.
삶의 신산(辛酸), 즉 피·땀·눈물이라는 세 가지 액체를 몇 바가지씩 흘려봐야만 <논어>의 행간에서 진짜 의미를 포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저자인 주대환이 보여주었다. 주대환은 1973년 서울대학교에 들어가자마자 데모를 시작하여 지금까지 40년을 좌파 운동권으로 살아온 사람이다. 형사들의 추적을 피해서 도피생활도 해보았고, 감옥에도 몇 번씩 들락거렸고, 동지들과 같이 울기도 하고 결별도 하면서 쓰라린 상처를 받았다.
선거에 나가서 세 번이나 떨어져 망신도 당해보았고, 돈이 없어서 쩔쩔 매는 가난에 시달린 삶을 살아왔다. 그러면서도 당대의 좌장급 좌파 이론가이자 지식인으로서 먹물의 자존심을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팔자다. 환갑 나이가 되었지만 남은 것은 무엇인가? 그는 40년을 일관되게 노력했지만 남은 것은 적수공권(赤手空拳). 돈도 없고 지위도 없고 알아주는 사람도 별로 없다. 환갑의 고개에서 달관(達觀)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좌파논어>가 한 권 남았다.
달관의 인생관이 낳은 책 <좌파논어>
필자는 그동안에 주로 산에서 도를 닦은 도사들을 주로 많이 만났다. 유·불·도의 고수들이거나, 또는 풍수·명리학·족보와 같은 분야의 전문가들과 많이 어울렸고, 이들과 대담을 나누는 것이 삶의 취미이자 내공 쌓는 방법이었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좌파 사상가와 대화를 하게 됐다.
좌파 분야는 생소한 대화였다. 난류와 한류가 만나는 곳에 고기가 많이 산다고 들었다. 내가 알기로 ‘左’를 뜯어보면 ‘工’자가 들어 있다. 좌파는 공부하는 파당이라는 의미로 필자는 해석한다. 右는 무엇인가. ‘口’자가 들어 있다. 입 구(口)다. 먹는 문제에 신경 쓰는 파당이 아닌가.
그래서 밥상머리에서 숟가락을 들어 밥을 먹을 때는 오른손을 사용해야 한다고 교육을 받았던 것 같다. 왼손으로 숟가락을 집는 것은 유교문화권에서 금기시했다. 왼손은 공부하는 손이다. 밥도 중요하지만 공부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같은 정승급이라도 우의정보다는 좌의정이 한 급 더 높은 위계로 여겨져왔다. 左는 陽을 상징한다. 右는 陰을 상징한다. 동양의 지남철 배치에서 보자면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인군남면(人君南面)이라 하던가. 이 상태에서 보면 동쪽이 좌측에 해당한다.
아침에 해는 좌측에서 뜨는 것으로 보인다. 양기는 왼쪽에 있다고 여겼다. 우측은 서쪽이다. 석양이 지는 방위다. 우는 음이다. 좌파야 말로 공부하는 당파다. 주대환 선생의 ‘사회민주주의연대’ 사무실인 서울 가회동의 ‘북촌학당(北村學堂)’에서 필자가 3일간 숙박하며 나눈 대화 내용을 대강 정리해 보았다. <좌파논어>에 이미 정리되어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공자는 좌파당을 만든 사람으로 볼 수 있단 말인가? 당(黨)을 만들고 당원들 간에 분쟁을 일으키지 않고 원만하게 지낸다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인가?
“그렇다고 본다. 공자는 흔히 정치가로서 실패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너무 이상적이어서 실패했다. 당시 현실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는 이상적인 정책을 내걸었다는 점에서 좌파라고 볼 수 있다. 이상주의자 성향을 가진 좌파의 특징이 풍찬노숙(風餐露宿)이다. 고생바가지다. 공자는 풍찬노숙의 고생바가지 삶을 살았으니 좌파가 분명하다. 그러나 당을 만드는 데는 성공했다. 동아시아에서 유가(儒家)가 2천 년 가까운 세월 동안 집권당을 한 것 아닌가. 공자 개인은 권력을 잡는 데 실패했지만 당을 만드는 데는 성공한 셈이다. 나는 평생 당을 만들고자 분주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공자로부터 배울 게 많은 인생이다. 나 자신을 반성해야 한다.”
공자가 당을 만드는 데 성공한 비결은 뭐라고 보는가?
“예(禮)와 악(樂)에 있었다고 본다. ‘예’는 동지들 사이에 인간관계를 오래 유지하는 데서 효과를 발휘했다. ‘악’은 동지들 개개인이 분노와 소외감을 스스로 달래는 데서 효과를 발휘했다. 예와 악이 당장에 정권을 잡는 데는 크게 도움이 안 되었지만, 동지들 간의 집단, 즉 당을 만들고 유지하는 데에는 큰 효과를 발휘했다고 본다. 유가는 사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에서도 다른 학파에 비해 깊지 않았고, 때로는 비현실적인 정책을 주장했다.
정책적 비전이나 콘텐트는 빈약했던 것 같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자 유가가 천하의 이데올로기적 패권을 쥐었다. 바로 예와 악, 인(仁), 군자와 같은 개념을 강조하여 당을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 아닌가? 진보정당 만들기에 실패한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나와 동지들에게 예와 악이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분별이 없어야 큰 세력으로 성장한다
예와 악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당원들 간의 유대를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는가?
“예는 개인들이 서로 사랑·증오·슬픔·분노 등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일정한 형식을 가하여 그 감정을 규격화하는 효과가 있었다. 규격화함으로써 쓸데없는 오버를 줄여주었다. 순간적인 감정폭발을 제어해주는 의식과 제도적인 장치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야 서로 상처를 덜 받는다. 그래야만 인간관계가 오래 유지된다. 악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감정을 다스리고 절제하는 데 꼭 필요하다. 다 함께 예의 의식을 행하고 악을 연주하는 집단적인 행위를 통해서 공동체의 결속을 유지하고 소속감을 확인했다.
원래 공자가 되살리려고 노력한 ‘예악’은 성공하지 못했다. 주나라의 봉건체제를 되살려내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전혀 다른 부분에서 커다란 효과가 나타났다. 공자 학단(學團) 내부에서 효과가 나타났다. 유가는 세월이 흐르면서 나타나는 내부분열을 잘 극복했다. ‘예악’의 효과 때문이다. 서로 예의를 잘 지켰다. 돈과 권력은 없었지만 음악으로 자신의 소외감이나 분노를 달랠 줄 알았다.
분열이 없다 보니 나중에 커다란 세력으로 성장했다. 마침내 천하의 이데올로기적 패권을 잡을 수 있었다. 한국의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도 ‘예악’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논어>에는 동지들 서로간에 사랑과 연대의 감정, 이해심과 관대함을 포함하는 인(仁)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주대환은 <논어>의 유명한 첫 구절인 ‘學而時習之 不亦悅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 不亦君子乎’을 좌파적으로 해석한다. 이는 공자가 자기의 생활을 한마디로 압축해 정리하고 군자로서 자부심을 드러낸 대목이다. 스스로를 위로하는 대목이라고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군자는 요즘의 좌파적인 스타일의 삶이 들어 있다고 본다.
즉 언제 한번 권력을 잡을지 기약도 없고, 또 가난하여 먹고 살기에도 바쁘지만 틈틈이 공부한다. 주류 여당 혹은 집권 다수파에 밀려 소수이긴 하지만 나름 훗날을 도모하며 의논하는 동지들이 있으니, 남들이 뭐라 하든 상관하지 않는 “나는 군자다”라는 선언이라는 것이다. 실패한 정치가인 공자는 자존 선언을 하기 위해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
“나는 계속 공부하고, 동지들과 연락을 끊지 않고, 언젠가는 우리파의 세력이 커져서 나의 주장과 사상이 세상을 바꾸리라 믿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세상 사람들의 무시나 비아냥거림을 참고 견딜 수 있다.”
여기에서 군자라는 단어가 핵심이다. 군자이기 때문에 당대 세인들의 평가에 초연할 수 있는 것이며, 가난하고 외로운 생활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주대환은 군자를 좌파로 환치시킨다. “나는 좌파이므로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좌절하지 않고, 당장 내일 먹을 것이 없어도 절망하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다독거린다. 이 대목에서 공자는 자신의 외롭고 궁색한 생활을 미화했다고 본다. 그렇지만 이 대목은 제자들에게 춥고 배고프더라도 이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라는 메시지로 읽혀졌다.
“외로움을 참고, 당파를 유지하라”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 좌파운동이라는 게 풍찬노숙의 길인데, 어떻게 호의호식을 바라는가. 여기에서 ‘인부지(人不知)’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만이 아니라, 자리와 관직에 등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정확하게는 실업상태를 가리킨다고 주대환은 해석한다. 따라서 이 세 구절이 <논어>의 제일 앞부분에 비중 있는 자리에 배치된 이유는 좌파생활, 즉 군자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유념하고 있어야 할 생활지침이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를 못 받아들이면 군자(좌파) 생활 못하는 것이다.
‘學而時習之’의 시(時)도 해석이 필요하다. 당시 선비는 무산계급이었다. 벼슬하지 않으면, 취직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가 없었다. 먹고 살기 위해서 무슨 일이든지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품팔이라도 해야만 하였다. 그러니 공부는 틈틈이 짬 나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가난하다고 포기하지 말고 틈틈이 공부를 계속해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주대환은 해석한다.
‘有朋自遠方來’도 그렇다. 가까운 데에는 내 편과 동지가 없다는 의미를 읽어낼 수 있다. 외로운 처지라는 말이다. 한때 친했던 관계라도 노선 차이로 떨어져 나갈 수 있고, 적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멀리서라도 간혹 동지가 찾아오니 얼마나 즐거우냐? 비주류나 왕따가 되더라도 굽히지 말고, 소인배들에게 굽히지 말고, 외로움을 참고 견뎌라. 너희들끼리 연락을 끊지 말고 서로 정보를 교환하면서 당파를 유지해라…. 이런 강령을 잘 지켜서 후대에 유가는 주류가 되었다고 본다.
군자와 소인의 개념도 그렇다. 군자는 주변 동료들과 사이좋게 잘 지낼 수 있는 원만한 인품을 지닌 사람이다. 유능하다고 다 군자가 아니다. 유능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 잘 지내기 힘들다. 그런 사람이 소인이다.
소인은 우리 편과 잘 지내지 못하는 사람이다. 군자는 아무리 먹고 살기 힘들어도 틈틈이 공부를 계속하고, 아무리 어렵고 서운한 일을 당하더라도 동지들과 연락을 끊지 않는 인품을 가리킨다. 군자는 또한 부모형제와 잘 지내는 사람이기도 하다. 부모형제와 잘 지내지 못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원만하게 잘 지내겠는가. 부모형제와 잘 지내는 사람은 대체로 조직원 간에 인간적인 융화도 무난하게 잘하는 경향이 있다.
따지고 보면 부모형제와 잘 지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인생을 살아본 사람은 안다. 좌파 당의 성패는 구성원 간의 융합에 달려 있다. 융합이 될 것인지 안될 것인지 어떻게 아는가? 그 기초는 효제(孝弟)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 공자의 관점이었다. 효제는 내부 단결에 굉장한 효력을 발휘했고, 이 단결 덕분에 유가가 주류가 된 것이다.
‘過而不改하면 是謂過矣니라’(위령공편 29장)의 의미를 독특하게 해석했다. 이 대목을 개인의 과오는 고치기 쉽지만, 정치적인 과오, 정치적인 판단착오 또는 노선이 잘못되었을 때는 나중에 고치기 어렵다는 것으로 해석했다. 어떤 의미인가?
“기존의 해석은 ‘過’를 개인의 도덕적 허물로 보았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허물이 있으면서 고치지 아니하면 이것을 허물이라 하느니라’. 하지만 나는 이런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 수준의 해석에 동의할 수 없다. 이런 해석이 동아시아 2500년 역사 동안 면면히 이어져온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는 過를 정치적인 오류가 아닌 개인의 도덕적인 허물로 해석한 이유는 전제 왕권의 탄압 때문이었다. 역대 왕조의 1인 독재정권 치하에서는 정치 노선의 잘잘못을 지식인이 자유롭게 논할 수 없었다. 함부로 논했다가는 죽는다.
둘째는 경전 해석에 생활인과 실천가의 생각이 반영되기 힘들다는 점이다. 학자가 주로 다루는 죽은 현실, 과거 속에서는 선악의 구분이 쉽고 분명하다. 그들은 정치적 과오라고 할지라도 개인의 도덕적 과오처럼 인식한다. 그것을 고치기 쉬운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지금 당장 눈앞에서 펼쳐지는 복잡한 현실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실생활의 다양한 경험을 포기하면서 평생 경전 풀이에 매달린 사람들이 권위 있는 학자가 되고 주석서를 내고, 그들의 풀이가 주류적 해석이 되었다고 본다.
그래서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 같은 풀이를 우리가 읽게 되지 않았을까. 정작 공자는 시장과 정치판을 기웃거린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과를 고치기 쉽다면 공자가 이런 말을 할 이유가 없다. 정치적 과오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미 그런 판단에 함께 동의하거나 실행에 나선 사람들이 있고, 얽힌 사람들이 있으니 고치기는 더욱 어렵다.
설사 무슨 일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느끼더라도 변명을 하기 마련이다. 조금씩 다른 분식(粉飾)을 하거나 보완책을 찾아내려고 이리저리 잔머리를 굴리게 된다. 심지어는 남을 탓한다. 애시당초부터 노선 설정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인정하기보다는 무언가를 조금씩 바꾸고 땜질하면서 버틴다(小人之過也는 必文이니라). 공자식 표현대로 하면 이것이 소인의 행동이다.”
“군자는 懷德하고 소인은 懷土한다”
군자와 소인의 차이는 또 나타난다. “군자는 懷德하고 소인은 懷土한다”는 이인편 11장의 해석이다. ‘소인은 토를 가슴에 품고 그리워한다’.
여기에서 토(土)가 어떤 개념인가? 주대환은 고향 또는 연고(緣故)로 가득한 ‘나와바리’로 해석한다. 한국사회 문제가 연고주의 아닌가. 지연, 학연으로 똘똘 뭉쳐서 배타적인 기득권을 유지한다. 문제는 여기에 속하지 않은 사람과 속한 사람을 차별한다는 점이다.
토(연고, 나와바리) 때문에 기회균등이 어그러지고 있다. 여기에서 소인은 특혜에 기대어서 살아간다. 군자는 덕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이라면, 소인은 특혜와 배타적인 기득권을 항상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이라는 게 주대환의 해석이다.
덕은 보편적인 법률과 도덕률을 가리킨다. 군자는 보편성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군자는 능력에 따라 사람을 뽑지만, 소인은 자기 연고에 따라 항상 자기에게 유리한 사람만을 뽑는다. 공동체에 해가 되지만 자기에게는 유리한 선택을 하는 사람이 바로 소인이라고 공자는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를 지원해준 최대 후원자는 여자였다고? 어떤 근거로 그런 주장을 하는가?
“옹야편 26장에 보면 남자(南子) 이야기가 나온다. 남자는 위나라 영공의 부인을 가리킨다. 여자였던 것이다. ‘子見南子하시니 子路不說이어늘 夫子矢之曰 予所否者인데 天厭之 天厭之시리라’는 대목이 그 부분이다. ‘공자께서 남자(南子)를 만나보시자 자로가 기뻐하지 않으니 공자께서 맹세하여 말씀하셨다. 내 맹세코 잘못된 짓을 했다면 하늘이 나를 싫어하시리라, 하늘이 나를 싫어하시리라’는 대목이다.
공자가 여러 나라를 떠돌아다니는 주유천하 기간에 가장 대접을 잘 받은 시기는 위나라의 영공에게 머물 때였다. 이 대접은 영공이 해준 것이 아니라 자세히 살펴보면 영공의 부인인 남자로부터 받은 것이었다. 남자는 단순히 영공의 부인이 아니라 영공과 공동으로 나라를 통치했던 정치적 파트너 수준이었다. 영공의 부인이었던 남자의 발언권이 강했다.
남자는 대부분이 남성인 신하들을 잘 다스렸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왔던 모양이다. 남녀관계가 있지 않았나 하는 소문이었다. 그런데다가 남자가 공자에게 유별나게 잘 대해주니 주변에서 둘 사이의 관계가 수상하다고 ‘씹었던’ 것이다. 당대의 정치가들 가운데 ‘禮와 樂을 되살려 이로써 정치가 이루어지도록 하자’는 공자의 주장에 가장 깊게 이해하고 공감해준 인물이 여성 정치인이었던 남자(南子)였다. 왜냐하면 공자의 정치철학은 원래 여성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공자는 큰 키에다가 힘도 장사였던 아버지 숙량흘을 닮아서 덩치가 컸다. 그렇지만 공자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죽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청상과부인 안징재가 혼자서 애지중지 아들 공자를 키우다 보니, 공자는 여성적인 남자로 자랐을 가능성이 높다. <논어>를 읽다 보면 공자는 여성화된 남성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는 남들과 싸우고 경쟁하여 이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릴 적에도 칼싸움이나 전쟁놀이 같은 것을 하지 않고 소꿉놀이를 하며 놀았다. 공자의 인간관계에 대한 가르침은 모두 남성적인 힘겨루기와 서열 정하기, 시기·질투와 분파 투쟁으로 힘을 낭비하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공자 정치철학의 핵심인 인(仁)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공자의 정신에 가장 깊은 공감을 느낀 당대의 정치가는 여성인 남자(南子)였다고 본다. 이전투구의 치열한 승자독식 상황에서 공자의 철학은 비현실적인 정치철학이다. 하지만 여성인 남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공자의 주장이야 말로 현실에서 이뤄져야 할 매력적인 정치철학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치고 받는 현실정치의 전면에 있었던 남편 영공보다 약간 뒤에 서 있었던 배우자인 남자가 더 열성적이고 꾸준한 공자의 후원자였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세금은 1할만 받아라”
공자로서는 위나라의 2인자인 남자를 만나야 생계도 해결되고 뭐라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여자라는 이유로, 세간의 소문이 두려워 공자가 남자를 만나면 안 된다는 자로의 주장은 과한 것이었다. ‘왜 쓸데없이 남자는 만나가지고 저런 소리를 듣고 공연한 오해를 사나?’ 이것이 공자에 대한 자로의 불만이었다. 그렇지만 공자도 남자에 대한 사상적·정서적 교감은 있었을 것이다.그것이 남녀의 육체적인 관계까지는 가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공자와 남자는 육체관계는 없었을지라도 서로 상대방에 대한 상당한 호감은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좌파논어>에서는 예(禮)에 대한 해석도 독특하다. 공자는 평생 주나라의 예, 즉 주례(周禮)를 복원하기위해 노력했다. 주례가 무엇인가? 주나라의 토지제도와 세금제도라고 본다. 주나라의 세금은 정전법(井田法)이다. 백성은 토지수확의 10분의 9를 얻고 국가는 나머지 1할 는다. 이를 철법(徹法)이라고 했다. 철(徹)은 균등하다, 공평하다의 뜻이 있다. 하지만 주나라가 망하고 이어서 생긴 나라들은 세금을 더 걷었다.
노나라는 2할의 세금을 걷었다. 주나라의 갑절이 되는 세금을 걷은 것이다. 전쟁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노나라에 흉년이 들었다. 세금을 올릴 생각을 하는 노나라의 애공이 공자의 제자 유약에게 상의하니, 유약은 오히려 1할만 받는 철법을 써야 한다고 답변했던 것이다. 아마 이 철법은 공자당의 공식적인 입장이었던 것 같다.
각국이 준 전시상태인 상황에서 공자당이 이러한 비현실적인 입장을 취하다 보니 당대의 군주들은 공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보여진다. 공자가 말한 ‘극기복례(克己復禮)’를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주나라의 토지제도와 세금제도를 회복해야 한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농사 소득에 대한 세금을 2할 받지 말고 1할만 받으라는 이야기다.
주대환이 <논어>를 읽으면서 깊이 공감하고 눈물을 흘리며 읽었던 대목이 있다. ‘知者不惑하고 仁者不憂하고 勇者不懼니라’는 대목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성공할 가능성이 별로 없는 일을 도모하자는 유혹에 마음이 흔들리거나 그럴듯한 기획에 현혹되지 않고, 어진 사람은 가난과 어려움을 걱정하지 않고, 용감한 사람은 대책이 없는 불확실한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 대목은 공자가 자기 자신을 타이르는 말이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고 한 말이 아니었다. 공자 자신이 주변에서 들어오는 듯한 제의에 항상 마음이 흔들렸다는 말이다. “이거 투자하면 대박난다”고 제의가 들어오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흔들리기 쉽다. 공자는 주변에서 수시로 이런 제의를 받았던 것이다. “40에 불혹(不惑)한다”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풀이해야 한다. 그렇다고 공자가 가진 것이 있었는가?
춥고 배고팠다. 그러다 보니 현재가 근심이 가득하고(憂), 미래가 두렵고(懼), 그러다 보니 위험부담이 많은 모험적인 제안에도 마음이 흔들릴 수 있는(惑) 상황이었다. 자신의 내면을 향해 스스로를 다독거리는 말이었던 것이다.
공자는 ‘상갓집의 개’처럼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한자리를 구했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외로운 상황, 자리를 얻지 못하여 돈도 없는 상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처지가 계속됐다. 그러다 보니 진(晉)나라에서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불힐(佛?)이 공자를 불렀을 때도 가려고 했다.
제자인 자로가 말려서 가지 않았다. 만약 갔더라면 큰 낭패를 당했을 수도 있다. 불힐의 정적이자 독재자인 조간자(趙簡子)에게도 가려다가 말았다. 대국인 위나라나 초나라뿐만 아니라 채나라, 섭나라 등 소국까지 방랑하고 다닌 것도 한자리를 해보기 위해서였다. 모조리 실패했다. 따르던 제자들도 실망하고 떨어져나갔다.
공자의 마음속에는 걱정, 근심, 의혹이 가득했다. 궁지에서 벗어나려고 버둥댈수록 더 깊이 빠져 들어간다. 이런 상황에서 한 말씀이다.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다 보니까 주대환 본인의 인생행보가 여기에 겹쳐졌다고 한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60세 가까운 남자인 내가 엉엉 울음소리를 냈다.
후대인들은 성인 공자의 이미지에 너무 몰입된 나머지 공자가 별로 마음의 동요 없이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삶을 살았던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일찍부터 달관한 인생을 살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실제 공자의 삶을 들여다보면 공자는 너무도 많은 스트레스와 좌절감을 안고 살았던 것이다.
현명하다 안회, 녹봉 위해 영혼을 팔지 않았으니!
공자라고 해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특별한 기술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공자는 자신의 한계를 이렇게 그대로 고백했다. 이 고백이 지니고 있는 복합적인 의미를 후대의 주석가들이 잘 눈치채지 못하고 대강 해석하며 넘어가고 말았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좌파당을 만들려고 수많은 신산을 겪었지만 결국 성취하지 못한 채 나이는 들어가고 손에 가진 것은 없는 주대환의 눈에는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고생을 해본 사람이 <논어>를 읽어야 공자의 처지를 꿰뚫어볼 수 있었던 것이다. <논어>는 험난한 정당 생활을 해보지 못한 사람은 그 속 깊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전이다.
공자가 가장 아꼈던 제자가 안회(顔回)다. 공자는 안회를 극찬했다. 안회만한 제자는 없다고 보았다. 안회는 그렇게 오래 살지도 못하고 요절했다. 어느 정도 사회활동을 해봐야 그 사람 실력과 내공이 나오는 법인데, 안회는 사회활동을 할 기회도 없이 죽었다. 내공을 검증할 기회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는 안회가 최고의 제자라고 한다. 왜 그렇게 안회를 높게 평가했을까?
“一簞食와 一瓢飮으로 在陋巷을 人不堪其憂어늘 回也不改其樂하니 賢哉라 回也여” “한 대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국을 먹고 누추한 골목(빈민가)에 사는 것을 딴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뎌내지 못하는데, 안회는 그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았으니 현명하도다, 안회여!”
보통 해석에서는 이 대목을 두고 안회가 가난하게 사는 것도 개의치 않고 공부하는 데에만 매진했다고 본다. 안회는 먹고 입는 데에 관심이 없고 오로지 공부에 몰두한 인물로 해석했다.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니까 공자가 찬탄했다는 것으로 읽혔다. 그러나 <좌파논어>에서는 다른 각도로 설명한다.
“안회가 포기하지 않은 ‘그 즐거움’이란 군자당의 벗들과 함께 배우는 즐거움, 동지들과 더불어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는 ‘도’를 토론하며, 우리학파, 우리 정당의 세력을 키워나가는 즐거움을 말한다. 하지만 이런 대목은 정말 가슴을 아프게 하는 구절이다. 가난의 고통을 겪어보지 않으면 모를 날카로운 아픔이 가슴을 파고든다. 그리고 의문이 생긴다. 안회는 왜 출사(出仕), 즉 취직을 하지 않았을까?
그토록 가난하면 먹고 살기 위해서 무언가 일을 해야지, 왜 공부만 하고 있었을까? 그런 안회를 왜 공자는 현명하다고 했을까? 출사하지 않은 것이 현명한 것은 아니다. 우리의 주장을 굽히고 출사하지 않은 것이 현명한 것이다. 우리의 노선과 정책을 받아들이지 않는 군주에게 단지 녹봉을 받기 위해 영혼을 팔지 않았으니 현명하다고 칭찬한 것이다.”(<좌파논어>, 179∼1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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