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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바로알기/아리랑

1896년 채록한 아르렁타령인 이 곡은 서도아리랑선율에 3/4박 이다 (연합뉴스 2007-05-15 14:46)

1896년 채록한 아르렁타령인 이 곡은 서도아리랑선율에 3/4박 이다

[출처] 1896년 채록한 아르렁타령인 이 곡은 서도아리랑선율에 3/4박 이다|작성자 아리랑정

 

 

1896년 채록한 아르렁타령인 이 곡은 리듬과 선율이 서도아리랑 3/4박 이다

<볼록거울> 헐버트의 아리랑 사랑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

 

서울 마포 절두산의 외인묘지에 고이 잠든 선교사 호머 H 헐버트. 자신의 소망처럼 동방의 작은 나라에 묻혀 있는 헐버트는 한국 근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이 중요한 '외국인'이다.

대한민국 건국 이듬해인 1949년. 헐버트는 떠난 지 43년 만에 서울 땅을 다시 밟는 감회를 누렸다. 나이 86세에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국빈 자격으로 온 것이다.

그러나 연로한 나이에 긴 여행을 해서인지 병원 입원 얼마 뒤인 8월 5일 눈을 감았다. 조국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그의 소원이 예언처럼 실현돼버렸다고나 할까. 대한민국장으로 치러진 영결식에서는 외국인에게 주는 최고 영예인 '태극훈장'이 수여됐다.

1863년 미국 동북부의 뉴헤이븐에서 태어난 헐버트는 1905년까지 한국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한다. 1886년에 한국에 와서 첫 관립 외국어학교인 '육영공원'의 영어교사가 됐고, 최초의 영어 교과서인 '한국 역사'와 '대한제국의 멸망'을 출간했다.

1892년 귀국했다가 이듬해 선교사로 다시 온 그는 감리교 출판사를 운영하며 선교잡지 '한국유기'로 외국에 한국 문화를 알렸다. 고종이 1905년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낼 때도 전달자가 헐버트였고, 1906년 헤이그 밀사사건 때는 평화회의에서 일본의 침략을 저지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역설했다.

헐버트와 한국이 맺은 가장 뜻깊은 인연은 아리랑이 아닐까싶다. 구전 등으로 이어져 오던 아리랑을 서양식 오선보로 처음 채보해 외국에 알린 이가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헐버트는 1896년 '한국유기'의 논문을 통해 "한국인은 즉흥곡의 명수" "아리랑은 한국인에게 쌀과 같이 중요한 노래"라고 예찬했다.

바로 이 논문이 아리랑을 세계에 알리는 시발점이다. 이듬해인 1897년 영국의 여류 여행가 비숍은 저서 '한국과 그 주변의 나라'에 헐버트의 기록과 자신의 견해를 함께 실었다. 1907년 선교 시의(侍醫)였던 H.알렌이 '조선견문기'에 수록한 악보 역시 헐버트의 것과 일치하며, 1910년 런던에서 출간된 미국 역사사전에도 헐버트와 알렌의 아리랑 기록이 있다.

하지만 초창기 아리랑 기록은 오랫동안 묻혀 있었다. 1989년에서야 국내 연구자들이 발굴해 햇빛을 보게 했을 정도다. 그리고 신간 '한 지리학자의 아리랑 기행'을 쓴 이정면 박사가 아리랑과 헐버트의 인연을 재조명한 것은 늦었지만 다행이라고 하겠다.

나이 83세의 그는 우리 핏속에 녹아 흐르는 이 민족의 노래를 현장과 자료로써 체계있게 살폈는데, 헐버트 부분도 굵은 방점이 찍힌 곳 중 하나다. 이 박사는 찬송가를 보급한 선교사 헐버트는 음악의 전문가였다며 "채보와 그 기사도 전문적 식견에 의한 것"이라고 풀이한다. 악보를 통해 헐버트가 간결하고 명쾌하게 1880년대의 음악상(音樂像)을 부각시킨 점 또한 높이 평가돼야 함은 물론이다.

헐버트의 한국 사랑은 이처럼 아리랑 사랑으로 고스란히 나타났다. '대한제국의 멸망'의 헌사(獻辭)를 통해서도 그의 한국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이 박사의 말처럼 우리에게 오랫동안 생각에 젖게 하는 대목이다.

"비방이 극에 이르고 정의가 점차 사라지는 때에 나의 지극한 존경의 표시와 변함없는 충성의 맹세로써 대한민국의 황제폐하께, 그리고 지금은 자신의 역사의 종말을 고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지만 장차 이 민족의 정기가 어둠 속에서 헤쳐나와 주검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게 될 대한민국 국민에게 이 책을 드립니다."

ido@yna.co.kr

선교사 호머 H. 헐버트의 묘비

 

 

 진도아리랑 가사[모두보기]듣기진도아리랑/ 진도 민속(국악)

 

 

진도아리랑가사 모음[모두보기]듣기

 

진도아리랑은 진도 일대에서 널리 알려진 산아지 타령을 기반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오늘과 같은 후렴구가 정리되었다고 한다.

진도출신예인(국악인)들이 가사와 곡을 일부 다듬어서 지금의 노래로 탄성했다고 하는데

구전되어 오던 진도아리랑을 체계적으로 정립한 사람은 우리나라 대금의 명수인 진도군 임회면 삼막리 출신

박종기(1879~1953)선생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사에 한이 깃들여 있는 다른 지방 아리랑과는 달리 진도아리랑은 남녀 간의 사랑과 이별에 대한 것이 많고

생활 전반의 삶의 이야기를 풀어 놓아 진도아리랑 가사에는 익살과 해학이 담겨 있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앞 절을 부르는 노래꾼은 정해진 사람이 있기보다는 누구라도 끼어들어서 생활에 관계되는 노랫말로

흥겹게 부르면 된다.

신이 난 주위 사람들은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를

신명나게 같이 부른다.

이때면 주위의 모든 사람은 아리랑 노래 한 곡에 한마음이 되는 것이다.

진도아리랑 가사

진도아리랑은 일반적인 노래와 다른 점이 있으니 그것은 수없이 많은 노랫말이다.

아리랑타령 가사집에 의하면 노랫말 수가 약 750여개나 된다고 한다.

(노래를 다 부르려면 6시간 30분 정도 걸린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 많은 노랫말이 일정하게 처음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첫 시작의 ‘문경새재는 웬고갠고 구비야 구비구비가 눈물이 난다.’이 부분만 똑 같이 시작하고

다음 노랫말부터는 부르는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르다.

그것은 노랫말 수는 많고 일정한 순서가 없다보니 자기가 부르기 쉽거나 선호하는 구절을

중심으로 삼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특이한 점은 '만경창파에 두둥실 뜬 배 어기여차 어야 뒤어차 노를 저어라'이 구절을 거의 모든 국악인들이

마지막을 장식하는 마무리로 사용한다는 점이다.)

진도아리랑의 본 고장인 진도에서도

진도군청 홈에서 공개하는 진도아리랑가사와

진도아리랑마을 체험관 안에서 교육용으로 들을 수 있도록 한 진도아리랑가사와

체험관 안내판(벽)에 기록된 가사와

아리랑마을 방송용 스피커로 나오는 진도아리랑가사,

이렇게 4개의 가사가 하나도 같지 않았다.

몇 개의 노랫말은 서로 순서가 바뀌어서 불리어졌고 전혀 다른 구절이 들어가기도 하였다.

<진도 국악인들이 즐겨부르는 가사>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1.세월아 네월아 오고가지를 마라 아까운 이내 청춘 다 늙어간다

2.노다가세 노다가세 저 달이 떴다지도록 놀다나 가세

3.치어다 보느냐 만학은 천봉 내리 굽어 보니 백사지로구나

4.서산에 지는 해는 지고 싶어서 지느냐 날 두고 가는 님은 가고 싶어서 가느냐

5.날 다려 가거라 날 다려 가거라 심중에 꼭 있거든 나를 데려 가거라

6.한국 최남단 보배섬 진도 인심이 좋아서 살기가 좋네

7.우리가 여기 왔다 그냥 갈 수 있나 노래부르고 춤추며 놀다나가세

8.만경창파에 두둥실 뜬 배 어기여차 어야 뒤어차 노를 저어라

진도아리랑마을

아리랑체험관 듣고 부르기에 나오는 노랫말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1.문경새재는 웬고갠고 구비야 구비구비가 눈물이 난다

2.만경창파에 두둥실 뜬배 어기어차 어야디어차 노를 저어라

3.노다가소 노다나가소 저 달이 떴다지도록 놀다가소

4.만나니 반가우나 이별은 어이해 이별을 하려거든 왜 만나는고

5.왜 왔던고 왜 왔던고 울고나 갈 길을 왜 왔던고

6.저넘에 계집에 눈매좀 보소 속눈만 뜨고서 발발뜨네

 

진도아리랑마을

아리랑체험관 벽에 쓰인 노랫말

1.문전세재는 웬 고갠가 구부야 구부구부가 눈물이로구나

2.약산동대 진달래꽃은 한 송이만 피어도 모두 따라피네

3.나 돌아간다 내가 돌아간다 떨떨거리고 내가 돌아간다

4.치어다 보느냐 만학은 천봉 내려 굽이보니 백사지로구나.

5.만경창파에 두둥실 뜬 저배야 저기 잠깐 닻주거라 말 물어보자

진도아리랑

(진도 아리랑관광지 방송용 가사)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 응 응~ 아라리가 났네

1> 가지 많은 나무는 바람잘날이 없고

자식 많은 우리 부모는 속편할 날이없네

2> 오늘 갈지 내일 갈지 모르는 세상

내가 심긴 호박박모 울타리를 넘네

3> 만경창파에 두둥실 뜬 배

어기여차 어야 뒤어차 노를 저어라

4> 저건너 저가시나 눈매를 보아라

가마타고 시집가기는 영 틀렸네

5> 사람이 살며는 몇 백년이나 사나

호박같은 이내세상 둥글둥글 사세

6> 문경새재는 웬 고갠가

구부야 구부 구부가 눈물이 난다

7> 만나니 반가우나 이별을 어이해

이별을 할려거든 왜 만나는고

8> 노다가세 노다나가세

저 달이 떴다지도록 놀다나 가세

9> 간다 못 간다 얼마나 울어서

정거장 마당이 한강수가 되었네

10> 노랑저고리 앞섶에다 바늘장 걸고

뒷머리 나지나진 내 간장을 녹이네

11> 맹감은 고와도 가시 덤풀에 놀고

유자는 얽어도 한량 손에 논다

12>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

우리내 가슴속에는 희망도 많다

13> 알그닥 딸그닥 짜던 베는

언제나 다 짜고 친정에를 갈거나

14> 서산에 지는 해는 지고 싶어서 지느냐

날 두고 가는 님은 가고 싶어서 가느냐

15> 여덟세 두번걸이 열두폭 치마

신작로 다 쓸고 임 마중을 가네

16> 님은 죽어서 극락세계로 가고

나는 따라 가며 나무아미타불

17> 약산 동대의 진달래 꽃은

한송이만 피어도 모두 따라 피네

18> 간다 가노라 내가 돌아간다

정든임 따라서 내가 돌아간다

19> 싫어요 싫어요 당신은 싫어요

연지 분통 안 사준께 당신은 싫어요

20> 허리끈 졸라 매고 논빼미 사논께

야답 마지기 논 가운데로 신작로가 났네

21> 한국 최남단 보배섬 진도

인심이 좋아서 살기가 좋네

22> 앞보고 뒷보고 가는 사람

돈있고 잘났거든 날데려가거라.

23> 치어다 보느냐 만학은 천봉

내리 굽어 보니 백사지로구나

24> 아리랑 고개는 열두고개

요내 고개는 한 고개라네

25> 왜 왔던고 왜 왔던고

울고나 갈 길을 내가 왜 왔던고

26> 갈매기는 어디가고 물드는 줄 모르고

사공은 어디가고 배뜨는 줄 모르네

27> 날 데려 갈 때는 사정도 많더니

날 데려다 놓고는 잔말도 많다

28> 수천리 밖에다 정들어 놓고

오라는 등살에 나는 못살것네

29> 해당화 한 송이를 왁자지끈 꺽어

마누라 머리에 꽂아나 주세

30> 세월아 네월아 오고가지를 마라

아까운 이내 청춘 다 늙어간다

31> 오다가 가다가 만나는 님은

손목이 끊어져도 나는 못놓겠네

32> 저기가는 저 처녀 엎으러나 지거라

일써나 주면서 보듬어나 보자

33>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이 난다

34> 춥냐 더웁냐 내 품안으로 들어라

베개가 높고 얕으면 내 팔을 비어라

35> 강로야 강로야 육로나 되어라

내 발로 걸어서 내 고향을 갈란다

36> 날 다려 가거라 날 다려 가거라

네 심중에 꼭 있거든 나를 데려 가거라

37> 아리랑 고개다 집 지어놓고

우리님 오시기만 기다린다네

38> 님은 죽어서 나비가 되고

나는 죽어서 화초가되리

39>산중에 머루다래는 얼크러설크러 졌는데

나는 언제 님을 만나 얼크러설크러 질거나

40> 우리집 서방님은 명태잡이 갔는데

바람아 불어라 석달열흘만 불어라.

41> 산이 높아야 구렁도 깊지

조그만한 여자 소견이 얼마나 넓으리

42> 우리가 여기 왔다 그냥 갈 수 있나

노래부르고 춤추며 놀다나 가세

‘치어다 보면 만학은 천봉 내려 굽어 보니 백사지로구나’에서 만학천봉(萬壑千峰)은 수많은 골짜기와 산봉우리,

백사지(白沙地)는 흰모래 땅이니, 넓은 땅에 갈 곳(의지 할 곳)없는 신세를 한탄한 내용.

✻호박박모에서 박모는 박 모종을 줄인 말로 옛날시골에서는 담이나 울타리 쪽에 호박과 박을 같이 심어

호박은 담으로 넝쿨을 올리고 박은 주로 초가지붕위로 넝쿨을 올렸었음.

✻여덟세 두번걸이 열두폭치마에서 여덟세는 베를 짤때 올(실)의 굵기를 말하며

보통 여섯세에서 열세까지 짰다고 하니 여덟세는 올의 굵기가 중간인 셈이다.

진도 아리랑마을 체험관

진도아리랑 경연대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