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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 구해줘요 → 왕자는 내가 구한다 → 왕자 없어도 돼요 (중앙일보 2014.02.08 00:32)

왕자님 구해줘요 → 왕자는 내가 구한다 → 왕자 없어도 돼요

'겨울왕국' 흥행으로 본 디즈니 공주의 진화

 

‘겨울왕국’의 안나(왼쪽)와 엘사.

‘겨울왕국’(원제 Frozen, 1월 16일 개봉, 크리스 벅·제니퍼 리 감독·⑫)의 열기가 뜨겁다. 국내 극장가에서 지금까지 661만 관객을 동원, ‘쿵푸팬더 2’(2011년·506만 관객)를 제치고 애니메이션 역대 최고 흥행작에 등극했다. 관련 책들까지 덩달아 인기다. 2월 1~2주(1월 31일~2월 6일) 주간 베스트셀러 순위에서 『디즈니 겨울왕국 무비 스토리 북』을 비롯해 『겨울왕국』 영어원서 등 무려 세 권이나 순위권에 들었다.

 ‘겨울왕국’은 전 세계적으로도 8억6000만 달러가 넘는 흥행수입을 올렸다. ‘토이 스토리3’(2010년·10억6000만 달러)의 기록을 깰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겨울왕국’은 주옥같은 OST와 함께 과거 디즈니의 부흥기를 이끌었던 ‘인어공주’(1989), ‘미녀와 야수’(1991) 등의 계보를 잇는 공주 이야기인 동시에 기존과 확연히 다른 주인공을 등장시켜 디즈니의 변화를 알린다.

 디즈니 공주 애니메이션의 시작은 그림형제의 동화가 원작인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1937·①)다. 널리 알려진 대로 백설공주는 계모 왕비의 계략에 속아 독 사과를 먹고 깊은 잠에 빠진 뒤 왕자의 키스에 깨어난다. 이 행복한 결말은 어린 소녀들을 매혹시켰지만 한편으로 여성주의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예쁜 외모의 백설공주가 지닌 바보스러울 정도의 순진함과 왕자의 구원을 기다리는 수동성 때문이다. 이는 ‘신데렐라’(1950·②)도 마찬가지. 왕자를 만나 결혼하기 전까지 신데렐라는 온갖 구박을 받으며 집안일만 하는 여성이었다. 세계대전을 거치며 직업 전선에 뛰어든 여성이 크게 늘어난 당시 미국 사회의 흐름과는 거리가 있었다. 특히 ‘잠자는 숲 속의 공주’(1959·③)의 오로라는 왕자가 키스해 줄 때까지 잠에서 깨어날 줄 모르는 공주라는 점에서 비판의 표적이 됐다.


 30년 뒤 디즈니가 내놓은 ‘인어공주’(1989·④)는 달랐다. 주인공 에리얼은 왕자를 기다리는 대신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직접 뭍으로 향한다. 왕자와 사랑에 빠지기 전부터 바닷속 왕국을 탈출하고 싶어 했던 자의식 강한 공주란 점도 주목할 만하다. ‘미녀와 야수’(1991·⑤)의 벨 역시 능동적인 캐릭터다. 태생이 공주가 아니라는 점은 신데렐라와 같지만, 벨은 아버지를 위해 스스로 야수와 사는 길을 택한 인물이다. 남성과 동등한 지적 능력으로 대화를 나누는 디즈니 최초의 여성 캐릭터다.

 이후 디즈니는 공주들의 피부색으로도 변화를 꾀했다. ‘알라딘’(1992·⑥)의 아랍 공주 자스민, ‘포카혼타스’(1995·⑦)의 인디언 소녀 포카혼타스, ‘뮬란’(1998·⑧)의 중국 소녀 뮬란이 그 예다. 이 중 포카혼타스와 뮬란은 각각 실존 인물과 설화를 모티프로 만든 캐릭터로, 난세에 영웅으로 활약한다. 포카혼타스는 인디언의 땅을 점령하려는 백인들을 돌려보내고, 뮬란은 전장에 나가 훈족으로부터 대륙을 구한다. 그러나 이들 작품은 각지의 전통문화를 나열하는 데 그친 기획상품이라는 비판도 받았다. 특히 디즈니 최초의 동양인 여주인공 뮬란은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때마침 드림웍스가 내놓은 ‘슈렉’(2001)은 디즈니의 공주들을 대놓고 꼬집고 비틀었다. 피오나 공주는 남들이 다 피하는 흉측한 초록괴물 슈렉과의 결혼을 선택하고, 무엇보다 그 실체가 미녀가 아니라는 점이 놀라움을 안겼다. ‘슈렉’은 백설공주와 신데렐라가 싸우는 장면을 등장시켜 디즈니 공주들을 웃음거리로 만들기도 했다.

 모욕을 맛본 디즈니 공주 애니메이션은 2000년대 후반 다시 기지개를 켰다. ‘공주와 개구리’(2009·⑨)는 여러 면에서 파격이었다. 배경은 1920년대 미국 뉴올리언스. 요리사 아버지와 재봉사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티아나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사상 최초의 흑인 주인공이자, 자신만의 식당을 차리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아가씨다. 그 앞에 나타난 개구리 왕자는 말이 왕자일 뿐, 파산 직전의 한량이다. 능동적 여성과 수동적 남성이라는 새로운 구도를 등장시킨 이 작품은 흑인 문화를 재즈와 부두교로 전형화했다는 점, 티아나가 흑인 여성보다 개구리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시간이 더 길다는 점에서 비판을 면하지 못했지만, 이전의 디즈니 공주 이야기들과의 차별성이 두드러졌다.

 뒤를 이은 ‘라푼젤’(2011·⑩)은 디즈니 공주 애니메이션 최초의 3D(3차원) 작품이다. 주인공 라푼젤은 원작 동화에선 우울한 사연을 지닌 평민이지만, 애니메이션에선 출생의 비밀을 지닌 공주로 거듭났다. 하지만 왕자를 기다리는 공주와는 거리가 멀다. 라푼젤은 평생 갇혀 있던 탑에서 스스로의 호기심 때문에 탈출을 감행하고, 사랑하는 이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외모를 망가뜨리고, 왕국의 공주였던 지위를 되찾는 담대함을 발휘했다. ‘메리다와 마법의 숲’(2012·⑪)의 활쏘기에 능한 말괄량이 공주 메리다 역시 능동적인 공주다. 엄밀히 말해 메리다는 픽사가 창조한 캐릭터이지만 디즈니-픽사로 합병된 이후 작품이라 디즈니의 공식 공주 대관식을 치렀다.

 ‘겨울왕국’의 엘사와 안나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특히 엘사는 여왕으로 즉위한 직후,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가두어버린 고독한 캐릭터다. 엘사의 마법을 풀기 위해 필요한 건 진정한 사랑인데, 그 실체는 왕자의 키스가 아니라 애틋한 자매애다.

디즈니는 자사 애니메이션에 등장한 여성 캐릭터 가운데 출신 가문, 사회적 지위 등을 고려해 지금까지 11명만을 일명 ‘디즈니 프린세스’로 선정해 놓았다. 뮬란처럼 공주로 태어난 것도, 왕자와 결혼한 것도 아닌 캐릭터도 포함돼 있다. ‘겨울왕국’의 엘사와 안나도 조만간 디즈니 프린세스로 이름을 올릴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