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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운 좋을 거라던데…지금은 묘자리에 파묻혔어요” (한겨레 2013.09.22 19:38)

“말년운 좋을 거라던데…지금은 묘자리에 파묻혔어요”

 

영화 ‘관상’ 장면.

대박 영화 ‘관상’ 시나리오 쓴 김동혁 작가

영화 ‘관상’ 시나리오 작가 김동혁. 박종식 기자

영화 <관상>이 한가위 연휴 극장가에서 관객 몰이 독주에 나서면서 올 하반기 최대 흥행 영화로 떠오르고 있다. <관상>은 개봉 전 추석 연휴 5일새 400만명 가까운 관객을 포함해 개봉 12일만에 700만여명을 동원했다. 지난해 <광해, 왕이 된 남자>(1232만명)에 이어 추석 시즌 한국영화가 2년 연속으로 1000만명 이상 ‘흥행 홈런작’이 나올 것인가 기대감도 커진다.

<관상>의 인기 비결은 계유정난이라는 조선의 비극적인 왕위찬탈 사건과 누구나 한번쯤 솔깃해 봤을 ‘관상’이란 소재를 조합해 새로운 시대극을 시도한 시나리오에서 나온다. 영화에서 기생 ‘연홍’역을 맡은 김혜수는 “연기 생활 중 본 시나리오 가운데 최고”라고 극찬한 바 있다. 송강호, 김혜수, 이정재, 백윤식, 조정석, 이종석 등 인기 최고 배우들을 모두 한 영화에 끌어모은 캐스팅 역시 시나리오의 강력한 힘 덕분으로 평가받는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쓴 김동혁(42) 작가를 추석 연휴가 막 시작하던 17일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났다. 프랑스에서 영화를 전공한 뒤 2003년 한국에 돌아온 그는 2008년 <관상>의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해 5년여에 걸쳐 이 이야기를 완성했다. 2010년 한국시나리오 공모 대전 ‘대상’에 당선되는 등 영화가 완성되기 전부터 주목을 받았던 작품이다.

김 작가는 “미래를 예측하는 수단인 ‘관상’으로 왕위를 빼앗으려는 반역자를 사전에 색출한다는 점에서 ‘조선판 <마이너리티 리포트>’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착안점을 들려줬다. “현대 정치사에도 정적을 제거하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조선시대에 대담하고 노골적인 패륜을 통해 권력을 차지하는 소름돋는 상황을 관상과 연결하면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시나리오는 평소 사람들 얼굴에 관심이 많았던 김 작가가 우연히 중국 관상책 <상리형진>를 만나면서 출발했다. 김 작가는 관상이 얼굴만이 아니라 목소리, 앉음새, 걸음걸이 등 몸과 관련된 모든 부분을 분석한다는 대목에 빠져들었다. 산전수전 모두 겪은 인물만이 관상의 최고 경지에 오를 것이라 짐작했고, 대역죄를 저지른 가족의 일원으로 비참한 삶을 살아온 ‘내경’이란 인물을 만들었다.

영화 ‘관상’ 장면.

“최고의 관상쟁이조차 자기 운명을 모르는데, 한치 앞도 못보는 인간들이 탐욕에 눈이 멀어있는 모습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처음엔 광해군의 실리외교를 관상과 접목해 보려고 했는데, 피비린내 나는 비극적인 사건이 결합하면 극적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겠다 생각했죠.”

그는 이때부터 관상과 역사 공부를 병행했다고 한다. 조선 시대 드라마틱한 사건을 모조리 뒤져 계유정난을 배경으로 골랐고, 신비로운 인물 한명회(김의성)가 등장하는 영화의 얼개가 만들어졌다. 영화화하는 과정에서 한재림 감독 등의 손을 거치며 달라진 부분도 있다. 애초 시나리오에서 내경한테 관상을 가르치는 ‘장봉수’라는 인물이 사라지고, 대신 ‘연홍’과 ‘팽헌’(조정석)이 등장했다. 그는 “애착을 많이 뒀던 장봉수가 사라진 아쉬움이 있지만, 여성 캐릭터 연홍과 감초같은 팽헌을 얻었다”고 했다. 영화 말미에 수양대군(이정재)이 내경의 아들 진형(이종석)의 운명을 결정짓고 던진 말도, 애초에는 내경이 ‘관상’으로 아들의 운명을 바꿔보고 싶어 다른 대사를 중얼거리는 장면이었다고 한다.

영화 ‘관상’ 장면.

단편영화 3편을 연출한 바 있는 김동혁 작가는 내심 이번 작품으로 연출 데뷔까지 기대했다고 한다. 먼저 시나리오 작가로 장편 상업영화에 참여하게 되었지만 섭섭한 부분도 적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한국에선 연출자에 견줄 때 시나리오 작가가 ‘이야기의 창조자’로서 소홀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이런 탓에 작가들이 저마다 연출쪽으로 나서려는 것 같다고 아쉬워하며 “이대로라면 제대로 된 스토리가 없는 시나리오가 양산되거나, 글 잘 쓰는 감독만 살아남게 되는 악순환이 벌어져 한국영화의 질적 저하를 가져올까 걱정된다”고 했다.

실제 관상을 본적이 있냐고 묻자 그는 “하관이 좋아서 말년운이 좋을 것이란 얘기를 들었다”고 웃었다. 40대 초반에 세번째 시나리오로 ‘대박’을 터뜨린 것을 보면 믿을만한 관상쟁이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는 다음 작품으로 풍수지리를 소재로 한 <명당> 시나리오를 준비중이다. <관상> 제작사인 주피터필름이 <명당>, <궁합>으로 이어지는 ‘3연작’으로 계획중이다. 그는 “<관상>의 인기가 어디까지 갈지도 궁금하지만, 지금은 묘자리에 파묻혀 있다”며 이미 다음 작품에 푹 빠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