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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바로알기/아리랑

[주간조선] [인물] 아리랑 뿌리 찾아 바이칼 호수로 떠나는 아흔 살의 노학자 (조선일보 2014.09.28 14:11)

[주간조선] [인물] 아리랑 뿌리 찾아 바이칼 호수로 떠나는 아흔 살의 노학자

아리랑 연구에 빠진 이정면 교수

 

 


	/사진출처 염동우 영상미디어 기자
/사진출처 염동우 영상미디어 기자

 

올해 아흔 살인 이정면 교수(미국 유타대학교)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해 8월이다. 구순을 눈앞에 둔 노학자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건강해 보였다. 당시 그를 인터뷰한 것은 “6000㎞에 이르는 아리랑 로드 대장정을 떠나겠다”는 계획을 듣고서였다.
   
지리학자인 이 교수는 뒤늦게 아리랑 연구에 빠져 있었다. 한민족의 뼈에 새겨진 아리랑을 제대로 모른다면 한국인으로서 부끄러운 일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2007년 ‘한 지리학자의 아리랑 기행’이라는 책을 펴냈고, 2009년엔 영문판인 ‘Arirang, Song of Korea’를 냈다. 아리랑을 세계에 알리려면 무엇보다 영어로 아리랑을 설명해놓은 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영문판이 인연이 돼 2011년엔 북한 당국 초청으로 홀로 평양에 다녀왔다. 10일 동안 북한 아리랑 학자들과 만나고 돌아온 후 북한 아리랑을 추가해 영문 개정판을 내놓은 것이 지난해 1월이었다.
   
책 출간 후 노학자의 발걸음은 더 바빠졌다. 노학자의 다음 일정표는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다. 그중 하나는 고대 한·일 교류사에 대한 연구를 마무리하고 책을 내는 것이었다. 30년 넘게 공을 들여온 일이었다. 또 하나는 중앙아시아 ‘아리랑 로드’ 6000㎞ 대장정 계획이었다. ‘아리랑 로드’는 1937년 소련에 의해 강제이주 당했던 고려인들의 이주경로를 따라가는 것이다.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중앙아시아의 타슈켄트까지 화물열차에 실려 짐짝처럼 버려졌던 고려인의 고단한 삶을 따라 아리랑 가락도 생사의 고개고개를 넘으며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노학자는 어머니 등에 업혀 아리랑을 듣고 자란 2세들이 죽기 전에, 소련에 의해 지워진 강제이주의 역사와 그들이 부른 아리랑 가락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고 했다. 인터뷰 당시 노학자의 마음은 이미 아리랑 로드 6000㎞를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1년, 이 교수는 막 출간된 책 한 권과 함께 ‘아리랑 로드’ 대장정 일정표를 들고 나타났다. 서울 광화문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이 교수는 여전히 건강해 보였다. 이 교수는 “책을 잔뜩 들고 도서관을 오고 가느라 무릎이 안 좋아지긴 했지만 아직 어디든 갈 수 있다”면서 자신만만해 했다. 사실 작년에 이 교수의 계획을 들으면서도 그가 실행에 옮길 수 있을까 의문이었다. 나이를 생각하면 계획을 세우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싶었지만 이 교수의 열정과 끈기 앞에 나이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이 교수는 1년 전의 약속대로 9월 14일 아리랑 로드 대장정의 첫걸음을 뗀다고 했다.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동안 우여곡절도 많았단다. 작년 주간조선에 이 교수의 기사(8월 5일자)가 나간 이후 이 교수를 돕고 싶다면서 연락처를 물어오는 사람이 많았다. 관심을 보인 방송사도 있었다. 한 다큐멘터리 제작회사는 아리랑 가락을 좇는 이 교수의 발자취를 카메라에 담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문제는 비용이었다. 한두 명도 아니고 촬영 팀이 움직이자면 기업의 후원이 뒤따르지 않으면 힘든 일이었다. 처음엔 일반인 지원도 받고 팀을 꾸릴 계획도 있었다. 그러자면 행사를 맡아서 진행해 줄 주관단체가 있어야 하는데 이 교수의 힘이 닿는 곳이 없었다. 서울대에서 지리학과 석사까지 마치고 1960년 박사과정을 밟기 위해 미국 미시간대로 떠난 이후 잠깐 경희대에서 교수로 있었던 때를 제외하고는 50여년 한국을 떠나 있었던 탓에 한국에는 이 교수의 기반이 없었다.

	[주간조선] [인물] 아리랑 뿌리 찾아 바이칼 호수로 떠나는 아흔 살의 노학자
다른 사람만 믿고 있다 일정만 늦어지겠다 싶었던 이 교수는 혼자라도 떠나겠다는 의지로 일단 계획을 밀어붙였다.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6000㎞를 한 달 일정으로 계획했지만 차질이 생겼다. 생각지도 않게 이 교수의 발목을 붙잡고 나선 곳은 여행사였다. 일정을 맡은 여행사 측에서 이 교수의 나이를 이유로 들어 한 달 일정은 진행할 수가 없다고 난색을 표했다. 만일 일정 중에 문제가 생기면 책임을 져야 하는 여행사로서는 부담이 클 수밖에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계획을 변경했다. 처음 일정과는 거꾸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하기로 했다. 하바로프스크를 거쳐 러시아 이르쿠츠크로 가서 바이칼 호수까지 14일 동안 3000㎞를 다녀오는 것으로 일정을 단축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고려인의 이동경로를 따라 갈 생각이었지만 짧은 일정을 고려해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바로프스크까지는 열차를 타고, 이르쿠츠크까지는 비행기로 이동하기로 했다.
   
이 교수는 “갈 수 있을 만하니 가겠다고 나선 것인데 여행사에서 반대를 하는 바람에 실망했다. 여행사가 내 건강을 염려해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난 거뜬하다. 일단 이번에 1차로 다녀오고 2차로 나머지 절반도 꼭 가고야 말겠다”며 의지를 내보였다.
   
이 교수는 “이번 여행의 목적은 무엇보다 아리랑과 한민족의 기원 찾기”라고 했다. 특히 바이칼 호수에서 가장 큰 섬인 알흔섬 방문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고 했다. 이 교수는 “한민족과 꼭 닮은 브리야트족이 사는 알흔섬은 샤먼의 성지로 샤머니즘이 기원한 곳이다. 알흔섬의 무당이나 우리나라 무당은 물론이고 아메리칸 원주민, 터키의 무당이 부르는 노래들이 신기하게도 똑같다. 알흔섬의 샤머니즘에서 한민족과의 공통점을 알아보고 아리랑의 뿌리가 어디인지를 찾으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가 일정표라고 내민 종이에는 방문 예정지가 줄줄이 적혀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한인 집단 거주지였던 신안촌에서부터 고려인 우정마을, 극동대학 박물관, 강제이주의 출발지인 블라디보스토크역 등을, 하바로프스크에서는 아무르강과 혁명내전 영웅기념관과 조선이민사를 볼 수 있는 향토박물관이 포함돼 있다. 이 교수는 “과거를 이야기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다. 구간구간마다 한인회 간부들과 그곳의 유지들을 만나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시장을 찾아가 아리랑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고구려와 서역의 문화가 교류했던 담비길의 흔적도 더듬어 볼 계획이다”고 말했다.
   
아리랑 로드 대장정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중에도 이 교수는 30년 넘게 매달려 왔던 큰 일 하나를 끝냈다. 이 교수가 며칠 전 출간된 책이라고 내민 ‘고대 한일 관계사의 진실’(이지출판)에는 ‘일본 고대국가는 누가 만들었나’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다. 책에는 일본으로 건너간 고대 한반도 이주민들의 발자취가 지명, 신롱석(일본에 분포한 한국식 산성), 불교, 석탑, 마애불, 화지(제지기술), 직물, 다다라(제철기술) 등으로 구분돼 조목조목 정리돼 있었다.
   
한반도 이주민이 일본 고대국가 형성에 미친 역할을 규명해내기 위해 이 교수가 무엇보다 역점을 둔 것은 현장 조사였다고 한다. 일본의 역사서에는 한반도 이주민의 역할과 영향이 의도적으로 배제되고 축소된 것이 많기 때문에 ‘기록되지 않은 사실들’을 밝혀내는 것이 중요했다.
   
일본 학계에도 고대국가 형성에 한반도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개중엔 비교적 객관적인 목소리를 내는 학자들도 있다. 이 교수는 책에 추천사를 써준 우에다 마사아키 교토대 명예교수를 만난 것이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고대 일본의 한반도 도래인에 대한 연구자 중에서 우에다 마사아키 교수는 일본 최고로 손꼽힌다. 한반도 이주민의 역할에 대해 가장 양심적으로 인정하는 학자이다. 교토대 초빙교수 시절 만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추천사도 이미 10년 전에 써주고 빨리 책을 내라고 격려해줬다. 얼마 전 출간을 앞두고 일본에 가서 ‘추천사 내용 중 바꾸고 싶은 곳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10년이 됐든 20년이 됐든 내 생각은 변하지 않는다’고 하더라. 일본의 살아있는 양심이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현장을 찾기 위해 1992·1994년 교토대 초빙교수로 머물면서 간사이, 간토, 이즈모, 규슈 북부 지역 등을 중심으로 답사를 다녔다. 이 교수는 “매년 일본을 오가면서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일본 전역을 다녔다. 개발과 의도적인 역사 지우기로 고대 한반도 문화의 흔적들이 너무 빨리 사라지고 있다. 왜곡된 역사가 사실로 굳어질까 안타깝다. 진실을 덮으려는 이들에게 생생히 남아있는 흔적들을 보여주고 ‘이래도 안 믿을 거냐’고 증거로 내보이기 위해 책을 썼다”고 말하고 “이 책은 서론에 불과하다. 이것을 기초로 해서 앞으로도 쓸 것이 많다”고 덧붙였다.
   
책 출간은 생각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 인명·지명을 한글로 옮기는 작업이 만만치 않았다. 자료마다 표기법이 다르다 보니 마무리 작업이 계속 늦어졌다고 한다. 지난 1년 동안은 일본문화원, 국회도서관, 중앙도서관과 몇몇 대학 도서관을 오가며 자료 조사하느라 진을 뺐다. 무거운 가방 메고 하루에도 몇 곳을 오가느라 기어코 무릎에 이상이 왔다. 참고문헌이 얼마나 많은지 책 뒤에 실은 목록이 10쪽을 꽉 채웠다.
   
미국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에 있는 집과 한국을 쉬엄쉬엄 오가며 편안한 여생을 보낼 수 있을 텐테 노학자는 왜 고행을 자처하고 나선 것일까. 이 교수는 “조국을 위해 뭘 할 것인가를 늘 생각하고 있다. 학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려는 것이다. 내가 시작을 해놓으면, 그것을 기초로 누군가 연구를 이어갈 수 있지 않겠느냐”면서 “아직도 쓸 책이 많다”고 했다. 이번에 발간한 ‘고대 한일 관계사의 진실’도 곧 영문판을 출간할 예정이다. 원고는 이미 완성이 돼 있다고 했다. 외국 독자들에게 고대 한·일 관계와 동아시아의 역사를 올바로 이해시키기 위해서이다.
   
9월 27일 아리랑 대장정에서 돌아오는 이 교수의 가방엔 또 한 보따리의 자료들이 따라올 것이다. 2차로 나머지 아리랑 로드를 다녀와 연말까지 시베리아 아리랑과 고려인들의 아리랑을 추가해 아리랑 완결판을 내는 것이 일단 올해의 목표라고 했다. 건강 비결을 묻자 노학자가 답했다. “할 일이 많아서 아플 시간이 없어요.”