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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열차’…인류의 끝 혹은 시작으로 (대전일보 2013-08-01 21:44:56)

‘설국열차’…인류의 끝 혹은 시작으로

빙하기 17년 … 계급·갈등·본능만 남은 지구 순환 열차

 

 

지구 온난화의 위험이 점점 커져가던 2014년. 전 세계 환경단체의 강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세계 각국 정부들은 온난화를 해결할 목적으로 하늘에 'CW-7'이란 화학가스를 살포하면서 엄청난 기상이변이 발생, 지구는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은 채 새로운 빙하기를 맞이하게 된다. 인류는 멸망의 위기에 봉착하게 되고 마지막 생존자들은 철도기업 '윌포드 컴퍼니'가 개발한 지구를 순회하는 열차에 오른 사람들뿐이다. 마치 이런 순간을 예언이라도 하듯 기차를 완성한 윌포드(애드 해리스)는 신과 같은 존재가 되고 기차는 탑승료에 따라 사람들을 나누며 공고한 새로운 계급사회를 형성하게 된다. 최하층이 머무는 공간은 무임승차 한 사람들이 거주하는 열악한 조건의 꼬리 칸이고, 선택된 사람들이 술과 마약까지 즐기며 호화로운 객실을 뒹굴고 있는 최상층이 머무는 공간은 앞쪽 칸이다.

기차가 달리기 시작한지 17년 째인 설국 17년. 꼬리칸의 젊은 지도자 커티스(크리스 에반스)는 억압과 차별에 못 이겨 긴 세월 준비해 온 폭동을 일으키려 한다.

그는 기차의 심장인 엔진을 장악, 꼬리칸을 해방시키고 윌포드를 죽인 후 꼬리칸의 지도자 길리엄(존 허트)을 지도자로 세우려 한다. 하지만 앞쪽 칸까지 가기 위해서는 감옥에 수감돼 있는 열차 보안설계자 남궁민수(송강호)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 때를 기다리던 커티스는 마침내 꼬리칸 동료들과 함께 준비해 온 폭동을 일으키고 서서히 앞쪽 칸을 향해 전진하기 시작한다.

영화는 커티스가 반란을 일으키고 꼬리칸 사람들이 힘을 합쳐 물공급 탱크를 확보하는 초반부와 윌포드의 2인자인 총리 메이슨(틸다 스윈튼)을 인질 삼아 윌포드를 만나러 가기 위해 앞쪽 칸을 향하면서 마주하게 되는 단백질블록 생산공장, 정육냉동칸, 거대한 온실, 터널 수족관, 교실 등의 모습이 세밀하게 묘사되는 중반부, 그리고 드디어 윌포드와 커티스가 조우하게 되는 마지막 결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이중 영화의 재미가 가장 큰 부분은 초반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새해를 맞은 기차가 긴 터널을 지나갈 때 진압군과 꼬리칸 사람들이 싸우는 장면은 압권이라고 할 수 있다. 다소 잔인하기도 하지만 기차라는 폐쇄된 공간 안에서의 극렬한 긴장감과 긴 터널을 지날 때 열 적외선 카메라로 촬영한 모습은 공포 영화를 연상시킬 정도로 관객들의 몰입을 극대화 시킨다. 또 기차가 커브를 돌 때 앞쪽 칸에 있는 프랑코(블라드 이바노브)와 뒤쪽 칸에 있는 커티스가 창을 통해 마주하며 총격전을 벌이는 설정도 상당히 인상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결말 부분 윌포드가 커티스에게 장황하게 열차의 질서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은 약간 지루하게 느껴지며 중반부의 극 전개도 초반부와 이질적으로 나뉜 채 극적 긴장감을 반감시키는 점은 아쉽다.

이번 작품은 봉준호 감독의 전작에 비해 정치적인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담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새로운 세상에 대한 대안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세력들과 기존의 가치를 고수하며 이를 막기 위한 세력들 간의 잔인한 대결을 보여주며 감독의 진보적인 가치관을 주제 속에 함축시키고 있다.

열차는 말 그대로 인간 사회이며 1년을 주기로 세계를 순회하는 궤도는 인류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열차의 주인인 윌포드와 그의 추종세력들은 끊임 없이 인류의 안전을 위해 열차 내의 질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 질서는 계급 질서이자 생태학적 질서를 말한다. 이는 마치 영국의 고전파 경제학자인 토마스 멜서스가 1798년에 낸 '인구론'을 연상시킨다. 즉, 자원이 한정돼 있는 상황에서 인구가 늘어나면 인류가 멸망하기 때문에 가장 보잘 것 없고 대가 없이 무임승차 한 꼬리칸 사람들을 항상 일정 비율에 맞춰 인구를 조절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앞쪽 칸 사람들은 군대를 동원해 꼬리칸 사람들의 학살도 서슴없이 범하게 되는 것이다.

이 불의에 항거하는 인물이 커티스지만 어떻게 보면 진정한 혁명가는 열차 보안설계자인 남궁민수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도 커티스처럼 미친듯이 열차의 문을 열고 싶어하지만 그가 열고 싶어 하는 문은 앞쪽 칸으로 향하는 문이 아니라 17년 동안 마치 벽처럼 인식됐던 세상으로 향하는 문을 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상당히 철학적인 물음을 관객들에게 던진다. 즉, '기존 질서와 가치를 전복하는 새로운 세상을 우리는 꿈꿀 수 있는가? 그 꿈을 현실로 실현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영화는 이 물음에 대해 정확한 답을 내려 주진 않는다. 다만 혁명의 실패로 설국열차가 전복 된 후 모두가 죽은 상황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남궁민수의 딸 요나(고아라)와 타냐(옥타비아 스펜서)의 아들이 눈 덮힌 땅 위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북극 곰을 발견하는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이 모습은 생각하기에 따라 인류의 희망일 수도 있고 새로운 절망의 시작일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